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호주선교회 약사 - 1977년부터 현재
죤 브라운 목사 (호주파송 전 한국선교사)
1977년 6월 22일 호주장로교회는 호주감리교회와 호주회중교회와 연합하여 호주연합교회를 구성하였다. 호주장로교회 교인 가운데서 약 삼 분 지 일이 연합교회에 소속하지 않기로 하였으나 호주장로교회가 경영하던 모든 선교사업이 연합교회에 소속하게 되었다.
그 이듬 해인 1978년 호주연합교회 선교부 위원들이 호주장로교회 선교부에서 이어받은 책임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필자가 보고서를 작성하였는데 주한 호주선교회의 역사를 요약하며 연합교회가 앞으로 담당하게 된 계속되는 책임을 설명 해 주었다.
그 보고서에 필자는 이렇게 썼다: “1950년대 이전에 대한예수교 장로교회와 협력해 온 3개 선교회 즉 미국연합장로교회 선교회,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회, 그리고 호주장로교회 선교회가 그들이 각각 맡은 지방에서 지방 노회와 협의해 가면서 선교 정책을 결정하였다.
그러다가 1960년대부터 예장 총회가 솔선하여 총회 대표들과 3개 선교본부 대표와 각 선교회 대표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선교정책이 점점 단일화 되도록 협의하였다. 첫 선교정책 단일화 협의회를 1963 년에 소집하였다. 그 때부터 4개 교회 대표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선교 정책을 협의하였다. 이 정기적 회의 내용에 응하여 예장 총회가 제도를 만들어 주한 3개 해외 선교회 활동을 점점 주관하고 단일화 하였다. 따라서 이제 총회가 각 선교부에서 파송하는 선교동역자를 한국 어느 지역이든 파견할 수 있었다.”
따라서 1977년에는 호주연합교회에서 한국에 파송하는 선교사들이 대한예수교장로교 총회의 세계선교 협력 위원회의 초청에 응답하여 파견되었다. 이 위원회가 선교사의 활동을 감독하고 해외에서부터 받는 모든 선교 자금을 할당하였지만 원래의 내용을 별로 수정하지는 않았다. 그 때에 각 선교본부가 그들의 선교사 가운데서 한 사람을 선교본부 대표로 지명하였고, 호주연합교회 선교부의 주한 대표는 이태선 목사였다.
1977년 당시 호주연합교회에서 한국선교를 위하여 할당하는 예산은 (선교사의 생활비 제외) 다음과 같다:
$5000 예장 세계선교위원회 결의에 의하여 소규모 프로젝트에 할당하는 금액
$20,000 일신 기독 병원
$7000 양지 기술 학원
$8000 영등포 산업 선교
$11000 해외 신학생 대학원 장학금
1977년 당시에 호주 선교동역자 12 명이 한국에서 사역 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5 명이 일신기독병원에서 종사하고 있었으며, 노승배 목사와 부인이 울산 노회에 파견되며 파트타임으로 양지기술학원에서 사역하며, 라병도 씨가 영등포 산업선교회에서 일을 하고, 원성희 선생은 이화여대에서 성악을 가르치고, 이태선 목사는 대전에서 평신도 훈련하면서 총회 사무실에서 파트타임 근무하고, 나명애 선생은 전주에서 공동위생 교육에 종사하였다.
1980년부터 2000년 까지 우리의 주요 관심은 선교사업 네 가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즉 일신기독병원, 영등포산업선교, 신체 장애인 교육을 위해 경영하는 양지기술학원, 그리고 신학교육이다. 필자는 이 네 가지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하고 당시 선교정책을 세우는데 우리가 중요시 여겼던 영향들을 말씀을 드리겠다.
일신기독병원은 1952 년에 세워졌다. 그 때에 부산에서 수 많은 여성 피난민, 군인의 아내와 아이들이 부산에서 몹시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판잣집에서 살든지, 부산역 부근에서 살면서 해산을 하고 자녀를 먹이고 있었다. 매혜란 여사는 상당한 자격과 경험이 있는 산부인과 의사이며 매혜영 선생 역시 우수한 자격과 경험이 있는 조사 간호사 교육 선생이었다. 그들은 고생하는 이 여성들을 도와 줄 수 있는 기술과 열정이 있었다. 그들은 여성과 그들의 아이를 돌봐 줄 수 있는 병원을 설립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처음부터 환자들이 치료비를 낼 능력이 있든지 없든지 또 환자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든 불교를 믿는 사람이든 불신자이든 간에 차별 없이 치료하기로 정책을 세웠다.
두 자매는 병원을 세우는데 또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그들은 기독교인으로 여성 해방을 추진하는 분들이었다. 그들이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여성을 위한 봉사할 기회를 가지게 된 것 같이 그들은 다른 여성들도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들이 지니고 있는 타고난 능력을 활용하여 남을 도울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하여 산부인과 의사와 조산간호사 교육을 시작하기로 했다. 일신기독병원 거의 60 년 동안 이 두 목적을 달성하려고 노력하였다. 호주 선교부도 이 두 가지 목적을 계속하여 추진하고 싶어 하였다.
호주연합교회 선교부는 영등포산업선교회를 계속하여 도와 주고 싶은 이유가 몇 가지 있었다. 우택인 목사는 조지송 목사와 함께 1965 년부터 1968년 까지 일을 하였다. 우 목사는 선교부에서 필자의 동역자로 인권 문제를 담당하였다. 한편으로 필자가 장신대에서 구약학을 가르치는 동안 인명진 목사는 3년간 내가 가르치던 학생 중 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 때에 공부하던 과목 가운데 히브리 예언자의 신학을 공부하였다. 이 공부가 단순히 아모스, 호세아, 미가 등등의 신학사상과 그들이 주전 8세기에 당면한 상황에 대한 연구로 끝나지 않았다. 도리어 예언자들이 믿던 하나님을 따르려는 우리들이 영등포에서 장시간 동안 적은 보수로 말할 수 없는 형편으로 노동하는 근로자, 청계천의 빈민굴에서 사는 난민, 거제도에서 가족을 먹이려고 고생을 하는 농어민 등에게 무엇을 설교하며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지 연구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래서 1977-78 년에 인명진 목사와 다른 분들이 구속되었을 때에, 우리는 영등포산업선교회와 구속된 분들을 도와 줄 수 밖에 없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우리는 군사정권 밑에서 신음하는 신도이든 불신자이든 이들을 위하여 발언해 줄 수 밖에 없었다.
양지기술학원도 장애인 여러 사람이 울산 시에서 빈곤과 절망 속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우연히 발견하므로 시작한 사역이다. 노승배 목사와 그의 동역자인 신익균 장로는 소규모로 시작하여 장애인 몇 명에게 자기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기술을 가르치고 복음을 알려 주어 그들이 돈을 조금씩 벌어 자기의 생계를 유지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그들은 울산 시에서 실태 조사를 하여 이러한 장애자가 많이 숨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사업이 점점 성장하였다. 처음에 신 장로의 가정 집에서 시작하였고, 그 다음에 동래에서 선교사 주택으로 사용하던 집으로 옮겼다가 부산시 거제동에 학원을 세워 청년들에게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또한 그들이 각각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예수의 귀중한 형제자매로써 자신을 가지고 살게끔 전도하였다. 그러므로 양지 학원이 발전하였다. 졸업생들은 주로 개업을 하든지 기술자로 취직을 한다. 그들은 이제 보잘것없는 장애인이 아니고, 자긍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된 것이다.
필자는 1972 년 장신대에서 8년간 교수생활을 하다가 호주장로교회 선교부 총무직을 맡으려고 귀국할 때 호주 교회가 계속하여 한국 신학교육에 기여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호주장로교회 선교부가 장신대를 졸업한 유능한 학생 몇 명이 해외에 가서 계속하여 공부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마련하였다. 예장 총회 장학금위원회가 학생들을 선출하고 장학금을 관리하였다. 그래서 몇 해 동안 몇 명의 학생이 스코트랜드, 독일, 이스라엘, 미국, 그리고 호주에서 공부를 하고 한국에 돌아가 신학 교육에 기여하였다.
호주 선교회가 왜 이렇게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많은 힘을 썼을까? 필자는 몇 가지 영향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주한 호주선교회에는 그러한 강력한 전통이 있었다. 벌써 1909년에 진주에 주둔하는 처녀 선교사 두 분이 백정들이 교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편에 서서 온갖 저항을 이기며 백정의 전국 해방을 시작하였다. 그 당시의 처녀 선교사 한 명은 매견시 목사의 부인이 되었다. 매견시 목사가 1910 년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그 때부터 29 년 동안 그는 상애원 나병환자 수용소 원장으로 봉사하였다. 그는 거의 삼십 년 동안 밤낮없이 경남의 가장 가난하며 소외된 사람을 돌보아 주었다. 매혜란 원장과 매혜영 선생은 이 두 어른의 딸이었다. 또한 선교회는 일정 시대에 버려진 여성과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도 학원을 세웠다. 그러므로 소외된 사람들을 특별히 돌보아 주는 오랜 전통이 선교회에 항상 있었다.
필자 자신이 받은 큰 영향은 첫째로8년 동안 거제도의 가난한 농어민을 상대하므로 받은 영향이 컸고, 그리고 장신대에서 근로자와 가난한 시민들을 상대하는 학생들에서 받은 영향이 컸다. 또 한편으로는 1972 년부터 나와 우리 선교부가 땅 소유권을 찾으려고 애쓰는 호주 아보리지니 족의 편을 들어 옆에서 싸우므로 배운 점이 많았다.
나아가서 나에게 끼친 영향 한 가지가 더 있다. 나는 1980년부터 1990년대까지 WCC
전도부와 산업선교 위원회의 한 사람이었다. 동시에 나의 동역자였던 우택인 목사가 WCC
국제문제와 인권위원 한 사람이었다. 또한1977년 까지 호주감리교회 선교부 총무로 계시던 하비 퍼킨스 목사는 CCA
직원 한 사람으로 아시아 각국에서 정의를 위해서 노력하는 단체들을 위하여 성경 공부자료를 만들어 분배하였다. 이 자료가 선교위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우리 선교부 전체가 인권을 위하여 노력하는 억눌리며 가난한 사람의 고통과 선교와 관련을 맺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전도를 시작하실 때에 사명을 이런 말씀으로 표명하셨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누구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의 기쁜 소식을 우선적으로 들어야 된다는 것이었다.
1980 –
1990년대에 호주연합교회 선교부는 일신기독병원과 양지기술학원과 영등포산업선교회를 계속하여 도와 주었다. 1977년 이 후에 우리는 영등포 산업선교회의 요청에 응하여 청년들을 파송하여 같이 일하게 하였다. 이 청년들의 주요 역할은 보고서를 준비하여 노동자들의 사정과 산업선교회의 대책을 아시아 각국의 비슷한 단체나 각 교회 선교부로 보내는 역할이었다. 이 청년들이 영등포에서 일하므로 호주연합교회 교인들이 노동자들의 형편을 알게 되었고 그들을 위하여 계속하여 기도하였다.
군사정권 시절에 한국교회의 복음 증거를 위한 고통스러운 노력, 호주교회 젊은이들이 영등포에서의 사역, 1978년 나병도 선교사가 강제 추방을 당한 사건, 그리고 인명진 목사, 홍길복 목사, 조성기 목사, 고 김이태 목사 등이 호주에서 목회하거나 공부하게 되었던 상황이 전체 호주연합교회, 선교부, 선교부가 결정하는 정책에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한편으로 이 당시 중요한 운동 한 가지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선교의 역방향 운동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인들이 호주로 이민하지 못 하게 하던 소위 백호주의 정책이 1972 년 드디어 폐지되었다. 그때부터 아시아 인들이 호주로 이민 올 수 있게 되었다. 이 당시부터 한국에서 이민자들이 몇 명씩 오기 시작하였다. 1975년 월남 전쟁이 끝나므로 월남에서 일하던 한국인 기술자 몇 백 명이 호주에 들어왔다. 그래서 1973년과 1974년 멜본과 시드니에 선교부와 관계를 가진 한인교회들이 세워졌다. 이후 10 년 동안 한인교회를 여러 곳에 설립하였다. 그러던 차에 선교부가 한국에서 가장 유능한 목사 가운데서 몇 명을 초청하여 이런 한인교회에서 목회 하도록 하였다. 이외에 감리교, 기장, 합동, 고신 등의 교회들도 생겼다. 세워진 한인교회 가운데서 여러 교회가 호주연합교회에 소속하지만 한국의 타 교단에 속한 교회도 많다. 뉴 싸우스 웨일즈 주의 호주연합교회에 소속한 교회는 작년에 세운 한인노회에 대부분 속하여 있다. 다른 주에는 한인교회가 지방노회에 소속한다. 이 교회들이 호주연합교회에 소속하게 된 것은 우리 두 교단의 긴 선교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진 자매결연의 한가지 열매이다.
호주에 한인교회를 설립한 또 하나의 열매는 한국에서 온 이민자들이나 그들의 자녀들이 호주연합교회의 목사가 되어 일반 호주인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들은 다문화적 교회로 되어가는 호주 연합교회를 크게 돕는다. 이런 목사들 가운데 양명득 목사가 한국으로 파송되어 한국 예장 총회에서 선교동역자로 협력하고 있다.
1977년 호주연합교회의 설립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한 열매와 표현이었다. 한편으로 예수의 기도인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에 대한 호주교회의 응답이다. 작은 일보 하나였다. 그래서 호주연합교회의 영문이름을 글자대로 해석하면 호주에서 연합하는 교회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한국교회를 위해서 “주님, 하나 되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이다. 한국교회의 역사를 읽으면 여러 해외 선교회가 교회통합에 영향을 끼친 것 보다 교회 분열에 대한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호주연합교회 선교부 총무로써
1978년에 미국연합장로교회, 미국남장로교회, 호주연합교회, 그리고 대한예수교장로교회 각 교회 대표들이 몇 년에 한 번씩 모이는 것 보다 좀더 넓은 범위로 한국감리교회,
한국기독교장로회, 그리고 그들의 모든 해외 자매교회 대표들이 같이 모이기를 제안했으나, 적극적 응답이 없어 그냥 넘어갔다. 내가 너무 주제 없는 발언을 했는지 몰라도 그 제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 분열의 아픔과 예수의 간절한 기도가 언제나 나를 괴롭힌다.
호주연합교회는 북한 라선 시에서 시작된 사역에 예장 총회가 참여하여 크게 도와 주신데 대하여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장래에도 우리 두 교회가 이 사역에 계속하여 동참하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동북 아시아나 다른 곳에서도 우리가 협력하여 함께 선교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주한 호주선교회의
120주년 행사 시에 조성기 사무총장과 총회가 제안하신 선교협력 안을 아주 고맙게 생각한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호주장로교회는 첫 선교사인 데이비스 목사를 한국에 우연히 파견하게 되었다. 헨리 데이비스 선생이 한 성공회 교회에 가서 중국에 주둔하는 성공회 선교사가 부산에 가서 보니 선교를 시작할 만한 곳이라고 보고서를 썼다. 그래서 데이비스 선생이 성공회 선교부에 자기를 부산에 선교사로 파송해 달라고 하였지만 그들이 너무 까다로운 조건을 내 세워, 데이비스 선생이 장로교회에 요청해서 그들이 그에게 안수를 주고 파송하기로 하였다. 우리가 라선에서 사역을 시작하게 된 동기도 마찬가지로 우연히 이루어진 일인 것 같다. 우리는 라선 시장이 미국 그리스도교회 목사에게 발급한 초청장을 그 목사로부터 받았다. 성령께서 뜻 밖의 길로 인도하시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동참할 수 있도록 길을 여러 주신 분에게 감사를 드리고, 이 사역에 크게 이바지 하신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대표인 여러분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Copyright John Brown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