변조은_죤 브라운 – 그의 삶과 생각
홍길복 (시드니신학대 교수)
1.
들어가는 말
한국 이름으로는 변조은, 출생지를 따른 영어 이름은 John Percival Brown, 그는 금년 9월 24일로 80회 생신을 맞이하게 된다.
한국 이름으로는 변조은, 출생지를 따른 영어 이름은 John Percival Brown, 그는 금년 9월 24일로 80회 생신을 맞이하게 된다.
이
분은 1970년 장로회 신학대학에서 나에게 히브리어와 구약 신학을 가르쳐준 선생님이시다. 이 후 1980년에는 나를 호주로 초청하여 지난 33년간 호주 교회와 한국인 이민교회, 그리고 나그네와 행인 같은
이 디아스포라 사회와 역사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 세상과 교회, 목회와
신학, 그리고 인생과 죽음에 대하여 생각을 함께 나누어 온 스승이요,
선배요, 또한 친구이다. 신학생 시절부터 치자면 40여 년이 훨씬 지나 그의 인생 80에서 절반도 더 되는 긴 시간을
그와 함께 해 온 나는 진심으로 그의 생신을 축하하며, 변목사님의 인생길에 그와 함께 동행해 온 것을
크게 기뻐하고 감사한다.
변목사님은
나에게 있어서 신학하는 길을 가르쳐 준 선생님이요, 목회자의 길을 지도해 주신 선배요, 또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신 스승이요, 이 땅 호주에서
복합문화 사회를 경험하며 함께 인생길을 걸어온 친구이다.
2.
출생과 성장
변조은의 조상은 본래 영국 스코트랜드 사람이었으나 1800년대 중반에 호주로 이민을 왔다. 그의 할아버지는 호주가 죄수들의 유형지로만 알려져 왔던 시절을
지나 호주에 골드 러쉬(Gold Rush)가 불어닥칠 즈음에 자유이주자로써 호주로 건너왔다. 그들은 남부호주 (South Australia) 의 동부 지역에
자리를 잡고 농사와 목축을 하면서 삶의 터전을 넓혀갔다. 그러나 초기 이민자요, 동시에 개척자로써 농토를 일구어가며 목초지를 만들어가는 하루하루의 삶은 몹시 힘들었으며 아주 많이 가난했다. 변조은은 1933년
9월 24일, 그곳의
한 작은 시골 마을인 마운틴 갬비아 (Mt. Gambier)에서 팔 남매 가운데 다섯째로 태어났다. 죤의 가문은 이미 영국에서부터 경건한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었으며 그는 태어 날 때부터 깊은 신앙적 분위기
가운데서 낳고 자라났다.
다른 한편 할아버지 때부터 농업과 목축을 가업으로 해온 죤의
어린 시절을 한마디로 하자면 가난한 삶이었다. 공부하는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그 많은 자녀들이 먹고
입고 생활하는 것 자체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아무리 많은 빵을 화덕에서 구워내도 몇
일이 못 갔다. 죤을 비롯하여 자라나는 아이들은 먹성이 너무나도 좋았다. 그래서 그런지 변목사님은 지금도 무엇이나 참 잘 잡수신다. 한국음식
뿐만이 아니라 어느 나라 음식이든 가리는 것이 전혀 없다. 그는 자신이 어릴 때 가난하게 살았던 삶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인간을 이해하고 선교사로써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은총이라고 말하곤 했다. 변목사는 우리가 함께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 때도 심지어는 손가락에 뭍은 쨈이나 버터 까지도 다 빨아먹는다. 어떤 때는 좀 챙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런 몸에 배인
근검, 절약과 인간적인 모습은 늘 우리 마음에 신선한 감동을 준다. 언젠가
변목사님은 나한테 이런 말을 했다.
“그 시절 우리는 1년에
꼭 한 차례, 어머니가 레몬네이드나 코카콜라를 나누어 주셨는데 그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 전 날 저녁이었어요” 뿐만이 아니다. 변목사님은 다 헤어져서 이젠 버려야 할 것 같은
옷도 잘만 입고 다니신다. 체면이나 겉치레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는다.
그 분의 떨어진 양복, 헤어진 와이샤츠, 구멍난
양말, 십여 년도 넘게 쓰고 있는 넥타이와 지갑을 볼 때마다 나는 숙연해지며 마음 속 깊이 존경을 드리게
된다. 사실 변목사님에게서 뭍어나는 이런 체질적 검소함 때문에 우리는 인간과 인간이 내적으로 친밀해
질 수 있는 생활 감정의 동질성을 발견하게 된다.
초등 학교에 들어 갈 무렵 소년 변조은의 아버지는 식구들을 이끌고
빅토리아 (Victoria)주의 넬슨 (Nelson) 이라는
마을로 이사를 했다. 넬슨은 해변가에 있었지만 어촌이 아니라 농촌이었고 브라운 가문은 여기에서 또 다시
새로운 목초지와 농토를 개간 하게 되었다. 같은 나라에서의 이사이긴 했지만 이 또한 제2의 이민 이라고 해야 할 만큼 멀고 험하고 고달픈 길이었다.
이 곳에서 죤은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러나 어느 나라의 농촌에서나 마찬가지로 죤네 가정 역시 늘 일 손이 딸렸다. 죤은 항상 공부하면서 일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젖소들에게 여물을 먹이고 우유를 짜고 한바탕 아침 일을 마친 후에야 학교에 갔다. 하학 후에도 그는
아무리 해도 끝이 없는 농사 일을 거둘 수 밖에 없었다. “목초지를 개간 할 때 어느 해엔 제가 뱀을
삼십여 마리나 잡았을 때도 있었습니다” 고생스러웠던 옛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변목사님이 하신 이야기이다. 아마도 변조은목사의 타고난 근면성은 이때부터 형성 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오래 전에 나는
변목사님과 같이 한 두어 주간 해외 여행을 한적이 있었는데 그 때 우리는 한 호텔에서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그
때 나는 변목사님에 대하여 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 두 가지를 알게 되었다. 첫째로 변목사님은 참 부지런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과 둘째로 이 분은 참 경건한 신앙인 이구나 하는 것 이었다. 그는 새벽기도회가 없는
호주 교회에서 낳고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새벽 4시만 되면 어김없이 혼자 자리에서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한 후 퍽 긴 시간 기도하는 것이 생활화 되어 있었다. 어릴 때 넬슨에서의 소년 시절이
그에게 준 은혜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총 인구가 약 80여명 정도 되던 시골 마을 넬슨에도 예배당이 하나 있긴 했지만 목사님 한 분을 모시기에는 너무나 작은 교회이어서
한 달에 한번 정도만 목사님이 오셔서 예배를 인도했다. 허지만 소년 변조은은 목사님이 오시는 주일은
물론이고 그렇지 않을 때에도 주일이면 늘 교회에 나가서 혼자라도 말씀을 읽고 기도를 드렸다. 이는 그의
부모님들에게서 받은 영향이었는데 특히 그의 어머니의 깊은 신앙심과 영적 감화력이 그에게 크게 아로새겨졌다.
3.
부르심
초등학교 밖에 없는 넬슨 마을을 떠나 고등학교에 진학 하기 위하여
소년 변조은은 작은 아버지가 사시는 해밀턴 (Hamilton)으로 갔다. 13 살 때 였다. 십대의 나이에 부모님 곁을 떠나 객지에서 겪는
경험들은 변조은에게 인생과 신앙을 성숙하게 해 주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때부터 그는 열심히 공부에
전념했고 교회에서의 학생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즈음 흔히 그 나이의 건강한 소년들이 마음
먹듯이 죤 역시도 장차 의과 대학에 들어가서 의사가 된 다음 보다 더 가난하고 어려운 나라에 가서 선교사가 되어 불쌍한 사람들을 위하여 살겠다는
꿈을 지니게 되었다. 그런데 한 2년 후 먼저 의사부터 되리라고
했던 그의 희망이 사라지게 되었다. 의과대학에 진학 하기 위해서는 고등학교에서 반드시 수학과 물리, 화학을 공부해야만 하는데 그 곳 해밀톤 시골 고등 학교에는 화학과목을 가르칠 선생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과 과정을 제대로 마칠수가 없게되었으니 의과대학 진학은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의사에 대한 꿈을 잃어버리게 된 변조은은 해밀턴 고등학교를 마친
후 실의와 좌절감을 안고 다시 아버지가 계신 넬슨으로 돌아왔다. 그는 낙심 가운데 장래 문제를 놓고
고민하면서 약 2년 정도 아버지의 농사일을 거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변조은의 마음 속에는 새로운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그는 틈이 있을 때 마다 부쉬(Bush)에 들어가 기도하고 명상하며 하나님과 더불어 대화하던 가운데 장차 목사가 되어 선교사가 되겠다는 새로운
비젼을 발견하게 되었다. 진짜 토박이 호주 사람들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변조은 목사도 호주의 부쉬를 참
좋아한다. 그것은 부쉬가 그의 육체적, 영적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는 부쉬 속에서 낳고 성장했으며, 부쉬 가운데서 배우고 생각하고
깨닫는 경험을 했다. 소년 변조은은 부쉬 가운데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법을 배웠다. 오래 전 모세가 시내산 떨기나무 불 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것 같이 변조은도 빅토리아 넬슨의 부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마침내 그는 멜본대학에 가기로 작정하고 장학생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여기서 변조은은 철학과 고대 중동어를 복수 전공하여 문학사 학위를 얻었다. 중동어 가운데서도 특히 그는 고대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전공하였다. 그가
훗 날 서울의 장로회 신학대학에서 히브리어를 가르칠 수 있게 된 것은 이때 준비 해둔 것이다. 곧 이어
그는 멜본대학교 안에 세워진 장로회 신학대학인 오몬드 칼레지(Ormond College)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신학사 학위를 받고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25살의 젊은 나이에 그는 목사가 되었다.
한편 신학도 변조은이 대학과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즈음인 1950년대 중반기 한국은 6.25후 정치,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이 계속되고 있었다. 한국전쟁에 참여하여 3백 여명이 넘는 호주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친 미지의 땅 한국에 대한 소식이 호주의 방송에서도 자주 전해지고
있었다. 피난민들과 가난, 질병과 굶주림을 비롯한 각종 사회적
비극들에 대한 뉴스들이 전파를 탓다. 지구의 어느 쪽에 있는지도 모르는 한국의 슬픈 뉴스가 전해 질
때 마다 이를 유심히 들어오던 변조은은 전에 부쉬에서 하나님께 약속한 대로 내가 공부를 마친 다음 목사가 되면 선교사가 되어 한국에 가서 일을
하리라 다짐하고 장로교 총회 선교부에 한국선교사 지원서를 보냈다. 그는 영적으로 대단히 민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이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주어진 현실의 학업
속에서 때때로 소명은 잊혀지거나 보류 될 경우도 적지 않은 법이다. 시간은 흘러 목사안수를 받은 변조은목사는
빅토리아주 번스데일(Bairnsdale)에 있는 성 앤류(St.Andrew)
장로교회로 부터 청빙을 받아 3년째 목회를 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교회에서의 목회 뿐 만이 아니라 깁슬랜드(Gippsland)와 라트로브 밸리(Latrobe Valley)를 중심한 여러 지역에서 노회청년 지도 목사로써 젊은이들을 지도하며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1957년 8월엔 노마 비어(Norma Beer)와 결혼도 했고 이듬 해엔 아들 마이클(Michael)도
낳았다. 행복하고 보람있고 뜻있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이었다.
변조은 목사는 총회 세계 선교부로 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당신이 신학교 재학 중에
한국 선교사로 지망 했던 것을 지금 이행 할 것인지 아니면 포기 할 것인지 확실히 결정 해 달라는 내용 이었다.
4.
보내시다.
“내가 너희에게 말
한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의 편지를 받은 변조은 목사는 즉시 성 앤드류 교회를 사임했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변목사는 노마와 함께 선교사 훈련기관인 올
세인트 칼리지(All Saints College)에 입학하여 선교사로써의 기본적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1960년 9월 25일 두 살 배기 아들 마이클을 데리고 4.19 이후 혼란스런 일들이
연이어지는 우리 나라 부산 항에 도착했다. 멜본과 시드니, 브리스번과
다윈, 그리고 홍콩과 일본을 거쳐 한 달이 넘는 긴 항해 끝에 당도한 땅이었다. 28살의 청년 변조은목사가 넬슨의 부쉬에서 부르심을 받고 신학생 때 흘러나오는 방송 뉴스를 통하여 하나님과
맺었던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찿아온 것이다. 이후 그는 1972년 7월 호주 장로교 총회 선교부로 부름을 받기 까지 만 12년 동안 선교사로, 목사로, 신학교의
교수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참 진실한 한국인들의 친구요, 색깔이
다른 또 하나의 한국인으로 우리들 곁에서 우리와 함께 삶을 나누어 왔다. 그의 나이 가장 젊고 활기차고
또 뜨거운 정열과 빛나는 지성과 아름다운 신앙의 기간을 그는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부산에서 하룻 밤을 지낸 다음 날 변목사와 그의 가족은 서울로
올라왔다. 그들은 미국연합장로교회 선교사였던 포만목사(K.J.Foreman)의
집에 짐을 풀었고 변목사는 곧 연세대학교 한국어 학당에 입학하여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후 만 2년 동안 그는 이 학당과 또 개인 언어 선생에게서 집중적으로 언어훈련을 받음으로 한국어 뿐만이 아니라 한국인의
정서와 생각, 한국의 역사와 문화, 한국의 전통과 풍습을
익히게 되었다.
때때로 변목사를 만나본 한국 사람들은 그의 뛰어난 한국어 구사에
크게 감탄하며 “아마도 변목사님은 언어에 있어서 타고난 재질이 있는가 보다”고 말한다. 그러나 변목사 자신은 이런 말을 듣게 될 때마다 매우
섭섭해 한다. 한국 말을 배우느라 고생한 그의 피 눈물 나는 노력을 인정해 주질 않는 듯 해서 그런
것이다. 실제로 지금도 가끔 변목사는 한국 말로 설교를 하거나 원고를 써야 할 경우 자주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 보다 정확한 어휘를 물어보고 확인하는 노력을 끊이지 않는다. 변목사는 때때로 “웃기네” “미치겠네” 하는
식의 한국 말도 곧 잘 사용하곤 하는데 사실 이런 말들은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지니지 않고는 사용하기가 쉽지 않은 말들이다. 켄베라에서 살고있는 그의 아파트를 방문하면 한자로 만들어진 한국식 문패가 붙어있다. 집안에 들어가 사방을 둘러보면 온통 동양화와 병풍과 매듭들이 우리를 맞아 주어서 우리는 이 집 주인이 정말
한국 사람임을 실감하게 된다. 그는 한글 만이 아니라 한자도 천자 이상이나 알고 있어 천지신명이니 천고마비니
하는 한문자들도 곧 잘 사용한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까지 한국 말을 익히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지 그의 끈질긴 노력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처음 한국 말을 배운 후 설교 한편을 준비하여
그는 각기 다른 곳에서 48번이나 되풀이 해서 설교를 한 적이 있다고 나에게 말 한 적이 있다. 사실 과정 없이 얻어지는 결과란 없는 것이다.
변조은 목사가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12년 가운데 처음 7년은 주로 거제도와 창원, 그리고 김해지역을 중심하여 경남 지방의 농촌 교회를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 물론
창신학교를 비롯한 교육기관에서 가르치는 일도 일정부분은 감당했으나 경남지방의 미자립 교회를 돌아보며 목사가 없는 교회들을 찿아가 설교와 세례 그리고
성례를 집행하는 일이 큰 사역이었다. 어떤 때는 16개나
되는 교회의 담임목사(당회장)직을 맡아 순회하며 시골교회에서
일하는 전도사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을 교육하였다. 60년대의 가난한 한국 농촌 교회에서 순회 선교사로 교회를 돌보는 동안
그는 한국의 온돌방을 사랑하게 되었고 재래식 변소에 익숙해졌으며 김치와 된장국, 그리고 밥그릇 위에
수북히 올라온 밥이 그릇에 담긴 밥 보다 더 많은 한국인들의 따뜻한 사랑을 귀하게 여길 줄 알게 되었다. 보통 20리, 30리 길은 걸어서 다니며 자신의 아들과 딸들을 한국학교에
보내 공부하도록 하여 시골 어린이들 틈에서 자라도록 하였다. 변목사를 대할때 마다 느끼는 것은 그는
참으로 한국인을 사랑하고 한국을 아끼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언젠가 한번은 우리 한국 목사들이 함께 자리한 곳에 변목사도
동석한 적이 있었는데 이야기 도중에 어떤 목사가 “우리 이 문제는 변목사님이 가신 다음에 우리끼리 해결
합시다” 라고 말하자 변목사는 아주 정색을 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 나 정말 많이 섭섭합니다. 나도 한국 목사입니다”
5.
신학적 반성과 방향 전환
거제도에서 교회를 돌보던 시절,
변목사는 농부들이 가축 개량 사업을 통하여 농가 수입을 높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여 호주에서 양과 염소와 돼지를 들여왔다. 1966년 한국 농촌 교회 교우들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하여 그는 호주 산 대형 흰 돼지와 샤넨 염소(Saanen goats)들을 수입했다. 그를 파송한 빅토리아 선교회가
적극 지원하였다. 기도와 눈물로 헌금하는 교우들을 생각하며 그는 선교비를 조금이라도 아껴서 한 마리의
돼지라도 더 가져오고 싶었다. 변목사는 자신이 직접 호주에 와서 성도들이 돈을 모아 사준 돼지와 염소들을
배에 싣고 자신이 친히 43일 동안이나 같은 배를 타고 가축들에게 여물을 먹여 가면서 같이 먹고 자며
부산 까지 왔다. 변목사는 그의 조수요, 동역자였던 권오성씨의
협력을 받아가면서 이들 돼지와 염소들을 분양 해주고 또 번식 시켜 나갔다.
분양된 돼지와 염소들은 새끼를 치기 시작했고 변목사는 이것이
밑거름이 되어 거제도지역의 농촌 경제를 개선하는 데 크게 보탬이 되리라는 희망에 젖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돼지를 분양 받은 한 농가를 방문했는데 돼지들이 한 마리도 없이 다 사라져 버리고 축사가 텅 비어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 이냐고 물었더니 그 농부는 이렇게 말 하는 것이었다. “
목사님, 그 동안 농사 짓느라고 고리로 사채를 써 왔는데 어제 채권자가 와서 돼지들을 다
빼았아 갔습니다.” 변목사는 이런 과정을 경험 하면서 한국의 농촌이 지닌 구조적 문제들이 무엇인지 하나씩
깨닫게 되었다. 아직도 부자 지주들이 토지와 자본을 비롯한 일체의 모든 것을 독점 하고 있으면서 소작인들을
착취하고 있는 현실을 알아가게 되었다. 동시에
그는 없는 사람들은 영원히 그 가난을 면하기가 어려운 정부의 정책이 지닌 모순을 알게 되었다.
본래 변조은
목사는 단순한 복음주의적 열정에 이끌리어 선교사가 된 사람이었으나 1960년대 이후 한국 농촌이 지닌
구조적 악을 체험적으로 자각하게 된 이후 점점 강경한 어조로 사회정의의 실천과 구조 악에 대한 교회의 책임적 행동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는 거듭된 한국 농촌 교회 교우들의 고난을 목격하고 그들의 고통에 직접 참여하면서 교회가 해야 할 일, 선교사가 가야 할 길은 이 주어진 가난을 이겨내고 잘못된 정책을 바로잡고 제도적 악과 싸우며 병든자와 가난한자들을
돌아보며 정의로운 인간공동체를 만들어 가는데 있음을 자각하는 신학적 반성으로 연결 되었다.
간혹 변조은
목사에 대하여 오해를 갖고 있는 이들은 변목사가 지나치게 한국의 정치문제나 사회문제에 간여하며 또 신학적으로 진보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변조은 목사는 복음과 말씀에 충실한
하나님의 종이요,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예수의 제자요, 우리 한국을 참으로 좋아하는 우리들의 친구이다. 그는 군사 독재
시대 우리 조국의 민주화를 위하여 한국과 호주의 정부나 각계 사회단체는 물론 세계교회와 연대하며 온갖 힘을 기울여 왔다. 그는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 할 때는 물론, 호주로 돌아온 후에도
줄기차게 군사 독재정권의 종식과 인권의 신장과 경제적으로 정의로운 사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편지하고 설교하고 방송하고 투고하며 글을 쓰면서 온 몸을
다하여 노력해 왔다. 나는 보통의 경우 내가 우리 조국에 대하여 비판 하는 것은 당연시 하면서도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데 대해서는 언짢아 할 때가 많다. 그러나 변조은
목사가 우리나라 문제에 대하여 말 할 때는 좀처럼 화가 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변목사는 진정으로 우리나라를
자기 나라처럼 사랑하고 우리 사회를 안타까워하며 우리 나라 국민들이 잘 살게 되기를 바라는 진심이 묻어 나기 때문이다.
경상남도에서
농촌 전도자로 출발한 선교사 변목사가 사회정의를 향한 신학적 반성을 할 즈음이었다. 그는 이미 1964년 부터 간간히 마산에서부터 야간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장로회 신학대학에서 히브리어와 구약신학을
가르쳐왔는데 1969년 부터는 아예 서울로 선교지를 변경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산하 호주 선교부의 대표가 되어 총회에서 일하게 되었다. 변목사는 총회의
각종 선교사역에 협조하며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를 비롯한 여러 가지 사회선교활동에 헌신 하면서 장로회 신학대학의 전임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신학교수로써의
변조은목사는 성실하고 자상하면서도 친구 같은 선생님이었다. 특히 그의 한국어 강의는 권세열 목사와 함께
모든 학생들에게 신기 할 정도였다. 변목사는 우리들이 제출한 레포트나 시험지에 일일히 코멘트를 달고
잘못 쓴 맞춤법 까지도 교정해서 되돌려 주었다. 당시 한국인 교수들 중에는 그렇게 하는 이가 한 분도
없을 때였으니 참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한 사람의 교수가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내 나이 70이 되어 지금 호주의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학습을 평가하는 모든 기준은 이때 변목사님으로부터 물러 받은 것이다.
변목사의 구약신학
강의는 예언자적 전통과 비젼에 그 촛점이 있었다. 지금도 눈에 선한 것은 주전 6세기 이스라엘 예언자들에 대한 그의 열정적 강의이다. 아모스서를
비롯하여 호세아서와 남북왕국의 부패한 정치와 이에 대한 예언자들의 저항 정신에 대한 그의 열변이 우리들의 가슴을 뜨겁게 해 주었다. 분명히 그분의 영향이 컷을 것이다. 당시의 시대적 아픔과 더불어
변목사의 구약신학으로부터 크게 도전을 받은 우리 반에서는 남달리 민주화와 인권 그리고 사회정의와 빈민선교에 뛰어든 친구들이 많이 배출 되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지금 까지도 변목사님이 진정으로 존경스럽고 또 참으로 아름답게 인생을 살아오신 분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그의 구약신학이나 예언자 신학에 대한
강의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넬슨에서 부터 시작하여 거제도를 거쳐 시드니와 켄베라에 이르기 까지 그의
변치 않는 삶의 태도와 일관성 때문이다.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 없이 불의를 미워하고 정의를 추구하며
약한 자를 변호하며 자신은 검소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그의 일관성 있는 사람됨의 바탕이 그이를 존경 받게 해 준다. 변목사는 한국에서 뿐만이 아니라 호주에서도 총회나 교회나 에큐메니칼 기관이나 각종 NGO 를 비롯한 그 어디를 동원해서 든지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과 약자들의 편을 들어 주었다. 호주 원주민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슬픈 역사와 과거의 아픈 상처를 어루만지며 그들의 권익에 앞장서 왔다. 호주를 찿아오는 난민들을 위하여 교회가 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미치도록 주도 해 왔다. 한국인 이민자들을 비롯하여 아시아 이민자들을 위하여 동분서주 하면서 온갖 뒤치닥거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진실로 이 지구 위에 단 한 사람의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만 남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 까지도 우리 믿는 사람들과 교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변목사는
자주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는 그가 신학교에서 가르친 신학과 그 자신의 삶을 구분하지 않고 살아 온
예수의 좋은 제자이다.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흘러 지난 날 조국의 민주화와 인권과 정의로운 사회를 위하여 고난 받았던 친구들이 현실 정치에서 권력도 잡고 가진자들의 편에 편입이 되어
허무한 생각이 들 때가 참 많이 있다. 예언자 선생님은 여전히 예언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예언자를
공부한 사람들은 아합도 되고 이세벨도 되어 버렸다. 몇 일 전 우리 집을 방문한 변목사는 한국 사회가
예전 보다 좋아진 점도 있기는 하지만 오히려 교회가 더 크게 걱정이 된다고 하시면서 이런 말을 하셨다. “ 내가
참 미안 합니다. 그 때 신학교에서 좀 더 잘 가르쳐야 했는데 내가 그만 잘 못 가르쳤습니다.”
6.
호주로 돌아온 후
1972년 7월 변조은 목사는 12년에 걸친 한국 선교사역을 마치고 호주장로교
총회 에큐메니칼 선교와 국제 관계부에서 책임자로 일하게 되어 호주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파송을 받았을
때는 배를 타고 긴 항해를 했었는데 이제는 단숨에 비행기로 돌아왔다. 가난한 농촌 교회의 전도자로, 존경 받는 신학 대학의 교수로 그리고 한 시대의 고뇌하는 지성인으로써의 역할에 대해 대구 계명대학이 수여한
명예박사학위를 받고 호주가 준비 하고 있는 에큐메니칼 시대, 새로운 사명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
1974년 변목사는
시드니에서 최초의 한인교회를 설립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했다. 당시 시드니 한인사회에는 약 30여 세대의 한인들이 살고 있었으며 때마침 월남 전쟁이 종식 되면서 월남에 가있던 많은 한국인들이 호주로 모여들었다. 이들을 중심하여 자연스럽게 한국 말로 예배와 친교를 나눌 수 있는 한인교회의 필요성이 제기 되었다.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했던 변조은 목사는 이 일을 위하여 준비된 사람이었다. 물론
이 교회는 어디까지나 한국인들이 중심이 된 최초의 한국인 이민교회였지만 변목사의 노력과 헌신적인 협조로 출발이 되었다. 변조은 목사는, 한국 땅에 있는 한국 사람이든, 호주에서 살고 있는 한국 사람이든, 그는 운명적으로 한국인들과는
결코 그 인연을 끊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시드니 시내 남서부에 있는 워터루(Waterloo)에서 시작 된 이 최초의 시드니 한인교회의 특징은 에큐메니칼 교회였다. 물론 여기에는 처음부터 교파의 구별이란 없었으며 심지어는 신구교의 장벽 까지도 허물어졌다. 개신교 목사 뿐 만이 아니라 호주에 유학차 온 천주교회의 신부들 까지도 함께하여 예배와 설교, 미사와 강론 그리고 성도의 친교를 나누었다. 교우들 역시 과거 한국에서
통합측이든 합동측이든, 고신이든 기장이든, 감리교이든 성결교이든, 순복음이든 천주교인이든, 그 어떠한 구별도 없이 모두 하나가 되어
한 예배당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성도의 교제를 이루어 갔다. 그래서 교회이름도 호주연합교회가 생기기 전부터
이미 ’시드니 한인 연합교회’로 시작이 되었다. 이것은 지도자로써의 변조은 목사가 지닌 신학적 성격을 반영한 것이었다.
1977년 호주장로교회, 감리교회 그리고 회중교회가 통합하여 호주연합교회 (The Uniting Church in Australia)가 되기 까지 호주교회는 일치를 위한 긴 신학적 여행을
했다. 물론 그 중에는 지난 날 주님의 몸을 찢어 놓았던 분열의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에큐메니칼 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땅, 호주에서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를 초월하여 생명수 강가에서 주를 찬양하는
천국의 환상을 바라본 믿음의 선각자들이 많이 있었다. 변조은 목사도 바로 이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는 “주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나가도록” 호주연합교회를 만들어 나가는데 일익을 감당하였다. 변목사는 스코트랜드와
웨일즈와 잉글랜드 만이 아니라 지구촌 모든 나라와 민족이 모두 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사람이었다. 호주연합교회가 형성 될 당시 한국 파송 선교사들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이 새롭게 만들어진 호주연합교회로
옮겨온 것은 변조은이라고 하는 장로교 총회 선교부 책임자의 신학적 노력이 가져다 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호주연합교회가
탄생된 후 15년 동안, 그리고 일선 책임자의 자리에서 은퇴
할 때 까지 지난 20여 년에 걸쳐 변목사는 세계선교부의 책임자로써 줄기차게 에큐메니칼 정신에 입각한
평화와 정의, 일치와 평등을 위하여 헌신했다.
한 때 그는
교회의 성장 보다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 보다 더 강조 되어야 한다는 그의 신학적 확신을 넓혀가기 위하여 호주연합교회 총회장에 입후보자로 나선적이
있었으나 당선 되지는 못했다. 허지만 그는 오히려 그가 있는 자리에서 “호주연합교회는 다문화 교회” (The Uniting Church is A
Multicultural Church) 라고 하는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선언문을 만들어 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 냈다. 호주연합교회 제 3차 총회가 공식적으로 채택한 이 문서는 호주연합교회
뿐만이 아니라 오늘 날 세계교회가 지향 해 나가야 할 신학적 성격과 선교의 방향을 지시해 주는 대단히 중요한 문서 가운데 하나이다. 변목사가 이후 호주연합교회 원주민 총회 (UAICC, The Uniting
Aboriginal and Islander Christian Congress)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개입하고 또 은퇴 후 까지도
온 힘을 기울여 지난 날 백인들이 이 땅에서 저지른 잘못을 회개하며 ‘참회의 날’ (The Sorry Day)을 이끌어 내도록 교회의 목소리를 모으면서 뛰어다닌 것 역시도 모두 다 그의 이런
두잉 테올로지 (Doing Theology)에 대한 성실함 때문이다.
변목사는 호주연합교회
안에서 만이 아니라 호주교회협의회 (Australian Council of Churches)의 대표와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중앙 위원과 선교와 전도위원회의 위원을
비롯한 각종 에큐메니칼 기관에서 쉬임 없이 교회를 새롭게 하고 세상을 바르게 하는 일에 정성을 다하여 일 해 왔다. 본래부터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지체이며 따라서 갈라서거나 대립 되거나 경쟁적이 되어서는 않된다는
것이 그의 신앙이며 신학이다. 분열된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도덕적 충고를 할 수 없다는 신학적 태도
위에 굳게 서서 종교개혁 후 계속되어온 우리교회의 쓰라렸던 분열의 시대를 마감하고 이제는 일치를 향하여 피차 겸손히 마음의 문을 열자는 것이었다. 변목사는 이러한 원칙 위에 서서 한 시대 호주교회의 지도자로써 맡겨진 길을 잘 걸어왔다.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은 함께 해야 합니다. 함께 할 수
없는 일만 따로 따로 해야 합니다. 함께 할 수 있는 일인 데도 불구하고 따로 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이 내게 자주 들려준 에큐메니칼 신학이다.
7.
나가는 말
변조은은 목사이다. 그는
예수의 뒤를 따라가는 선한 목자이다. 특히 그는 잃은 양과 울타리 밖에 있는 양들에 대하여 더 많이
마음을 쓴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을 위하여 평생 기도하며 그들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을 대변한다. 원주민들, 이민자들, 특별히
아시아 이민자들, 보트 피플들, 난민들, 가난한 사람들, 병든 이들, 버려진
사람들, 집 없는 이들, 북한 사람들과 탈북자들, 인권이 침해 당하는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인종적으로 성적으로 차별 받는 사람들, 가난과
내전과 전쟁으로 인하여 고통 당하는 사람들, 동남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제 3세계의 가난한 사람들 – 변목사는 이런 사람들을 편들어주고 이런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면서 이런 사람들을 섬기고 이들을 위하서 일 해 왔다. 그는 선한 일에 참
부지런한 사람이다. 그는 악과 불의에 대해서는 분노하고 선과 의에 대해서는 기뻐한다.
변조은은 신학자이다. 그는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끊임없이 말씀을 묵상한다. 그는 성서 언어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성서 해석에 있어서 남다른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본문과 상황을 연결하는데 있어 민감한 영안을
부여 받았다. 그는 끊임 없이 연구한다. 나이는 들었지만
늘 새로움을 향하여 목말라하며 새로운 학문적 세계를 향해 열린 마음을 갖는다. 그는 가르치는 것을 즐거워하며
말씀 따라 사는 것을 행복으로 여긴다. 그는 단순히 학자 만이 아니라 교육자이다. 그의 학문적 입장은 교실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는 상아탑의
학자가 아니라 교회의 학자이다.
변조은은 착한 사람이다. 그는
선한 양심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잘못은 머뭇거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한다. 그는 미안하다든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을 하나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변목사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다. 잘못된 일이나 그릇된 사람에 대해서는 금방 얼굴을 붉힌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의 기쁨과 행복에 대해서는 어린 아이 처럼 좋아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해 한다. 그는 정이 많은 목회자이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웃는 자들과 같이 우는 사람이다. 지난 날 내가 한 교회를 떠나
몹시 우울해 하고 아파 할 때 그는 나를 찿아와 아침부터 저녁 때 까지 온 종일 같이 이야기도하고 기도도하며 놀아준 적이 있다. 그는 목사들의 목사이며 적어도 나에게는 영원한 선생님이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변목사님은 또한 나의 친구이다. 해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목사님이 늘 우리 집을 방문하신다. 선생님이기 때문에 내가 찿아 뵈어야 할 것 같지만 그러치 않다. 변목사님은
정말 좋은 친구요, 그져 순수하고 맑은 사람이라는 점을 잘 보여주시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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