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장로교 한국선교역사 1889-1941
추천사: 초기 호주선교사들의 숨결
존 브라운
(전 한국선교사 1960-1972,
전 호주장로교회와 호주연합교회 총회 선교부 총무)
올해는 한국교회와 호주교회가 선교 관계를 맺은 지 128년 되는 해이다.
1889년 헨리 데이비스가 한국에 도착한 이후 약 130명의 호주 선교동역자가 한국교회의 선교를 협력하였다. 한국교회의 성장과 압제 속에서의 투쟁과 순교, 그리고 호주선교사들의 사역 이야기는 우리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어 왔다. 1899년부터 1942년 사이의 어려웠던 시기와 증가하는 일본제국의 핍박 속에서 호주선교사들은 젊은 한국교회를 지원하였다. 초기 호주선교사들의 증언은, 그리고 성장하는 한국교회의 신실한 증언은 호주에 있는 교회들에게 지금까지도 도전을 주고 있는데, 이 역사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선교의 증언은 어떤 이유에서 복음에 신실한 증언일까? 더 성찰하여 보면 호주선교부가 선교의 우선을 정하는데 조정되었어야 할 관점은 있지 않았을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의 기준은 선교가 성공하였느냐 혹은 못하였느냐가 아니라, 선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에 신실하였느냐 그리고 성경이 전하는 대로 하나님의 본성을 잘 증언하였느냐 일 것이다. 한 세기 후 우리의 선교가 얼마나 적절한지를 평가하는데도, 아마도 이 자료가 우리에게 올바른 질문을 하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현재 해외의 어떤 다른 나라 교회들보다 선교사를 더 많이 파송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들보다 앞서 간 선교사들의 성취와 실패들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호주선교사들은 백여 년 전 당시 어떤 안건들을 어떤 이유로 선택하여 어떻게 접근하였을까? 그리고 그 일들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선교에 어떻게 합당하였고, 혹은 포함되어야 하는데 생략된 것은 무엇이 있을까?
이 책은 한국교회가 읽어야 한다. 초기 선교사들은 당시 한국에서 어떻게 우선을 정하였을까? 꼭 되어져야 했었는데 이루어지지 않은 일은 무엇일까? 혹은 하지 말아야 했던 일을 한 것은 없을까? 지금 한국교회는 어떤 방법으로 선교의 우선을 정하고 있는가? 지금 실행하고 있지만 하지 않아도 되고, 무관심하지만 지금 꼭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예전 선교사들에 의하여 주어진 우선과 이해를 질문 없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는 않은가?
호주선교사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 믿음으로 대응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복음과 성경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그들을 인도하였던 것이고, 또 다른 면은 그들이 처한 당시의 상황을 알고 분석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 선교의 우선을 어떤 방법으로 결정하고 있는가?
우리가 선택하는 선교의 우선은 우리가 처한 상황을 분석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 은사, 그리고 영감을 그 상황에 가져 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분석위에 우리에게 주어진 여러 자산의 현실적인 평가로 우선을 설정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며 최선을 다 하는 것이다.
나는 본도서가 한국에서 출판되는 것을 환영한다. 이 책이 드디어 한국말로 번역이 되었는데 그 수고를 맡아 준 양명득 목사님께 감사드리며, 우리는 그에게 빚을 지게 되었다.
초기 호주선교사들의 숨결이 이 책 속에 기억되어 있다. 또한 경상남도 지역의 신실한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마산에 세워진 선교사들의 묘역에도 그 기억이 남아있다. 초기 호주선교사들의 숭고한 사역과 한국의 기독교인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또한 한국의 교회들과 친구들에게 감사드린다. 당신들은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주었다.
호주 캔버라에서
2017
추천의 글: 공식적인 한국선교 보고서
이상규
(고신대학교 교수)
호주장로교회의 한국선교역사를 개관한 에디스 커(Edith Kerr)와 조지 앤더슨(George Anderson)이 공동 집필한 『호주장로교 한국선교사 1889-1941』가 이번에 번역되어 우리말로 읽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호주장로교회는 1889년 10월 해리 데이비스(J. H. Davies)를 한국에 파송한 이래 1941년 와킨스(Rene F. Watkins)를 파송하기 까지 50여 년 간 78명의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여 부산과 경남지방의 5개 선교지부, 곧 부산 진주 마산 거창 그리고 통영에서 전도, 교육, 의료, 구제 및 자선 분야에서 봉사하게 했는데, 이들의 한국에서의 선교활동을 정리한 것이 이 책의 내용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호주빅토리아 장로교회의 공식적인 한국 선교보고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주장로교회는 한국 외에도 현재 바누아투라고 불리는 뉴 헤브리디즈나 호주 원주민, 그리고 호주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을 위한 선교사역을 수행해 왔는데, 가장 성공적인 선교지가 한국이었습니다. 1920년대 호주(빅토리아)장로교회 해외선교비 총액의 70% 정도가 한국 선교를 위해 사용될 정도였습니다. 호주장로교회는 여전도회 연합회(PWMU)나 청년연합회(YFU) 등과 같은 선교사 파송단체만이 아니라 지역교회, 그리고 주일학생에서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한국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후원 하는 등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였고, 그 결과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 결실이 지금의 부산경남 지역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장로교회의 한국선교 역사가 정리되지 못한 점을 아쉬워하여 호주장로교 해외선교부는 한국선교역사를 편찬하기로 하고, 한국선교사 출신인 에디 커 와 조지 앤더슨 두 분에게 집필을 위임하였고, 그 결과 1970년 이 보고서가 출판된 것입니다.
이 책을 집필한 에디스 커 선교사는 1921년부터 1941년까지 진주 마산 통영 부산에서 일했던 유능한 선교사였고, 호주에서 신학사 학위(BD)를 얻은 첫 여성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저술을 남긴 문필가이자 여권운동가였습니다. 그리고 조지 앤더슨은 1922년부터 1937년까지, 그리고 해방 후 다시 내한하여 2년간 선교사로 일했고 후에는 호주장로교 선교부 총무를 역임했던 선교사이자 선교정책가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보고서를 집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보고서를 번역한 양명득 목사님은 호주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호주연합교회에서 목회자로 활동하는 등 호주교회의 신학과 역사에 깊은 식견을 가진 목사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어느 누구보다 더 적절한 번역자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수고의 값으로 이 보고서가 번역되어 한권의 책으로 출판된 것을 축하하며 환영합니다.
이 책을 통해 호주장로교회의 한국선교 역사, 한국의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호주교회 성도들의 뜨거운 사랑과 헌신을 이해하고 감사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면서 이 책을 추천합니다.
2017년 6월 25일
부산
서문: 새 한국으로 나가는 새 선교사들
에디스 커
1889년부터 1941년까지 한국의 호주장로교 선교회의 사역기록은 1945년 이후 ‘새 한국’으로 선교를 나가는 ‘새 선교사들’에 의하여 요청되었다.
총회 선교부는 이 작업을 멜본의 ‘한국친교회’에 위임하였는바, 이 친교회는 1941년 이전에 고요한 아침의 땅에서 봉사한 특권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이 된 모임이다.
그러나 첫 20년 동안의 사역은 아쉽게도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당사자들로 부터 직접 들을 수 없었는데, 오래전 그들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한국친교회는 이 과제를 1921년과 1922년 각각 한국에 갔었던 에디스 커 선교사와 조지 앤더슨 목사에게 위임하였다. 1934년 한국에서 돌아온 후 앤더슨 목사는 총회 해외선교위원회 총무에 임명되었다. 그는 1939년부터 1951년까지 교회를 위하여 중요한 직책을 감당하였고, 1939년에는 해외선교위원회와 장로교여선교연합회 대표들을 인도하여 한국을 방문하였고, 그리고 전쟁이 끝났을 시 호주선교부 자산을 확인하기 위하여 또다시 방문을 하였다. 그는 크게 타격받은 한국교회의 재건을 돕기 위하여 1952년부터 1954년까지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하여 총회 선교부 총무자리를 사임하기도 하였다.
이 책의 한 부분이 앤더슨에 의하여 쓰였다. 커 선교사는 이 책의 집필과 편집, 그리고 정리를 하였다.
이 책이 준비되면서 한국친교회는 다양한 내용을 듣고 토론하기 위하여 수시로 모였다. 그러나 시드니의 선교부 사무실에서 타자를 치기 전 완성된 원고를 친교회가 읽어 보고 확인할 수 없어서 못내 아쉬웠다.
각 장을 읽기도하고 들어주며, 사진도 제공하여 준 선교회 회원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특별히 감사한 것은 도로시 레게트 선교사가 원고 타자를 돕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고, 던 선교사도 수시로 도와주었다.
서문: 우리는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조지 앤더슨
"한국은 마치 아시아의 아픈 손가락과 같고, 아직도 붕대를 감고 있으며, 휴전선, 1953년 7월27일 이후 북의 공산주의와 남의 비공산주의 사이에 불편한 평화가 감돌고 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1960년 12월)
1950년과 1951에 있었던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파괴된 한국의 도시들을 재건하는데 미국의 자본이 2천 3백만 명의 한국인을 도와왔다. 두 번 파괴되고 두 번 재건된 수도 서울은 아름다운 도시가 되었고, 전에 보다도 더 번영하고 있다. 기찻길도 들어섰고, 새 발전소, 그리고 새로운 공업이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인구의 증가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공산주의자들의 어두운 그림자는 새 호흡을 위하여 몸부림치는 분열된 작은 한반도에 여전히 위협의 가능성을 드리우고 있다.
1941년은 약 60년 전에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탄생된 놀라운 선교사들의 사역과 기독교 교회의 성장이 막을 내리는 해였다.
그리고 1945년까지의 중간 기간은 세계전쟁의 구름이 기독교 공동체의 운명을 완전히 뒤 덮었다. 뒤 이어 해방의 종소리가 새 시대를 열었고, 새로운 세대의 선교사 ‘동역자’들이 위대한 재건의 사역 목적을 가지고 대부분 지하에서 운영되던 교회를 도우러 한국에 들어갔다.
선교지의 교회와 선교부의 공식 기록을 대부분 근거로 한 이 작은 책의 출판 목적은 현재 한국의 새로운 세대에게 현재와 미래의 뿌리를 찾을 수 있는 당시의 이야기를 좀 더 친밀하게 전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우리 세대에 여전히 남겨진 것은 그 뿌리의 최소한 어떤 부분들은 다시 자라나 귀한 추수를 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 요 12:24
차례
추천사: 초기 호주선교사들의 숨결 존 브라운
추천사: 공식적인 한국선교 보고서 이상규
초기 한국선교역사의 소중한 기록물 이종삼
발행의 글 진방주
현재와 미래의 뿌리를 찾아서 양명득
서문: 새 한국으로 나가는 새 선교사들 에디스 커
서문: 우리는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조지 앤더슨
1부
1장 역사적 배경
1. 은둔의 나라
2. 구 한국의 종교
3. 첫 선교사들
4.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의 활동
2장 개신교 선교의 설립
1. 게일과 데이비스 선교사
2. 경상남도: 호주와 미국장로교 선교부 협력의 시기
3. 부산에서의 미장로교회 선교
4. 부산에서의 철수
5. 부산에서의 호주선교 초기
6. 초기 복음전도 사역
7. 1900년부터 1914년 까지
8. 새 선교부 개원: 첫 시대의 마감
3장 교회선교의 정치적 배경: 1941년까지
1. 1909년까지
2. 1909년부터 1919년까지
3. 1919년부터 1925년까지
4. 1925년부터 1930년까지
5. 1930년부터 1941년까지
4장 교육 선교
1. 전반적 정책과 실행
2. 호주선교부의 교육정책
3. 교육심의회
4. 호주선교부의 학교들
5. 1915년의 딜레마
6. 호주선교부의 초등학교
1) 부산진
2) 진주
3) 진주광림남학교
4) 마산의신여학교
5) 창신남학교
7. 호주선교부의 중등학교
1) 마산의 라이얼중등학교
2) 동래의 하퍼중등학교
8. 신사참배 문제
9. 미션 스쿨의 폐교
5장 직업 교육
1. 남학생들: 복음농업학교
2. 여학생: 실업학교와 동래농업학교
6장 구호사역
7장 유치원과 유치원 교사 훈련
1. 유치원 교사 훈련
2. 주일학교, 마을학교, 직업학교
3. 어린이성경학교 혹은 마을학교들
4. 여름방학 성경학교들
8장 의료 선교
1. 부산과 진주 병원의 시작
2. 세브란스
3. 호주선교부의 협력
4. 통영과 테일러 박사
5. 나병환자 의료사역
6. 건강한 아이들의 집
7. 치료
8. 유아양육 사역과 건강진료소
9장 신사참배에 관한 전반적인 사고
1. 신사참배에 관한 질문
2. 선교사들의 철수, 1940-1942
10장 호주선교부
1. 부산선교부
1) 부산에서의 전도사역
2) 교육 사역
3) 신학 교육
4) 부산에서의 특별 사역
5) 1941년까지 부산선교부의 마지막 행적
2. 진주선교부
3. 마산선교부
4. 통영선교부
5. 거창선교부
11장 선교기관과의 협력
1. 세브란스 병원
2. 성서공회와 성서 번역
3. 기독교서회
4. 신학 훈련
5. 평양의 유니온기독신학교
6. 이화여자대학교
7. 구호사역
8. 기독여자청년회
12장 중간기 1941-1951
1. 정치적 배경
2. 국내 정치상황
3. 교회 상황 1941-1951
4. 북한의 교회 상황
5. 항거의 대가
6. 선교사들의 귀환 1941-1951
13장 호주교회의 특별한 대표와 손님들
14장 1941년 전 호주를 방문한 한국인
15장 한국의 호주선교사 묘지
16장 참고자료 소개
2부
1. 한국 장로교회의 시작과 발전
2. 호주선교부의 시작과 발전
3. 순회 선교: 그 이유와 발전
4. 성서학원의 시작과 발전
5. 졸업생들
3부 호주선교사 연대기
4부 주요 문서 및 자료 모음
1.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의 죽음을 여동생 메리 선교사에게 알리는 편지
2. 호주빅토리아장로교 총회 한국선교 전진정책
3. 김호열의 첫 호주 유학
4. 양한나의 첫 여성 호주유학
5. 양한나의 빅토리아장로교회 방문기
6. 거창의 매카그 양으로부터 온 편지
7. 통영의 수공예반은 가치가 있는가?
8. 진주에서의 교육의 어려움
9. 부산진의 선교사역 편지
10. 마산의 선교사로부터 온 편지
11. 호주선교회의 신사참배 거부 선언문
12. 진주교회가 보내는 선언문
13. 호주선교회의 신사참배 거부와 학교폐쇄 정책에 경남노회가 낸 성명서
14. 호주선교회의 신사참배 거부를 비난하는 통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