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다문화사회와 재호 한인동포
- 호주 백호주의의 등장과 발전
호주와 뉴질랜드는 영국이라는 국가 밖에서 가장 영국적인 나라로 알려져 있다. 호주는 지리학적으로 아시아와 남태평양에 위치하고 있고 가장 근접한 이웃이 인도네시아로 다인종, 다문화, 다 종교 국가이다. 그럼에도 호주가 현재 이렇게 영국계 국가로 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출생지와 관계되는 것으로 캐나다나 미국보다도 더 아이랜드계와 스코트랜드계 인종들이 호주 주류사회의 구성원을 이루고 있고, 그들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고, 인구의 4분의 3이 영어만 사용하고 있다. 호주를 영국적인 문화와 국가로 성장시키기 위한 계획적이고 정교한 정책이 제도적으로 진행되어 왔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백호주의 정책이었다. 이것은 백호주의가 철폐된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국가정책 골간으로 이민정책을 통해 다른 인종의 호주 유입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졉(Jupp)은 그의 책 From White Australia to Woomera(백호주에서 우메라까지)에서 지난 150년동안 진행된 호주이민정책은 세개의 기둥에 근거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영국의 헤게모니와 백인통치의 유지; 호주의 경제와 군사적 강화를 위한 선택적인 이민; 이 과정을 국가가 철저히 통제 (Jupp, 2002: 6)
이 세가지 정책이 현재 나라 안팍에서 많은 도전을 받고 있지만 두번째와 세번째는 여전히 현대 호주국가의 중요한 정책이 되고 있다.
이런 실제를 역사적으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낸 정책이 바로 백호주의 정책이다. 1901년 호주가 영국에서 독립되어 연방정부를 구성한 해에 공포된 ‘이민 제한법’ (Immigration Restriction Act)으로 공식화된 백호주의 (Australian White Policy)는 이미 1850년대 중국인의 골드 러쉬 이후 ‘황색공포 (yellow peril)’의 확산으로부터 그 정서가 형성되고 있었고, 향후 거의 백년동안 호주의 사회와 정치에 막대한 영향을 미쳐온 정책이다. 인종차별을 기본으로하는 이 법은 호주의 백인인종 순수성 보전, 아시아의 갚 싼 노동력에서 호주 노동인구 보호, 그리고 아시아의 침략 가능성에 대한 호주국가 방어 등이 그 골자이고, 이 정책을 통해 내적으로는 호주 백인 민족국가의 일치와 애국심을 증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정책은 영어구술시험 등의 제도적 장치를 철저하게 진행하여 유색인종을 배제하고 영국백인들 중심의 국가로 기틀을 잡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구증가인가 아니면 멸망인가 (populate or perish)’라는 슬로건으로 집약되는 인구번성의 절박한 필요성과 사회의 하부구조를 발전시키기 위한 노동력의 수요, 그리고 특히 인종차별에 대한 아시아국가들의 반발과 원성으로 인하여 이민제한정책은 1950년대와 60년대에 단계적으로 무너지면서 비 유럽계 이민자들을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새로 들어선 노동당 정부가 1973년 전격적으로 다문화주의를 공포하므로 백호주의 정책은 공식적으로 폐기된다. 당시 그레스비(Grassby) 이민성 장관이 아시아를 방문하며 새 이민법을 적극 홍보하는데 “백호주의는 죽었다. 나에게 삽을 달라. 그것을 묻어 보이겠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민정책이 여러 굴곡을 거치면서 백호주의는 이제 호주정부의 공식적 플랫폼에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호주를 영국계 국가로 지키려는 백호주의 정신은 여전히 많은 호주인들 마음속에 사라지지 않은 이데올로기로 다른 형태의 모습으로 계속 드러내어 왔고, 심지어 너무 조숙하게 백호주의 정책을 포기하였다는 원성이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1984년 호주 역사학자 블레이니(Blainey) 교수의 아시아인 이민과 다문화정책에 대한 공개 비판으로 시작된 논쟁이 1997년 등장한 핸슨 (Henson)의 완 네이션 당 (One Nation Party)으로 그 절정을 이루었다. 핸슨 국회의원은 호주가 아시아인으로 넘쳐나고 있다며 다시 이민제한정책으로 돌아 갈 것을 호소함으로 호주사회에 적지 않은 지지와 영향을 이끌어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 뉴스폴(Newspoll) 여론조사에 따르면 호주인들 70% 이상이 다문화주의를 지지한다고 응답하고 있다. 2001년 템퍼 사건으로 알려진 난민선박을 돌려보낸 사건과 그에 따른 하워드(Howard) 수상의 발언 “이 나라에 누가 그리고 어떤 상황에 들어 올지는 우리가 결정한다”는 인종차별을 다시 정당화하는 분위기였다. 또한 2004년 시드니 레드펀 지역에서 발생한 원주민 폭동사건과, 2005년 시드니의 크로눌라 해변가에서 일어난 인종폭동은 호주사회에서 거의 보지 못하였던 적극적인 집단 인종폭력 사건으로 증가하는 중동계와 아시아인 이민자들로 불안해 하는 호주사회의 한 단면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진행형으로 지금도 난민과 중동계 혹은 아시아계 이민자들은 호주정치의 뜨거운 감자로 항상 논쟁의 주제이며, 여당과 야당할것 없이 보수적인 이민정책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터번(Tavan)은 그의 책 The Long, Slow Death of White Australia(백호주의 길고 느린 죽음)에서 비 유럽계 이민자들에 대한 영국계 백인들의 근본적인 태도변화가 없을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 대한 원망이나 적개심이 커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백 여년동안 지속되어 온 백호주의 정신과 가치를 그들이 쉽게 버릴 수 없을뿐 아니라, 그것이 여전히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 호주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리고 호주백인들은 그 정책 철폐에 대한 역사적인 중요함을 아직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Tavan, 2005: 4).
『인종차별의 간추린 역사』에서 프레드릭슨(Fredricson)은 현대 세계역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공개적인 인종차별 정권 셋을 다루고 있다. 독일의 나찌정권, 남미국의 노예정책, 그리고 남아프리카의 인종분리정책이 그것이다. 그러나 호주의 백호주의 정책은 간발의 차이로 빠져 있는데 이 책의 서문을 쓴 매네(Manne)는 호주 백호주의 정책도 공개적인 인종차별 정책이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Fredricson, 2002, XII-XIII). 이런 역사적인 배경을 가진 호주를 현재 다문화 사회라고 칭하는데 그것이 얼마나 사실적이며 또 그 의미가 무었인지 다음에서 다루도록 한다.
- 호주 다문화 정책과 실제
현대 호주인들의 고민 중에 하나가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다. 호주인은 누구인가? 호주인이라는 의미는 무었인가? 그리고 이런 담론들은 더 나아가 호주문화는 무었인가? 그 문화는 어떤 가치를 담고 있는가? 라는 더 깊은 염려들을 유발하고 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다양성 (diversity)’이란 단어가 그 대답의 하나로 등장하고 있다.
호주인들 중에는 세계 200여개의 나라에서 온 다양한 종족들, 전체 인구의 50페선트정도가 해외에서 태어 났거나 부모중 한명이 해외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이 스스로를 호주인이라 부르며 호주 땅에서 새로운 삶을 창조해 나가고 있다. 호주 해안선을 따라 발전된 주요 도시들을 보면 말 그대로 다문화 다종족 도시의 모습을 띄고 있으며, 어떤 지역은 이곳이 호주인지 월남의 한 거리인지 혹은 레바논의 한 지역인지 모를 정도로 게토화되었는 곳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라는 단어는 호주에서 죽어 가고 있는 단어 아니면 적어도 호주정치인들이 기피하고 있는 단어가 되었고, 그 대신 다양성이란 단어가 현대 호주의 정체성을 설명하는데 자주 사용되고 있는 이유는 무었인가? 그만큼 다문화주의는 그동안 호주역사에서 정치적으로 사용되어 많은 논쟁과 분열을 야기한 개념으로 일반 호주인들에게 부정적인 인식을 가져 왔다는 사실이다.
먼저 다문화주의가 무었인가?라는 질문이다. 호주정부가 1973년 백호주의를 폐기하면서 당시 국민들의 여론이나 공감을 얻는 절차 없이 정치권 밀실에서 다문화정책을 기안하여 일방적으로 공포하였다는데 기인한다. 다문화주의가 장차 호주사회에 어떤 영향을 가져 오는것인지, 다문화 사회에서는 다른 인종과 종교와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 것인지, 무었을 포기하고 무었을 수용해야 하는지 등에 관한 충분한 이해나 교육없이 호주정부는 다문화정책을 국가정책으로 홍보를 시작한 것이다.
호주 주류문화에 이민자들의 문화가 완전히 흡수되기를 기대하는 동화정책(assimilation policy)이나 이민자들의 문화를 유지하면서 주류사회와 새로운 문화를 이루는 통합정책(integration policy)과는 어떻게 구분이 되는지, 그 실제는 무었인지 대한 논쟁은 계속되었다. 1977년 ‘다문화 사회로서의 호주 (Australia as a multicultural society)’라는 문건이 정부에서 나옴으로 학교 교육과 언어 정책에 대한 실제가 좀 더 구체적으로 제안되었지만, 1978년 당시 호주수상에게 제출된 갈발리(Galbally) 보고서가 비로소 다문화주의의 근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보고서는 다문화 정책의 원칙을 말하고 있는데 현재까지 각 단체에서 인용하고 있는 내용이다.
1) 우리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그들의 가능성을 온전히 성취하기 위한 평등한 기회를 가지며, 사회의 프로그램이나 복지에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2) 모든 개인은 편견이나 불이익 없이 개인의 문화를 유지할 수 있으며, 반면에 다른 사람들의 문화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권장한다.
3) 이민자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이나 복지가 전체 사회에서 제공되어야 하고, 그리고 현재 그들의 특별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평등한 기회와 돌봄이 있어야 한다.
4) 복지와 프로그램은 이민자들과 충분한 협의를 거쳐 계획되고 운영되어야 하며, 그리고 스스로 도울수 있는 제도를 제공하여 그들이 이 사회에서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Jupp, 2002, 87).
1980년 초 호주정부 이민성장관의 지시로 연구하여 보고된 다문화정책에 대한 제안서도 그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보고서는 다문화주의는 호주의 여러 인종들의 관계를 위한 가장 적절한 모델이고 정부의 소수민족정책을 위한 최선의 근거라고 제안하면서 다문화주의를 다음과 같은 두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첫째는 다양한 문화 그룹들의 관계와 제도적인 기구들을 설명하는데 이것은 자원, 특권 그리고 참여에 관한 모든 결정권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고, 둘째는 사회와 국가의 이상을 위해 인종들간의 자유로운 왕래와 공동의 과제를 나누는것이다(Zubrzycki, 1982, 2)
이 보고서는 다문화 사회에 기회의 평등성을 가지고 여러 인종들간의 자유로운 경쟁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한 두 인종이 독점하는 것을 극복할때 다문화주의의 참 성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이민심사점수제와 사업이민프로그램이 도입되면서 전례에 볼 수 없었던 많은 비 영국계 이민자들이 호주에 정착하였으며, 이런 분위기에서 1984년 아시아계 이주자 증가와 다문화주의 비판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고, 이후 계속하여 다문화와 이민정책에 대한 개편이 정부차원에서 있게된다. 1989년 호주정부는 다문화주의를 국가정책으로 발표하고, 1999년 또 다시 다문화주의를 새 국가정책으로 발표한다. 그 다음해는 그 실천을 위한 다문화 호주위원회가 정부 안에 설치되어 이후 다문화주의에 대한 전략적 방향을 제시하게 된다.
당시 다문화 정책의 네가지 원칙을 제시되었는데 첫째는 모든 국민들의 책임을 강조하였다. 호주국가의 근본인 자유와 평등을 지키기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이 시민의무를 다할 때 가능하다. 둘째는 각 사람을 존경해야 하는데 자기 문화가 소중한 것처럼 다른 사람등의 것도 존중해야 한다. 세째는 각 사람이 갖는 평등권으로 인종, 문화, 종교, 언어, 성, 출생국가 등에 의해 차별받지 않는 권한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경제의 생산성 공유로 모든 국민들이 문화의 다양성과 경제의 생산성에서 오는 이윤을 수혜한다는 것이다 (Multicultural Australia: United in Diversity, Strategic Direction, 1994).
1996년에는 인종관계에 대한 정책선언이 연방의회에서 의결되었고 이것은 다섯가지의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1. 모든 호주인은 인종과 피부색, 신념과 출신지역과 관계없이 동등하게 존중되고 대우받으며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으며,
2, 인종과 피부색, 신념과 출신지역에 근거하여 전혀 차별받지 않는 이민정책을 지속하고,
3, 사회와 경제적으로 심각한 어려움에 처한 원주민과 토레스해협 섬주민들과 치유와 화해의 과정을 계속하며,
4, 우리의 국가, 민주제도, 그리고 가치에 대한 모두의 헌신을 통해 단합하여 호주를 문화적으로 다양하고 관용적이고 개방적인 사회로 지속시키며,
5, 우리 모두가 원하는 사회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어떤 형태의 인종적 폭력과도 단절한다 (Federal Government, ‘Statement on Racial Tolerance’, 1996).
그러나 이러한 다문화주의의 이상이 계속하여 호주의 주류사회의 일각으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다. 딕슨(Dixson)은 다문화 사회에서 특히 호주 백인들의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들이 사회의 결속과 일치를 가져올 수 있는 중추적 기능을 다할 때 비로소 분열의 두려움, 시민정체성의 상실, 정서적 깊이의 메마름,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무관심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혼란스러운 다문화 사회에서 앵글로 켈트계의 주류인들이 정체성과 가치를 굳건히 할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Dixson, 1999: 6-8).
이런 불안은 호주 다문화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 우파와 좌파 모두에게 나타난다. 좌파들의 비난은 다문화주의가 여러가지 희망과 약속을 제공해 왔지만 실제 결과는 미미하고 교육적 성과가 저조할 뿐 아니라, 인종차별과 백인 우월주의를 은폐시키고 있다는 비판이다. 반면 우파들의 염려는 여러 인종들의 문화를 불필요하게 강조하므로 오히려 인종간의 경계선과 민족심을 더 강화하여, 사회결속을 저해하고 국가를 분열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또한 정부 안에서도 수상이 바뀔때 마다 다문화정책을 시행하는 부서가 바뀌거나 통폐합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일관성있는 정책이 시행되지 못하고 예산만 낭비되고 있다는 비평이다. 1996년 하워드 수상이 집권하면서 수상실의 다문화부서를 폐지하였고, 이민프로그램과 난민수용인원을 대폭 축소하였는데, 사실 그 이후 다문화주의에 관한 공식적인 담론이 현격하게 위축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한편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호주정부가 더 관심을 가지고 실행하고 있는것이 시민권받기 운동이다. 2001년부터 시민권의 날(Citizenship Day)을 정하여 새로 시민권을 획득한 사람들을 축하해주며 모두가 그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를 갖게하였다. 또한 정부는 2007년 이민과 다문화부를 이민과 시민권부로 바꾸므로 그 정책의 우선권을 표명하였다. 많은 이민자들이 호주의 영주권을 취득하여 호주에 살면서도 본국의 시민권을 유지하며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다. 호주정부 입장에서 보면 시민권 취득과 영어 사용이야말로 국가개념을 확고히 하고 국가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어 애국심을 갖게 할 뿐 아니라 법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준수하게 하는 중요한 전략적 정책이다. 이것은 강압적으로 되는 것이 물론 아니고 다문화주의가 확고할 때 시민이 되고 싶고, 또 시민권을 가질 때 다문화 사회에 책임있게 참여 할 수 있기에 상호보완적인 소위 ‘다문화 시민권’ 개념이다.
단적으로 이 현상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예가 바로 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 축구대회이다. 평상시에는 호주인으로 살다가 이때가 되면 본인이 출생한 나라의 국민으로 돌아가 본인의 민족팀을 열심히 응원하는데 시드니에서도 이탈리아인들이 많이 사는 라히카드 지역이나 멜본의 그리스인 지역 등에서는 그들의 국가가 울려퍼지며 큰 축제가 있다.
호주에서 태어난 필자의 고등학교 아들들도 평소에는 한국인인지 호주인인지 알지 못하는 이중적이고 복합적인 생활을 하다가 월드컵 축구대회 기간이나 올림픽 때는 분명한 한국인으로 돌아가 애국자가 된다. 2010년에도 한국, 북한 그리고 호주 순으로 관심을 갖고 응원하는 모습을 볼 때 호주의 시민권을 가진다고 해도 호주정부가 원하는 국민으로서의 일치감을 끌어 내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정부는 최근 세계적인 안보위기로 인하여 시민권 시험제도를 다시 도입하였다. 호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호주 역사와 가치문화를 알아야 한다는 의도이지만 일각에서는 백호주의 시대의 영어시험처럼 특정한 민족을 배제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냐는 지적을 받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시민권받기를 권장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제한해야 하는 현실이 세계의 다문화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고민이라 하겠다.
커야샤리안(Kerkyasharian) 뉴싸울스주 다문화협의회 회장은 “Multiculturalism in Australia - Today and Tomorrow” (호주의 다문화주의-오늘과 내일)란 소책자를 통해 호주의 다문화정책이 성공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호주의 평등주의 정신이 이민자들이 호주 땅을 밟는 순간부터 법적으로 평등한 자격을 갖게 하였고, 사회의 하모니를 이루려는 다문화정책을 정부나 야당이 적극적으로 추진해 왔고, 정부에서 실제적으로 다문화 부서를 두어 예산편성, 지도자훈련, 정책발전, 학술대회 등을 지원해 왔고, 그리고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글로벌화의 일환으로 정보통신이 발달되므로 이제는 이웃에 대한 개념이 달라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Kerkyasharian, 1998: 5-6).
또한 그는 호주의 다문화정책이 성공하고 있는 이유를 몇 가지로 지적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첫째, 다문화정책은 호주사회의 일치성과 단결을 가져왔는데 그것이 걸프전쟁과 이라크전쟁 시 호주에서 시험되었지만 큰 전쟁의 여파가 없었고, 둘째, 호주사회에는 미국이나 영국에서 보는 것 처럼 과격한 인종분규가 없다는 사실이며, 셋째, 다문화주의로 인하여 국제적으로 경제수익과 자원이 증가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는 호주내에서의 일상생활이 다양한 문화, 예술, 음식등으로 더 흥미로우며 풍요로워지고 있다고 하였다(Kerkyasharian, 1998: 6-7).
그러나 호주의 저명한 사회학자 메케이(Mackay)는 Turning Point: Australians Choosing Their Future라는 책에 호주 다문화정책이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1) 현대판 부족주의: 현 시대에 살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부족주의를 버리지 못하는데 다른 부족에 대한 무관심이나 혹은 적대감은 인종차별을 조장하고 있다. 같이 이웃이 되어 살 수는 있지만 그들이 절대로 우리 부족은 될 수 없다는 우월의식이 존재하여, 나의 부족 보호와 누리고 있는 특권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다문화관계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있다.
2) 원주민들과의 관계: 영국인들이 오기 전 이 땅에 살고 있던 250여개의 부족들이 호주의 다문화주의에 포함되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들의 투쟁은 훨씬 근본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과 화해되지 못하는 한 온전한 다문화 사회를 이룰수 없다는 딜레마이다.
3) 다문화주의, 그 단어 자체: 이 단어가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너무 이용되어 호주인들 뇌리 속에 거부감이 존재하고 있다. 자연적으로 발전된 단어가 아니라 정책적으로 사용되어진 단어이기에 여러가지 부정적인 역사적 짐이 남아있다.
4) 호주시골생활의 동경심: 다문화 사회는 결국 대도시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는데 사막이나 산간지역의 시골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도시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는 호주인들이 시골생활을 미화하며 그런 ‘진짜 호주생활’을 동경하며 돌아갈 것을 꿈꾸고 있다는 현실이다.
5) 혼합된 정체성: 호주에서 태어난 2세나 후세들이 살 수 있는 문화나 환경이 아직 조성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부모세대와는 또 다른 지대에서 호주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있지만 이들의 정체성으로부터 시작하여 여러 생활의 이슈들이 충분히 성찰되지 않고 있다 (Mackay, 1999: 36-48).
호주에서 이민자들을 가르켜 흔히 ‘에쓰닉 (ethnic)’이라고 칭하여 호주정부 부처에도 에쓰닉 담당 커미션(Ethnic Affairs Commission)이 이민자 관련 부서였다. 그러나 에쓰닉이란 단어가 호주 사회에서 주로 부정적이고 분열적인 이미지를 동반하여 정작 이민자 자신들은 스스로가 에쓰닉으로 불리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도 호주 백인들처럼 ‘호주인’으로 불리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던차에 뉴싸우스웨일즈 (NSW)주 정부는 2000년 Ethnic Affairs Commitssion을 Community Relations Commission (커뮤니티 관계 커미션)으로 정부부처 이름을 개명하며 “이것은 우리 뉴싸울스웨일즈 주 이민자공동체의 승리이다. 그들은 더 이상 ‘에쓰닉’이 아니라 자랑스런 호주인이다”라고 당시 수상이 공포하고 있다 (Premier of NSW News Release, 2000: 1).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최근 호주사회에 ‘호주인답지 않은 (unAustralian)’ 이란 단어가 등장되어 종종 사용되고 있다. 호주 주류사회의 가치나 문화를 따르지 않으면 호주 시민권자라고 해도 호주인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만약 너희가 우리와 같지 않으면 우리를 적대하는 사람들이다’ 라는 주류사회의 무언의 압력이 담겨 있다. 현재 이런 분위기의 가장 큰 희생자들은 물론 호주인들이 두려워하는 회교도인들이지만 타 소수민족들도 그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것이 사실이다.
호주의 다문화주의는 이렇게 한편으로는 법적 제도적으로 호주사회에 확고히 자리를 잡아 회귀할 수 없는 사회가치가 되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복합성과 분열성이 호주인들 마음속에 여전히 두려움을 주고 있다.
- 호주 다문화 사회와 한인동포
호주의 다문화 정책과 이민정책의 부침에 따라 호주에 사는 한인동포들도 그 명암이 바뀌어 왔다. 아시아인 이민에 우호적인 정권이 들어서면 늘어나는 한인 이민자들로 인하여 한인사회도 경제적 활기를 찾았고, 이민정책이 보수적인 정권이 들어서면 현상을 유지하며 새 날을 기다려야 했다. 이러한 굴곡을 거치면서도 지난 50여년간 호주의 한인사회는 숫적으로나 질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해 온 것이 사실이다.
호주의 사회학자 코간(Coughlan)은 그의 글 ‘Korean Immigration in Australia(호주의 한국인 이민)’에 다문화 호주사회 속에서 한인이민자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젊고, 교육수준은 높고, 실업률은 비교적 낮은 한인들의 특성은 호주사회의 경제 발전과 사회 발전을 위해 가치있는 공헌을 하고 있고, 또 이들은 전반적인 호주 복지제도에 부담이 적은 공동체이다” (Coughlan, 1997: 194).
다음은 호주이민과 다문화정책에 따라 발전한 한인이민사를 간략하게 요약한 것이다.
1) 초기 한인 방문자들 (1920-1950)
호주를 방문했던 최초 한인유학생에 관한 기록은 19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호주선교사가 세운 마산의 창신학교의 선생이었던 김호열은 호주장로교의 후원으로 호주에 입국하는데 백호주의 정부로부터 비자를 받아 멜본대학에서 학교행정에 관한 공부를 하게 된다. 그는 멜본에 있는동안 후두암이 진행되어 치료를 받지만 의사의 권고대로 1925년 한국으로 돌아간 직후 사망했다.
1926년 호주선교사 에이미 스키너가 호주에 휴가차 올때 그의 한국어 선생이자 친구인 양한나와 동행한다. 호주에 머무는 동안 그는 유치원 운영에 관해 공부하고 나중에 부산으로 돌아가 고아원을 운영했다.
1934년에는 심문태 목사가 호주에서 기독교교육을 공부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계속 공부한 후 1937년 한국으로 돌아가 사역했다. 1935년에는 세브란스 병원의 이춘철 의사가 연구차 호주에 왔었다. 1937년에는 빅토리아 장로교 총회 연사로 이약신 목사가 초청되었다. 그는 빅토리아주에 몇 달 머물면서 여러교회에서 설교와 강연을 하였고 한국으로 돌아가 진해와 마산에 있는 교회들을 섬겼다. 1937~1939년에는 손옥순과 이영복 간호사들이 멜본에 와 공부를 했는데 나중에 손옥순은 한국정부의 건강과 복지부에서 이영복은 이화여대에서 각각 공헌을 하게된다.
이렇게 대부분 교회기관을 통해 호주로 온 초기 방문자들 대부분이 한국으로 돌아갔는데, 이 당시는 호주 이민제한정책이 왕성하던 시기라 아시아인들에게 거의 시민권을 주지 않았을 때였다. 또한 골드러시때부터 살고 있었던 중국인이나 일본인의 숫자 조차도 크게 감소한 때라 본인이 원한다 해도 호주에 영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즈음 언급되야 할 한인 ‘집단 방문자’들이 있다. 세계2차대전 중 일본에 의해 강제로 징용된 한국 청년중 일본군인들과 함께 포로가 되어 호주에 잡혀 온 162명의 전쟁포로들이다. 이들은 시드니 서북부 카우라수용소에서 포로생활을 하다 전쟁 후 1946년 시드니를 거쳐 한국으로 송환된다.
한국전쟁을 전후해서도 계속하여 호주로 온 한국인들이 있었는데 호주 적십자나 YWCA를 통해, 그리고 특히 호주장로교가 부산에 세운 일신병원의 관계자들이 훈련의 목적으로 호주에 왔고 그 중에 호주에 영주하게 되는 경우가 비로서 나중에 생기기 시작하였다.
2) 초기 한인 이민자들 (1950-1970)
1950년대에 와서 이민 차별법에 대한 변화의 필요성이 호주 정부안에 대두되게 된다. 특히 비 유럽계인들에게 시민권과 영주권을 주지 않는데서 야기되는 외교적이고 상업적인 어려움은 호주 정부의 큰 짐으로 계속되고 있었다.
호주정부가 매년 발행하는 백서를 보면 1957년에 한국인 한명이 호주 시민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최근에서야 그 이름과 배경이 알려 졌는데 그는 곽묘임이라는 여인으로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호주군인 리챠드 가렛(Richard Garett)을 일본에서 만나 호주로 입국한다. 그녀는 시드니에서 곧 결혼하고 빅토리아 주 푼카펀얄에서 외로운 호주에서의 삶을 시작하였고, 현재 시드니에 거주하고 있다. 이 여인의 시민권 수여 연도를 기준으로 후에 ‘호주한인50년사’가 출판된다.
1960년 초에는 호주를 방문하여 호주인과 결혼하므로 영주권을 받아 호주에서 일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런 경우 방문자의 신분에서 영주권을 받는 과정까지 여러 복잡한 어려움이 있지만 호주사회에 정착하게 되는 초창기의 사례이다.
또한 공식문건의 확인이 어려운 1968년 이전을 제외하고 1969년 이후로 지금까지 호주에 입양된 한인 숫자가 3천명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도 당연히 이곳 한인이민사의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첫 가족이민으로 알려진 최영길은 1968년 이민수속 절차를 밟아 가족과 함께 호주에 입국한다. 그의 경우는 한국전쟁에 참여한 호주군인들과의 인연과 호주 재향군인회등의 후원으로 비자를 받아 이민 한 초창기의 경우이다. 당시 시드니모닝헤랄드 신문은 이 가족을 사진과 함께 보도하면서 최영길을 호주군인들이 ‘입양한 전쟁고아’로 소개하였는데 한국에서 함께 일했던 그들과 결국 호주에서 재회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1968년 6월 21일).
주 시드니 총영사관 웹싸이트 한국인 호주이민 역사에 초기 전문직 이민자들에 관한 내용이 간단히 소개되어 있는데 1970년 이전 소수의 유학생및 콜롬보 계획 장학금 수혜 공무원들이 50명에서 60명 수준으로 호주에 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 아시아국가들의 정치적 불안과 공산주의 확장을 막기위해 호주 정부는 다각도로 지원하였는데, 그 일환으로 ‘선한 이웃’정책을 60년대 이전부터 실시하였고 그 중에 성공적인 프로그램이 콜롬보 플랜이었다. 이 장학금제도를 통해 수 천명의 아시아인 학생들이 호주에서 기술을 배울 수 있었고 아시아국가들 중에 이 플랜만큼은 인기가 있었다. 이 플랜을 통해 1960년 입국해 호주에 정착한 소설가 김동호는 내 이름은 티안 (My name is Tian)이란 영문 장편소설로 호주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3) 한인 이민사회의 시작 (1960-1980)
호주 정부는 백호주의 정책을 한편으로 시행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아시아 나라들과의 외교와 경제협력을 계속 유지하였다. 그러므로 한국정부와 호주정부의 외교관계는 더 일찍 거슬러 올라 가지만 주 호주 한국대사관은 시드니 영사관을 시작으로1953년에 개관되었고 1962년에 가서야 대사관으로 승격된다. 한편 호주와 북한과의 국교수립은 1974년에 가서야 이루어지지만 그 다음해 북한대사관은 유엔에서의 의견차이로 호주에서 일방적으로 철수한다.
호주의 백호주의 정책이 공식 첼폐된 1973년을 전후로 호주의 광산과 유전개발에 필요한 지질학자및 헬리콥터 조종사, 보석 디자이너, 그리고 태권도 사범등 소수의 전문기술자들이 호주로 입국하였다. 호주 이민성 웹싸이트에도 1969년에서야 기술이민 프로그램으로 첫 한인 이민자들이 들어 왔다고 적고 있는데 1971년 당시 지질학자로 입국한 남기영은 그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1969년 부터 소수이기는 했지만 서울 서소문에 있었던 주한 호주대사관에서 이민 신청서를 접수하였고 그 일진이 1970년 말과 1971년 초에 호주에 도착하였다. 그 당시의 이민은 소위 말하는 기술이민으로 호주에 필요한 인력을 선발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공계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남기영, 2003: 11).
멜본에서는 한국에서 사역했던 호주 선교사들이 호한회란 이름으로 한인 이민자들을 환영해 주었는데 그들이 작성한 명단에 의하면 1972년 말 멜본에는 영주 거주자가 36명, 그리고 유학생 등이 21명 있는것으로 나와있고, 그 다음해 1973년 초 멜본 한인회 주소록에는 성인 47명, 어린이 22명 초 69명이 기록되어 있다 (남기영, 2003: 11). 호주정부가 실시한 1971년 인구조사에 468명의 한국태생 한인들이 호주에 살고 있는 것으로 기록된 것을 보면 그 당시 시드니에 300여명 정도의 한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한인이민사회에 중요한 발전이 있었는데 1966년 브리스반한인회, 1968년 시드니한인회 그리고 1972년 말 멜본한인회가 각각 창립되었다.
4) 월남전쟁과 사면령 (1970년대)
1975년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막을내린 월남전쟁은 정치적으로 호주에도 논쟁을 불러 일으켰을 뿐 아니라 지역적으로 비교적 가깝다는 이유로 호주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전쟁 고아들이나 보트피플 등의 난민들이 나중에 호주로 입국하기 시작한 것은 물론이고, 그곳에서 일하던 많은 해외 인력들이 호주행을 택했기 때문이다.
월남패망 직전인 1974년 부터 파월기술자 500여명이 관광비자로 입국하였는데, 물론 이것은 그 당시 백호주의 정책의 철폐와 비자 간소화정책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 와 호주정부는 인종차별적인 백호주의 정책에 대해 일본, 필리핀, 인디아 등 주변 국가들로부터 계속 공격을 받고 있었고, 한국의 김수환 추기경도 호주 백호주의 정책이 아시아 나라들로부터 원망을 사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Australian Financial Review, 22 Feb 1973). 내부적으로는 호주의 적은 인구와 아시아 침략의 불안으로 인해 ‘인구증가인가 아니면 멸망인가’ 라는 질문이 2차대전 후부터 끊임없이 대두되고 있었다.
이때 1973년 노동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극히 제한적이었던 아시아 이민을 개방할 뿐 아니라, 호주에 3년이상만 영주하면 누구에게나 시민권을 수여하여 인구증가 정책을 시도하게 되고, 더 중요하게는 아시아국가들과의 정치경제관계를 개선하면서 당시 이민성 장관이 아시아를 방문하며 새 이민법을 적극 홍보하게 된다.
이런 배경속에 월남에서 일하던 많은 한인들은 한국으로 돌아가기 보다 더 나은 미래를 찾아 호주로 오게된다. 1973년 월남에서 호주로 입국한 이상기는 그 당시 많은 파월 기술자들이 그곳에서 저축한 돈과 또 월남전에 참여한 용사라는 배경으로 비교적 쉽게 호주 관광비자를 받았다며, 일년 비자기간이 지나면서 더러는 다른 종류의 비자로 바꾸기도하고, 더러는 비자 유효기간이 지나기도 하고, 또 소수는 그 당시 이민이 쉬웠던 캐나다로 건너갔다고 말한다. 그 당시 한인들은 주로 시드니 시내 근처인 레드펀에 살았고 월남에서의 노동력 경험을 바탕으로 대부분 부지런하고 근면하게 일하면서 실제로 한인사회는 이때부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고 증언한다 (인터뷰, 2005년 12월 8일).
한국의 한겨례 21에 호주 이민사의 산 증인으로 소개된 고 신경선도 월남전 당시 파월 기술자 측량사로 맹호부대에 파견되었었고,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인 1974년 일자리를 찾아 지하자원이 풍부한 남부호주 퍼스에 첫 발을 디뎠다고 적고 있다(179호, 1997년 10월 23일). 이 당시 많은 이들이 열심히 일하는만큼 돈을 벌 수 있고 또 미국달러보다 높았던 호주달러를 벌수있는호주를 기회의 땅 혹은 지상의 천국으로 여기면서 돈 벌어 한국으로 돌아가기 보다, 이제는한국에 있는 가족들을 불러 올 생각을 하게 된다.
1976년 호주 정부는 마침 이민쿼터를 7만명으로 대거 늘리면서 1975년 말까지 입국했다가 비자지간이 지난 소위 ‘불법체류자’들에게 사면령을 내리게 된다. 멜본의 The Age신문은 그 당시 호주건국기념일에 발표된 사면령을 3면에 조그맣게 기사화하면서 비자 간소화 정책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들어와 불법으로 체류하기 시작했다며, 그들중에 범죄 기록이 없고 좋은 시민이 될 수 있는 자들을 선별하여 영주의 기회를 주겠다고 당시 이민성 장관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런 사면령이 앞으로 더는 없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약 8천명 정도의 이민자가 이 사면을 통하여 호주에 영주하게 되고 또 그들의 가족이 줄줄이 입국하게 되므로 ‘체인 이민’이 시작된다. 한인사회도 이 사면을 통하여 숫적으로 성장하게 되는데 특히 여성들과 자녀들이 들어오므로 남자들만의 이민사회 성격이 좀 더 안정적이고 다양하게 바뀌어지게 되고, 70년대 말부터 여러 한인 단체들이 생겨 나기 시작하였다.
5) 호주 한인 이민사회의 성장 (1980년대)
사면령을 통하여 많은 이민자들이 호주에 영주하게 되자 세계 곳곳에 있던 많은 한인들도 기대를 가지고 호주로 입국하게 된다. 특히 한국에서는 물론 중동과 남미에 있던 한인들도 이 시기 입국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호주를 통과하여 다른 나라로 가는것처럼 비행기 표를 구입하면 3일간 호주 체류가 가능하였는데 이것을 이용해 호주에 계속 머무는 방법이 있었다.
호주 프레이저(Fraser) 수상 정부는 사면령이 많은 방문자들을 불법으로 체류하게 만드는 요인인 것을 알면서도 또 한번의 사면령으로 알려진 신분정례화 프로그램을 1980년 선포한다. 영국인이지만 비 유럽계 배우자일 경우에도 엄격하게 제한하던 가족 재결합 정책을 완화하고, 아시아 피난민들 숫자를 늘이고, 또 비자유효기간은 지났지만 이미 호주에 적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신분의 합법화와 영주의 기회를 주는 인도적인 이민정책이 이 당시 진행되고 있었다.
호주 이민성 웹싸이트는 “1976년과 1978-79년 사이에 있었던 사면령으로 500명 이상의 한인들이 호주의 영주권을 갖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1976년 한인의 공식 숫자는 1,460명 이었는데 5년 후 1981년에는 4,514명으로 급증한 것으로 보아 사면령의 영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진으로 보는 호주 이민사’라는 글을 쓴 김인기는 “초창기 체류자들은 주급 $120불을 모아 한국의 가족들 생활비및 자녀교육비로 보내며, 또 한편으로는 이민 경찰의 습격에 항상 긴장해야 하는 이중의 고통을 감당하고 있었다” 고 그 당시 긴박한 상황을 전하고 있다 (2004년 2월 13일: 124).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숨어 다니며 (그 당시 그들은 ‘잠수함’ 혹은 ‘맨발’로 불리기도 하였다) 갖은 고생과 불평등을 견뎌 내다 결국 호주의 시민이되어 가족을 불러들이는 여러 한인들의 경험과 증언은 그것만으로 가치있는 이민역사의 한 부분이다. 그 후에도 1980년 말까지 꾸준히 입국한 사람들에게, 특히 호주 건국 200년을 맞는 1988년 또 한번 사면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좌절을 안겨 주었다.
이 당시 한가지 주요한 현상은1980년 대 초 부터 시드니의 캠시(Campsie)라는 지역에 한인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한국식당과 식품점등이 자연스럽게 생기면서 한인촌이 형성되어 한인들의 보금자리가 된다. 한인들이 캠시에 모이게 되는 다섯가지 현상을 번레이 (Burnley) 교수는 The Impact of Immigration on Australia에 설명하는데 정신적인 안정감, 직업 찾기의 용이함, 낮은 가격의 셋집, 한국식 서비스와 생활용품, 그리고 시드니 시내와 남쪽 공업지역으로의 교통편리 등이 그것이다 (번레이, Burnley, 2001: 271) . 캠시는 그 후 오랬동안 한인들의 경제적, 사회적 중심지로 특히 갖 입국한 한인들에게 호주 이민생활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게 되고, 또 중요하게는 호주인들과 타 민족 이민자들이 코리언 음식과 문화를 접하게 되는 나눔의 현장이 된다.
6) 투자 이민과 기술 이민 (1980 – 1990년 대)
인종차별을 근거로 하는 이민 제한정책은 철폐되었지만, 이민은 결국 국가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필요와 이익에 따라 책임있게 통제되져야 한다는 원칙은 후에도 여러 집권당에 의해 계속 유지되었다. 이민 점수제도가 그런 취지에서 1979년 도입되어 교육, 사회, 그리고 경제적인 능력에 따라 점수를 가산하므로 호주의 경제 발전에 얼마나 이바지 할 수 있느냐가 향후 이민의 골간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투자이민, 사업이민, 기술이민 등이 생겨나므로 아시아의 중산층 이상 수준의 이민자들을 불러 오게 되는데 이 정책들은 실패와 성공속에 계속 보완되어 현재 호주사회에 필요한 여러가지 기술이민 카테고리가 나와있다.
한 예로 1987년부터 시작된 사업이민은 해외의 자본있고 기술있는 이민자들을 호주의 주요도시로 불러오는 매력있는 정책이었다. 호주의 경제를 활성화 시키는 한 방법으로 사업체 소유자, 투자자 그리고 기업간부 등이 호주에서 새 사업이나 기존의 사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영주권을 주고 있었다. 또한 호주의 고용주가 본국 시장에서 찾을 수 없는 기술이나 또 훈련이 불가능한 고급 기술 인력에게 우선적으로 이민을 허용하였다. ‘숫자’를 찾았던 호주정부의 이민정책이 이제는 ‘질’을 중심으로 인적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사면령 이민자’들과는 달리 이들 대부분은 호주에 정착하여 사업을 계속 할 것인지 돌아갈 것인지 여유로운 선택이 있었고 호주는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그리고 자녀들의 교육을 위한 한 방편이었다. 호주에 정착하기로 결정하면 곧 집을 사고 호주의 자연과 레져를 즐기며 살 수 있었는데 이전 이민자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이민이었다.
한길수 교수는 Asian Migrant라는 학술지에 다른 단면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들 한인 사업이민자들중 많은 사람들이 본인이 원하는 사업을 호주에서 할 수 없어 정신적인 불만족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 주된 이유로는 영어의 어려움과 호주사회 이해부족에서 오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길수, 1996: 85).
그러므로 1980년대 사업비자로 들어 온 사람들의 시행착오를 보고 1990년대 들어 온 사업이민자들은 임금을 높이 주어야 하는 호주에서의 사업에 곧장 뛰어 들기보다 재산을 그대로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한국의 사업체를 계속 유지하거나 혹은 아시아쪽의 시장으로 눈을 돌리게 하였다고 적고 있다. 사업이민자들 중 많은 사람이 본인이 원하는 사업을 호주에서 할 수 없어 심리적으로는 만족치 못한 생활이지만, 좋은 기후와 한국에서처럼의 과로나 술자리가 없어 육체적인 건강은 증진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한길수, 1996: 82-85).
이 당시 교민사회에 재미있는 용어가 있었는데 ‘구포(old timer)’와 ‘신포(new comer)’이다. 구포는 이전에 이민 온 교포들을 지칭하고 신포는 사업이민이나 투자이민으로 갓 이민 온 교포들을 말하였다. 구포는 신포를 향하여 ‘이민자로 산다는 것이 무었인지도 모르고 돈만 있는’ 사람들로 이야기하고, 신포는 구포들을 볼때 ‘남의 나라에서 고생고생하며 사는 가난한’ 사람들로 서로 조롱하는 단어였다 (한길수, 2001: 547).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여러종류의 이민자들이 들어오고 또 구포들도 많이 성공하여 좋은 지역에 살면서 지금은 이런 구별이 없어 졌는데 이민의 서로 다른성격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었다.
한편 ‘해외 이민의 명암: 호주내 한인들의 이민동기와 실제생활’이란 글을 쓴 설병수는 대다수의 한인들은 경제적인 동기보다 ‘양질의 삶’을 위해 호주로 이민 왔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아메리칸 드림’이 경제적인 성공을 의미한다면, ‘오스트라리안 드림’은 보다 나은 ‘인간적인 삶의 추구’를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설병수, 2001: 59).
이 시기 이웃나라인 뉴질랜드에서 호주로 이민오는 숫자가 크게 증가하였는데 이것은 영국인 이민자가 계속 감소하므로 같은 영국계 뉴질랜드 정부와는 쌍방 시민들의 입국절차를 간소화한 결과이고, 적지 않은 한인들도 이 경로를 통해 호주에 입국하였다. 한인이 9,285명이라는 1986년 인구조사는 1991년 가서 20,580명이 되어 배가 증가되었다. 이것은 이 당시 많은 한인들이 사업과 기술이민 등으로 들어 온 이유인데 이민성은 이 당시 매해 1,400명 정도가 입국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숫자는 1996년 인구조사에서 30,091명으로 나타나 조금 둔화되고 있다.
7) 한국 유학생과 교민사회 (1990년대부터 현재)
1990년에 들어서면서 호주는 한국인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여행국가중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었다. 호주와 한국을 이어주는 비행기가 매일 뜨고 많은 사람들이 관광으로 또 공부를 위해 호주를 방문하고 있다. 한국 유학생들이 여러모양의 교육과 미래의 발전을 위해 호주의 주요 도시로 들어 오고 있고 그의 부모들 중에도 함께 동행하여 호주에서 삶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따라서 많은 여행업체와 더불어 유학원들이 번성하고 있으며 식당업, 숙박업, 광고업들이 교민사회의 경제에 활력을 주고 있다. 이민성의 자료는 2002-2003년에 11,270명의 한인학생들이, 2003-2004년에는 14,375명으로 27.5퍼센트의 증가율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 다음으로 가장 큰 유학생 숫자이다. 폭발적으로 성장해 오던 호주 유학산업이 후에 잇단 악재로 인하여 신장세가 크게 둔화되는데 2009년에는 한인 유학생의 신규등록이 2%정도 감소되어 중국과 인도 다음으로 35,708명이다.
유학의 내용을 분야별로 보면 대학교와 대학원등의 고등고육기관, 전문대 직업 전문기술과정, 초중고등학교, 어학연수, 그리고 교환학생등인데 이중에 언어연수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지역별로는 시드니를 중심으로 한 뉴싸우스웰스 주, 브리즈번을 중심으로 한 퀸스랜드 주, 그리고 멜본을 중심으로 한 빅토리아 주 등의 순서로 한국 유학생들이 들어 오고 있는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006년 주간 코리아타운에서 유학생 276명을 대상으로한 설문조사에서 유학 후 호주에 정착하고 싶다고 대답한 한국학생이 33%나 되었다 (2006년 3월24일).
2001년 7월 한국의KBS에서는 추적 60분을 통해 호주 한국유학생들의 문제점을 방송하기도 했는데 당시 한국이 3등급으로 하향조정되어 유학의 절차가 어려워지게된 이유는 소수 유학생들의 불법취업, 비자기간 경과 체류, 조기 유학생들의 탈선행위등이 그 내용이었다고 하였다. 2년 후에 가서 한국은 다시 2등급으로 상향분류 되었는데, 호주의 각 대학마다 유학생 유치를 통하여 정부의 보조금 삭감으로 인한 부족한 재원을 충당하므로 연간 총35억불 이상의 호주 외화수입원이 되고 있다.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통해 호주에 입국하는 청년들도 점차 늘고 있는데 이것은 30세 이하의 청년들이 호주여행을 하면서 단기간의 노동을 통해 여행자금을 충당할 수 있는 제도로, 주로 과일따기나 포장등 추수철 호주의 부족한 인력을 충당하고 그래서 불법체류자들이 일을 못하도록 막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유학생과 관광객 등으로 인하여 교민 경제사회도 크게 활성화 되었고 그중 유학업 및 교육 사업, 이민 상담업 그리고 관광업등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동포 주간신문 Top지는 2005년 8월 4일자에 한인경제에 관해 논하면서 “14년 전 10개에 불과했던 유학원의 숫자가 이제는 시드니에서만 70여개 이상으로 파악되고 있고, 14년전 5개 업소에 불과했던 이민 대행업체가 현재는 이민 법무사라는 이름 아래 최소 12배 이상의 양적 팽창을 한것으로 파악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Top, 2005년 8월 4일). 관광관련 업체도 91년 당시 1만 4천명에 그쳤던 한국 관광객이 2004년 무려 21만명으로 집계됬다는 통계는 인바운드 여행사뿐만 아니라 관광객 전용 선물쎈터 역시 파죽지세로 양적성장을 거듭하고 있다고 같은 신문은 전한다. 이것은 비단 한국 관광객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유럽등에서 오는 관광객이 연평균 4백만명, 워킹 홀리데이로 오는 청년들이 6만여명, 그리고 학생비자로 10만명 이상이 매해 호주에 입국하므로 지역적으로 소외되 있었던 호주도 글로벌시대의 한 주역이 되어 있다.
8) 젊은 한인 이민사회 (2000년 대 이후)
최근 호주인들이 한국의 언어와 문화에 더 관심을 가지고 실제로 몇 대학에서는 한국학과가 개설되는가 하면, 일부 고등학교에서도 한국어를 가르쳐 대학입시 시험과목의 하나로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한국이 호주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때문이기도 한데. 2004년-2005년에는 한국이 호주의 네번째로 큰 무역 상대국이었고, 더 중요하게는 한국이 호주의 세번째로 큰 수출국이었다.
1991년 정부 인구조사 통계에 호주의 한국태생 이민공동체는 84.8%가 가정에서 한국어를 사용하며, 영어만 사용하는 가정은 12.8%로 나타났는데 호주의 한인들은 한국의 문화와 생활 패턴을 비교적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한 단면이다. 한인들이 얼마나 호주사회에 적응하여 소외된 게토집단이 아니라 주류사회의 한 부분이 되는 가는 더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이민 1세들과 2세들, 그리고 1.5세들의 정체성과 문화에 대해 다각적인 연구가 요청되고 있다.
2001년 호주 인구 통계를 보면 38,840명이 한국에서 태어난 이민자로 기록되어 있다. 평균 나이는 30.8세이고 이것은 전체 이민자 평균 나이의 46세와 비교되며, 또한 호주 전체 평균 나이인 35.6세 보다도 젊은 나이이다.
호주에서의 한인사회는 주로 1세 사회로 크게 드러나지는 않치만 한편으로는 일반사회와 잘 공존하면서 기여하고 있는 ‘모델 소수민족’으로,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영어사용을 포함해 일반 호주문화에 잘 동화되지 못하는 또는 않는 민족으로 비추어지고 있다. 계 파동이나 각종 사기사건 그리고 폭력등의 범죄 이미지가 존재하는것도 사실이지만, 한 두 호주언론에 과장되고 또 왜곡되어 비쳐진 결과이기도 하다. 2004-2005회계연도에는 각종 불법이민 항목에 한인들이 일제히 상위에 기록되 한국과 한인들의 이미지에 손상이 가기도 하였다 (한국신문, 2006년 1월 19일: 14).
한인에 관한 호주 인구조사에는 호주에서 태어난 2세들의 생활이나 문화가 반영되지 않으므로 이들에 관한 통계나 학문적인 연구가 현재 전무한 현실이다. 이들에 관한 학문적 고찰은 아직 이를 수 있지만 2세들의 존재와 그들의 공헌은 한인사회와 호주사회 전반에 점차로 부각되고 있는 현실이다. 1.5세와 2세들 중에 전문화된 직업을 가진 지도자들이 많이 나와 있는데 사업가, 언론인, 의사, 변호사, 회계사, 종교지도자, 정치인, 교육가, 노동운동가, 복지사등이다. 이들의 전문직 분야 진출은 일세대가 할 수 없었던 직종으로 일세대들의 희생과 희망으로 그 자리에까지 와 있는것은 물론이다. 특히 1.5세로는 처음으로 호주의 주요 정당으로 진출해 2004년 스트라스필드 시의원이 되고 후에 시장까지 지냈던 권기범 후원회 모임에서 한 관계자는 “한 정치인 개인을 후원하는것도 중요하지만 동포사회 정치적 향상을 위한 차원에서 이런 행사가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한인들의 의사와 필요가 지방정부에 반영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정치 참여가 절실하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신문, 2005년 11월 25일). 또한 시드니의 한 총영사는 어떤 공식모임에서 한인사회의 정치적 신장에 대해 언급하며 동포사회의 위상을 위해 주류정치권을 향한 보다 효율적인 연대모임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한국신문, 2005년 8월 26일).
이것은 비단 한인사회뿐 아니라 다른 주요 이민자 그룹들의 정치사회적 영향력도 호주사회에 전반적으로 미약한것이 현실이고, 이민자이기 때문에 지도자가 되기 보다는 이민자임에도 불구하고 개인능력으로 정치사회적 신분상승을 하는 호주 주류사회의 지금까지 분위기이다. 그러므로 한인사회의 발전과 정치사회적 영향력은 일반 다문화정책의 확장, 타 이민자 그룹의 발전, 그리고 호주정부의 우호적인 이민정책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5. 나가는 말
호주 다문화 사회에서 비교적 소수민족 집단인 한인들의 이민역사나 삶의 형태, 그리고 그 공헌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호주의 문화와 경제 발전에 한인을 포함한 여러 아시아 종족들의 공헌은 호주 정규학교의 역사와 사회 교과서에 대부분 언급되지 않고 있다. 중국인 노동자들은 오래 전 호주 오지지역의 금광에 취업을 해 왔었고, 그 이후 여러 도시에서 식당이나 서비스업, 그리고 호주인들이 저급하게 생각하는 일에 종사해 오면서 호주 사회에 기여해 왔고, 일본인들은 호주 북부에서 진주산업에 참여하여 왔고, 필리핀 사업가들은 호주와 아시아의 무역에 활발히 앞장서 왔고, 그리고 월남 난민들이 호주까지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등 이런 정도의 피상적인 내용만 호주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워왔다. 호주에 이민 온 아시아 인들이 현대 호주의 문화적, 경제적, 예술적인 발전에 공헌을 해 온 많은 이야기들이 근래에 와서야 비로소 조금씩 알려지고 있는 형편이다. 최근에 와서 사회교과서에 호주의 문화와 인종의 다양성을 가르치고 있으며 소수민족 공동체들의 이민역사과 그 공헌도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호주의 한인사회는 호주 정규교과서에 거의 언급이 안되고 있어 그들이 어떤 이유로 호주에 와 공동체를 이루었는지, 어떤 내용의 공헌을 하고 있는지, 또한 어떤 다문화 관계를 이루며 호주사회에 살고 있는지 등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형편이다. 호주의 사회학자 코간(Coughlan) 교수는 그 이유에 대해 크게 두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첫째로는 한인공동체가 비교적 숫적으로 작다는 현실이다. 2006년 통계에 보면 한국출생 한인은 해외에서 온 이민자 중 17번째의 그룹이고 (52,761), 한국어는 13번째로 사용되고 있는 언어이고 (54,625), 한인은 29번째로 한 혈통을 가진 그룹이었다 (60,873). 두번째로 한인들에 관한 내용이 호주교과서에 없는 이유는 호주한인들에 관한 영어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자료들이 오래된 내용이거나 호주 선생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만약 한인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호주 교과서와 강의실에 알리기 원한다면 연구된 내용들이 영어로 출판되어 이용되어야 한다(Coughlan , 2008: 117).
코간 (Coughlan)은 호주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그룹 중의 하나가 한인공동체이고, 한인들이 호주에 정착한지 1세기가 되어 가지만 호주사회는 한인들에 대해 무지하거나 잘못된 정보에 의한 이해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언론에 의해 보도되는 이미지가 그 무지를 부채질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위의책, 116). 이것은 물론 호주 정규학교의 역사나 사회과학 학과에 호주 한인들에 관련된 연구가 거의 없다는데 기인하고 있다. 호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인 학자들 중 한국어 교육이나 한국문화에 관한 연구는 지속하고 있지만, 호주사회에 사는 한인동포와 타민족과의 다문화 관계에 관한 연구나 글을 영문은 물론 한글로도 발표하는 학자가 거의 없는 형편이다.
호주 한인들이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는데 또 다른 어려움은 내부로부터 기인한다고 한길수 교수는 지적하고 있다. 한인사회의 몇 단체들과 교회들의 지나친 민족의식과 한국식 교육이 다문화 호주사회로 한인들이 진출하는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길수, 2004: 115).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성과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일은 아무리 하여도 다함이 없으나, 다문화 사회의 현실을 무시하고 자민족중심주의만 부추긴다면 호주사회에서 소외되거나 인종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2005년 8.15 광복 60돌 행사가 시드니 한인회관에서 남북 공관대표등 각계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었다. 남북화합의 이름으로 태극기를 한반도기로, 애국가를 아리랑으로 대신하여 행사를 진행하는 도중, 한쪽에서 돌연 애국가를 부르며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외쳐 행사가 잠시 중단되기도 하였다. 한국인으로 다문화 호주에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호주에 있어서 한반도의 통일은 무었인가? 1세와 또2세들에게 고국과 민족은 무었인가? 등을 생각하게 해주는 의미있는 사건이었다.
호주 각 주에서 한인사회의 존재와 문화를 알리고 공유하려는 한인회의 노력과 활동은 칭찬할 만 하다. 다문화 사회 행사에 참여하거나 다문화 행사를 주도하여 한인사회의 위상을 높이려는 다각도의 노력이 그나마 한인사회를 주류사회에 알리고 있는 공헌을 하고 있다. 다문화 정책의 실행과 인종관계에 관한 것은 호주 지방정부의 역할이 중요한데 지방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하모니 데이(Harmony Day) 행사, 소수민족 사업체지원, 이민자 정착지원, 통번역 언어 서비스, 성인이민자 영어프로그램, SBS (특별방송서비스공사) 라디오와 텔레비젼 다언어 방송등과 꾸준히 접촉하며 참여의 길을 모색할 때 다문화 사회에 관한 꿈과 이상이 현실의 상호존중과 생산적 다양성의 혜택을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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