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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8일 월요일

호주선교사 한국선교역사 1889-1941

호주장로교 한국선교역사 1889-1941
















추천사초기 호주선교사들의 숨결

존 브라운
(전 한국선교사 1960-1972,
전 호주장로교회와 호주연합교회 총회 선교부 총무)

올해는 한국교회와 호주교회가 선교 관계를 맺은 지 128년 되는 해이다.
1889년 헨리 데이비스가 한국에 도착한 이후 약 130명의 호주 선교동역자가 한국교회의 선교를 협력하였다한국교회의 성장과 압제 속에서의 투쟁과 순교그리고 호주선교사들의 사역 이야기는 우리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어 왔다. 1899년부터 1942년 사이의 어려웠던 시기와 증가하는 일본제국의 핍박 속에서 호주선교사들은 젊은 한국교회를 지원하였다초기 호주선교사들의 증언은그리고 성장하는 한국교회의 신실한 증언은 호주에 있는 교회들에게 지금까지도 도전을 주고 있는데이 역사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선교의 증언은 어떤 이유에서 복음에 신실한 증언일까더 성찰하여 보면 호주선교부가 선교의 우선을 정하는데 조정되었어야 할 관점은 있지 않았을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의 기준은 선교가 성공하였느냐 혹은 못하였느냐가 아니라선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에 신실하였느냐 그리고 성경이 전하는 대로 하나님의 본성을 잘 증언하였느냐 일 것이다한 세기 후 우리의 선교가 얼마나 적절한지를 평가하는데도아마도 이 자료가 우리에게 올바른 질문을 하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현재 해외의 어떤 다른 나라 교회들보다 선교사를 더 많이 파송하고 있다우리는 우리들보다 앞서 간 선교사들의 성취와 실패들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호주선교사들은 백여 년 전 당시 어떤 안건들을 어떤 이유로 선택하여 어떻게 접근하였을까그리고 그 일들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선교에 어떻게 합당하였고혹은 포함되어야 하는데 생략된 것은 무엇이 있을까?
이 책은 한국교회가 읽어야 한다초기 선교사들은 당시 한국에서 어떻게 우선을 정하였을까꼭 되어져야 했었는데 이루어지지 않은 일은 무엇일까혹은 하지 말아야 했던 일을 한 것은 없을까지금 한국교회는 어떤 방법으로 선교의 우선을 정하고 있는가지금 실행하고 있지만 하지 않아도 되고무관심하지만 지금 꼭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예전 선교사들에 의하여 주어진 우선과 이해를 질문 없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는 않은가?
호주선교사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 믿음으로 대응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복음과 성경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그들을 인도하였던 것이고또 다른 면은 그들이 처한 당시의 상황을 알고 분석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오늘날 우리는 교회 선교의 우선을 어떤 방법으로 결정하고 있는가?
우리가 선택하는 선교의 우선은 우리가 처한 상황을 분석하여우리에게 주어진 재능은사그리고 영감을 그 상황에 가져 오는 것이다그리고 이 분석위에 우리에게 주어진 여러 자산의 현실적인 평가로 우선을 설정하여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며 최선을 다 하는 것이다.
나는 본도서가 한국에서 출판되는 것을 환영한다이 책이 드디어 한국말로 번역이 되었는데 그 수고를 맡아 준 양명득 목사님께 감사드리며우리는 그에게 빚을 지게 되었다.
초기 호주선교사들의 숨결이 이 책 속에 기억되어 있다또한 경상남도 지역의 신실한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마산에 세워진 선교사들의 묘역에도 그 기억이 남아있다초기 호주선교사들의 숭고한 사역과 한국의 기독교인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또한 한국의 교회들과 친구들에게 감사드린다당신들은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었다.

호주 캔버라에서
2017



추천의 글공식적인 한국선교 보고서

이상규
(고신대학교 교수)

호주장로교회의 한국선교역사를 개관한 에디스 커(Edith Kerr)와 조지 앤더슨(George Anderson)이 공동 집필한 호주장로교 한국선교사 1889-1941가 이번에 번역되어 우리말로 읽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호주장로교회는 1889년 10월 해리 데이비스(J. H. Davies)를 한국에 파송한 이래 1941년 와킨스(Rene F. Watkins)를 파송하기 까지 50여 년 간 78명의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여 부산과 경남지방의 5개 선교지부곧 부산 진주 마산 거창 그리고 통영에서 전도교육의료구제 및 자선 분야에서 봉사하게 했는데이들의 한국에서의 선교활동을 정리한 것이 이 책의 내용입니다이런 점에서 이 책은 호주빅토리아 장로교회의 공식적인 한국 선교보고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주장로교회는 한국 외에도 현재 바누아투라고 불리는 뉴 헤브리디즈나 호주 원주민그리고 호주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을 위한 선교사역을 수행해 왔는데가장 성공적인 선교지가 한국이었습니다. 1920년대 호주(빅토리아)장로교회 해외선교비 총액의 70% 정도가 한국 선교를 위해 사용될 정도였습니다호주장로교회는 여전도회 연합회(PWMU)나 청년연합회(YFU) 등과 같은 선교사 파송단체만이 아니라 지역교회그리고 주일학생에서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한국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후원 하는 등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였고그 결과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그 결실이 지금의 부산경남 지역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장로교회의 한국선교 역사가 정리되지 못한 점을 아쉬워하여 호주장로교 해외선교부는 한국선교역사를 편찬하기로 하고한국선교사 출신인 에디 커 와 조지 앤더슨 두 분에게 집필을 위임하였고그 결과 1970년 이 보고서가 출판된 것입니다.
이 책을 집필한 에디스 커 선교사는 1921년부터 1941년까지 진주 마산 통영 부산에서 일했던 유능한 선교사였고호주에서 신학사 학위(BD)를 얻은 첫 여성이었습니다여러 가지 저술을 남긴 문필가이자 여권운동가였습니다그리고 조지 앤더슨은 1922년부터 1937년까지그리고 해방 후 다시 내한하여 2년간 선교사로 일했고 후에는 호주장로교 선교부 총무를 역임했던 선교사이자 선교정책가였습니다이렇게 볼 때 이 보고서를 집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보고서를 번역한 양명득 목사님은 호주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호주연합교회에서 목회자로 활동하는 등 호주교회의 신학과 역사에 깊은 식견을 가진 목사입니다이런 점에서 그는 어느 누구보다 더 적절한 번역자라고 생각합니다그의 수고의 값으로 이 보고서가 번역되어 한권의 책으로 출판된 것을 축하하며 환영합니다.
이 책을 통해 호주장로교회의 한국선교 역사한국의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호주교회 성도들의 뜨거운 사랑과 헌신을 이해하고 감사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면서 이 책을 추천합니다.

2017년 6월 25
부산



서문새 한국으로 나가는 새 선교사들

에디스 커


1889년부터 1941년까지 한국의 호주장로교 선교회의 사역기록은 1945년 이후 새 한국으로 선교를 나가는 새 선교사들에 의하여 요청되었다.
총회 선교부는 이 작업을 멜본의 한국친교회에 위임하였는바이 친교회는 1941년 이전에 고요한 아침의 땅에서 봉사한 특권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이 된 모임이다.
그러나 첫 20년 동안의 사역은 아쉽게도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당사자들로 부터 직접 들을 수 없었는데오래전 그들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한국친교회는 이 과제를 1921년과 1922년 각각 한국에 갔었던 에디스 커 선교사와 조지 앤더슨 목사에게 위임하였다. 1934년 한국에서 돌아온 후 앤더슨 목사는 총회 해외선교위원회 총무에 임명되었다그는 1939년부터 1951년까지 교회를 위하여 중요한 직책을 감당하였고, 1939년에는 해외선교위원회와 장로교여선교연합회 대표들을 인도하여 한국을 방문하였고그리고 전쟁이 끝났을 시 호주선교부 자산을 확인하기 위하여 또다시 방문을 하였다그는 크게 타격받은 한국교회의 재건을 돕기 위하여 1952년부터 1954년까지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하여 총회 선교부 총무자리를 사임하기도 하였다.
이 책의 한 부분이 앤더슨에 의하여 쓰였다커 선교사는 이 책의 집필과 편집그리고 정리를 하였다.
이 책이 준비되면서 한국친교회는 다양한 내용을 듣고 토론하기 위하여 수시로 모였다그러나 시드니의 선교부 사무실에서 타자를 치기 전 완성된 원고를 친교회가 읽어 보고 확인할 수 없어서 못내 아쉬웠다.
각 장을 읽기도하고 들어주며사진도 제공하여 준 선교회 회원들에게 감사를 드린다특별히 감사한 것은 도로시 레게트 선교사가 원고 타자를 돕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고던 선교사도 수시로 도와주었다.



서문우리는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조지 앤더슨


"한국은 마치 아시아의 아픈 손가락과 같고아직도 붕대를 감고 있으며휴전선, 1953년 727일 이후 북의 공산주의와 남의 비공산주의 사이에 불편한 평화가 감돌고 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1960년 12)
1950년과 1951에 있었던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파괴된 한국의 도시들을 재건하는데 미국의 자본이 2천 3백만 명의 한국인을 도와왔다두 번 파괴되고 두 번 재건된 수도 서울은 아름다운 도시가 되었고전에 보다도 더 번영하고 있다기찻길도 들어섰고새 발전소그리고 새로운 공업이 발전하고 있다그러나 인구의 증가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공산주의자들의 어두운 그림자는 새 호흡을 위하여 몸부림치는 분열된 작은 한반도에 여전히 위협의 가능성을 드리우고 있다.
1941년은 약 60년 전에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탄생된 놀라운 선교사들의 사역과 기독교 교회의 성장이 막을 내리는 해였다.
그리고 1945년까지의 중간 기간은 세계전쟁의 구름이 기독교 공동체의 운명을 완전히 뒤 덮었다뒤 이어 해방의 종소리가 새 시대를 열었고새로운 세대의 선교사 동역자들이 위대한 재건의 사역 목적을 가지고 대부분 지하에서 운영되던 교회를 도우러 한국에 들어갔다.
선교지의 교회와 선교부의 공식 기록을 대부분 근거로 한 이 작은 책의 출판 목적은 현재 한국의 새로운 세대에게 현재와 미래의 뿌리를 찾을 수 있는 당시의 이야기를 좀 더 친밀하게 전하기 위함이다그리고 우리 세대에 여전히 남겨진 것은 그 뿌리의 최소한 어떤 부분들은 다시 자라나 귀한 추수를 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 요 12:24



차례

추천사: 초기 호주선교사들의 숨결 존 브라운
추천사: 공식적인 한국선교 보고서 이상규
초기 한국선교역사의 소중한 기록물 이종삼
발행의 글 진방주
현재와 미래의 뿌리를 찾아서 양명득

서문: 새 한국으로 나가는 새 선교사들 에디스 커
서문: 우리는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조지 앤더슨

1

1장 역사적 배경
1. 은둔의 나라
2. 구 한국의 종교
3. 첫 선교사들
4.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의 활동

2장 개신교 선교의 설립
1. 게일과 데이비스 선교사
2. 경상남도: 호주와 미국장로교 선교부 협력의 시기
3. 부산에서의 미장로교회 선교
4. 부산에서의 철수
5. 부산에서의 호주선교 초기
6. 초기 복음전도 사역
7. 1900년부터 1914년 까지
8. 새 선교부 개원: 첫 시대의 마감

3장 교회선교의 정치적 배경: 1941년까지
1. 1909년까지
2. 1909년부터 1919년까지
3. 1919년부터 1925년까지
4. 1925년부터 1930년까지
5. 1930년부터 1941년까지

4장 교육 선교
1. 전반적 정책과 실행
2. 호주선교부의 교육정책
3. 교육심의회
4. 호주선교부의 학교들
5. 1915년의 딜레마
6. 호주선교부의 초등학교
1) 부산진
2) 진주
3) 진주광림남학교
4) 마산의신여학교
5) 창신남학교
7. 호주선교부의 중등학교
1) 마산의 라이얼중등학교
2) 동래의 하퍼중등학교
8. 신사참배 문제
9. 미션 스쿨의 폐교

5장 직업 교육
1. 남학생들: 복음농업학교
2. 여학생: 실업학교와 동래농업학교

6장 구호사역

7장 유치원과 유치원 교사 훈련
1. 유치원 교사 훈련
2. 주일학교, 마을학교, 직업학교
3. 어린이성경학교 혹은 마을학교들
4. 여름방학 성경학교들

8장 의료 선교
1. 부산과 진주 병원의 시작
2. 세브란스
3. 호주선교부의 협력
4. 통영과 테일러 박사
5. 나병환자 의료사역
6. 건강한 아이들의 집
7. 치료
8. 유아양육 사역과 건강진료소

9장 신사참배에 관한 전반적인 사고
1. 신사참배에 관한 질문
2. 선교사들의 철수, 1940-1942

10장 호주선교부
1. 부산선교부
1) 부산에서의 전도사역
2) 교육 사역
3) 신학 교육
4) 부산에서의 특별 사역
5) 1941년까지 부산선교부의 마지막 행적
2. 진주선교부
3. 마산선교부
4. 통영선교부
5. 거창선교부

11장 선교기관과의 협력
1. 세브란스 병원
2. 성서공회와 성서 번역
3. 기독교서회
4. 신학 훈련
5. 평양의 유니온기독신학교
6. 이화여자대학교
7. 구호사역
8. 기독여자청년회

12장 중간기 1941-1951
1. 정치적 배경
2. 국내 정치상황
3. 교회 상황 1941-1951
4. 북한의 교회 상황
5. 항거의 대가
6. 선교사들의 귀환 1941-1951

13장 호주교회의 특별한 대표와 손님들
141941년 전 호주를 방문한 한국인
15장 한국의 호주선교사 묘지
16장 참고자료 소개

2

1. 한국 장로교회의 시작과 발전
2. 호주선교부의 시작과 발전
3. 순회 선교: 그 이유와 발전
4. 성서학원의 시작과 발전
5. 졸업생들

3 호주선교사 연대기

4 주요 문서 및 자료 모음

1.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의 죽음을 여동생 메리 선교사에게 알리는 편지
2. 호주빅토리아장로교 총회 한국선교 전진정책
3. 김호열의 첫 호주 유학
4. 양한나의 첫 여성 호주유학
5. 양한나의 빅토리아장로교회 방문기
6. 거창의 매카그 양으로부터 온 편지
7. 통영의 수공예반은 가치가 있는가?
8. 진주에서의 교육의 어려움
9. 부산진의 선교사역 편지
10. 마산의 선교사로부터 온 편지
11. 호주선교회의 신사참배 거부 선언문
12. 진주교회가 보내는 선언문
13. 호주선교회의 신사참배 거부와 학교폐쇄 정책에 경남노회가 낸 성명서
14. 호주선교회의 신사참배 거부를 비난하는 통지문



호주선교사 연표

호주선교사 연표























1880년대

1887 중국기독교인들이 두 명의 중국인 사역자를 부산에 보냄. 울프 감독이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할 것을 호주교회에 호소

1888 여성선교후원회 창립의 목적으로 멜본의 해외선교위원회가 교회여성들 의 모임을 주선

1889 6. 네비우스 목사가 중국에서 한국을 방문함. 성경반 훈련제도와 교 회의 자립을 제안함. ‘선교적 교회의 개척과 발전을 출간함

1889 102. 데이비스 목사와 메리 데이비스 양이 호주 멜본에서 한국 부산 도착

1889 10. 조선성교서회가 서울에 창립됨.

1889 10. 호주와 미국선교부의 선교협력이 안건으로 떠오르고, 연합된 공 의회 설립이 결정됨. 헤론 목사 회장, 데이비스 목사 총무.

1890년대

1890 언더우드 목사가 한영사전과 한국어 입문을 출판함

1890 45. 데이비스 목사 부산에서 사망. 메리 양은 호주로 귀국

1890 9. 코페 감독이 성공회 선교부를 서울에 창립함

1890 9. 장로교여선교연합회가 멜본에 창립됨. 첫 모임은 18907월 하 퍼 여사의 집에서 열렸고, 선교지원 지역은 정하여지지 않았음.

1891 12. 매케이 목사는 부인과 맨지스 양, 포세트 양, 페리 양과 함께 부 산에 도착. 호주장로교선교회를 개원함

1891 게일 목사는 한영사전을 준비하기 시작하였고, 1897년 일본에서 출판

1892 3. 메케이 부인 사망

1892 8. 무어 양 부산에 도착

1892 호주장로교 초량선교부 개원

1893 128. 선교사공의회 조직. 호주장로회, 미북장로회, 미남장로회 참

1893 부산진선교부 개원. 해외선교위원회에 의하여 선교부 건물세워짐

1893 병환으로 인하여 매케이와 포세트 부부 사임

1894 4. 서울에서 독립적인 고아원 운영을 위하여 페리 양 사임

1894 5. 아담슨 목사 부부 도착. 초량에 거주함

1894-1895 중일전쟁

1894 4. 여성선교사들에 의하여 한국 남자 한명과 여자 두 명이 고용됨. 베어드 목사에 의하여 세례 받음. 첫 개종자들. 남자의 성은 심이었고, 맨지스 양의 2년 동안 한국어 교사. 그 후 얼마 안 되어 사망함.

1895 아담슨 부인 사망

1895 10. 부산에 여학생들을 위한 일신학교 개교

1895 10. 민비 황후 시해됨

1895 10. 남감리교 선교부가 한국에 개원

1895 12. 브라운 양 부산진에 도착

1896 중일전쟁 후 한국독립 선언됨. 왕은 황제의 칭호가 부여됨

1895-1896 비숍 부인이 한국을 두 번 방문함. ‘한국과 그의 이웃들을 출판

1896 페인 양은 아담슨과의 결혼을 위하여 한국에 도착함

1896 부산 밖에서 첫 번째 기독교 공동체가 조직됨. 김해.

1898 캐나다장로교 선교부는 함경남북도에 선교부를 개원함

1898 전차가 서울에 설치됨

1898 서울과 부산 간의 철도개설을 일본의 회사에 허가됨

1898 호주의 장로교여선교연합회와 남청년친교연합회는 해외선교위원회와 상 의하여 미국선교부에 속하는 가능성을 타진함. 그 안건은 미선교부에 의하여 거절됨.

1899 장로교여선교연합회와 남청년친교연합회는 철수하지 않고, 오히려 한국 에 선교사를 더 충원하기로 함

1899 클라크 박사 부부에 의하여 한국기독교면려회가 창립됨

1899 첫 남감리교 선교부가 고양읍에 조직됨

1899 러시아교회 선교회도 한국에 도착

1900년대

1900 5. 신약성서가 언더우드, 게일, 그리고 레이먼드에 의하여 완성됨. 22,700권이 출판됨

1900 엥겔 목사 부부가 장로교여선교연합회의 사역을 감독하기 위하여 도착. 부산진교회 부임

1900 박 에스더 박사 미국에서 한국 귀국. 첫 한국인 여성 의사

1900 언더우드 박사는 12월에 외국인을 향하여 소요를 일으킬 비밀스런 명 령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 미국 목사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계획은 차질을 빚게 됨

1901 2. 엥겔 목사 41명의 성인과 27명의 아동에게 세례를 베품. 성찬 식 명단에는 58명의 성인과 26명의 세례지원자가 기록됨

1901 4. 엥겔 목사 목회후보자들 훈련 준비를 위하여 신학과 성경공부 과목을 개설

1901 12. 부산지역의 교회 발전을 도울 목적으로 두 명의 장로대행 그 리고 한명의 디컨이 사역함

1901 평양에서 두 명의 학생과 함께 신학교육이 시작됨

1901 휴 커를 박사 부부가 부산에 도착

1902 여성선교사들을 위한 사택이 부산진에 건축됨

1902 경상남도에서 미국선교부와 선교지 분할이 제기됨. 1904년 제기된 안 건이 합의됨

1903 선교동아리가 멜본에서 조직됨. 후에 맥켄지를 지원함.

1903 기독교청년회가 서울에 조직됨

1903 첫 장로로 심취명이 경상남도에서 안수 받음. (장로교여선교연합회 회 의록 14, 1903/4)

1904 세브란스병원이 헌납됨

1904 제칠일안식교회가 순안에 선교부를 개원함

1904 9. 두 번째 교회가 영도에 창립됨 (사슴섬)

1904 심취명 장로가 목회자 후보생으로 받아들여짐. 학비는 해외선교위원회 와 장로교여선교연합회에서 공동으로 내기로 함

1904 다가오는 정치적 상황으로 인하여 한국인들 하와이로 이주 쇄도

1904-1905 러일전쟁. 포츠담조약

1905 5. 패튼 부인 사망. 진주의 병원을 그녀의 이름을 따 배돈병원으로 하여 그녀를 기념

1905 9. 6개 선교회를 대표하는 150명의 선교사에 의하여 한국에 복음 선 교공의회가 창립됨. 목적은 상호 협력과 연합을 위함임. 1912년에는 전 국 공의회가 되었고, 한 교회가 되려는 목적은 포기됨.

1905 10. 커를 박사 부부 진주선교부 개원

1905 멜본의 디커니스와 선교사훈련학교를 처음으로 졸업한 켈리 양과 니븐 양 도착. 해외 사역을 위함.

1906 더 미셔너리 크로니클첫 호가 장로교여선교연합회에 의하여 발행됨

1906 1. 마산의 한국인 한명의 너그러운 후원으로 독서숙, 후에 창신학교 가 설립됨. 또한 멜본의 한 여성도 후원함.

1906 이토가 한국의 총독으로 임명됨

1906 대 부흥 운동이 한국교회에 시작됨

1906 4. 엥겔 부인이 집으로 가는 도중 시드니에서 사망

1906 커를 부부가 진주에 초등학교를 설립함. 후에 광림()학교와 시원() 학교로 명명됨

1906 장로교여선교연합회는 진주에 마가렛 화이트크로스 패튼 기념병원 세울 기금이 준비되었다고 보고함

1907 엥겔 목사 브라운 양과 결혼

1907 커를 부부의 친구 스콜스 양이 그들을 돕기 위하여 진주에 도착

1907 커를 목사 안동학교 정숙학교 설립

1907 한국인들이 진주에 첫 교회를 창립. 해외선교위원회의 지원을 받음.

1907 동양선교사협회가 한국에서 일을 시작. 서울에 성경훈련학교를 설립

1907 9월 조선교회 최초의 치리회 독노회 설립. 왕길지 목사 개회 설교, 회장 마펫 목사. 33명의 선교사와 36명의 한국인 장로가 참석

1907 첫 신학교 졸업생 일곱 명이 안수를 받음. 그 중 이기풍 목사는 첫 선 교사로 제주도로 파송

1907 이태왕 한국 황제는 이왕 왕세자를 위하여 퇴위함

1907 한국의료협회 조직

1908 한국간호사협회 조직

1908 세계주일학교협회 한국지부 창회. 윤치호 회장 (1913년 세계주일학교 대회가 15,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에 열림)

1908 평양신학교 건물의 모퉁이 돌이 세워짐. 1922년 더 큰 건물로 대체. 다 미국의 한 여성이 기증함

1908 세브란스의과대학에서 일곱 명의 의사와 다섯 명의 한국인 간호사 첫 졸업

1908 평양의 유니온기독대학에서 첫 졸업생 배출

1908 구세군이 한국에서 일을 시작함

1908 장로교여선교연합회 어린이동아리가 멜본에 창회. 부산의 고아원 지원 을 도움

1908 연합에 대한 안건을 장로교여선교연합회와 상의하기 위하여 해외선교 위원회에 소위원회를 임명. 여성선교사에게 투표권을 허락하고, 선교공 의회에 참석하며, 선교부 회의에도 참석하도록 추천함. (이전에는 여성 에 관한 안건만 자문하는 권리만 있었음.)

1909 4. 라이얼 목사 부부 진주에 도착. 8월에 사택이 건축됨

1909 부산에 새 학교 건물이 완성됨. 맨지스 양이 교장직에서 사임하고 니븐 양이 임명됨

1909 5. 신학생 존 플린 한국에 자원. 문학과를 졸업할 때까지 보류됨. ( 자 주: 존 플린은 후에 호주에서 유명한 로얄비행기 의료서비스를 창립 하였고, 호주장로교총회 총회장이 됨.)

1909 8. 아담슨 목사에 의하여 마산포에 세 번째 선교부 개회. 1911년 부 터 거주

1909 819. 마산 창신초등과 설립. 설립자 아담슨 선교사

1909 9. 한국의 수공예품 판매를 위하여 장로교여선교연합회 멜본에 산업 상점을 시작.
1909 9. 서울에서 선교 사반세기 축하 컨퍼런스 개최

1909 9. 미국과 호주장로교 사이에 경상남도 선교분할이 합의됨. 1914 에는 이 지역 전부를 호주선교사들이 관할하게 됨

1909 10. 천주교인 안중근에 의하여 이토 히로부미 암살됨. 후임으로 소네 총독이 임명됨 (1909-1910)

1909-1910 그리스도를 위한 백만인 구령운동

1909 10. 챕맨과 알렉산더가 부흥사경회를 개회

1909 빅토리아교회는 한국에 5명의 남성 선교사를 충원하기로 함

1910년대

1910 빅토리아교회는 백만 구령부흥회를 승인함. 빅토리아 주 달레스포드 에서 열린 학생 집회에서 선교에 대한 헌신이 쇄도함.

1910 2. 맥켄지 목사 부산에 도착

1910 3. 클라크 양 진주 수간호사로 임명됨

1910 진주에 여성선교사 사택을 세우기로 결정함. 후에 해외선교위원회는 독신 남자선교사 사택으로 사용

1910 부산의 구 고아원을 대체하여 무에라고아원세움

1910 맥켄지 목사 울릉도 방문. 교회 순회 목회와 교회 창립

1910 3. 초량교회는 호주장로교선교부에서 미장로교선교부로 이관됨

1910 3. 장로교여선교연합회의 비용으로 진주에 여성의 집을 건립하기로 결정.

1910 4. 1866년 시작된 구약성서 번역 완성

1910 6. 일본 기독교청년회 서울에 조직

1910 6. 서울에 감리회신학교가 공식적으로 탄생

1910 8. 조선이란 공식적인 이름하에 한일합병. 데라우치 총독 임명됨 (1910-1916). 군사독재 세움

1910 10. 진주에 배돈기념병원 건축 시작

1910 11. 데이비스 양과 매크레이 목사 한국에 도착

1910 11. 해외선교위원회 해외서기 패튼 목사가 인도하는 대표단 한국 방 . 발포어 목사, 길란더스 씨, 앤더슨 씨, 허친슨 씨, 데이비스 부인, 그리고 켈살 양 동행

1910 미선교부에 의하여 부산에 첫 나환자의 집 개원. 엥겔과 맥켄지 목사는 재정적 책임은 지지 않고 돌보기로 동의함

1910 12. 왓슨 목사 한국 도착

1911 2. 알렉산더 양 한국 도착

1911 7. 초량선교부 문 닫음. 아담슨 목사는 마산으로 이전. 왓슨도 마산 에 임명. 마산선교부 설립

1911 9. 선교협의회는 해외선교위원회에 전보함. “전진하라! 교회는 따르 려는가?” 답장이 오기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따를 것이다.”

1911 10. 맥라렌 부부 진주에 도착

1911 10. 맥피 양 도착. 1912년 마산으로 발령

1911 11. 왓슨 부인 도착

1911 12. 캠벨 양 도착

1912 16. 첫 경상노회 개회 임시노회장 왕길지 목사

1912 2. 한국선교공의회에 의하여 첫 연례보고서 발간. 일본 정부 서면 으로 된 설명서 요구

1912 2. 맥켄지 목사 켈리 양과 결혼

1912 3. 진주병원이 화재로 인하여 큰 피해를 입음

1912 4. 맥피 양의 지도하에 여학생을 위한 의신초등학교가 마산에 개교. 전에는 남학교에서 공부함

1912 해외선교위원회는 부산에 있던 장로교여선교연합회 소유 집을 이전 받 . 여성들은 맥켄지의 집으로 이사하고, 맥켄지 가족은 새 이층집으로 들어 감

1912 91.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 창립총회. 손안로와 왕길지 목사 참석

1912 9. 한국인 음모 사건’,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모의 하였다는 죄로 125명이 구속됨. 그 중 98명이 기독교인. 6명을 제외한 전원 석방

1912 10. 켈리 목사 부부 도착. 1913년 새 거창선교부 매크레이 목사와 합

1912 라이트 목사 도착. 부산선교부에 정착

1912 네피어 간호사 도착. 마산선교부에 정착

1912 멜본에 시니어여성선교사유니온 창립. 클라크 양 지원

1913 2. 알렌과 커닝햄 목사 진주에 도착

1913 4. 테일러 박사와 퀸즈랜드의 레잉 양 도착

1913 왓슨 목사 부부와 무어 양에 의하여 통영선교부 개원

1913 4. 통영 건강관리소 설치

1913 6. 매크레이 목사에 의하여 거창선교부 개원. 후에 켈리 부부 합류. 라렌 부인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진주에 진명유치원 개원. 진명야학교 설립

1913 9. 첫 한국인 목사 안수 및 마산포교회 취임. 아담슨 목사와 협력

1913 9. 엥겔 목사 평양에서 개회된 총회 제2대 총회장으로 선출됨

1913 11. 진주병원 공식 개원

1913 11. 경남남도에서 23년 사역한 미선교부 선교지 호주선교부로 이양

1913 12. 테일러 박사 엘리스 매인 양과 결혼

1913 통영에 진명야학교 설립. 마산에 의신여학교 설립

1913 로마스 씨 마산에 도착. ‘헨리 데이비스 기념학교로 불릴 남중학교 설립을 위함

1913 해외 의사 상호 등록제도. 영국 자격증은 인정되나 호주자격증은 추가 시험 없이는 인정 안 됨

1914 2. 아담슨 목사 부부 은퇴

1914 7. 마산의 남학교에서 중등학교 반 시작

1914 1. 거창에 켈리의 사택 완공. 매크레이를 위한 해외선교위원회 두 번 째 집 완공

1914 세계 1차 대전 발발

1914 장로교여선교연합회 선교사들을 위한 사택 거창에 완공

1914 9. 스키너 양과 애버리 양 거창에 도착

1914 세브란스의과대학 특수교육을 위하여 맥라렌 박사를 기간제로 구별할 것을 요청. 전쟁으로 인하여 지연됨

1915 1. 매크레이 목사 일본에서 마가렛 홀 양과 결혼

1915 거창에 비정부 초등학교 개교

1915 서울에 공식적으로 조선신학교 조직과 개교

1915 2. 거창에 명덕강습소 설립

1915 6. 10년 안에 종교와 문화의 분리를 위한 일본정부의 칙령 발표. 학교는 즉시 시행

1915 9. 라이트 목사 니븐 양과 결혼

1915 11. 커를 박사 부부 은퇴

1916 평양신학교 교회역사부 회장 엥겔 목사 영구 직이 됨

1916 2. 학교에 관한 일본정부의 새 법규로 로마스 씨 사임

1916 3. 호킹 양, 스콧 양, 토마스 목사 부부 도착

1916 7. 호주 재산위원회가 한국선교부 재산 감정. 해외선교위원회의 대지 와 건물 12,387파운드 및 장로교여선교연합회 재산 3,560파운드

1916 920. 경남노회 설립. 초대 노회장 엥겔 목사

1916 한국에 하세가와 총독부임 (19161019198)

1916 통영에 여선교사 사택과 학교 건축. 학교 등록 거절당함. 1917년 비정 부 학교로 개교

1917 부산과 중국 만주와 러시아를 잇는 1,000마일의 철도 건설 완공

1917 맥라렌 박사 프랑스의 중국인 노동자 대대 의료장교로 참전. 1920 한국으로 귀국

1917 한국교회 총회에 의하여 경상노회가 남과 북으로 분리됨. 총회장, 부총 회장, 그리고 서기 모두 한국인이 됨

1917 호주선교부 운영 성경학교 남 3, 5명 첫 졸업

1917 2. 마산포교회가 지도자 교회로 부상. 처음에는 경상남도. 한석진 목 1917년 총회 총회장 됨

1917 11. 커닝햄 목사 일본에서 트리쉬만 양과 결혼

1918 1. 데이비스 박사와 위더스 양 한국에 도착

1918 왓슨 부인에 의하여 통영의 소녀들을 위한 실업 사역 시작

1918 9. 매카그 양 부산 도착

1918 2. 교회협의회가 40개의 회원으로 서울에 조직. 19249월 한국교 회와 선교협의회로 재조직됨

1918 한국에서 26년 동안의 사역을 마치고 무어 양 은퇴

1919 1. 한국의 고종 황제 사망. 34일 국가 장례식

1919 1. 박성애 진주교회 조사 목사 안수. 경상남도지방 첫 한국인 목사

1919 31. ‘독립운동발발

1919 3월 일신여학교와 부산진교회를 중심으로 만세운동 시작

1919 3월 마산 문창교회 중심으로 만세 운동 시작

1919 3월 통영 진명여학교 세 명의 교사 만세운동 주도

1919 4. 스콜스 양 사망. 애버리 양 사임

1919 8. 켈리 목사 부부 사임

1919 10. 테잇 양 거창 도착. 캠벨 양 한국 방문

1919 호주 장로교여선교연합회 선구자기금 설립

1919 라이얼 목사 미래의 마산 남중학교 교장으로 임명. 1920년 사임. 1921 년 사망

1919 8. 사이토 총독 임명. 19191927, 1929-1931, 일본 총리 1931, 1936226일 암살당함

1919 9. 엥겔 목사 부부 평양에 거주하며 평양신학교 강의

1919 9. 무어 양 은퇴. 1892-1918

1919 9. 통영에 심각한 콜레라 발병. 성경부인과 교사들이 주사를 놓도록 . 위생당국은 개화된 기독교인들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함

1919 해외선교위원회와 장로교여선교연합회 대표단 방문. 패튼 목사와 캠벨 양이 인도

1920년대

1920 데이비스, 클라크, 레잉 양 동경에서 열린 세계주일학교 대회에 참석. 32개 국가에서 총 2천명 참석.

1920 모든 선교부에서 확대 주일학교 개학

1920 중등학교 조직을 계속하기 위한 잠정적 결정

1921 10. 커 양 진주에 도착

1921 김호열 호주 멜본 유학

1922 1. 트루딩거 목사 부부 마산에 도착

1922 4. 캠벨 양 병환으로 호주 귀국. 1924년 사임. 1930년 사망

1922 9. 앤더슨 목사 부부, , 딕슨 양 도착

1922 기독교여자청년회 출범. 젊은 한국여성 그룹에 의하여 서울에 창회

1923 4. 맥라렌 박사 부부 세브란스의과대학으로 영구히 이전

1923 테일러 박사 진주병원 원장으로 임명

1923 4. 정부는 인가와 동등한 지정을 선언하고, 사립중등학교 자격이 허락되도록 함

1923 10. 중등학교 설립의 확실한 결정. 마산의 남학교와 부산의 여학교

1923 9. 진주에서 새 여자초등학교(시원) 개교

1923 9. 던 양 한국에 도착

1923 장로교여선교연합회에 의하여 산업상점 멜본에 개점

1924 11. 라이얼중학교 개교를 위하여 아담 교수 방문

1924 맨지스 선교사 은퇴 (1891-1924). 1935년 사망

1924 9. 프란시스 양 도착. 두 번째 퀸즈랜드 주 임명. 결혼을 위하여 1930년 사임

1924 12. 동래 하퍼기념학교 주춧돌 놓음. 장로교여선교연합회에서 34 년 동안 회장직을 수행한 여성 이름을 딴것임. 19247월 사망

1924 12. 창신학교 2층 붉은 벽돌 회원동 완공. 호주빅토리아정부 학교사 진을 담은 우편엽서 발행

1924 서울 구세군의 대지 위에 구제의 집 건립. 호주선교부에서 일정부분 재 정 지원

1925 4. 사이토 총독 한국의 교육가를 위하여 일본 교육기관 연수 조직. 커 양 참가

1925 5. 김호열 호주로 유학. 라이얼학교 교장직을 위한 학문적 훈련. 환으로 귀국하여 사망

1925 6. 동래에 하퍼기념학교 개교

1925 전체 한국장로교회를 위한 여성선교사유니온 설립

1925 8. 부산진 일신학교 개교 30주년 기념

1925 부산지부 기독교여자청년회 개회. 지도자 양귀임

1925 9. 엘리스 양 한국 거창에 도착

1925 매튜 목사 멜본의 해외선교위원회 총무로 임명

1926 기독교여자청년회 하퍼기념학교에 시작

1926 4. 마지막 조선 황제 이상 서울에서 사망

1926 양한나 호주빅토리아교회 방문

1927 야마나시 장군 한국 총독으로 임명 1927-1929

1927 12. 라이트 부인 서울에서 사망. 한국에서 21년 봉사

1928 왓슨 목사 부부 은퇴. 왓슨 부인 1935년 사망. 왓슨 1942년 사망

1928 7. 해외선교위원회 매튜 목사 부부 한국 방문

1928 9. 레게트 양 한국에 도착. 길레스피 양 한국 방문

1928 한국 장로교여선교연합회 설립

1928 양한나 양에 의하여 기독교여자청년회 부산에 설립

1928 엘리스 양 마산지역 유치원교사 훈련 시작

1929 하퍼기념학교 지정을 위하여 신청서 제출. 1933년 승인

1929 하퍼기념학교 교장 사택을 동래에 건축

1929 진주남학교(광림) 폐교. 건물은 성서학원에 기증

1929 사이토 총독 재임명됨 1929-1931

1929 9. 보어랜드 목사 부부 진주 도착

1929 서울에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 설립. 국제선교협의회 회장 모트 박사 참석

1929 부산의 사회봉사 계획 안건 제안. 1934년 지역 한국목사들에 의하여 다시 촉구됨. 1936년 송 박사를 임명하므로 시행

1930년대

1930 11. 미감리회와 남감리회의 연합으로 기독교조선감리회 창립총회. 초대총리사로 양주삼 목사

1930 마산에서 경상남도 주일학교 대회 개최

1931 3. 라이얼기념학교 잠정 폐쇄

1931 9. 에드거 양 도착

1931 커닝햄 목사 서울 성서번역위원회 임명

1931 기독교서회 새 건물 서울에 개원

1931 진주병원에 엑스레이 설비 장착

1931 정부 지시로 통영의 두 번째 유치원 폐교

1931 통영의 농업실수학교 여자산업학교에서 실습 시작

1931 한국 장로교여선교연합회가 처음으로 중국 산동에 성경부인 파송

1931 우가키 장군 한국총독으로 임명 1931-1936

1931 목단 사건발발. 만주 점령과 정복 시작

1931 해외선교위원회 한국의 호주선교부 직원 감축 요청

1932 7. 알렌 목사 마산에서 사망 1913-1932

1932 빅토리아교회 장로교여선교연합회 저녁 지부 설립

1932 일본 수상 사이토 암살

1932 5. 레잉 양 은퇴. 한국에서 19년 봉사. 1967년 사망

1933 하퍼기념학교 지정승인. 한국에서 두 번째

1933 4. 라이얼기념학교 폐교

1933 9. 코트렐 목사 부부 도착. 1939년 사임

1933 12. 빅토리아총회 총회장 매카울리 목사 방한

1934 1. 총회장과 특별협의회로 모임

1934 1. 동래에 여성들을 위한 농업실수학교 자리를 찾도록 결정

1934 4. 라이얼기념학교 건물에 복음농업학교 개원

1934 6. 선교사 아내들도 스스로의 권리로 선교사로 인정됨. 협의회에서 투표

1934 6. 진주여학교의 교장대행으로 정석록 임명. 한국인으로 첫임명. 1936년 교장 취임

1934 9. 뉴 목사 부부 한국 도착. 마산에 임명

1934 마산 복음농업실수학교 설립

1934 한국 개신교선교 설립 50주년 기념 축하

1934 심문태 목사 호주 멜본 연수

1935 정부는 학교에 신사참배 참석을 지시

1935 1. 레인 목사 부부 한국 통영 도착

1935 3. 스터키 목사 부부 한국 진주 도착

1935 3. 이중철 의사 호주 방문. 동아일보에 호주여행기 연재

1935 4. 동래에 여자농업실수학교 개교

1935 통영 스키너 양의 모터보트 정치적인 이유로 등록 거절됨. 1937년 매

1935 부산의 사회와 복음 사역을 위하여 송 박사 임명

1935 엥겔 부인 한국의 40년 사역 완성 1895-1935. 1954년 사망. 엥겔 박 사는 35년 사역 1900-1935. 1935년 은퇴. 1939년 사망

1936 2. 호주선교회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선언문 발표

1936 이삼남 호주 멜본 방문

1936 4. 클라크 양 사임. 1956년 호주에서 사망

1936 5. 부산진의 새 초등학교 완공

1936 김성만 교사 부산의 거지 소년들을 위한 사역 시작

1936 6. 협의회는 신사참배 안건 논의 금지됨. 모임에 형사들 참관

1936 김만일 한국인 목사 동래의 하퍼기념학교 교실 확충을 위하여 8,500 모금

1936 극단적 군국주의자 미나미 장군 총독 임명

1936 맥라렌 부인 이화대학교 위원회에 임명

1936 농업실수학교를 위하여 동래의 논 5에이커 매입. 멜본의 농업학교 친구 들이 비용 지불

1937 3. 리체 양 마산에 도착

1937 이약신 목사 빅토리아장로교 백주년 행사의 연사로 빅토리아총회 초청 방문

1937 4. 맥피 양 마산에서 사망

1937 91. 라이트 선교사 기념 예배당 완공 (해운대교회)

1937 간호사 송옥순과 이영복 호주의 대학원 공부를 위하여 호주 연수. 19395월 귀국. 송 간호사는 세브란스병원. 이 간호사는 진주병원으 로 임명됨

1937 빅토리아장로교회 백주년 기념. 이약신 목사 한국교회 대표로 참석

1937 통영에 새 학교 건립을 결정

1937 데이비스 박사 비엔나의 대학원 세미나 참석

1937 구세군 부산 항구에 여행자 도움처 설립

1937 성경학교의 첫 한국인 교장으로 심문태 목사

1937 북경사건을 핑계로 중국을 적대하는 기류 형성

1937 미장로교 신사참배 문제로 미션스쿨 폐교

1938 평양신학교 191명의 학생으로 봄 학기 종강. 그 후 개강 불허됨

1938 3. 아우만 양 도착

1938 9. 거창에 새 학교 건립 및 개교

1938 복음농업학교 구포로 이사. 대지

1938 9. 테일러 박사 요코하마에서 사망. 한국에서 25년 봉사. 10월에 테 일러 부인 호주로 은퇴

1938 10. 마산여학교 비어있던 라이얼기념학교 한 건물로 이전

1938 이약신 목사 부산에 의료 사역 계획 제안. 1940년에 구금됨

1938 통영선교부 설립 25주년 기념

1938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 해체

1938 조선기독교청년회와 기독교여자청년회 국내위원회 강제 종료. 동경의 청년회와 병합

1938 8. 신사참배 문제로 진주교회 문 닫음. 후에 찬성하는 목사와 함께 다시 문을 열다

1939 1. 호주선교회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입장 재확인

1939 2. 진주교회 일본교회로 형성하기로 선언. 신사참배 찬성

1939 3. 거창여학교 폐교. 그 후 지역교회에 의하여 인수

1939 5. 보어랜드 목사 부부 사임

1939 57. 충무교회 스키너 선교사 선교 25주년 기념 비석 건립

1939 매튜 목사 사임. 앤더슨 목사 멜본의 해외선교위원회 총무로 임명

1939 6. 맥켄지 목사 부부 은퇴. 맥켄지 부인 1905-1939. 맥켄지 목사 1910-1939

1939 6. 진주여학교 폐교. 지역교회에 의하여 인수. 그 후 정부가 인계함

1939 7. 부산진과 마산의 여학교 폐교 명령. 마산남학교 정부교육기관에 의하여 인수. 하퍼기념학교 폐교 명령과 인수를 위한 협의. 1940 4월까지 선교부가 운영하도록 승낙. 다른 학교들은 건물과 설비를 2 동안 선교부가 사용하도록 정부 승인
동래의 농업실수학교의 위상은 구제기관으로 바뀜

1939 7. 세계 2차 대전 발발

1939 8. 호주장로교 한국선교 50주년 기념. 한국교회에서 축하 행사 가능 치 않음. 한 시대의 마감

1939 9. 전체 호주교회의 연합을 위한 총회의 첫 발걸음. 각 주의 대표들 로 구성된 소위원회 임명. 해외선교 사역을 위한 하나의 기구 설립 가 능성 조사

1939 9-11. 호주 총회에 의하여 특별대표단 한국 방문. 해외선교위원회 총무 앤더슨 목사. 존스 목사. 캠벨 양. 존스 부인. 마틴 양

1939 10. 대표단과 특별협의회 모임. 미션스쿨에 영향을 미치는 신사참배 문제 토론. 그 지역의 기독교인 부지사 마수다 씨 참석

1939 맥라렌 박사 진주병원 원장 대리. 데이비스 원장 휴가

1940년대

1940 1. 동래의 학교를 학부모협회에 이양하는 문제로 대표들과 특별 임원 회 개회. 학교 건물과 설비를 학부모협회에 매매 결정. 장로교여선교 연합회의 승인을 전보 받음

1940 11. 테잇 선교사 사택에서 한상동, 이일재, 최덕지 등 신사불참운 동 실천사항 결의

1940 통영의 학교 학교로서는 폐교. 그러나 자선 단체로 계속 활동

1940 3. 성서학원 진주에서의 개원 거절됨

1940 4. 나병원 폐교 명령됨. 그 장소는 군대의 주둔으로 요청. 트루딩거 목사 휴가 19414월로 연기. 1940년 말 환자 이송으로 영향 받음

1940 4. 심문태 목사 주일학교 담당 사임. 노회에 의하여 복음농업학교 교 장으로 임명

1940 4. 디커니스 왓킨스 한국 도착. 통영에 임명

1940 4. 맥켄지 목사 빅토리아장로교회 총회 총회장 피선

1940 4. 부산에서 연례 선교협의회 모임. 형사들이 모든 회의에 참관. 년사역자로 레인 목사 외 리체 양 과 함께 이일래 임명

1940 4. 리체 양 마산의 여학교 교장 등록신청이 거절됨. 한국인이 요청됨

1940 4. 멜본의 장로교여선교연합회 진주병원의 한국인과 선교사 모든 여 직원 봉급을 책임지기로 동의

1940 64. 신사참배에 협조 안한다는 이유로 레인 선교사 경남노회로부 터 시찰권 및 당회권 파면 당함

1940 830. 멜본 투락교회에서 희년 모임 열림. 18907월 장로교여선 교연합회 창립을 위한 예비모임 장소.

1940 9. 데이비스 의사 휴가 후 진주병원 원장직 재개. 맥라렌 의사 자 문관으로 남음. 직원들 구금됨

1940 9. 스터키 목사 부부 휴가 떠남

1940 9. 중심축 동력으로 일본정렬.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모든 교회 지도 자들 제지당함

1940 영국과 미국 시민권자들 한국을 떠날 것을 관계 영사관을 통해 통보. 11월에 마리포사호로 219명의 미국인 출국

1940 10. 감리회 정 감독 교회를 위한 개혁 계획을 발표

1940 10.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헌법 개정안 통과. 안건에 대한 투표는 허용 안 됨

1940 1025. 라이트 목사 매카그 양과 서울에서 결혼

1940 11. 던 양 트루딩거 딸들 호주로 동행

1940 1128. ‘조선장로교회의 개혁 선언 서울에서 발표

1940 12. 스코트 양과 맥켄지 양 한국으로 가는 도중에 고베에서 돌아 감

1941 2. 맥라렌과 레첼 부인, 호킹 양, 데이비스 박사 호주로 귀국. 호킹 양과 스코트 양 25년 한국 사역 마감. 데이비스 박사 23. 맥라렌 부 30

1941 41. ‘세계를 위한 기도공모의 구실로 15명의 여성과 몇 남성 선 교사들 체포 조사되고 가택 수색됨.

1941416. 장로교여선교연합회 선교사들 전보를 통하여 소환됨. 알렉 산더와 테잇 양 경찰에 의하여 8월까지 구금됨. 그 후 추방 명령

1941 420. 트루딩거 목사 부부 19년 사역 후 휴가 떠남. 커 양은 20 사역

1941 427. 딕슨, 레게트, 리체, 에드가, 아우만, 왓킨스 양 다음 배로 출국. 선교부에 남은 사람은 진주의 맥라렌 박사, 부산의 라이트 목사 부부, 통영의 레인 목사 부부임. 알렉산더와 테잇 양은 8월까지 구금. 알렉산더 양은 30, 테잇 양은 22년 사역

1941 12. 진주만 공격. 맥라렌은 진주에 11주 구금됨. 그 후 라이트 부부 와 레인 부부와 함께 부산에 억류됨. 19426월 일본으로 피신. 로렌 조 마키스로는 8. 194211월 멜본 도착

1941 일본 세계 2차 대전 참여

1942 마지막 호주선교사들 호주로 귀국

1943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는 카이로선언 발표. 루스벨트, 처치힐, 장개석

1945 2. 얄타회담 체결. 소련과 미국 분단의 경계로 삼팔선 합의

1945 726. 포츠담선언. 카이로선언 재확인. 미국, 영국, 중국은 일본의 조건 없는 항복 요구

1945 88. 러시아 일본에 전쟁 선언. 812일 러시아 군대 한국 진입

1945 815. 일본의 무조건 항복. 포츠담선언에 러시아와 3대 강국 조인

1945 92. 맥아더 장군 일본정부에 삼팔선 이북에 있는 그들의 군대 는 러시아에 그리고 이남에 있는 군대는 미국에 항복하도록 명령. 9 8일 미국군대 한국에 상륙

1945 98. 미군 행정부 남한 통제. 한국 임시정부 지도자 이승만과 김구 개인적 시민자격으로 한국 귀국 허용

1945 12. 모스크바협약. 4개 강국 신탁통치 (미국, 러시아, 영국, 중국). 국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기 위함. 한국의 모든 정당 반대함. 임시 민 주정부 수립

1946 1. 던컨 양 유엔 구호 및 재건 기구 직원으로 한국 입국. 한국에 1 년 거주

1946 2. 모스크바 라디오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북한 중앙정부 수립 선포

1946 214. 이승만과 김구를 중심으로 한 정치지도자들 미군 대장 호지 장군과 협력하기로 함

1946 해외선교위원회 대표단 총무 앤더슨 목사, 레인 목사 한국 방문. 전쟁 후 한국 상황을 조사하고 한국교회의 필요를 알아보기 위한 목적

1946 6. 해외선교위원회와 장로교여선교연합회 연합함. 빅토리아총회가 승

1946 7. 호주장로교 총회 해외선교부 호주 6개 주 교회의 모든 해외 선교 를 책임 맡음

1946 6. 커닝햄 목사 한국 방문 승인 받음

1946 맥라렌 선교사 'They kept the Faith. Shining lights from Korea' 멜본에서 출간

1947 9. 위더스, , 레게트 양 부산 입국

1946-1947 신탁통치 아래 연합위원회 2번 만남. 교착상태에 빠짐

1947 9. 한국의 문제 유엔에 상정. 1948510일 한국 민주정부를 위 한 총선을 치르기로 결정

1947 기독교여자청년회 부산에 다시 시작. 양한나 회장

1947 서윤복 보스톤 51회 마라톤 승리. 동양인으로는 처음

1948 510. 유엔위원회의 감시 하에 남한에 총선. 북한은 보류

1948 531. 첫 국회 열림. 이승만 의장으로 피선

1948 712. 대한민국을 위한 새 헌법 통과

1948 815. 해방절에 대한민국 공식 건국. 이승만 대통령으로 당선 1948-1960

1948 1212. 유엔 대한민국 승인. 점령군 철수를 유엔이 권고

1948 525. 모스크바 라디오 조선인민공화국건립 선언

1948 1228. 모스크바 라디오 러시아 군대 철수 방송. 유엔은 확인 못함

1949 중국 국가 이데올로기로 공산주의 채택

1949 629. 미군 완전 철수

1949 앤더슨 목사 2번째 한국 방문

1949 레인 목사 가족 동행위하여 호주 귀국

1950년대

1950 1. 레게트 양 병환으로 호주 귀국. 16년의 사역 후 은퇴

1950 3. 레인 목사 부부와 두 자녀, 율 목사 부부, 맥납 양 인천 도착

1950 4. 연수 목적으로 의과 대학원에 이봉은, 신학부에 조민하, 경제학과 에 허증수 멜본에 도착

1950 5. 대한민국 두 번째 총선. 이승만 두 번째 임기 시작

1950 5. 북한에서 남한으로 오는 전기 차단

1950 54회 보스턴 마라톤 함기용 우승

1950 6. 평양방송 평화적 통일호소

1950 625. 북한군 남한 침공. 유엔 북한공산당에 철수를 요구. 유엔 회 원국 한국 지원. 50개국 지원 자원함. 16개국 적극적으로 참여. 호주인 들 유엔군에 의하여 일본 에비수로 철수. 커닝햄과 율 부부 호주로 귀

1950 629. 북한군 서울 정복

1950 9. 연합군 서울 수복. 북한군 압록강 이북으로 밀림

1950 10. 북한군 재침공. 1021일 평양 탈환

1950 10. 레인 목사 한국 귀국 허락 받음. 레인 부인과 아이들은 1021 일 호주로 귀국

1950 12. 중국 인민군 북한을 도와 전쟁에 개입. 연합군 서울 이남으로 후

1950 12. 서울의 기독교인들 대구, 부산, 제주, 거제 등으로 피난

1950 12. 뉴 목사 한국 방문

1951 14. 북한군 두 번째로 서울 점령

1951 4. 북한군 삼팔선 이북으로 밀려남

1951 홍 양 대학원 연수를 위하여 호주로 감. 빅토리아간호사협회로부터 수 료증 받음. 1953년 서울 세브란스병원 수간호사로 한국으로 귀국

1951 412. 맥아더 장군 사임. 매튜 리지웨이 장군 인계. 트루먼 대통령 미국 정책의 목적은 한국에서 전면전을 피하기 위한 국지전임을 방송. 맥아더는 이 정책에 부동의

1951 6. 평화를 위한 협상

1952 2. 헬렌 맥켄지 박사와 캐서린 맥켄지 양 의료사역자로 한국 입국 승 . 왓킨 양 일본에 호주직원 합류

1952 3. 앤더슨 목사 해외선교위원회 사임. 2년 임기로 한국으로 귀국

1952 레인 목사 호주로 귀국하여 사임

1952 8. 위더스, , 맥납, 그리고 왓킨스 양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국 승인

1952 2월 캐서린과 헬렌 맥켄지 자매 부산 도착. 부산일신병원 설립

1953 에디스 골트 부산 도착. 일신병원에서 근무

1953 찰스 케년 목사 부부 부산항 도착. 경남노회와 동역

1954 애슬리 콜빈 도착. 뉴사우스웨일즈주에서 온 첫 선교사

1955 캐서린 다이크 일신병원 근무. 다음해 사고로 사망

1955 416일 프레드 터비 부산 도착. 농촌마을 발전을 위하여 헌신

1957 127일 알란 스튜아트 목사 부부 부산 도착. 마산과 부산에서 사역. 부산장신 교장

1957 제임스 스튜아트 목사 부부 도착. 부산과 진주에서 사역

1957 아그네스 와렌 의사 입국. 일신병원 대리원장 사역

1958 3. 제임스 크로프트 목사 부부 도착. 기독학생 활동 참여. 마산대학 강의

1958 호주장로교회 세계선교부 맥라렌 선교사에 관한 한국의 한 의사(A Doctor in Korea)’ 영문출간

1959 4월 브리즈번의 조이슨 앤더슨 목사 부산 도착. 선교회의 비즈니스 매 니저와 회계

1960년대

1960 조안 잉글랜드 디커니스 도착. 진주에서 사역

1960 7. 도로시 언더우드 도착. 장로회신학대학과 이화여자대학에서 교회 음악 교수. 명예 서울시민

1960 7. 데스몬드 닐 목사 도착. 진주, 서울, 대전에서 사역. 장로교연합공 의회 회계. 예장 총회 협력

1962 마저리 하포드 디커니스 도착. 후에 닐 목사와 결혼

1960 존 브라운 목사 부부 한국 도착. 마산과 서울. 장신대에서 히브리어와 구약학 강의. 호주로 돌아가 호주장로교회와 호주연합교회 총회 선교부 총무 재직. 부인 노마는 후에 목사가 되어 교회 목회

1964 바바라 마틴 의사 부산 도착. 부산일신병원 사역. 부산 명예시민

1964 523. 호주장로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미국연합장로교회, 미국 남장로교회와 더불어 서울에 협동사업부설립을 위한 상호협정서 체

1964 7. 리차드 우튼 목사 부부 한국 도착. 서울 영등포산업선교회 근무

1964 윌리엄 포드 부부 한국 도착. 선교회 비즈니스 매니저. 일신병원 재정 과 행정 감독

1965 베리 로우 목사 부부 한국 도착. 서울과 울산

1963 릴리안 매튜스 도착. 일신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

1968 도로시 나이트 도착. 일신병원과 전주 예수병원 근무

1968 115. 베리 로우 선교사 장애우들을 위한 양지훈련재활원 설립

1970년대

1970 호주장로교회 총회 호주장로교 한국선교 역사 1889-1941’ 영문출간

1971 피터 램 부부 도착. 김천. 호주의 양을 수입하여 농장을 경영

1972 레이몬드 스터만 도착. 부산과 거제도에서 사역

1972 호주장로교회와 후에 호주연합교회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봉급 13 간 지원

1973 호주 멜본에 첫 한인교회 창립. 알란 스튜아트 전 한국선교사가 주도

1975 엘리자베스 니콜슨 의사 부산 도착. 일신병원 근무

1976 67. 스티븐 라벤더 서울 도착. 영등포산업선교회 근무. 노동운동 참여로 비자 갱신 거절됨

1977 622. 호주연합교회 탄생. 한국선교관계 호주장로교회에서 호주연 합교회로 이관

1979 앤서니 도슨 한국 도착. 영등포산업선교회 근무

1980년대

1982 크리스챤 모스테드 목사 부부 도착. 장신대에서 조직신학 교수

1986 임경란 서울 도착. 호주교회 파송 첫 한인선교사. 영등포산업선교회 에서 근무

1989 김진엽 부산 도착. 일신기독병원 치과의사로 근무. 임수경 방북 편 제공 혐의로 구속되기도 함

1990년대

1990 데비 카슨 서울 도착. 영등포산업선교회 근무. 영어 소식지 발행

1992 데브라 굿서 서울 도착. 아시아여성정보센터 근무

1994 엘렌 그린버그 서울 도착. 영등포산업선교회 근무

1999 1031. 한호선교 110주년 기념예배 멜본한인교회에서 열림

2000년대

2000 531. 로한 잉글랜드 서울 도착. 영등포산업선교회 근무. 도시농촌 선교 훈련과정 수행. 안산 외국인노동자센터 근무

2001 114. 부산진교회 데이비스 선교사 기념비 복원

2001 414. 일신기독병원 맥켄지 선교사 기념비 복원 제막식

2002 917. 일신기독병원 50주년 기념 맥켄지 역사관 개관

2003 52. 부산광역시 부산진일신여학교 건물 기념물 제55호 지정

2005 12. 호주연합교회 총회, 멜본한인교회와 예장통합 총회 공동으로 북 한 라선 지역에 보육원 완공

2006 헬렌 맥켄지 호주선교사 맥켄지의 발자취출간

2007 호주장로회 선교사들의 신학사상과 한국선교 1889-1942’ 정병준 교수 출간

2007 826. 부산진교회 엥겔 선교사 기념관 입당예배

2008 45. 충무교회 호주선교 100주년 기념탑 세움

2009 7. 데이비스와 엥겔 선교사 일기 크리스찬 리뷰사 번역 출판.

2009 919. 경남성시화운동본부 순직호주선교사묘역 마산에 제막

2009 9. 한호선교 120주년기념 은혜의 증인들한글과 영문으로 출간

2009 923. 예장 통합 총회와 호주연합교회 총회 한호선교 120주년 기 념 선교선언문선포. 선교 120주년 기념행사와 상호방문 한국과 호주 에서 거행

2010년대

2010 42. 부산진일신여학교 역사기념관 개관

2010 91. 양명득 목사 서울 도착. 예장 총회와 제10차 세계교회협의회 준비위원회 사역. 후에 영등포산업선교회 국제협력부 부임

2010 107. ‘호주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의 열매크리스찬 리뷰지 출판

2011 한호수교 50주년 기념행사 및 기념우표 발행

2011 625. 진주교회 커를 메모리얼 비전센터 개관

2012 4. 일신기독병원 총동문회 맥켄지가의 딸들출간

2012 예장 통합총회 100주년 기념도서 한국교회와 호주교회 이야기출간

2012 7. 호주연합교회 13차 총회에서 일신기독병원 인명진 이사장 헬렌 맥켄지 선교사가 수상한 대한민국 무궁화장 소개

2013 124. 진주시와 진주교회 배돈병원과 광림학교 100주년 기념비 제막식

2013 한호선교 125주년 기념 호주선교사 존 브라운한호기독교선교회에서 출간

2013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맥라렌 교수의 생애와 사상'을 연세대학교에서 출판. 한국 최초의 신경정신과 전문의

2013 112. 10차 세계교회협의회 부산총회 주말프로그램 호주선교사 유적지 방문

2014 119. 한호선교 125주년 기념예배 부산진교회에서 열림

2015 바바라 마틴 선교사 '인생 여정의 발걸음' 자서전 출간

2016 호주선교 한국선교호주 찰스스터트대학교에서 출간

2016 91. 일신기독병원과 경기대학교박물관 주관 호주 매씨 가족의 한 국소풍 이야기사진전시회 개최

2017 왕길지의 한국선교고신대 이상규 교수 출간

2017 호주장로교 한국선교 역사 1889-1941’ 영등포산업선교회 60주년 기념 으로 데이비스선교회와 공동으로 편역 출간

커와 앤더슨 공저, 호주장로교 한국선교역사 1889-1941, 동연, 2017, 273-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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