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선교사와 세계교회협의회 부산총회
1. 들어가는 말
편집자로부터 호주선교사들의 한국선교역사에 대한 원고청탁을 받고 호주선교사들에 관한 책이 한권 더 나오게된다는 생각에 필자는 우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1800년대 말과 1900년대 초중반 호주선교사들의 한국에서의 행적이 점차로 알려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연구되지 못하고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가 많이 있다는것을 필자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부산, 마산, 진주, 통영, 창원, 거제 등의 지역에서 한국근대사속에 지역주민들과 함께하며 이루어 낸 기독교적인 성과를 포함하여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기여한 공헌들이 충분히 밝혀지지 못하고 있는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중의 하나는 물론 호주의 교회사 학자나 목회들 중에 또한 한국의 역사학자나 목회자 중에 이 방면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고 연구와 혹은 논문을 꾸준히 발표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고, 이러한 연구에 대한 관계 교계의 지원도 미미한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번에 호주의 찰스 스터트대학 신학부의 지원으로 본 책이 발간하게 된다는 것은 자못 기쁜일이고 고무적인 일이라 하겠다.
필자는 원래 글의 내용을 경상남도의 한 도시에서 이루어졌전 호주선교에 대한 이야기로 하려했으나 마음을 바꾸어 부끄럽지만 필자 자신의 한국선교에 관한 이야기를 서술하려고 한다. 필자는 2011년 부터 2013년 말까지 3년 3개월 동안 호주연합교회 총회와 파라마타 네피안노회의 파송을 받아 한국교회를 섬겼었다. 그동안 한국에서 헌신하던 많은 선교사들 중에 교단총회와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에서 일하였던 경우도 드물뿐 아니라, 또한 한국인으로 호주에서 목사가 되어 다시 한국으로 파송받은 경우도 처음이기에 그 선교일정을 나름대로 자료로나마 남길 이유가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후에 한국선교를 연구하는 후학도들을 위하여, 그리고 호주의 한인 후배들이 한국으로의 선교소명을 받을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이 글을 쓰게 되었음을 밝힌다.
본 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었는데 첫번째 부분은 필자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에서의 선교사역이고 두번째부분은 세계교회협의회 부산총회 준비를 위한 선교사역이다.
1.
2. 총회에서의 선교사역
2010년에 가서 필자는 만 10년 섬겼던 호주연합교회 뉴싸울스웰스 주총회 선교국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호주교회는 5년동안의 임기제이고 보통 두번을 마치면 떠나는것이 관례인데, 이후에 어느 사역지로 갈것인지 기도하고 있을때였다. 필자의 전공은 다문화목회로 선교국에서도 다문화목회 총무로 일하면 그 방면에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나름대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필자가 떠날때 전국총회 다문화목회위원회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회의록에 기록하고 있다.
"2010년 3월13일 호주연합교회전국총회 다문화목회위원회에서는 양명득 박사가 그동안 행한 목회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함과 동시에 그의 업적을 기록에 남기기로 결정하였다. 특히 호주연합교회 안에서, 또한 국제적으로 다문화목회에 대한 그의 소중한 기여를 인지하고자 한다. 특히 신학교육에 대한 헌신, 다양한 목회분야에 있는 리더들을 위한 훈련프로그램에 장기적 기여를 해왔는데 다음분야에 대한 헌신을 기억하고자한다; 다문화목회를 위한 교육과정에 대한 기여, 다문화관계를 위한 워크숖에 대한 계회과 지도, 신학대학 강의와 세미나등에 기여, 이 분야의 저서와 출판 그리고 번역작업, 또한 한인교회들에 대한 참여와 역사를 위한 공헌 등이다. 우리는 양명득 목사의 신실하고 능력있는 목회를 하나님 앞에 감사드리며, 그리스도를 위한 그의 계속되어질 미래목회에 하나님의 계속적인 축복이 함께하기를 기도한다." (호주연합교회 총회다문화목회위원회, 2010년 3월 13일)
다소 장황하게 회의록 내용을 그대로 옮기는것은 선교국의 사역을 마치고 가야할 다음 사역지도 다문화목회의 연장선에서 찾고 있었기 때문이고, 이러헌 목회를 위하여 필자는 불리움을 받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 목회지의 부름은 정반대의 지역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부름이었다. 다문화 다인종사회도 아니요 필자가 교육받고 친근한 호주의 컨텍스트도 아니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는 호주연합교회와 오래동안 파트너쉽을 가져온 선교동역 교단이다. 그동안 호주장로교와 호주연합교가 파송한 호주선교사 126명 대부분이 그 역사와 전통에 속하여 있다. 그러나 시실 피선교지였던 한국교회가 크게 부흥하면서 1970년대부터 호주에서의 선교사 파송이 뜸해지고 있었고, 선교의 내용도 바뀌어 부산경남도 아닌 서울의 영등포산업선교회 쪽으로 젊은 선교사들이 파송되어 노동자들의 인권과 복지를 위한 사역을 하고 있었던 때였다. 그러나 그것도 그나마 2006년 로한 잉글랜드 선교동역자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 간 후로 선교사파송의 관계가 완전히 끊겨있었다.
마침 2009년은 한국과 호주선교의 120년이 되는 해였고,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는 120주년 기념예배를 성총회기간에 모든 총대들과 함께 드리며 호주교회의 공헌과 파트너쉽네 관하여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당시 양 교단은 선교선언문을 공동작성하여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중의 첫번째가 선교유산의 계승이다.
"양 교단은 호주선교사들의 선교정신과 신앙적유산을 존중하며 이를 계승 발전시켜서 향후 온 땅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를 위하여 함께 협력할것을 선언한다." (한호선교 120주년 기념 선교선언문 중, 2009년9월23일)
필자가 한국으로 파송되어 온 배경이 바로 선교정신을 계승 발전시킨다는 이 내용을 근거로 통합총회가 호주연합교회총회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였고, 그 초청이 필자에게 127번째 선교동역자로 오라는 부름이었다. 사실 필자는 오래전부터 한국교회에 관하여 관심이 많았고 기회가 되면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왔던 것 같다. 한국인으로 비록 호주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었지만 모교회인 한국교회에서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응하고 싶은 마음이 늘 있어왔던것이다. 그러다 마침 초정을 받게 되자 가족과 상의하여 주저하지 않고 응답을 하였다.
2010년 8월 19일에 총회세계선교국과 파라마타네피안 노회 주관으로 파송예배가 있었다. 당시 양 교단이 합의한 한국교회에서의 필자의 일은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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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예장통합 총회의 다문화목회를 협력하며, 이주노동자와 그들의 가족을 지원한다.
2 b. 예장총회의 에큐메니칼운동을 협력하며 특히 호주와 한국교회간의 관계를 지원한다.
3 c. 다가오는 세계교회협의회 부산총회 준비를 협력하며 컨설턴트의 역할을 한다.
(선교사임명서신, 호주연합교회 총회세계선교국, 2010년8월17일)
이 일들이 후에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혹은 이루지지 않았는지는 이글이 전개됨에 따라 서술될것이지만, 이상의 분명한 선교사역의 내용을 가지고 한국으로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호주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 우진이와 함께 한국에 도착한것은 그해 8월 27일 이었다. 가족이 함께 다 오지는 못하였어도 초등학교 마지막 학년인 둘째는 이 기회에 한국에서의 학교생활을 경험하기 위하여 온 것이다. 우진이는 다음해 하이스쿨을 가기위하여 호주의 집으로 다시 돌아 갔지만 당시 한국 교회와 사회에 적응해야하는 나에게는 함께한 아들이 큰 힘이 되었고, 우진이도 한국에서의 학교 경험으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더 가질 수 있었다.
한국에 와 처음 하였던 일 중 그동안 애뜻하게 길러왔던 수염에 관한 것이었다. 한국문화에서는 수염을 기르는 일이 웃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줄수 있다는 생각에 ‘그리스도와 문화’를 생각하며 미련없이 밀어버렸다.
그러나 처음부터 총회에서의 선교사역은 만만치 않았다. 총회 위원회에서나 총회 직원들 중 호주선교동역자라고는 하지만 한국인 목사가 총회에서 과연 무슨일을 할까하는 의구심으로 대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호주교회가 이제 더 이상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할 입장에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호주연합교회와 인연이 있는 조성기 사무총장이 총회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이분의 지지와 보호가 없었다면 총회에서의 사역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는 선교사역이 꼭 무슨 일을 주도하여 어떤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하는것보다, 현지의 사람들의 문화를 이해하며, 그들과 함께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서로 나누는것으로 이해하고 있기에 서두르지 않고 조그만 일이라도 나를 필요로 하는 부서가 있으면 언제라도 협력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마음같이 안되어 좌절할 때도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 중에 하나가 소명을 받고 온 다문화목회 협력이었다. 단일문화이지만 이주노동자들과 타 종족 이민자들이 점차로 늘어나는 한국에 호주의 진보된 다문화정책과 목회를 소개할 일을 은근히 기대하고 왔던것이 사실인데, 한국의 다문화목회는 이주자들을 위한 복지차원에 아직 머무르고 있었고 호주의 그것과는 상이한 상황에서는 또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필자는 총회의 다문화목회 실무자와 접촉하며 다문화목회 지침서와 같은 교재를 낼것을 건의하였고, 그 실무자도 그 필요성에 공감을 하였다. 그러나 그일에 대한 집행은 위원회의 승인, 재정확보등 여러 단계를 거쳐야했었는데 총회에는 항상 다른 우선적인 일들이 많이 발생하다 보니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열정이 점차로 식어 갔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아쉬움이 많이 남는 일 중의 하나였다.
또한 한국교회의 문화는 호주교회의 그것과는 크게 달랐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되면 주변조건이 어떻게 되던지 온 힘을 다하여 해내고야 마는 집중력과 추진력이 지금의 한국교회를 있게 만들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것으로 인하여 인간관계나 재정문제 등의 여러 어려움을 내적으로 수반하고 있었다. 또한 교회 안의 권위주의와 파벌주의가 인간관계를 옥죄고 있어 열린마음으로 다가가거나 다가오는 일이 참 어려웠다. 당시 필자는 어렵고 힘들때마다 열어보는 책이 있었다. 변조은 목사가 집필한 ‘은혜의 증인들’이란 책이다. 이 책에는 126명의 호주선교사들과 그들이 한 사역을 적고 있다. 백여년전에 이 선배들은 서양사람으로 어떻게 한국에서 그 어려움들을 극복하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그들의 일생을 거듭 읽으며 어느새 나는그 선배들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에이미 선배, 충무에서 어떻게 그렇게 일을 많이 하실 수 있었어요?” “메켄지 목사님, 부산의 나병환자들이 무섭지는 않았나요?” “라이얼 목사님, 그때 처음으로 한인 유학생을 멜본으로 초청한분이 당신인가요?”
총회에서의 첫 일년반은 호주연합교회가 재정지원을 하여 파송선교사로 일을 하였고, 나머지는 한국에서 지원을 하여 협력선교사로 이름을 달리하여 사역을 하였는데 이것은 봉급이 어디서 나오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호칭이다. 가장 보람있었던 일은 역시 한국교회와 호주교회 간의 다리를 놓아 서로 왕래하며 그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중 2012년 예장 총회 직원 50명을 안내하여 호주의 멜본, 시드니, 브리즈번 연수를 다녀간 일은 총회 역사상 전무한 일이었고, 총회장을 비롯하여 부산경남지역 노회대표 31명을 안내하여 호주연합교회 제13차 아델라이드 총회에 참석한 일, 그리고 호주대표들이 예장 총회창립 100주년에 방문하여 부산경남지역의 호주선교사 유적지를 안내하였던 일이었다. 역시 사람이 오고가고 만남을 가지다 보니 호주와 한국의 선교역사를 잘 모르는 젊은 세대들도 선교유산을 존중하며 현재 교회의 건강함을 위하여 계승발전시켜야 한다는 자극과 도전이 되는 모습이 현저하였다.
총회에 있으면서 책을 3권 출판할 수 있었던 일도 필자에게는 즐겁고 보람된 일이었다. 총회창립 백주년 기념도서로 ‘한국교회와 호주교회 이야기’를 편집하였는데 호주선교를 연구해 온 여러 필자들이 참여하여 비교적 최근의 한호선교를 재조명하고 여러 연구자료들을 남기게 되었다. 또 한권의 책은 비교적 잘 알려져있지 않은 호주연합교회를 한국과 호주한인들에게 소개하는 책으로 ‘호주연합교회와 교회일치운동’이란 제목이다. 이 책은 호주총회 총회장 앤드류 더트니 교수의 글을 번역한 도서이다. 세번째는 ‘호주선교사 존 브라운-변조은’이란 책으로 존 브라운의 선교와 목회를 한국과 호주의 동료들과 제자들이 쓴 글을 편집하였다. 이 책은 이중언어로 출판되어 한국과 호주교회에 널리 소개되고 있다.
총회에 있으면서 몇몇의 직원들과 친해졌는데 그 중 농어촌선교부의 간사 김상만 목사와 백령도, 울릉도와 독도, 그리고 강원도 산간지방의 군부대를 방문하여 농어촌선교와 군선교를 접할수 있었던것도 좋은 기억이다. 또한 2012년 논산군부대에서 있었던 진중세례식에 참석하여 필자가 100여명의 군인들에게 세례를 줄수 있었던 것도 특별한 시간이었다.
당시 호주의 찰스스터트대학 부총장 로스 챔버스 장로가 총회를 방문한적이 있었다. 필자가 한국에 오기전 그 대학 신학부에서 강의를 하기도 하였지만 한국과 호주 신학대 사이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위하여 방문을 한 것이다. 이 방문에서 놀랄만한 결정이 있었다. 찰스스터트대학에서 매년 두명의 한국신학생들에게 박사학위 장학비와 생활비 전액을 제공하겠다는 합의였다. 단 선발되는 장학생은 한호선교관계에 공헌을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한국과 호주교회의 장래발전을 위한 중요한 내용이었다. 그 후 선발절차 과정이 있었지만 아직 그 장학금의 혜택을 보는 학생이 없어 아쉽다.
한가지 위에서 언급한 한국에서의 필자의 사역 내용 중 ‘세계교회협의회 부산총회 준비를 협력’이 있는데 이 내용은 다음 장으로 넘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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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세계교회협의회 부산총회
총회에서 선교사역을 하던 중 2013년 10월 부산에서 열릴 세계교회협의회 총회 준비가 점점 가시화되고 있었다. 스위스 제네바 본부 관계자들의 왕래가 점점 빈발해지고 총회에도 준비위원회가 있어 여러가지 과정들이 복합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세계교회협의회 총회는 전 세계 140개국에 산재한 유수한 개신교회와 정교회들 349개 교단과 그 속에 속한 5억 6천만이 속해 있는 세계 최대의 연합기구이며, 한국에서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 대한성공회 그리고 한국기독교장로회가 회원교회로 참여하고 있다.
이런 세계적인 기독교 에큐메니칼기구의 총회가 21세기에 들어 한국땅에서 열린다는것은 한국교회와 아시아교회 큰 역사적인 의미와 기대를 던져주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총회를 막상 2009년 유치하기는 했어도 2012년이 되도록 안팎으로 여러 어려움에 봉착하여 있어 그 준비과정이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그 갈등이 계속 언론매체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총회 준비는 언급한 4개 회원교회와 한국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되어지고 있었는데 여러가지 교단 이해관계와 지도부의 갈등으로 의사소통이 원만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부산총회를 준비하는 준비위원회의 역할과 인사조직, 엄청난 규모의 재정모금, 세계교회협의회 신학이해 등 어느 한가지도 만만한것이 없었다. 밖으로는 보수적인 한국교단들 중 세계교회협의회의 신학을 이단으로 정죄하여 부산총회를 극구 반대하며 홍보하고 있었다.
그러다 2012년 말에 와서 예장통합 총회 사무총장직 임기를 마친 조성기 목사가 준비위원회 사무총장으로 임명이 되었는데, 그의 추천으로 준비위원회 위원장 김삼환 목사는 필자를 사무국 국제협력국장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호주연합교회 총회 총회장 알리스터 매크레이 목사도 추천을 해주었는데, 처음 필자가 파송될시 양 교단이 부여한 ‘다가오는 세계교회협의회 부산총회 준비를 협력하며 컨설턴트의 역할을 한다’를 이제 비로소 이행할 수 있는 길이 열린것이다. 하나님은 손해보시지 않고 처음 파송하신 목적 그대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2013년 1월 첫 주부터 종로 5가의 준비위원히 사무실로 출근을 시작하였는데, 사무실 안은 긴장감이 돌정도로 결의에 차 있었다. 사무실에는 사무총장을 중심으로 7명의 국장과 몇명의 간사등이 이미 임명되었거나 임명되고 있었고, 각 교단에서 파송되다 보니 에큐메니칼 팀을 이루게 되었다.
이글은 부산총회 전반에 대한 글이 아니라 호주연합교회로 부터 파송을 받은 필자를 통하여 호주연합교회가 부산총회 준비에 어떤 참여를 하였고 공헌을 하였는지를 서술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필자가 담당한 국제협력국의 일을 중심으로 쓰여졌다.
이글은 부산총회 전반에 대한 글이 아니라 호주연합교회로 부터 파송을 받은 필자를 통하여 호주연합교회가 부산총회 준비에 어떤 참여를 하였고 공헌을 하였는지를 서술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필자가 담당한 국제협력국의 일을 중심으로 쓰여졌다.
2 1. ‘빛의 순례’
‘빛의 순례’는 사도행전의 예루살렘공의회가 열린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세계교회협의회 첫 개최지인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에서부터 9차 개최지인 브라질 포토 알레그로를 순례하는 프로그램이다. 생명, 정의, 평화의 순례를 통하여 부산총회의 개최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며, 각 국가의 WCC소속 교회들과 교회협의회의 일치와 연대를 모색하며, 특히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과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순례의 목적이었다. 이렇게 좋은 취지에서 출발을 했지만 준비프로그램 중 가장 비판을 받은 프로그램 중 하나였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막대한 교회재정을 쓰며 소수의 리더들만 참여했던 이 방문프로그램은 여러모로 구설수에 오를수 밖에 없었다. 이 프로그램은 한국문화와 교회를 세계에 알리는 목적으로 한국정부 문체부의 예산도 편성되어 있었지만, 결국에는 원래 계획이 대폭 수정되어 진행되었다.
예루살렘공의회가 열렸던 예루살렘, 두바이의 한인디아스포라교회, 7차 총회가 열렸던 호주 캔버라, 스위스 제네바의 협의회 본부, 그리고 중요한 정교회가 있는 이디오피아 등의 국가들을 준비위원회 대표들이 방문하였다.
그 중에서도 필자의 선교사역과 관련 있는것은 물론 한국대표단이 호주교회를 방문하였던 때이다. 특히 7차 캔버라총회를 1991년 준비하였던 당시 관계자들을 만나 캔버라총회 준비시 어떤 기쁨과 어려움이 있었는지 서로 대화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참석자들 모두 교회간의 에큐메니칼 연대가 후세대들을 위해서도 얼마나 중요한지 배우는 시간이었다. 한국대표단은 필자를 파송한 호주연합교회 총회도 방문하여 친교하며 부산총회의 의의에 관하여 나누고 협력을 다짐하였다.
그 중에서도 필자의 선교사역과 관련 있는것은 물론 한국대표단이 호주교회를 방문하였던 때이다. 특히 7차 캔버라총회를 1991년 준비하였던 당시 관계자들을 만나 캔버라총회 준비시 어떤 기쁨과 어려움이 있었는지 서로 대화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참석자들 모두 교회간의 에큐메니칼 연대가 후세대들을 위해서도 얼마나 중요한지 배우는 시간이었다. 한국대표단은 필자를 파송한 호주연합교회 총회도 방문하여 친교하며 부산총회의 의의에 관하여 나누고 협력을 다짐하였다.
‘빛의 순례’단은 가는 곳마다 지역교회 지도자들과 에큐메니칼예배를 드렸는데 서로 다른 나라에 있어도 그리스도를 머리로하는 한 형제자매임을 확인하며 한반도와 세계평화를 결단하는 시간을 가졌고, 곧 부산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2 2. 기획마당
부산총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절실하였던것 중 하나는 WCC의 신학을 이해하며, 그 신학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뿐만아니라 그 신학이 한국교회에는 어떤 의미가 있으며 또 아시아교회의 입장에서 새롭게 선포해야할 신학적 도전은 무었인지를 고민하는 것이었다.
이 일을 위하여 준비위원회 안에는 기획위원회가 있었고, 당시 WCC 중앙위원이었던 박성원 교수가 위원장을 맡고 필자가 그 실무일을 협력하였다. 이 위원회는 각 교단의 신학자들과 여성운동가들, 그리고 총회 실무자들이 참석을 하였는데, WCC의 일치, 증언, 봉사의 큰 범주에서 프로그램을 세분화하여 진행하는 동안 도출되는 주요 문서들을 해석하고 그것을 한국교회에 접목하는 작업을 하였다. ‘기획마당’이라는 이름의 세미나를 연속으로 개최하여 공식문서들을 성찰하는 작업은 자칫 큰 행사의 그늘에 가릴수 있는 신학교육과 성숙에 대하여 이해를 넓혀 나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양한 시각에서 발제된 문서들을 창조, 생명, 평화, 경제정의, 생태정의, 신학교육, 디아코니아, 다종교와 기독교 증언등의 내용을 엮어 ‘세계교회협의회 신학을 말한다’(한장사, 2013)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하였다. 앞으로 세계교회협의회를 이해하려는 목회자들과 후학들에게 좋은 자료가 될것이다.
3. 이웃종교와의 대화
3. 이웃종교와의 대화
WCC의 주요 목적중의 하나가 종교간의 대화를 통하여 세상에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부산총회에도 각 종단의 대표들이 초청되었으며, 이웃종교와의 대화가 다문화 다종교 사회의 주요 안건 중의 하나이다.
각 종단의 대표들이 총회기간 중 부산에 머무를때 여러가지 음식등에 관한 필요와 배려, 그리고 안전이 요구되었는데 이 일을 준비하기 위하여 WCC 실무자 라지쿠마 신부가 5월 초에 한국을 방문하였다. 필자의 국제협력국에서 이 일을 담당하였기에 NCCK의 협력으로 한국의 원불교, 이슬람교, 불교, 유교, 동래 향교 대표자들과 만날수 있도록 주선하여 함께 방문하였다. 부산의 범어사 주지 수불 스님등을 포함하여 대부분 각 종단 대표자들은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였고 부산총회에 참석하여 세게평화에 공조하겠다고 답하였다.
라지쿠마 신부는 한국 각 종단의 환영과 열린대화에 감사하였고, 동시에 같은 기독교이면서도 WCC를 반대하는 일부교단으로 인하여 아이러니하다고 언급하였다.
4. 주말방문프로그램
필자가 담당한 사역 중 ‘한반도와 세계를 위한 에큐메니칼 평화순례’, 다른 말로 주말방문프로그램은 가장 규모가 크고 두려운 일이었다. 총회에 참석하는 800여명의 총대들이 주말에 한국의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한국교회를 체험하고, 한국성도들을 만나며, 한국의 문화와 지리를 접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대규모 방문프로그램이었다. 크게 4개의 지역으로 나뉘어 방문을 하였는데 서울과 임진각, 부산경남지역, 광주, 그리고 제주도였다. 총대들은 한국에 입국하기 전부터 신청서를 작성하였으며 그들이 참석하기 원하는 지역, 교단에 따라 그룹을 나누어 출발하는 1박2일간의 여정이었다.
이 일은 각 교단 실무자들의 공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그들의 협력이 없이는 가능치도 않고 의미도 적은 프로그램인데 총회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와도 일이 진행이 되지 않았다. 준비위원회 지도부의 갈등도 있었지만, 회의로 모이면 여러가지 의견들은 많이 나와 서울에서의 1박 숙박을 호텔로 할지 민박으로 할지도 결정이 못되어 공문도 못나가는 상황이었다. 담당 국장인 필자로서는 피가 말리는 일이었고, 그렇다고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입장도 능력도 못되었다. 그럼에도 지금 와 돌이켜보면 여호와 이레로 한반도 평화를 위한 순례를 성공적으로 마칠수 있어서 감사할뿐이다.
서울로 가는 팀을 위하여 준비위원회는 KTX 전체를 전세 내었다. 부산 벡스코에서 울산역까지 버스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모두 KTX에 승차하였다. 당시 울산역장에게 필자가 전세비를 수표로 지불하였는데 약 7천만원이었다. 필자가 평생 지불한 비용중에 가장 비싼 기차표이었음은 물론이다! 임진각과 도라산을 먼저 방문한 총대들은 남북한의 분단현실과 한반도의 통일이 세계평화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여러 의식을 통하여 참여할 수 있는 뜻깊은 기회를 가졌고, 이 행사는 많은 언론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저녁에는 명성교회에서 개최한 성대한 문화의 밤에 참여하였고, 다음 날 주일에는 각 교단별로 교회별로 흩어져 예배를 드렸다.
부산경남에서는 총 14개의 방문프로그램이 동시적으로 진행되었다. 부산의 해양문화, 민주화역사, 평화, 정의와 생존권 투쟁, 생태환경, 이웃종교, 여성인권과 해방, 핵의 주제 등으로 나뉘였고, 김해의 다문화, 거제의 경제발전과 정의, 울산의 산업과 생태환경, 경주의 불교문화, 안동의 유교문화, 그리고 마산의 소외지역 선교 등이었다. 특히 마산의 소외지역 선교는 실제로 호주선교사들의 부산경남선교에 관한 주제였는데, 필자가 호주선교사다 보니 이 프로그램을 주장하여 넣었는데, 사실 전 세계에서 부산으로 온 총대들에게 부산지역의 초기 호주선교를 소개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방문은 호주선교사였던 존 브라운 목사와 탁지일 교수가 맡아 진행을 하였고, 부산진교회. 일신기독병원, 경남선교 120주년기념관, 호주선교사 묘원, 창신대학교, 문창교회 등을 방문하였다. 부산경남의 방문 프로그램은 부산준비위원회와 부산경남지역의 교회들, 특히 실무자인 최광섭 목사의 노고가 컸다.
한가지 필자의 제안으로 평화엽서를 제작하였는데 이것은 모든 총대들이 본인이 떠나 온 전 세계의 교회나 가족에게 한반도 순례를 하며 느낀 평화의 메세지를 보내도록 하는 목적으로 시행되었고, 실제 한반도에서 보내는 평화의 우편엽서가 세계 곳곳으로 발송되기도 하였다.
총회가 끝나고 약 8개월 후인 2014년 7월, WCC 중앙위원회에 부산총회 평가서가 보고되었다. 평가서는 총회에 참석한 각국 대표, WCC직원, 그리고 실행위원회를 대상으로한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한것이다. 그 문서에 부산총회 프로그램 중 주말방문프로그램이 가장 좋았다고 평가되었다.
총회가 끝나고 약 8개월 후인 2014년 7월, WCC 중앙위원회에 부산총회 평가서가 보고되었다. 평가서는 총회에 참석한 각국 대표, WCC직원, 그리고 실행위원회를 대상으로한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한것이다. 그 문서에 부산총회 프로그램 중 주말방문프로그램이 가장 좋았다고 평가되었다.
5. 부산일신기독병원
세계교회협의회 총회 기간중 반드시 필요한 것 중 하나는 의료지원이다. 전 세계에서 날라 온 총대와 방문자들이 경험하는 한국 음식과 기후,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병등을 고려해 볼때 의료지원은 필수적인 준비이다.
마침 부산에는 호주선교사가 세운 종합병원이 있다. 호주선교사 자매 헬렌과 캐서린 메켄지가 세운 병원이 일신기독병원다. 필자는 준비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일신기독병원에 연락을 하여 총회 기간중 의료봉사를 할 수 있는지 문의를 하였고, 흔쾌히 봉사하겠다는 응답이 왔다. 마침 병원 이사장인 인명진 목사는 호주와도 깊은 인연이 있는분이었다.
WCC 실무책임자가 한국을 방문할 시 병원대표자들과 의료봉사협정식을 맺었고, 총회 기간 총회 장소에 의무실을 만들어 의사와 간호원이 상주하며 매일 수십명의 환자들을 성공적으로 돌보았다. 호주선교사가 세운 병원 의료진이 세계교회협의회 총대들을 섬기는 특별하고도 귀한 기회였다.
6. 총회 화보편찬
2013년 초 준비위원회 사무국에서 사무총장, 국장, 간사들이 각 부서의 프로그램을 계획할때부터 필자는 총회 화보편찬을 주장하였다. 부산총회를 유치한 날부터 총회 폐회 전까지의 여러 만남과 행사들을 한글과 영문으로 화보를 만들어 총대들이 출국하기 전 한권씩 선물로 주고 싶었고, 그러면 그 화보가 전 세계로 흩어져 그리스도 안에서의 만남과 선교, 그리고 한국에 대한 기억을 오래 간직할 수 있기때문이었다.
기획안을 작성하여 절차에따라 위원회의 승인과 더불어 예산을 확보할 수 있었고, 곧바로 사진을 확보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본 작업이 쉽지 않았던것은 총회가 폐회하기 전 책이 출판되어 배부를 해야하기에 대부분의 작업이 총회 전에 마쳐져야 하며, 총회에서 일어나는 예배, 회의, 친교, 각종 프로그램들의 사진은 그날 그날 밤을 새워가며 완성하여 인쇄소에 넘겨야 하였기 때문이다. 하루라도 작업이 늦어지면 책이 폐회 후에 나오게 되고, 그러면 총대들은 이미 떠난 후이기 떄문이었다. 다행히 미국에서 온 크리스틴 리 목사가 우리 국제협력국 간사로 본 작업에 참여하여, 영문과 한글로 차근차근 편집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데서 터졌다. 부산총회에 대한 보수계의 계속되는 공격, 한기총과의 공동선언문으로 야기된 신학적인 혼란, 총회장소를 부산에서 인천으로 옮기려는 시도로 인한 반감 등으로 부산총회에 대한 당시의 여론은 부정적이었고, 그로 인하여 기대했던것 보다 모금이 저조하였다. 준비위원회는 다방면으로 예산을 삭감할 수 밖에 없었고, 급기야는 총회를 코앞에 남겨두고 화보편찬을 비롯하여 몇 프로그램들을 중지시켰다. 이러한 현실이 사무국에도 그대로 반영되면서 사무실의 분위기는 때로 험악하기까지 했고, 고성이 오고가는 모습이 연출되었다.
화보편찬이 중지되자 우리 팀은 허탈하였다. 거의 10개월 동안 준비해오며 시간을 많이 할애했던 작업이었기에 쉽게 포기되지 않았다. 총회 시 전담 현장 사진사도 예약을 해 놓았고, 인쇄소에서도 초기작업을 이미 마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나름대로 후원자를 찾고 있었고, 지도부의 이해를 구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필자 개인의 돈을 가용해가며 작업을 은밀히 진행하게 하였다. 혹 나중에 예산이 다시 승인이 된다하더라도 작업이 진행되어 있지 않으면 이미 늦어 총회는 폐회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필자의 생각이 들어 맞았다. 총회가 시작되고 화보를 다시 진행하라는 승인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부족하나마 화보는 완성되었고 총대들 앞에 출판 감사기도회가 본 회의장에서 열렸다. 총회준비대회장 박종화 목사의 설명과 세계교회협의회 총회 의장의 감사인사가 있자 모든 총대들이 기립하여 박수를 하였다. 한국교회가 이토록 세심하게 준비한것에 대한 감사였고, 총회기간 중에 화보가 출판되는 신속함에 총대들은 감격하는 모습이었다.
본 화보는 국내의 각 교단 총회와 각 신학도서관에도 배부가되어 당시의 장면을 앞으로 올 후세들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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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을 마치며
필자는 만 3년 4개월 간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로 오히려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한국교회의 사랑을 받았다. 한국인이면서 호주에서 공부하고 목사안수를 받고 파송된 선교사인데, 한국교회는 필자를 때로는 아웃사이더로 때로는 인사이더로 받아 주기도 하며 그리고 때로는 소외시키기도 하였다. 교회 구조안의 부정의와 부패로 인하여 큰 실망도 경험하였다. 하지만 내 일생의 목회 사역 중 가장 치열한 기간 중의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목회에는 여러가지 내용이 있겠지만 뭐니뭐니해도 선교사로서의 사역이 가장 복되고도 도전적인 일이라 생각된다. 목회자라면 누구나 한번씩은 편안한곳을 떠나 낮선 곳에서 선교사의 삶을 사는것이 좀 더 온전한 목회자로 거듭나는 길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선교사로 나간다는 것은 큰 손해를 보는 것이다. 원래 받던 봉급의 절반도 안되는 현실, 낮선곳에서 받는 온갖 외로움과 어려움, 필자의 경우는 가정을 떠나있어 가족들에게 끼치는 미안함과 그리움, 그리고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의 불안정함 등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은혜의 증인들’인 호주의 선교사들은 120여년전부터 지금까지 집을 떠나는 그 여정이 계속되고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필자가 한국에 있으면서 총 25번의 선교서신을 필자를 후원하는 분들에게 송고하였다. 그들의 관심과 기도와 사랑을 다시 한번 감사하며, 한국교회와 호주교회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동반자관계가 계속 발전해 나가기를 기원한다.
<참고도서>
변조은 저, 정병준 역, “은혜의 증인들”, 한장사, 2009.
양명득 편, “호주교회와 한국교회 이야기”, 한장사, 2012.
양명득 편, “호주선교사 존 브라운”, 한장사, 2013.
양명득 엮음, “세계교회협의회 신학을 말한다”, 한장사, 2013.
양명득 편, “세계교회협의회 제10차 총회” 화보집, 한국준비위원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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