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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12일 월요일

울도로 간 호주선교사 제임스 맥켄지


울도로 간 호주 선교사 제임스 맥켄지



지난 523일 울릉도선교기념관 기공 감사예배가 울릉도 (옛 이름은 울도)에 소재한 도동제일교회에서 열렸다. 1909년 울릉도에 기독교가 전파된 지 100년이 지나면서예장 통합 총회는 울릉도(독도)선교100주년 기념관 건축위원회를 임명하여 기념관을 건립하기로 한 것이다.

이번 기공 감사예배에는 총회와 노회 관계자 70여명이 참석하여 울릉도에 복음이 전하여져 교회가 설립된 100주년을 감사하고기념관을 통하여 미래의 복음 전도와 성장을 기도하고 다짐하는 시간이었다이 행사에는 울릉도 교회 관계자들은 물론 울릉도군 정부관계자들도 함께 참석하여 기쁨을 나누었다.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이 행사 중 호주선교사 제임스 노블 맥켄지(James Noble Mackenzie, 1865-1956) (한국명매견시, 梅見施목사가 언급되었다는 것이다이번에 필자는 신비의 섬 울릉도를 처음 방문하면서 맥켄지 선교사 부부가 그 옛날 이곳을 방문하였었다는 기억을 가지고 왔지만 막상 그의 이름이 언급되자 필자의 마음속에 그 관심이 증폭되었다.

그가 첫 방문할 당시의 1910년 울릉도는 일제의 핍박 하에 있었고 그곳 한국인들은 정말 비참하도록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호주선교사 맥켄지의 발자취, 242)고 증언하고 있는데 어떤 동기로 그곳까지 갔을까지금은 세 시간이면 오는 뱃길이지만 당시는 이틀에서 나흘 걸렸다는 거친 바닷길인데 어떤 열정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을까그가 특별히 좋아했다던 울릉도 지역 감독 일은 어떤 사역이었을까그의 부산지역 나환자 사역은 유명한데울릉도 행적은 왜 잘 알려져 있지 않을까?  이 글은 이런 질문에 대한 일차적인 대답이며앞으로 더 연구되어야 할 과제를 제시함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1.    호주선교사는 왜 울릉도에 갔을까

제임스 맥켄지 선교사의 울릉도 방문은 그가 한국에 도착한 첫 해인 1910년부터 시작되었다당시 울릉도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경상노회 소속이었으며맥켄지 선교사도 부산 경남지방에서 사역을 시작하므로 경상노회와 긴밀한 협조 하에 있었다그는 울릉도를 순행한 첫 외국인 선교사였으며, 10여 년 후에야 미국선교사들도 그 뒤를 잇고 있다.

그가 울릉도를 방문하기 한 해전인 1909년 울릉도에 첫 교회들이 이미 설립되어 있었다나리교회장흥교회저동교회 그리고 도동교회 등이 그것이다강원도에서 온 김병두라는 교인의 영향으로 한 해에 네 쌍둥이 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경북교회사, 56). 맥켄지 선교사는 이 네 교회의 초기 발전에 큰 견인차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울릉도 기독교 90년사를 보면 저동교회장흥동교회 그리고 현포교회의 창립자를 맥켄지 선교사로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울릉도기독교90년사, 66-67). 또한 한국인 창설자들의 이름도 함께 기록되어 있어 창립자 맥켄지의 정확한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먼저 울릉도의 첫 교회인 나리교회 (현 천부제일교회)부터 보자이 교회는 1909 3월 나리동에 거주하던 함영수송광수 등이 하나님을 믿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1910년 송광수가 경북 경산에서 매견시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후 나리동 176번지에 정착하면서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당시에는 나리동교회로 불렀다울릉도에서 처음 성례식을 베푼 매견시 목사는 이 후 경상노회의 파송을 받아 울릉도의 순행목사(巡行牧師)로 시무한다” (이연경, ‘100년을 하루같이 울릉도 복음의 등대가 되어 온 세 교회’, 주간기독교, 2009).
이 내용을 보면 맥켄지 선교사는 나리교회의 창시자 송광수에게 세례를 베푼 것이 인연이 되어 울릉도를 방문하였던 것으로 보이며그 이후 경상노회는 매견시 선교사를 울릉도 순행목사로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

저동교회(현 울릉동광교회)에서 맥켄지 선교사는 변선욱이라는 한 젊은 인재를 발굴하여 양성하였는데, 1919년 그는 저동교회의 초대 교역자가 된다다음의 기록이 그것을 증언하고 있다. “1915년경 경남선교사 매견시 목사가 울릉도 교회의 순행 목사로 파송되어 울릉도중(島中) 5개처 교회(장흥도동저동천부현포)를 순행할 때 저동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고 영수와 집사를 임명하게 된다이때 변조사의 아버지와 온 가족이 처음으로 예수를 영접하였고 집회 기간 중에 매견시 목사는 청년 변선욱의 인물이 매우 영민함 보고 부친에게 장남을 교역자로 양육할 것을 권유하여 승낙 받은 뒤 울릉도 순행을 마치고 육지로 떠날 때 함께 동행하여 대구동산성경학원(현 영남신학대학교 전신)에 입학할 수 있도록 추천하였다” (김기백, ‘저동교회 최초 교역자 변선욱 조사’, 울릉동광교회 홈페이지, 2009).

또한 울릉도 북면에 평리교회(현 현포교회)가 설립되었을 때 맥켄지 선교사는 1910년 제직을 임명하는데 다음이 그 기록이다. “그 때에 경남 선교사 매견시가 섬에 들어 와 교회 직원을 선택하니 정윤식은 영수로박춘목은 집사로 임명되었다” (경북교회사, 64).

또한 도동교회(현 도동제일교회)에서의 사역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자기가옥을 봉헌하여 설립했던 도동교회의 김성서가 1915년 모든 교인을 데리고 안식교로 넘어가자 교회를 다시 찾고자 관청(울도청)을 방문하여 문부를 확인하니 이미 교회는 안식교로 넘어가고 김성서의 명의로 되어 있어 권리회복을 하지 못하고 교인들이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김기백, 2009).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초기 울릉도 교회사에 있어서 맥켄지 선교사의 역할은 실로 다양하게 드러나고 있다.

2.    바누아투에서 한국을 위해 헌금하다

잘 알려진 대로 맥켄지 선교사는 한국으로 오기 전 남태평양의 바누아투 (Vanuatu, 옛 이름뉴헤브리즈)의 산토 섬에서 선교사 생활을 하였었다그곳에서 그는 15년 동안 성경번역과 찬송가 등을 만들며 원주민 사역을 하였는데 흑수열병으로 아내를 잃고선교본부의 권유로 1909년 호주로 귀국한다그리고 그는 이듬해 전혀 다른 기후와 언어의 한국으로 자원하여 입국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파송하는 호주빅토리아장로교회의 재정지원이 어렵자 산토 섬 노구구(Nogugu) 교인들이 매켄지의 사역을 위하여 헌금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자 장로들은 회의를 열고 한국에서의 그의 사역을 지원하기 위해 만장일치로 200파운드 –2년 간 칡을 팔아 얻은 돈-을 주었다고 헬렌 맥켄지는 그의 책에 쓰고 있다 (호주선교사 맥켄지의 발자취, 169).

또한 다른 글에서도 이 사실이 잘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산토의 사람들에게 눈물로 안녕을 고했을 때 그들은 그에게 그의 새 사역을 위하여 200파운드를 주었다이 돈은 활과 화살 그리고 다른 물건을 2년간 팔아서 모은 것으로가장 관대한 선물이었다” (Vanuatu Victory, 158).

산토 섬의 가난한 부족사람들이 활과 칡 등을 팔아 모은 큰 돈을 선뜻 한국선교를 위하여 헌금을 했다는 사실은 실로 놀랍고맥켄지 선교사에 대한 그들의 애정과 신뢰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에서 파송되어 바누아투에서 사역하는 원천희 선교사는 몇 년 전에 산 토 섬의 노구구를 방문하였었다당시 그가 이곳을 방문하였을 때 그 지역인들에게 듣기로 산토에서 선교했던 호주선교사(맥켄지를 지칭)가 한국에 가서 복음을 씨앗을 뿌렸고교회를 세웠으며그리고 지금은 그 열매로 한국 선교사(원 선교사 지칭)가 노구구를 방문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아마 이들에게는 큰 감동이며 역사적인 순간이었던 것 같았다 전하고 있다그리고 이 보고서는 더 놀라운 보고를 덧붙이고 있다당시 맥켄지 선교사는 이 헌금으로 울릉도에 교회를 지었습니다” (원천희 선교사 보고서,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다’, 2)는 것이다.
이 보고서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아 보고자 필자는 여러 관계기관에 연락을 하며 산토 섬 부족인들이 헌금한 돈이 울릉도의 교회를 건축하는데 쓰여졌는지어떤 교회에 쓰여졌는지 알아보려 했지만 아직까지 그 내용을 뒤 바침 할 자료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 내용이 사실이던 아니던 한국선교를 위하여 노구구 교인들은 헌금을 하였고 그 헌금으로 매켄지 선교사가 사역을 하면서 울릉도까지 갔다면 울릉도교회 역사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또한 관계된 울릉도교회들과 헌금한 산토 섬의 노구구에 있는 교회들이 서로 자매관계를 맺어 협력하는 기회가 있으면 유익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후에 맥켄지 선교사는 안식년을 맞이하여 바누아투를 다시 방문하게 된다그 곳1917년 총회에서 한국에서의 선교활동을 보고 했음은 물론이요이 보고를 통하여 노구구의 교인들도 본인들이 헌금한 돈이 한국에서 어떻게 귀하게 쓰여졌는지 들었을 것이다뿐만 아니라 총회도 도전을 받고 있는데 회의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져 있다. “맥켄지 선교보고를 듣고 나서 (중략더 강력한 사역을 위해서 재정적 지원을 하면서 뉴헤브리즈교회에서 더 많은 토착인 장로나 목사들이 발굴되어야 하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호주선교사 맥켄지의 발자취, 253).

사실 예장 통합 총회와 바누아투장로교회 총회는 2010년 바누아투장로교회 총회사무실이 있는 수도인 빌라(Villa)에서 자매결연을 맺었다당시 산토 섬의 노구구 교인들은 이 소식을 듣고 두 가지를 요청했었다양 교단 자매교단 결연식 행사를 노구구에서 하자는 것과노구구에 교회를 건축 중에 있는데 맥켄지 목사 기념교회로 지원을 부탁하였다그러나 당시의 사정으로 이 두 가지는 아쉽게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3.    초기 울릉도교회 설립에 견인차 역할을 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맥켄지 선교사는 그의 자서전에 울릉도를 순회하며 선교한 사실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다그러나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맥켄지 선교사는 울릉도를 최소한 일곱 번 방문하였다. 1910년 처음 방문한 이래로 1912년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울도 저동교회를 비롯한 6교회를 감리교회가 경남장로교회에 허락함으로 같은 선교사 매견시가 울릉도에 들어 와 장로회 규례대로 본 교회 주신조를 영수로도봉기를 집사로 임명하였다” (경북교회사, 81).

그 다음 해인 1913년에는 울도 장흥교회에 경남 선교사 매견시와 조사 이용하가 순회 차 섬에 와 직원을 선정하니”(경북교회사, 88) 라고 기록되어 있고호주에서 발행되던 선교소식지에는 맥켄지 선교사의 당시 울릉도 사역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He spent the Saturday talking with people about the organization of the church and conducting examinations for baptism and the catechumenate. He found nine men ready for baptism and they were baptized at the service next day, but the women had had no woman to teach them and so were not ready to receive baptism.” (The Messenger, April 4, 1913, 211)

그는 토요일에 교회의 조직에 관하여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였고 세례를 위하여 교리문답을 실시하였다아홉 명이 세례 받을 준비가 되었고그들은 다음날 예배 시 세례를 받았다그러나 여성들은 그들을 가르칠 수 있는 여성이 없었고그래서 준비가 안되어 세례를 받지 못하였다.”

1914년에는 울릉도에 흉년이 들어 호주선교부가 돕기로 하였고맥켄지 선교사는 신필수 영수를 울릉도 구제위원으로 보내어 양곡과 구제품을 교회를 통해서 나눈 기록이 신필수 자서전’ (뉴 워드사, 2004.11. 143-149)” 있다 (부산복음의 증인들, 264). 호주선교부도 맥켄지 선교사를 통하여 울릉도의 구제사업에 동참하고 있는 모습이다.
1915년의 방문 내용은 위에 이미 언급하였고, 1916년에는 경남선교사 매견시가 순행하여 함근복이 영수로 장호범이 집사로 시무하고 열심히 전도하여 30여명의 교인이 되었다고 나리교회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경북교회사, 112). 1917년에는 맥켄지 선교사가 울릉도 장흥교회에서 송원수를 영수로 임명하고 있다 (경북교회사, 120).

그 중 특별한 것은 1915년 아내 메리 켈리 맥켄지 선교사와 함께 동행한 것이다울릉도 여성들의 간청에 의하여 메리 선교사도 복음을 갈망하고 있는 울릉도 여성들과 소녀들을 가르치고 믿음을 나누기 위해서 갔다고 설명하고 있다 (호주선교사 맥켄지의 발자취, 242). 그 당시의 문화 속에 남자 선교사가 방문하여 교육할 수 없었던 여성들을 위하여 메리 선교사도 울릉도 선교에 동참하고 있다이것이 놀랍지 않은 것은 메리 선교사는 진주와 부산 지역에서 여성과 백정들을 위한 선교를 열정적으로 해 왔기 때문이다.

이 방문의 귀한 사진 두 장이 남아있는데 하나는 관모봉이 멀리 보이는 도동항에서 찍은 사진이며 또 하나는 짐꾼을 앞세운 메리 선교사의 사진이다 (김기백, ‘교회초기 울릉도로 찾아 왔던 매견시 목사의 흔적들’, 울릉동광교회 홈페이지, 2010). 메리 선교사는 한복을 입었고 임신으로 인하여 배가 나와 있으며그 해 11 25일 출산하여 얻은 딸이 헬렌 맥켄지의 동생 캐서린 맥켄지일 것이다이 둘은 후에 부산일신병원의 설립자가 된다.

맥켄지 선교사의 마지막 울릉도 방문은 1927년 원산에 있는 미국선교사 휴양관에 가는 길에 들렸으며 본인이 관할하였던 지역의 교회들을 마지막으로 둘러보며 현포교회와 남서동교회에서 세례를 베푼 내용이 교적부에 기록되어 있음을 울릉도기독교100년사를 쓴 김기백 장로는 증언하고 있다.

이상의 기록들에서 맥켄지 선교사의 울릉도 사역 전체를 전망해 볼 수 있는데 부흥집회 인도세례와 성만찬 교육과 집례제직임명교회조직감독심방교회 재산권 보호목회자 발굴과 교육구제이단과의 싸움 등으로 요약할 수 있겠고이러한 그의 사역이 초기 울릉도 개척교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목회적 돌봄과 힘이 되었을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맥켄지 선교사는 자기가 관할하는 지역을 순행할 때는 자신의 방문이 한국인에게 누가될까 하여 음식과 음료를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거친 파도를 넘어 울릉도에 다니면서 입었던 그의 옷가지고 다녔던 음식또한 이웃들과 나누었던 대화 등 모든 것이 궁금하기만 하다.
한국에서 28년을 봉사하고 귀국한 그는 1941년 호주빅토리아주 총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호주교회 속에 선교열정을 불러 일으키며한국선교를 계속 지원하였다.

현재 추진되고 있는 울릉도(독도)선교100주년 기념관에 여러 가지 내용이 담기겠지만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선교 방문한 제임스와 메리 맥켄지 선교사 부부를 기억하고 그의 사역을 기리는 일도 꼭 포함되어야 하겠다그의 기념비를 세우거나 기념동판을 개막하는 일은 후세대에게 선교의 비젼과 꿈을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한국과 호주의 선교관계를 더욱 튼튼히 하는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도서>

경북교회사박문영 편사김병희 편역코람데오, 2004.
맥켄지가의 딸들일신기독병원 총동문회도서출판 글꼴, 2012.
부산 복음의 증인들부산노회역사위원회부산노회, 2010.
울릉도 기독교 90년사울릉도기독교구십년사 편찬위원회포항, 1999.
울릉도 기독교 100년사김기백, 2012.
제임스 노블 맥켄지 목사 자서전제임스 맥켄지지응업 역부산진교회, 2004.
호주선교사 맥켄지의 발자취헬렌 맥켄지김영동 역기독교서회, 2006.
Victory Vanuatu, Helen Gillian, 1998.

Copy Right 양명득

한국교회와 호주교회의 선교정책과 과제


예장 총회와 호주연합교회 총회의 선교정책과 과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는 해외의 많은 교단과 자매결연을 소중하게 맺어 오고 있다. 그 중에서도 미국장로교회, 호주연합교회, 그리고 캐나다장로교회는 본 교단의 시작 때부터 함께 동역하며 총회를 세워 왔다. 특히 호주장로교회 파송 선교사 겔슨 엥겔 목사는 본 교단 총회 제 2대 총회장으로 섬겼고, 그 후로 많은 호주 선교사들이 뒤를 이어 총회의 사역을 협력하였고, 현재까지도 본 총회에 선교동역자가 파송되어 있다.

이 글은 지난 8년 동안 본인이 예장 총회 사무총장으로 재직하며 정책을 입안하며 실행해 온 입장에서 호주연합교회와의 관계를 조명하고 앞으로의 과제를 간략하게 나마 제시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본 총회는 호주빅토리아장로교에서 첫 선교사를 파송한 1889년부터 120여년 동안 관계를 맺어 왔다. 예장 통합 이 외에 호주연합교회는 한국기독교장로회와도 교단 시작부터 관계를 맺어 오다가 중간에 소원해지지만 1985년부터 다시 공식화되었다. 기독교대한감리회와는 1988년 서울에서 열린 감리교대회에서 공식협정을 맺었다.

호주빅토리아장로교가 1889년 선교사들을 한국에 파송하므로 부터 시작된 한국교회와의 관계가 1901년 호주전국장로교회가 조직되면서 이어졌고, 그리고 그 맥이 1977년 탄생한 호주연합교회를 통해 그 역사와 전통이 지금까지 전해 흐르고 있는 것이다.

호주연합교회의 한국선교는 이렇게 위의 세 교단과의 협력을 통해 선교사 파송, 목회자 교환, 목회자학력 상호인정, 선교활동지원 등을 골자로 하는 자매선교협력이었는데 그 내용이 현재까지 선교정책과 내용의 변화 속에 계속되고 있다.

그 변화의 주요 내용 중에 초기 호주교회가 한국교회에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관계에서, 현재 상호협력적으로 주고 받는 관계로까지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다음의 총회자료가 그 내용을 잘 요약하고 있다.
한국전쟁 전 까지 호주에서 한국으로 일방적으로 주는 선교에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평등하고 상호협력적인 관계의 파트너 쉽으로 바뀐 것이다.” (Mission Review, April/June 1989, 12)

또한 변조은 목사는 한 책에 호주와 한국교회 선교협정에 관해서, 특히 한국에서 호주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교협정은 어디까지나 상호간의 협조를 의미한다. 따라서 현재 호주사회에서 억눌린자의 상징인 원주민의 해방에 이바지할 선교인사를 초청하려 하고 있으며,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일반 호주인 선교에 대해서도 협력 가능성을 연구하고 있다.” (변조은, 변두리에 계신 예수에게로, 132)



1960-70년 대부터 호주에서 본 교단으로 파송된 선교사들은 그 전에 파송된 선교사들에 비해 그 역할이 변화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물론 한국의 정치사회적 상황에 기인한 것으로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들이 전통적으로 해 왔던 학교나 병원에서의 귀한 사역도 계속 되었지만 독재정권 시절의 한국 사회는 호주선교사들을 새로운 내용의 선교로 끌어 들였다. 1960년과 1964년 각각 입국한 죤 브라운 목사와 리처드 우튼 목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도시산업선교를 통한 민주화와 인권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또한 1980-90년 대에 들어서는 호주 젊은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파송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은 영등포산업선교회, 여성기독단체, 그리고 이주노동자를 위한 사역에 참여하게 된다. 이들은 인권이나 민주화 운동 그리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다가 감옥에 갇히거나, 추방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한국에서 결혼하기도 하였고, 한국 아이를 입양하기도 하였고, 호주로 돌아 가서는 한인교회를 창립하거나 여성들을 위해 계속하여 일을 하기도 하였다. 변조은 목사는 그의 책 은혜의 증인들에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호주에서 한국으로 보낸 선교사들은 호주교회에서 가장 신앙이 깊고 유능한 사람들 가운데 뽑힌 사람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변조은, 130).

또한 이상규 교수는 호주선교사들의 신학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시 한국교회의 신학적 전통이라 볼 수 있는 보수적 장로교 신학, 혹은 개혁주의 특성이 있는 정통주의 신학을 수용하고 이 입장에 서 있는 복음주의자들이었고, 한국교회에서 신학적 문제를 야기한 일이 없었다” (크리스찬 리뷰, 1991 11, 20).

이 당시 호주선교사들의 또 한가지 영향은 이들이 한국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호주로 돌아 가서는 호주연합교회 안에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위하여 계속하여 홍보하였고, 한국정부의 탄압을 받던 한국 목사들을 호주로 초청하여 보호하면서 재충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하였다. 예장통합의 인명진 목사, 감리교의 김동완 목사, 기장의 권호경 목사 김성재 목사 등이 그들이고, 이들은 후에 각 교단과 한국교회협의회의 지도자들이 된다.

뿐만 아니라 호주에 세워진 한인교회에 한국의 엘리트 목사들을 청빙하거나 유학하기 시작하였는데 김이태 목사, 조성기 목사, 홍길복 목사, 지태영 목사, 주현신 목사, 정병준 목사, 변창배 목사 등이 호주선교사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호주교회의 부흥과 다문화교회에 공헌을 하였고, 또한 한국과 호주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게 된다. 이들 중 몇 명은 현재 예장의 교회나 총회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교회에서 선교사의 이름을 가지고 호주로 가는 경우가 점차로 늘어 나고 있는데, 교단간의 공식 협의 하에 이루어지기 보다 개 교회나, 단체의 파송으로 호주에 입국하여 대부분 한인교회에서 목회하고 일부 원주민선교에 참여하고 있다. 특히 원주민선교에 앞장서고 있는 시드니의 천보영 목사나 브리즈번의 서정권 목사 등은 본 교단에서 간 선교사들이다.

예장 총회는 해외로 이주해 목회하는 목회자들은 현지 파트너 교회에 속하여 목회하도록 격려하고 있고, 이중 교적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해외에 있는 예장 통합 소속 선교사들과 선교 재산 등을 보호하기 위하여 해외 몇 개 지역에 선교위원회를 창설하기로 총회는 결정하고 현재 그 실무작업을 준비 중에 있다.

호주의 한인 디아스포라교회는 양국 선교관계에 있어서 점차로 중요한 부분으로 떠 오르고 있는데, 본 교단 출신 목회자들은 대략 3가지 유형으로 교단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호주연합교회 한인노회, 해외한인장로교회 호주노회, 그리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교회 등이다. 이들 한인교회들은 서로 디아스포라 네트워크를 이루어 협력하면서, 호주와 한국 양 교단의 다리역할을 하고 있다. 호주교회에는 한국교회의 전도와 기도 열정과 봉사를 소개하고 있고, 한국교회에는 합리적인 목회 문화와 다문화 선교를 소개하며 공헌하고 있다. 앞으로 양 교단 총회간의 선교협력에도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여 3자의 협력 구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

1988년 한호선교 100주년에는한호선교 100주년 기념행사가 부산경남지역의 노회중심으로 한국에 열려 호주대표들이 방문하였으며, 호주에서도 한국교회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예배 등 여러 의미있는 행사를 가지기도 하였다. 또한 한호선교 110주년인 1999 1031일에는 멜본한인교회에서 감사예배와 선교기념판 봉헌식이 있었다. 또한 2005년에는 한호선교 116주년으로 호주선교사 순직 기념비가 한호교회 교단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마산시에 있는 창신대학 제2캠퍼스에 세워지기도 하였다. 현재 호주선교사들의 유품과 기념비등이 한국의 부산노회, 부산진교회, 수안교회, 소정교회, 마산 문창교회, 창신대학 등에 소장되어 있다.

한호선교 120년을 맞은 2009년에도 한국과 호주에서 각각 의미있는 행사들이 성대히 진행되었다. 호주에서는 멜본과 시드니에서 120주년 기념예배가 열렸었고, 한국에서는 총회 기간 중에 공식행사로 기념예배가 진행되었다. 특히 새 시대에 맞는 한호선교120주년 기념 선교선언문을 함께 작성하여 각 교단의 대표가 낭독하므로 긴밀한 관계를 재 확인하였고, 앞으로의 공동선교를 향한 큰 틀을 제시하였다.

특히 이 당시 한호선교 120주년 기념도서로 변조은 목사의 은혜의 증인들이 출판되어 그동안 파송되었던 선교사들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고, 양명득 목사는 호주와 한국: 120년의 역사를 출판하여 총회에 소개하였다또한 선교선언문에서 약속한 것처럼 호주연합교회 총회는 예장 총회에 127번째 선교동역자 양명득 목사를 2010년에 파송하였는바 양 교단이 합의한 선교활동 중 2013년에 한국 부산에서 열릴 세계교회협의회 제 10차 총회 준비를 협력하게 하는 새로운 에큐메니칼 공동 협력을 이루도록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양 교단과의 선교협력에 있어서 새롭고도 놀라운 변화가 조용히 시작되었다. 북한에 나선 어린이집이라는 보육원을 우리 총회와 호주연합교회 총회가 2006 5월 공동으로 설립 개원하여, 협력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호주선교사의 도움으로 세워진 멜본한인교회가 시작하여 호주연합교회와 본 교단이 함께 참여하게 되었고, 호주연합교회 세계선교부는 2쌍의 선교사 부부를 파송하였다. 현재 북한선교는 북방선교위원회를 통하여 공동 운영하고 있다. 호주에서 일방적으로 한국교회를 지원하던 모델에서 벗어나 서로 협력하여 제3의 지역에 디아코니아 사역을 하는 모델로 발전한 것이다.

2012년 초에는 총회 창립100주년 기념으로 총회 직원수련회를 호주에서 개최하였다. 이것은 전무한 행사로 직원 50명이 빅토리아 주총회, 나라나 원주민센터, 전국총회, 한인교회 등을 방문하면서 우애를 다졌으며, 한호선교 심포지엄을 통하여 선교 비젼을 공유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호주연합교회 제13차 총회에 본 총회에서 30여명의 대표가 참석하였으며, 모든 총대 앞에서 '한국 선교의 밤'을 개최하여 호주와 한국과의 선교관계를 재 확인하였다.

호주연합교회 총회 선교부 책임을 맡아 선교의 여러 방면에 기초를 놓았던 변조은 목사는 연합교회의 선교와 신학을 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선교의 과제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 선교의 목적이나 선교활동에 대한 개 교회의 결정 권리
- 선교와 선교전략 간의 대화의 필요성
- 에큐메니칼적인 관계와 협력하에 호주 내와 해외 자매교회의 선교 이행
- 해외로 파송 할 뿐 아니라 파송을 받기도 하는 상호 주고 받는 관계
- 선교 식민지 시절 선택적으로 맺은 파트너관계에서 좀 더 다양하고 새로운 파트너 교회 관계
- 주로 장로교회들과의 관계에서 감리교회들과의 관계 발전
- 전도나 억눌린자 지원 등 선교의 우선 항상 모색
(Emilsen & Emilsen ed, Making Twenty Years, 1997, 61-62).
이런 내용들은 현재도 유효한 것으로 앞으로 선교관계를 맺어 나가는데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또한 인적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져야 하는데 목회자 방문을 포함하여 양 교단 소속의 신학대학들간의 교류, 평신도지도자들의 방문, 청년과 후세들의 상호만남 등이다. 이번에 본 교단 총회 직원 50명이 호주연합교회 총회 등에서 연수하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서 본 교단의 입장에서 보면 호주는 남태평양 선교로 나가는 중요한 길목에 있다. 현재 본 총회와 뉴질랜드장로교회 총회가 협력하여 뉴질랜드의 아시아교회 담당 선교사 한경균 목사를 파송하여, 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한국의 선교 연결고리를 만들고 있고 바누아투장로교회와도 협력하고 있다. 장차 양 교단 총회는 남태평양 지역의 전도와 선교를 위하여 공동 협력해야 하는 큰 과제를 안고 있다. 마지막으로 2009년 한호선교의 장차 방향을 제시한 한호선교 120주년 기념 선교선언문전문을 첨부한다.


한호선교 120주년 기념 선교선언문
Mission Declaration of the 120 year of Australian Mission in Korea

1889 10 2일에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죠셉 헨리 데이비스 목사(Rev. Joseph Henry Davies, 1856-1890)가 조선에 도착하면서 시작된 호주교회의 한국선교 120주년을 기념하며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와 호주연합교회 총회는 호주의 한인교회들과 함께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The Assemblies of the PCK and the UCA, together with Korean churches in Australia, celebrate the 120 year of Australian mission in Korea which began with the arrival of the Reverend Joseph Henry Davies(1856-1890) of the Victorian Presbyterian Church on the second of October, 1889,

양 교단은 그 동안 126명의 호주선교사들이 한국을 찾아와 헌신하며 복음을 위하여 봉사할 수 있도록 이끄신 성 삼위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한다. 지난 한호선교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호주의 선교사들로 하여금 한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한국 사회의 발전을 위해 헌신케 하심으로써 한국교회가 풍성한 선교적 결실을 거두게 하심을 확인 하면서 오직 하나님께만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Both Assemblies express thanks to the grace of God for the 126 missionaries who came to Korea for their dedication to the Gospel. Through this history of mission, God has shown a continuing mercy and love to the Korean people: we bear witness to the birth and growth of the churches in Korea. For these things we give glory only to God.

이에 양 교단은 지난 120년간의 선교협력 관계를 공동의 유산으로 삼아 더욱 발전적인 선교협력을 위해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At this moment of time, we combine to make this declaration for the more developing cooperation.
1. 선교유산의 계승: 양 교단은 호주선교사들의 선교정신과 신앙적 유산을 존중하며 이를 계승 발전시켜서 향후 온 땅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를 위하여 함께 협력할 것을 선언한다.
1. Succession of Mission Legacy: Both churches respect the mission, ethos and legacy of the Australian missionaries and seek to work together for the sake of the mission of God.

2. 복음증거: 양 교단은 선교에 있어서 복음 증거 사역의 중요성을 확인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28: 18-20)에 순종하여 하나님 나라 선교에 함께 헌신할 것을 선언한다.
2. Witness to the Gospel: Both churches confirm the importance of witnessing to the Gospel and declare our dedication to proclaim the Kingdom of God according to the Great Commission (Matt 28:18-20) of Jesus Christ.

3. 에큐메니칼 정신: 양 교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청하신 바 대로 교회가 하나되어 세상을 섬길 것 (17: 21)을 선언한다.
3. Ecumenical Spirit: Both churches are determined to serve the world as our Lord Christ requested as one church (John 17:21).

4. 통전적 선교: 양 교단은 호주 선교사들이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을 위한 선교에 충실해 왔던 것에 주목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섬기는 일(4: 18-19)에 함께 헌신할 것을 선언한다.
4. The Wholeness of Mission: Both churches seek to learn from the work of Australian missionaries on Justice, Peace, and Integrity of Creation as well as seek to imitate the Christ who served the poor and the marginalized (Luke 4:18-19).

5. 디아스포라 선교: 양 교단은 한국 내의 디아스포라와 호주 사회에 정착한 한인들을 포함한 다른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위하여 다문화적 신앙공동체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하며 모든 민족을 위한 하나님 나라를 증언할 것을 선언한다( 7:9).
5. The Life of Mission in Diaspora: Both churches declare their intention to serve the communities living in diaspora in both Australia and Korea for the sake of developing a cross-cultural community of faith and witness to the multicultural kingdom of God (Rev 7:9).

6. 평화와 통일의 실현: 양 교단은 분단된 한반도의 평화통일이 세계평화(5:9)를 위하여 매우 중요한 문제임을 공동으로 인식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북한 선교에 협력할 것을 선언한다.
6. Peace and Reunification: Both churches look towards the peace and reunification of South and North Korea and acknowledge the importance of such for world peace (Matt 5:9); both churches are committed to working together for mission in North Korea to achieve the reconciliation.

7. 원주민선교: 양 교단은 호주 원주민의 지위향상을 위한 호주연합교회의 관심과 노력을 지지함을 선언한다.
7. Mission with Aboriginal people: Both churches support the work of UCA with Aboriginal people and its recognition of the place and life of indigenous peoples in Australia.

8. 이주노동자 선교: 양 교단은 오늘날 세계적인 선교 과제인 이주 노동자의 권익보호 (22: 21, 25: 35)를 위하여 협력할 것을 선언한다.
8. Mission to Migrant workers: Both churches work together for the human rights and welfare of migrant laborers (Ex 22:21, Matt 25:35) throughout the world.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호주연합교회 총회
총회장 지용수목사                                            총회장 알리스터 매크레이 목사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Uniting Church in Australia
Rev. Chy Yong Soo                                                    Rev. Alistair Macrae
Moderator                                                              President                                                                         

September 23, 2009


참고: '한호선교 120년의 발자취' DVD 동영상, 예장총회, 2012.




2012년 11월 11일 일요일

주한 호주선교회 약사 - 1977부터 현재


주한 호주선교회 약사 - 1977년부터 현재


죤 브라운 목사 (호주파송 전 한국선교사)


1977 6 22 호주장로교회는 호주감리교회와 호주회중교회와 연합하여 호주연합교회를 구성하였다. 호주장로교회 교인 가운데서 일이 연합교회에 소속하지 않기로 하였으나 호주장로교회가 경영하던 모든 선교사업이 연합교회에 소속하게 되었다.

이듬 해인 1978 호주연합교회 선교부 위원들이 호주장로교회 선교부에서 이어받은 책임을 이해할 있도록 필자가 보고서를 작성하였는데 주한 호주선교회의 역사를 요약하며 연합교회가 앞으로 담당하게 계속되는 책임을 설명 주었다.

보고서에 필자는 이렇게 썼다: “1950년대 이전에 대한예수교 장로교회와 협력해 3 선교회 미국연합장로교회 선교회,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회, 그리고 호주장로교회 선교회가 그들이 각각 맡은 지방에서 지방 노회와 협의해 가면서 선교 정책을 결정하였다.

그러다가 1960년대부터 예장 총회가 솔선하여 총회 대표들과 3 선교본부 대표와 선교회 대표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선교정책이 점점 단일화 되도록 협의하였다. 선교정책 단일화 협의회를 1963 년에 소집하였다. 때부터 4 교회 대표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선교 정책을 협의하였다. 정기적 회의 내용에 응하여 예장 총회가 제도를 만들어 주한 3 해외 선교회 활동을 점점 주관하고 단일화 하였다. 따라서 이제 총회가 선교부에서 파송하는 선교동역자를 한국 어느 지역이든 파견할 있었다.”

따라서 1977년에는 호주연합교회에서 한국에 파송하는 선교사들이 대한예수교장로교 총회의 세계선교 협력 위원회의 초청에 응답하여 파견되었다. 위원회가 선교사의 활동을 감독하고 해외에서부터 받는 모든 선교 자금을 할당하였지만 원래의 내용을 별로 수정하지는 않았다. 때에 선교본부가 그들의 선교사 가운데서 사람을 선교본부 대표로 지명하였고, 호주연합교회 선교부의 주한 대표는 이태선 목사였다.

1977 당시 호주연합교회에서 한국선교를 위하여 할당하는 예산은 (선교사의 생활비 제외) 다음과 같다:
$5000 예장 세계선교위원회 결의에 의하여 소규모 프로젝트에 할당하는 금액
$20,000 일신 기독 병원
$7000 양지 기술 학원
$8000 영등포 산업 선교
$11000 해외 신학생 대학원 장학금

1977 당시에 호주 선교동역자 12 명이 한국에서 사역 하고 있었다. 가운데 5 명이 일신기독병원에서 종사하고 있었으며, 노승배 목사와 부인이 울산 노회에 파견되며 파트타임으로 양지기술학원에서 사역하며, 라병도 씨가 영등포 산업선교회에서 일을 하고, 원성희 선생은 이화여대에서 성악을 가르치고, 이태선 목사는 대전에서 평신도 훈련하면서 총회 사무실에서 파트타임 근무하고, 나명애 선생은 전주에서 공동위생 교육에 종사하였다.

1980년부터 2000 까지 우리의 주요 관심은 선교사업 가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일신기독병원, 영등포산업선교, 신체 장애인 교육을 위해 경영하는 양지기술학원, 그리고 신학교육이다. 필자는 가지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하고 당시 선교정책을 세우는데 우리가 중요시 여겼던 영향들을 말씀을 드리겠다.

일신기독병원은 1952 년에 세워졌다. 때에 부산에서 많은 여성 피난민, 군인의 아내와 아이들이 부산에서 몹시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판잣집에서 살든지, 부산역 부근에서 살면서 해산을 하고 자녀를 먹이고 있었다. 매혜란 여사는 상당한 자격과 경험이 있는 산부인과 의사이며 매혜영 선생 역시 우수한 자격과 경험이 있는 조사 간호사 교육 선생이었다. 그들은 고생하는 여성들을 도와 있는 기술과 열정이 있었다. 그들은 여성과 그들의 아이를 돌봐 있는 병원을 설립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처음부터 환자들이 치료비를 능력이 있든지 없든지 환자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든 불교를 믿는 사람이든 불신자이든 간에 차별 없이 치료하기로 정책을 세웠다.

자매는 병원을 세우는데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그들은 기독교인으로 여성 해방을 추진하는 분들이었다. 그들이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여성을 위한 봉사할 기회를 가지게 같이 그들은 다른 여성들도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들이 지니고 있는 타고난 능력을 활용하여 남을 도울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하여 산부인과 의사와 조산간호사 교육을 시작하기로 했다. 일신기독병원 거의 60 동안 목적을 달성하려고 노력하였다. 호주 선교부도 가지 목적을 계속하여 추진하고 싶어 하였다.

호주연합교회 선교부는 영등포산업선교회를 계속하여 도와 주고 싶은 이유가 가지 있었다. 우택인 목사는 조지송 목사와 함께 1965 년부터 1968 까지 일을 하였다. 목사는 선교부에서 필자의 동역자로 인권 문제를 담당하였다. 한편으로 필자가 장신대에서 구약학을 가르치는 동안 인명진 목사는 3년간 내가 가르치던 학생 사람이었다. 우리는 때에 공부하던 과목 가운데 히브리 예언자의 신학을 공부하였다. 공부가 단순히 아모스, 호세아, 미가 등등의 신학사상과 그들이 주전 8세기에 당면한 상황에 대한 연구로 끝나지 않았다. 도리어 예언자들이 믿던 하나님을 따르려는 우리들이 영등포에서 장시간 동안 적은 보수로 말할 없는 형편으로 노동하는 근로자, 청계천의 빈민굴에서 사는 난민, 거제도에서 가족을 먹이려고 고생을 하는 농어민 등에게 무엇을 설교하며 어떻게 행해야 것인지 연구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래서 1977-78 년에 인명진 목사와 다른 분들이 구속되었을 때에, 우리는 영등포산업선교회와 구속된 분들을 도와 밖에 없었다. 걸음 나가서 우리는 군사정권 밑에서 신음하는 신도이든 불신자이든 이들을 위하여 발언해 밖에 없었다.

양지기술학원도 장애인 여러 사람이 울산 시에서 빈곤과 절망 속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우연히 발견하므로 시작한 사역이다. 노승배 목사와 그의 동역자인 신익균 장로는 소규모로 시작하여 장애인 명에게 자기의 생계를 유지할 있도록 기술을 가르치고 복음을 알려 주어 그들이 돈을 조금씩 벌어 자기의 생계를 유지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그들은 울산 시에서 실태 조사를 하여 이러한 장애자가 많이 숨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사업이 점점 성장하였다. 처음에 장로의 가정 집에서 시작하였고, 다음에 동래에서 선교사 주택으로 사용하던 집으로 옮겼다가 부산시 거제동에 학원을 세워 청년들에게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또한 그들이 각각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예수의 귀중한 형제자매로써 자신을 가지고 살게끔 전도하였다. 그러므로 양지 학원이 발전하였다. 졸업생들은 주로 개업을 하든지 기술자로 취직을 한다. 그들은 이제 보잘것없는 장애인이 아니고, 자긍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것이다.

필자는 1972 장신대에서 8년간 교수생활을 하다가 호주장로교회 선교부 총무직을 맡으려고 귀국할 호주 교회가 계속하여 한국 신학교육에 기여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호주장로교회 선교부가 장신대를 졸업한 유능한 학생 명이 해외에 가서 계속하여 공부할 있도록 장학금을 마련하였다. 예장 총회 장학금위원회가 학생들을 선출하고 장학금을 관리하였다. 그래서 동안 명의 학생이 스코트랜드, 독일, 이스라엘, 미국, 그리고 호주에서 공부를 하고 한국에 돌아가 신학 교육에 기여하였다.

호주 선교회가 이렇게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많은 힘을 썼을까? 필자는 가지 영향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주한 호주선교회에는 그러한 강력한 전통이 있었다. 벌써 1909년에 진주에 주둔하는 처녀 선교사 분이 백정들이 교회에 참여할 있도록 그들의 편에 서서 온갖 저항을 이기며 백정의 전국 해방을 시작하였다. 당시의 처녀 선교사 명은 매견시 목사의 부인이 되었다. 매견시 목사가 1910 년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때부터 29 동안 그는 상애원 나병환자 수용소 원장으로 봉사하였다. 그는 거의 삼십 동안 밤낮없이 경남의 가장 가난하며 소외된 사람을 돌보아 주었다. 매혜란 원장과 매혜영 선생은 어른의 딸이었다. 또한 선교회는 일정 시대에 버려진 여성과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도 학원을 세웠다. 그러므로 소외된 사람들을 특별히 돌보아 주는 오랜 전통이 선교회에 항상 있었다.

필자 자신이 받은 영향은 첫째로8 동안 거제도의 가난한 농어민을 상대하므로 받은 영향이 컸고, 그리고 장신대에서 근로자와 가난한 시민들을 상대하는 학생들에서 받은 영향이 컸다. 한편으로는 1972 년부터 나와 우리 선교부가 소유권을 찾으려고 애쓰는 호주 아보리지니 족의 편을 들어 옆에서 싸우므로 배운 점이 많았다.

나아가서 나에게 끼친 영향 가지가 있다. 나는 1980년부터 1990년대까지 WCC 전도부와 산업선교 위원회의 사람이었다. 동시에 나의 동역자였던 우택인 목사가 WCC 국제문제와 인권위원 사람이었다. 또한1977 까지 호주감리교회 선교부 총무로 계시던 하비 퍼킨스 목사는 CCA 직원 사람으로 아시아 각국에서 정의를 위해서 노력하는 단체들을 위하여 성경 공부자료를 만들어 분배하였다. 자료가 선교위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우리 선교부 전체가 인권을 위하여 노력하는 억눌리며 가난한 사람의 고통과 선교와 관련을 맺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전도를 시작하실 때에 사명을 이런 말씀으로 표명하셨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누구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의 기쁜 소식을 우선적으로 들어야 된다는 것이었다.

1980 – 1990년대에 호주연합교회 선교부는 일신기독병원과 양지기술학원과 영등포산업선교회를 계속하여 도와 주었다. 1977 후에 우리는 영등포 산업선교회의 요청에 응하여 청년들을 파송하여 같이 일하게 하였다. 청년들의 주요 역할은 보고서를 준비하여 노동자들의 사정과 산업선교회의 대책을 아시아 각국의 비슷한 단체나 교회 선교부로 보내는 역할이었다. 청년들이 영등포에서 일하므로 호주연합교회 교인들이 노동자들의 형편을 알게 되었고 그들을 위하여 계속하여 기도하였다.

군사정권 시절에 한국교회의 복음 증거를 위한 고통스러운 노력, 호주교회 젊은이들이 영등포에서의 사역, 1978 나병도 선교사가 강제 추방을 당한 사건, 그리고 인명진 목사, 홍길복 목사, 조성기 목사, 김이태 목사 등이 호주에서 목회하거나 공부하게 되었던 상황이 전체 호주연합교회, 선교부, 선교부가 결정하는 정책에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한편으로 당시 중요한 운동 가지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선교의 역방향 운동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인들이 호주로 이민하지 하게 하던 소위 백호주의 정책이 1972 드디어 폐지되었다. 그때부터 아시아 인들이 호주로 이민 있게 되었다. 당시부터 한국에서 이민자들이 명씩 오기 시작하였다. 1975 월남 전쟁이 끝나므로 월남에서 일하던 한국인 기술자 명이 호주에 들어왔다. 그래서 1973년과 1974 멜본과 시드니에 선교부와 관계를 가진 한인교회들이 세워졌다. 이후 10 동안 한인교회를 여러 곳에 설립하였다. 그러던 차에 선교부가 한국에서 가장 유능한 목사 가운데서 명을 초청하여 이런 한인교회에서 목회 하도록 하였다. 이외에 감리교, 기장, 합동, 고신 등의 교회들도 생겼다. 세워진 한인교회 가운데서 여러 교회가 호주연합교회에 소속하지만 한국의 교단에 속한 교회도 많다. 싸우스 웨일즈 주의 호주연합교회에 소속한 교회는 작년에 세운 한인노회에 대부분 속하여 있다. 다른 주에는 한인교회가 지방노회에 소속한다. 교회들이 호주연합교회에 소속하게 것은 우리 교단의 선교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진 자매결연의 한가지 열매이다.

호주에 한인교회를 설립한 하나의 열매는 한국에서 이민자들이나 그들의 자녀들이 호주연합교회의 목사가 되어 일반 호주인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들은 다문화적 교회로 되어가는 호주 연합교회를 크게 돕는다. 이런 목사들 가운데 양명득 목사가 한국으로 파송되어  한국 예장 총회에서 선교동역자로 협력하고 있다.

1977 호주연합교회의 설립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열매와 표현이었다. 한편으로 예수의 기도인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대한 호주교회의 응답이다. 작은 일보 하나였다. 그래서 호주연합교회의 영문이름을 글자대로 해석하면 호주에서 연합하는 교회라고 해야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한국교회를 위해서  “주님, 하나 되게 하옵소서하는 기도이다. 한국교회의 역사를 읽으면 여러 해외 선교회가 교회통합에 영향을 끼친 보다 교회 분열에 대한 역할을 것이 사실인 같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호주연합교회 선교부 총무로써 1978년에 미국연합장로교회, 미국남장로교회, 호주연합교회, 그리고 대한예수교장로교회 교회 대표들이 년에 번씩 모이는 보다 좀더 넓은 범위로 한국감리교회, 한국기독교장로회, 그리고 그들의 모든 해외 자매교회 대표들이 같이 모이기를 제안했으나, 적극적 응답이 없어 그냥 넘어갔다. 내가 너무 주제 없는 발언을 했는지 몰라도 제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 분열의 아픔과 예수의 간절한 기도가 언제나 나를 괴롭힌다.

호주연합교회는 북한 라선 시에서 시작된 사역에 예장 총회가 참여하여 크게 도와 주신데 대하여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장래에도 우리 교회가 사역에 계속하여 동참하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동북 아시아나 다른 곳에서도 우리가 협력하여 함께 선교할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주한 호주선교회의 120주년 행사 시에 조성기 사무총장과 총회가 제안하신 선교협력 안을 아주 고맙게 생각한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호주장로교회는 선교사인 데이비스 목사를 한국에   우연히 파견하게 되었다. 헨리 데이비스 선생이 성공회 교회에 가서 중국에 주둔하는 성공회 선교사가 부산에 가서 보니 선교를 시작할 만한 곳이라고 보고서를 썼다. 그래서 데이비스 선생이 성공회 선교부에 자기를 부산에 선교사로 파송해 달라고 하였지만 그들이 너무 까다로운 조건을 세워, 데이비스 선생이 장로교회에 요청해서 그들이 그에게 안수를 주고 파송하기로 하였다. 우리가 라선에서 사역을 시작하게 동기도 마찬가지로 우연히 이루어진 일인 같다. 우리는 라선 시장이 미국 그리스도교회 목사에게 발급한 초청장을 목사로부터 받았다. 성령께서 밖의 길로 인도하시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동참할 있도록 길을 여러 주신 분에게 감사를 드리고, 사역에 크게 이바지 하신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대표인 여러분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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