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브리즈번한인장로교회와 나의 목회
김만영 목사
(브리즈번한인장로교회, 전 퀸즈랜드주 총회장)
들어가는 말
그 동안의 목회의 내용을 기록하는 것이 이민교회사에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었고, 또한 앞으로 후학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그 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소개된 내용들을 요약하는 동시에, 청탁 받은 글의 목적에 따라 편집을 하였다.
호주에서의 목회 시작
나는 한국의 장로회신학대학을 1961년에 졸업하고, 1964년에 호주장로교회 세계선교부의 초청을 받아 호주에 왔다. 당시 나는 26세의 청년목사로 멜본에서의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호주장로교회에서 나를 초청한 이유는 호주선교사들의 한국에서의 선교사역을 호주교인들에게 이야기 해 주고 그들의 선교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는지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6.25동란과 군사혁명 이후 국가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어려운 시기지만 교회는 오히려 부흥과 성장을 하고 있는데 그 비결이 무엇인지, 한국교회를 소개하는 것이었으며, 또한 인재양성의 프로그램 일환에 의한 것이었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나는 멜본을 포함하여 호주의 교회들을 방문하여 노회, 청소년집회, 부인선교집회 등 많은 곳에서 설교와 강연 등을 하게 되었고, 당시 호주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교회와 선교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66년에 시드니를 거쳐 브리즈번에 와서 퀸즈랜드대학교에서 신학을 계속했고,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당시 주일 설교가 없을 때는 호주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 교회의 한 장로님의 가족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고, 그 분의 딸과 친하게 되었다. 내가 선교집회를 인도할 때마다 그 장로님의 딸들이 열심히 참석을 하며 한국교회에 대하여 관심을 보였고, 그 집은 한국 고아들을 지원하였고, 부산 일신병원도 후원하고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그 중 한 명의 딸 쥴리(Julie)와 사귀기 시작하였고, 약혼을 하게 되었는데, 한국으로 나가 부산장로회신학교에서 전임강사로 봉사하다가, 다시 호주교회의 청빙을 받고 들어와 Bardon(바돈)호주장로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고, 1969년 현재의 아내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아내가 호주 여인이지만 신앙적으로 훈련을 잘 받은 가정에서 자라났기에 국제결혼으로 인한 어려움은 크게 없었고, 지금까지 교회 봉사와 3남1녀 자녀 교육을 훌륭하게 감당하여 주어서, 큰아들은 U.Q.에서 IT전공 Ph.D.이고, 둘째 아들은 법학/상학 전공으로 국제회사 Asia Business Director로 사회에 공헌하고 있으며, 딸은 상학 전공인 공인계리사이면서도 Fashion Designer로 인정받아 일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또 하나의 축복인 늦동이 막내아들은 현재 대학에서 건축설계를 전공을 하고 있어, 너무나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호주교회와 퀸즈랜드주 총회장 사역
바돈(Bardon)장로교회는 내가 1969년에 담임으로 첫 목회하였던 호주교회이다. 내가 부임할 당시에 호주 정부는 여전히 백호주의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고. 아시아인 이민은 문이 닫혀있던 시기였다. 그런데 아시아에서 온 한인 목사가 호주교회에 담임으로 부임하니 큰 사건이었고, 당시 일간 신문에서 대서특필하기도 하였다.
물론 첫 목회의 가장 큰 어려움은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호주 성도들이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설교를 좋아했고, 청소년들은 신앙의 활기를 되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래서 인종차별과 문화적 갈등은 신앙과 복음 속에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었다.
내가 호주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사역하고 있고, 내 나름대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이곳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 호주상황에 적응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니 인종차별이라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느 나라든지 다양한 차별은 있겠지만 그 나라의 문화와 풍습을 이해하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동양인으로 처음 브리즈번 노회장을 거쳐, 퀸즈랜드 주 총회장으로 선출된 것도 나의 인종을 보고 뽑은 것이 아니라 그 직무에 대한 이해와 그 역할을 얼마나 잘 감당할 수 있느냐를 보고 세운 것이었다. 나는 당시 21년 동안 호주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호주교회가 점점 전통화, 형식화, 세속화 되어가고 있는 실상을 알게 되었다. 그 상황이 나에게는 영적인 도전이 되었는데, 내 안에 있는 한국인의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그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그런 이유로 브리즈번 노회는 나를 인정해 주어 노회장으로 세워주었고, 결국 나를 추천하여 1990년과 1991년에 총회장으로 섬기게 되는 뜻밖의 하나님의 섭리가 시작되었다. 문화적 차이와 백호주의 정책이 있던 시절에, 퀸즈랜드 주에 속한 모든 장로교회를 대표하는 자리에 한국인 목사가 총회장이 되자, 교회 안에서는 당시 큰 기대의 분위기가 있었던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초청을 받아 다니는 교회마다 보다 뜨거운 복음의 메시지를 열정적으로 전파하였다. 이것이 호주교회가 영적으로 부흥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면 다만 하나님께 감사드릴 뿐이다.
사실 나는 불교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부산상고 2학년 때 예수를 믿고 거듭나게 되었다. 기독교인이 된 후 새벽기도에 다닐 때 마다 가정 복음화를 위한 뜨거운 소명감으로 열심히 기도하여 온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런 내용을 호주교회에 다니면서 간증하였는데 호주교인들이 감동을 받는 모습을 보았고, 총회는 나를 통하여 좀 더 열정적으로 호주교회를 영적으로 깨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총회에서는 주간에 퀸즈랜드대학교 교목으로 사역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그레이스여자대학 이사로 섬기게 하였다. 퀸즈랜드신학대학에서는 30년 동안 교회사와 비교종교학을 강의해서 목회자 양성에 공헌하게 했으며, 더 나아가 신학교육 실행위원회 이사장으로 7년간 봉사하게 되었으니 너무나 큰 축복이었음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시드니 웨슬리신학대학에서 목회학 겸임교수로 섬기면서 국제 선교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었다. 이렇게 호주교회와 한인 공동체를 위한 열정적인 섬김과 봉사의 시간을 보내던 중에, 한인 목사의 수고와 공헌에 대한 감사로, 호주 정부로부터 다문화봉사자 상(The multicultural Service Award)을 수여 받기도 하였다.
한인교회 창립과 부흥
1980년대에 들어서자 백호주의가 이미 폐지되고 브리즈번에도 한인들의 인구가 점차로 증가하고 있었다. 이들 중 기독교인들은 주일 예배를 드리기 원하지만 한국어로 예배드릴 곳이 없어, 나에 대한 소문을 들은 가정들이 바돈(Bardon)호주장로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1981년에 기술이민으로 온 두 가정, 취업이민으로 정착한 여덟 가정, 태권도 사범 세 가정, 그리고 몇 유학생 가정이 있었다. 당시 한국어 예배는 없었기에 영어로 예배를 드렸고, 내가 설교를 한국어로 요약을 했지만 항상 아쉬움이 남았었다. 그러나 예배후의 친교는 뜨거웠으며 종종 야외로 나가 한국음식을 나누며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의 우정을 두텁게 하였다.
그러다가 1984년 3월부터 한인들의 주일 예배가 별도로 시작되었다. 한국어로 마음껏 찬양하고, 기도와 설교가 모두 한국어로 진행이 되니 한인들은 기뻐하며 더 열심으로 교회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4월에 노회에서 한인장로교회 설립을 인준하고, 천희욱 장로(현 브리즈번 왕성교회 담임)의 장립식을 거행한 후 교회창립을 온 교인과 더불어 준비하게 된 것이다.
드디어 그 해 9월9일 브리즈번 노회 주관으로 성인 67명, 학생 12명, 아동 43명으로 호주교인들의 축하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창립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 순간을 위해 기도로 준비하고 눈물로 기도하던 한인성도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사실 호주교회 사역을 시작했을 때 한인교회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오직 ‘호주장로교회를 어떻게 잘 섬길까’하는 사명감에만 불 타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놀랍게 인도하셔서 한인교회를 창립하게 하시니 그 능력이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었다.
당시 브리즈번노회 Benn 노회장은 본인이 선교사였기에 한국말로 격려사를 하였는데 한인들은 개개인이 아닌 가족 중심으로 교회가 형성되는 것을 보고 기쁘게 생각한다고 하였다. 한인교회가 창립되고 기초를 놓아 가는 데는 물론 바돈(Bardon)장로교회 성도들의 따뜻한 격려와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자기들의 담임 목사가 많은 시간과 정력을 한인들을 위해 바칠 때 호주교인들은 한마디도 불평이 없었으며, 선교적인 차원에서 너그러이 이해하고 지지를 해 주었다.
한인교회를 창립하고 한달 후 10월에는 자녀들을 위하여 한글학교를 설립하고 주정부에 등록하기에 이르렀다. 브리즈번에 거주하는 한인 어린이뿐만 아니라 골드코스트에 사는 부모들도 토요일마다 자녀들을 데리고 와 한글을 배우게 하였다. 이민생활에서 자녀를 위한 한글교육은 무엇보다도 중요한데 당시 교회는 그러한 역할까지 감당하며 교민사회에 봉사를 하였다.
그 후 교회는 점차로 제직을 구성하게 되었는데, 그 중 여선교회가 먼저 조직되었고, 7명의 서리집사가 임명되면서 교회는 일꾼이 세워지는 제 모습을 갖추어 가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제일 어려운 문제는 교회당이었다. 호주교회를 빌려 쓰다 보니 여러 가지 불편함과 어려움이 야기되었는데 바돈장로교회가 자체의 교회 발전을 위하여 교회건물을 매각하고 좀 더 큰 공간으로 이사하게 되자 부득이 그들과 작별하게 되었다. 그래서 성 데이비드교회(St. David’s)로 예배처를 옮기게 되었고, 그곳에서 획기적인 부흥의 역사가 있었다.
호주 정부가 투자이민을 받아들이면서 한인이민자들도 브리즈번으로 많이 들어오게 되었다. 교회 구역이 확대되었고 각 부서의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새 가족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목회자의 필요도 증가하였는데 1987년에 김정만 목사를 초청해서 기독교교육을 전담하게 하였고, 1990년 8월에 한국의 서정권 목사를 부목사로 초청하여 담임목사를 보필하며 설교와 심방사역을 하게 하였으며, 서 목사는 특히 원주민선교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봉사하였다.
한인교회가 계속적으로 성장하자 또 한 번의 이사를 하게 되는데 1991년 성 바울교회당(St Paul’s)으로 이사를 하였다. 이 교회는 웅장하고 성스러운 교회당으로 아름다운 예배 분위기를 제공하여 주었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 보다 더 도약을 가능케 한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이민교회의 설움은 자체 교회당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듬해 또 다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브리즈번 시(City) 중심에 있는 앤 스트리트장로교회(Ann Street)였다. 이 교회는 브리즈번 시청 앞에 위치하여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호주교인들이 우리를 따뜻하게 포용해 주고 협조해 주었다. 사실 그 교회는 내 아내의 모 교회였고, 내 장인이 그 교회 장로님이었으니, 마치 모 교회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이렇게 본 교회가 안정적으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본 노회에서는 우리 교회를 독립적인 교회로 법적 재가하고 나를 한인목회에만 전담하도록 결의하여 주었다. 1969년부터 바돈(Bardon), 버지니아(Virginia), 그리고 더갭(The Gap)장로교회에서 23년 동안의 호주교회 목회를 마치고, 1992년 더갭(The Gap)장로교회에서 감격적인 송별예배를 드렸다. 철없던 젊은 목사, 갓 결혼한 한인목사를 담임목사로 받아 길러준 호주교회 성도들의 사랑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이 후 나는 한인교회에만 전념하며 교회를 돌보기 시작하였고, 장로들을 포함한 많은 제직들의 헌신으로 교회는 계속 부흥 발전하였다. 그러다 드디어 1999년 4월에 교회당 건축 부지를 구입해서 현장 감사예배를 드렸다. 교회의 숙원인 자체 교회당 건축을 마련하기 위하여 온 교인들은 기도해 왔고, 이제 그 기반을 가지게 된 것이다. 2004년에는 ‘20년-은혜의 발자취’라는 교회 화보를 출판하여 그 동안의 과정을 기록과 사진으로 남기게 되었다.
교회창립기념일 때마다 부흥성회를 개최하였는데 한국과 호주에서 강사들을 초빙하여 온 교인들과 은혜의 시간을 함께 하였다. 길자연 목사, 김창식 목사, 홍관표 목사, 지덕 목사, 홍길복 목사, 이상규 목사, 신예철 목사, 하해룡 목사, 정인찬 목사, 박희민 목사, 남윤우 목사, 엄문용 장로, 김순권 목사, 이규현 목사, 한명수 목사, 김찬종 목사 등이 우리 교회를 다녀간 강사들이다.
그 동안의 목회 경험으로 나는 퀸즈랜드 장로교신학대학과 시드니 웨슬리신학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영문으로 책을 출판하였는데 ‘Preaching: the supreme task of the Church’는 신학대학 교재로, ‘The Church as a Team’은 교역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을 위한 도서로, 그리고 ‘새 사람이 되리라’라는 제목의 설교집을 내었다.
새 성전 건축을 하다
나는 지금도 성전 건축의 감격이 가슴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만평이라는 넓은 대지 위에 하나님의 전을 아름답게 지어 봉헌하였던 역사는 온 교인들과 내 목회의 가장 큰 도전이자 기쁨이었다. 지금도 이 아름다운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릴 때마다 찬양이 저절로 나오고 감사의 마음이 솟구친다. 바벨론 강가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울며 노래하던 시온의 슬픔이, 지금은 그 세속적인 이방 땅에 하나님의 전을 우뚝 세워 그분의 놀라우신 능력을 전파하고 있다.
그러나 성전 건축은 항상 시련이 따르기 마련이고, 하물며 이민교회 성전 건축이야 말할 것도 없다. 울기도 많이 울고 속이 한두 번 탄 것이 아니다. 성전을 건축할 부지 마련, 자금확보, 설계사와 건설사 선정 등이 어려운 과정 중의 부분들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반신반의하거나 반대하는 성도들의 마음이 교회건축을 위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모든 성도가 성전 건축을 향한 열정으로 하나가 될 때 아무리 어려운 시련이 있어도 능히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축위원회가 설립된 때는 1992년, 땅을 매입한 시기는 2002년, 승인을 받은 해는 2005년, 착공된 해는 2007년이었다. 이 후에 추가 공사비가 예상보다 더 많이 증가되어 교회의 실질적인 부담이 되었으며, 결국 재정적인 이유로 우리가 계획한 대로 본당, 교육관, 선교관, 복지관 건축이 한꺼번에 완공되지 못하였다. 특히 주차장이나 교육시설, 복지관 등의 확장은 앞으로 계속되어야 할 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9년 4월 부활절에 드디어 예배당, 말씀의 집, 친교의 집이 완공되어 온 교인들이 호주 장로교회 총회와 노회대표들과 교인들의 축하와 함께 입당예배를 드릴 때 전능하신 능력의 하나님을 소리 높여 찬양하였고, 모든 영광은 주님께 드리고, 우리는 서로를 축하하며 눈물로 감격하였다. 실로 무에서 시작된 한인교회가 이렇게 영적, 수적으로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 큰 축복을 받았다. 존 길모 목사(Rev John Gilmore, 호주장로교 퀸즈랜드주 총회장)는 인사말을 통해 새 성전 완공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뜻 깊은 날을 맞이하여 주총회 총대를 대신하여 진심으로 기뻐하고 축하한다고 말하였고 택한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답게 남은 생을 헌신적으로 살아 갈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고 기원하였다.
대부분의 이민교회가 호주교회를 빌려 주일날 서너 시간만 사용하는 것을 감안할 때,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로서 만평부지에 800여명이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자체시설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기적 그 자체임이 분명하다. 분명히 “하나님의 대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목도하게 해 주셨다.
또한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는 항상 내부 갈등으로 상처 받기도 하므로 미래를 창조하는 영적 전쟁을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뿌리가 뽑힌 유랑민의 삶을 사는 것과 같은 이민자들의 삶은 항상 불안하고 외롭고 상처받기 쉽다. 교회 안에서 자신을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크다. 이러한 분들이 교회의 구성원들이 되니 이민교회목회는 더할 나위 없이 어렵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이민교회 목사다!”하니 코끼리도 그냥 서러운 동정의 눈물을 흘리더라는 유머도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교인들이 한국문화와 호주문화를 바로 이해하지 못할 때는 신앙생활에나 자녀 교육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즉, 평등주의(Egalitarianism)와 권위(Authoritarianism), 개성존중(Individualism)과 가족존중(Familism), 동료의식(Mateship)과 형식주의(Formalism), 이성중심(Rationalism)과 감성주의(Aestheticism)는 서로 이해하고, 견제할 것은 견제하고, 보완할 것은 보완해야 보다 성숙한 이민생활과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민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갈등들의 많은 부분이 목회자의 자질과 인격문제이다. 사실 이것은 이민교회의 문제만은 아니고 한국교회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해외에서는 그것을 검증하기가 더욱 어렵다. 정규적인 신학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하루 밤 자고 나면 목사가 되고 교수가 되는 실정이다 보니 그들에게 무슨 목회윤리나 목회철학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말이다. 너무나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교인들은 주일마다 “교회 쇼핑(Shopping)”을 하고, 목사는 교인들의 눈치를 본다. 사실 이민교회 교인들은 유동적이다. 그러니 나가는 교인을 저주하지 말고, 들어오는 교인을 막지 말아야 한다. 또한 중요한 것은 자녀들을 위한 차세대 선교와 이중문화권 안에서 영어사역의 준비이다. 이 과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적절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면 이민교회는 허망할 수 있다. 목회자가 먼저 각성하고, 영성, 지성, 이성, 감성을 갖춘 지도자로 거듭나야 한다. 목회자와 성도간에 서로 신뢰와 존경심을 회복해야 한다. 건강한 목자가 건강한 교인을 만들 것이다. 이러할 때에 예배가 예배답고, 교회가 교회답게 될 것이다.
나가는 말
이민목회에서의 어려움은 언어의 장벽과 문화의 장벽이다. 그리고 한인목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도자들의 개인 야망이나 욕심 등의 장벽들이다. 내 목회는 지금까지 ‘물의 목회’와 ‘피의 목회’로 요약할 수 있다. 물의 목회란 순리적으로 흘러가는 것을 말하는데 물이 흘러내리다가 앞에 바위가 막혀 있으면, 물이 고일 때까지 참는 것이다. 목회는 기다리고 인내하는 것이다. 물이 고여야 또 옆으로 지나 갈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던지 억지로 욕심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순리적으로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피의 목회란 주님의 보혈, 즉 희생하는 목회이다. 피 흘림이 없으면, 즉 희생이 없으면 성공이 없다. (There is no success without sacrifice.) 목회에 어떤 축복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 흘림이 있어야 한다. (If there is to be any blessing, there must be some bleeding.)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성취함도 없다. (Ministry that costs nothing accomplishes nothing.) 그러나 피 흘림이 있는 곳에는 생명의 역사가 있고, 면류관이 있다.
이민목회를 하면서 인간적인 부족함으로 인한 실수도 많았고, 그 과정 속에 남에게 실망도 주었고, 나 역시 많이 실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 희생 보혈을 생각하면서 다시 일어 설 수 있었다. 주님의 피 목회가 내 영혼을 뜨겁게 하고, 복음이 내 속에 역동적으로 살아나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민목회를 하면서 “제가하고 하고 있는 일을 축복해 주십시오” 라는 기도대신에 “하나님이 축복하는 일을 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해 왔다. 그래서 내 목회의 도구는 말씀과 기도이며, 목회의 능력은 성령의 능력이다. 사실 예수님의 목회는 능력목회, 치유목회, 영성목회임을 믿어야 한다. (“The Spirit of the Lord God is upon me” is the secret of our Lord’s ministry on earth.) 주님의 작은 종으로서 부르심에 순종하여, 한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영혼 구원을 위해 달려오게 해 주신 주님께 모든 영광과 감사를 올리며, 죽기까지 충성할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시기를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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