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한인연합교회 50년사
발행처: 시드니한인연합교회
발행인: 조삼열
발행일: 2024년 9월 7일
<특별 기고, 297-303>
시드니한인연합교회의 호주와 한국 선교 50년
글: 양명득
들어가는 말
호주의 빅토리아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는 1888년 설립 50주년을 맞았다. 1837년 이민자들과 함께 영국에서 건너온 한 장로교회 예배가 멜버른에서 생겨났고, 그다음 해 공식적인 목회가 시작되었다. 그 후 다른 분파의 장로교회도 생겨나 각기 다른 조직을 유지하며 활동하다 1859년 몇 장로교단이 연합하여 빅토리아장로교회 총회가 탄생하였다. 빅토리아장로교회는 1838년 설립 50주년 행사를 진행 중이었다.
당시 총회가 발간한 책이 한 권 있는바 바로 ‘빅토리아장로교회 50년사’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50년사 내용 중 특히 ‘이방인 선교’ 즉 해외 선교 부분을 보면 ‘꼬레아(Corea)’ 혹은 ‘조선’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당시 조선은 이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나라였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다. 그다음 해인 1889년부터 빅토리아장로교회 안에 ‘조선’이란 나라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조선은 이들의 ‘이방인 선교’ (빅토리아장로교회는 당시 해외 선교를 ‘이방인 선교’(Heathen Mission)로 불렀다.) 중심지가 되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중국과 일본 정도만 알고 있던 호주인들에게 극동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어찌하여 일 년 만에 빅토리아주 도시뿐만 아니라 시골 곳곳에까지 화제의 나라가 되었을까.
교회 설립 50주년의 씨앗
당시 헨리 데이비스(Henry J. Davies)라는 한 청년이 조선으로 건너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원하고 있었다. 독신 청년이라고는 하지만 그는 인도에서의 선교 경험도 있었고, 사립학교를 운영한 경험도 있었다. 물론 멜버른대학교에서 석사학위도 받아 신앙과 학문을 겸비한 청년이었다.
그런데 빅토리아장로교회 총회는 선뜻 데이비스를 받아들여 파송하지 못하였다. 극동의 조선은 그들의 선교 일정에 없었고 총회의 이름으로 파송하기에는 너무 위험이 많은 미지의 땅이었다. 그들은 그동안 호주의 원주민과 남태평양 특히 뉴 헤브리데스(지금의 바누아투) 선교를 위하여 인적과 재정 자원을 집중해 왔던 것이다.
그때 빅토리아장로교회 안의 청년친교연합회(Young Men’s Fellowship Union)란 한 단체가 데이비스의 한국선교 재정지원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연합회는 기독 청년들이 모여 기도하고, 성경 읽고, 신앙생활을 서로 격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된 단체이다. 그런 단체가 재정적으로 부담스러운 해외 선교를 후원하기로 하였다. 학교 교장으로서의 성공적인 위치를 포기하고 희생적이고 헌신적으로 미지의 땅에 자신을 바치려 하는 청년 데이비스에 감동하여 그 책임을 기꺼이 맡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결정을 총회가 인준하였고 그를 목사로 안수하여 파송하였다. 이렇게 조선이란 나라가 빅토리아의 교회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에도 널리 알려지게 되어 많은 호주인이 데이비스의 한국선교 활동 소식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이 지면에서 더 언급하지 않겠다. 빅토리아장로교회의 한국선교 역사가 본 소고의 목적은 아니다. 다만 1889년부터 시작된 호주인들의 한국선교는 1942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추방될 때까지 놀라운 모습으로 진행되었다. 빅토리아장로교회는 헨리 데이비스를 포함한 남성 선교사 24명과 여성 선교사 54명을 한국에 파송하여 지원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학교, 병원, 복지시설 등을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그곳에서 일한 한국인 직원 봉급까지 주었다. 어떤 경우에는 한국인 직원이 은퇴하면 연금까지 지원하였다. 이것은 물론 빅토리아교회 남녀 선교단체 회원들의 헌신적인 회비와 모금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당시 한국의 호주선교회는 주로 가난하고 사회에서 소외된 어린이, 여성,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였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글을 가르쳐 주고, 병을 고쳐 주고, 사회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일으켜 주었다. 자신들의 주님을 사랑하듯이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사랑과 은혜를 나눈 것이다. 호주선교사들을 지원하던 빅토리아의 교인들이 얼마나 한국인을 사랑하였으면 선교사들이 보내는 편지를 ‘로맨스 이야기’(캠벨, 184) 읽듯이 기다리며 읽었다고 하였을까.
빅토리아장로교회 설립 50주년에 우연히(그러나 섭리 가운데) 심은 작은 씨앗 하나가 이처럼 놀라운 열매를 맺었고, 수많은 한국인이 그 은혜를 입어 현재 한국과 호주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교회 역사는 선교 역사
시드니한인연합교회가 올해로 설립 50주년을 맞았다. 그동안 본 교회는 어떤 선교를 해 왔을까? 교회 역사를 여러 각도에서 조명해 볼 수 있겠지만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명제 중의 하나가 ‘교회사는 선교 역사’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본질은 곧 선교이기 때문이다. 지상의 교회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성취하기 위함이기에 선교적 관점에서 교회 역사를 정리하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라 하겠다.
본 교회가 존재 자체로 지역사회에 어떤 빛이 되었으며, 가난하고 상한 자를 얼마나 위로하고 봉사하였으며, 땅끝 어디까지 이르러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가 하는 질문이다. 여기서 필자는 선교의 가시적인 결과 즉 선교 활동의 빈도나 세례받은 자의 수 혹은 개척교회나 지교회의 현황만을 묻는 것은 아니다. 예전의 호주선교사들이 한국에서 하였듯이 가난하고 소외되고 차별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어떤 자기희생을 하였으며, 동시에 그 공을 자신이나 교회의 자랑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께 돌렸는가 하는 성찰이다.
본 소고는 그러나 그 질문에 충실히 대답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민교회의 특성 중의 하나가 당장의 교회 존립과 운영이 시급하다 보니 제대로 된 기록을 충분히 남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의식 있는 교회 지도자가 기록을 남긴다 하여도 후대에 가서 보관이 잘 안 되어 유실되기도 하니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본 소고는 시드니한인연합교회가 제공한 자료, 호주 한인 이민교회에 관한 수 권의 단행본, ‘크리스찬 리뷰’지에 실린 글 등을 근거하였음을 밝힌다.
먼저 시드니한인연합교회의 선교 활동을 말하려면 교회를 설립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 존 브라운(John P. Brown) 즉 변조은 목사를 지나칠 수 없다. 그는 1960년 한국으로 파송받아 마산과 서울에서 활동하였다. 1972년 호주로 귀국한 그는 총회 선교국에서 일하면서 시드니에 있는 한인들이 한국어로 예배와 친교를 나눌 수 있도록 지원하며 도왔다. 자신의 선교 신학과 경험을 자연스럽게 한인 교인들과 공유하며 교회가 선교 지향적인 교회가 되도록 안내한 것이다. 본 교회의 초기 선교 활동 중 호주 원주민 선교 지원, 한국 부산 일신기독병원과 영등포산업선교회 지원 및 선교사 파송 등은 그의 영향력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홍길복 목사는 자신의 글 ‘변조은-그의 삶과 생각’에 ‘시드니한인연합교회’의 이름 자체에 내재하여 있는 에큐메니컬 특성을 말하고 있다.
“...그 어떠한 구별도 없이 모두 하나가 되어 한 예배당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성도의 교제를 이루어갔다. 그래서 교회 이름도 호주연합교회가 생기기 전부터 이미 ‘시드니한인연합교회’로 시작이 되었다. 이것은 지도자로서의 변조은 목사가 지닌 신학적 성격을 반영한 것이었다.”(홍길복, 47)
변조은 목사의 목회적 특성이자 장점인 선교와 에큐메니컬 신학은 시드니한인연합교회를 교단과 지역과 국가의 경계선을 뛰어넘는 선교 활동을 하도록 인도하였다. 첫 담임 목사로는 월남에서 군목으로 일하였던 김상우 목사가 부임하여 초기 한인들의 호주 생활 정착과 신앙 활동을 도왔다. 그 후 1981년 기독교대한감리교회에서 부임한 이상택 목사는 교회의 선교와 에큐메니컬 활동의 외연을 좀 더 확장하였다. 그는 교회가 ‘시드니의 모 교회로 교민사회의 리더 역할을 하고, 호주 다문화와 호주 교단에도 크게 기여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봉사와 선교와 돌봄을 감당하는 교민사회의 큰 교회’(이상택, 74)로 성장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1980년대 진행되었던 본 교회의 선교 활동 중 두드러진 점은 호주 주요 도시 한인교회 설립과 중동선교였다. 이상택 목사는 당시 두바이를 포함한 중동지역을 수차례 방문하며 선교기행문을 남기었다.
“1989년 4월 22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창립한 헝가리한인교회 창립 1주년을 맞이하여 이상택 목사는 창립예배 인도차 지난 4월 24일 출국하였다. 지난해 3월 한국이 공산권과 첫 번째 수교를 맺은 후 처음 세워진 한인교회였다는 뜻깊은 헝가리한인교회는 많은 성장을 이루었으며 특히 연합교회의 재정적 지원으로 담임목사의 생활비 전액을 매월 지원해 오고 있다.
이상택 목사는 5월 4일 귀국 예정이며 귀로에 그간 중동선교를 지원해 왔던 두바이한인교회를 방문 자매교회 관계를 맺을 예정이며 중동지역선교에 관문이 되는 두바이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중동지역 선교전략을 구체화 시킬 계획이라 한다.”(크리스찬 리뷰, 51)
그 후 시드한인연합교회는 영국장로교회에서 온 문문찬 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의 류성춘 목사,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우병진 목사가 목회하였고, 현재는 호주연합교회의 조삼열 목사가 부임하여 선교 활동을 펼치고 있다. 다양한 교단 배경을 가진 목회자가 담임 목사로 활동하는 것은 선교 활동의 일관성과 지속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점도 있지만, 동시에 경계선을 넘어 선교의 지평을 넓고 초교파적으로 가질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본 교회의 선교 활동에도 그 장단점이 모두 드러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호주 국내에서의 선교 활동
1975년: 월남 피난민 구조금을 위한 특별헌금, 레드펀 원주민 병원에 장난감 기증
1977년: 예산의 10%를 선교비로 쓰기로 결정, 다윈의 원주민 신학교 지원
1979년: 서부한인교회 설립을 위한 방문
1981년: 서부한인교회 개척을 위한 헌금
1984년: 캔버라 개척교회 설립 및 지원
1988년: 아델라이드한인연합교회 개척 및 설립 예배
1989년: 골드코스크한인연합교회 설립 예배
1990년: 록데일한인교회를 지교회로 승인
1994년: 케인즈한인연합교회 창립예배
한국과 해외에서의 선교 활동
1975년: 부산 일신부인병원 설립 기금 후원
1977년: 한국의 시골 미자립교회, 영등포 일대 산업선교, 한국의 수재민을 위한 헌금
1981년: 고국의 불우한 이웃을 위한 성탄 헌금
1984년: 고국의 수재민을 위한 헌금
1985년: 파키스탄 선교사 가정을 위한 고난주간 헌금, 임경란 선교사 영등포산업선교회 파송 후원
1986년: UCA와 대한감리회본부와의 파트너 관계 공헌에 감사하는 감 독 회장의 표창패, 한국의 사회복지 기관을 매월 100불씩 후원, 한국 농촌 선교비 매월 100불씩 후원
1987년: 농촌유아원 선교(한국기독교산업개발원 주관) 지원, 파푸아뉴 기니아 선교 지원, 정미감리교회 지원
1989년: 김진엽 의료선교사 부산일신병원 파송예배, 부다페스트한인교 회 설립, 아현감리교회와 자매결연, 가봉선교사/터키선교사 지 원, 한호선교 백주년기념대회 참여
1990년: 두바이한인교회와 자매결연
1991년: 중동지역 선교대회 지원, 오클랜드한인연합교회 설립
1993년: 중동선교를 위한 바자회
1995년: 중동선교대회 지원
2001년: 인도 지진 참사를 위한 구제 헌금
2004년: 북한 용천 폭팔 피해자 의약품 헌금, 크리스마스 볼을 위한 헌 금
2008년: 교회 지원 선교사와 선교단체
①송재천 목사 (중국 쿤밍지역)
②김성훈 목사 (중국 단동에서 탈북자 지원)
③인세반 박사 (유진벨 이사장/ 북한 결핵퇴치 사업)
④ 박세록 장로 (호주 샘 대표 / 중국 단동과 연변에서 북한 탈북자 및 중 국 동포 의료선교)
⑤홍성택 장로 (북한 라선 고아원 원장/ 라선 고아원 운영)
⑥김용환 목사 (방파선교회/ 피지와 바누아투원주민 선교 및 교육)
⑦이향모 선교사 (공산권 알바니아 선교사)
⑧홍혜영 선교사 (남아프리카 공화국 / 원주민 줄루족 선교)
⑨박동권 선교사 (필리핀 칸타봉/ 필리핀 산족 교육 선교)
⑩박서근 목사 (부산 미문 장애인 교회)
⑪호주 성서 공회 (캄보디아 및 아프리카 문서 선교)
바누아투 청년 단기선교
2010년: 아이티 지진 참사를 위한 헌금
2011년: 한민족세계선교회(KEWM)를 위한 후원의 밤
2013년: 구역별 선교지 지정-인도네시아, 중국 등
2015년: 네팔 대지진 구호 헌금
2016년: 캄보디아 의료선교 지원, 한국 포항 연탄은행 지원
2022년: 통가 화산 폭발과 쓰나미 피해자를 위한 헌금
2023년: 튀르키에와 시리아 지진 피해를 위한 헌금
선교 활동의 일관성과 지속성
지난 50년 동안의 시드니한인연합교회 국내와 해외 선교 활동과 지원은 놀랍다. 호주 국내에서는 주요 도시인 퍼스, 아델라이드, 캔버라, 골드코스트 등에 교회를 개척하여 지원하였고, 동시에 한국에서 목회자를 초청하여 돌보게 하여 자립 교회로 성장시켜왔다. 본 교회의 비전 있는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 그리고 헌신하고 기도하는 교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을 포함한 해외에서도 흩어져 있는 기독교인을 모으고, 부흥회를 인도하고, 헌금하여 교회를 지원하고 설립하였다. 한국의 시골교회, 복지선교, 산업선교, 병원선교 등을 지원하였고, 중동에서는 중동선교대회를 지원하며 헝가리, 아랍에미리트, 뉴질랜드 등에 교회를 개척하고 후원하였다.
반면에 교회 안에 분쟁이 발생하여 담임 목사가 부재하거나 교인이 흩어져 국내외 선교 활동이 뜸해진 시기도 있었다. 이럴 때 선교 활동의 일관성과 지속성이 유지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교회의 어려움은 선교 지원의 단절로 이어질 수 있고, 그것은 곧 선교 현장의 위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2000년대를 지나면서 본 교회의 선교는 장기적이고 집중적인 선교 활동에서 점차로 단기적인 선교 현장지원과 구호 지역 헌금 후원의 방향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또한, 교회 재정의 최소 10%를 선교 활동에 사용하기로 한 초기의 원칙도 지켜지지 못한 듯하다.
그런데 정말 교회가 부흥하고 재정이 넉넉하였기에 선교 활동에 나선 것일까. 아니면 어려워도 선교 활동을 왕성하게 하니 교회의 부흥도 함께 일어났던 것일까. 즉 선교라고 하는 교회의 본질에 충실할 때 교회도 부흥한 것이 아닐까. 뉴사우스웨일스 시노드 선교국의 예전 구호인 ‘Mission Comes Home’, 즉 선교는 이제 해외에서 국내로 돌아온다는 말은 그래서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인 것이다.
나가는 글
교회 역사 반세기를 다양하게 기념하고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도 꼭 필요한 일이지만, 동시에 필자의 질문은 시드니한인연합교회가 이번 50주년을 맞아 어떤 선교의 씨앗을 심을까 하는 것이다. 어둠과 무지 속에 있던 경상남도 선교의 문이 헨리 데이비스를 파송한 빅토리아장로교회에 의하여 열렸던 것처럼, 이 지구상 어떤 소외되고 눌린 곳의 사람들이 시드니한인연합교회의 선교 활동으로 구원받고 자유케 될까.
하나님의 기적은 우리의 거창한 선교계획이나 큰 재정에 있지 않고, 헨리 데이비스와 같은 한 희생적인 청년의 자원과 그를 재정적으로 돕겠다는 교회의 한 작은 부서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참고 도서>
권순형 편, 「크리스찬 리뷰」, 1990년 5월.
캠벨, E, ‘50년 후에’, 『호주장로교 한국선교 설계자들』, 동연, 2020.
양명득 & 클라이브 피어슨 편, 『호주이민 한인교회 30년』, UTC, 2004.
양명득, 『다문화 사회 다문화 교회』, 한장사, 2009.
______, 『한국교회와 호주교회 이야기』, 한장사, 2012.
______, 『호주선교사 존 브라운』, 한장사, 2013.
______, 『첫 호주인 선교사 헨리 데이비스와 그의 조카들』, 동연, 2020.
이상택, ‘기독교대한감리교회와 호주연합교회의 선교관계’, 『한국교회와 호주교회 이야기』, 2012.
_____, 『새 교회와 새 땅』, 한장사, 2011.
홍길복, ‘변조은-그의 삶과 생각’, 『호주선교사 존 브라운』, 2013.
-----, 『호주 디아스포라 목회와 신학』, 한장사,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