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와 뉴질랜드 한인사회 성장과 이주물결
양명득('호주한인50년사' 편찬 집필위원)
I. 들어가는 말
대양주 혹은 영어로 오세아니아 (Oceania)는 호주와 뉴질랜드를 비롯하여 주변에 흩어져 있는 말레이 제도의 여러 섬 나라를 포함하고 있다. 한국인이 이 지역의 섬 나라로 방문하거나 이주를 시작한 정확한 시점은 현재 연구 대상이지만 호주는 1910년대에 미국거주 한인들이 호주를 방문하였던 기록이 있고, 우사 김규식은 1920년 호주를 방문하여 호주수상을 만나 대한민국 독립을 청원하였고, 그 다음 해에는 한 한인 청년이 유학의 목적으로 호주에 첫 입국하였다 (양명득, 2009, 20).
뉴질랜드는 “이에 대한 확인 연구가 수행되어야 할 것” 이라고 조건을 붙이고 있지만 1911년 이전 한국태생 한 명이 입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영성, 20).
이 후 호주나 뉴질랜드에서의 한인들의 정착은 각 정부의 이민정책과 한국상황에 따라 바뀌어 왔지만 대체적으로 호주는 1970년 대부터, 뉴질랜드는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대양주에서 한인들의 삶의 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다. 그 역동적 이민 역사를 담은 한인사를 자료집 형식으로 뉴질랜드는 2007년 뉴질랜드 한인사로, 호주는 2008년 호주한인 50년사란 제목으로 각각 출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를 포함한 대양주 한인사회에 관한 연구는 주류사회 안에서나, 동포사회 안에서 그리고 한국의 재외동포 연구 네트워크 안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현실이다.
한국의 외교통상부 자료에 의하면 2009년 남태평양에 거주하는 한인 숫자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호주: 약 12만 명, 뉴질랜드: 32,000명, 피지: 약 1,000명, 파푸아뉴기니: 199명, 팔라우: 80여명, 솔로몬 군도: 약 60명, 통가: 40명, 바나와투: 39명, 마이크로네시아: 약 25명, 키라바시 & 쿡아이랜드: 각 1명 (외교통상부 홈피, 국가 지역 정보, 2011).
이 글에서는 뉴질랜드와 호주를 중심으로 각 나라의 한인역사, 한인사회에 관한 연구 그리고 앞으로의 과제에 대하여 간략하게 나마 기술하도록 하겠다.
II. 뉴질랜드 한인 역사와 연구 소개
뉴질랜드에서는 뉴질랜드 한인사 발간위원회 (위원장: 한일수 박사)의 연구성과를 먼저 말할 수 있다. ‘아오테로아에서 한인들이 살아 온 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뉴질랜드 한인사는 2007년에 출판되었다. 뉴질랜드 한인사 발간위원회의 4년간의 노력으로 이야기 형식으로 출간된 본 한인사는 이 방면 연구에 유일한 자료로 남고 있다. 본 한인사는 다음과 같은 목차를 담고 있다.
1) 북반부로부터 뉴질랜드로 이주가 시작된 지 170여 년
2) 한국전쟁으로 맺어진 한국과 뉴질랜드의 인연
3) 1970년 이전의 한인 사회
4) 1970년대에 한인 사회가 태동하다
5) 뉴질랜드가 이민 문호를 개방하여 한인사회가 성장하다
6) 일반 이민 제도 시행으로 한인 사회가 도약하다
7) 한국의 IMF 사태로 인한 시련 중에도 희망을 펼치다
8) 뉴질랜드에서 한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9) 뉴질랜드 한인들의 현주소
10) 뉴질랜드 한인 사회의 미래
초기 뉴질랜드 한인사를 기록한 학자는 김영성 교수이다. 그는 상명여대 지리학과 교수로 1994년 ‘뉴질랜드의 한국인’이란 논문을 월간해외동포 1994년 5월 호에 기고하였다. 이 글은 초기 한인들의 양적 성장과 한인사회의 전개과정을 1971년부터 주요 연표를 통하여 기록하고 있다. 윤홍기 교수와 임석회 교수가 함께 연구하여 발표한 ‘뉴질랜드 오클랜드지역 한국인의 생업분석’은 1997년 대한지리학회지를 통해 발표되었다. 이 논문은 뉴질랜드 이민 초기 한인들의 생업을 한인주소록을 분석하여 쓴 글로 당시 한인들의 생활을 엿 볼수 있는 자료이다. 윤홍기는 오클랜드대학교 지리학과 교수이며, 임석회는 오클랜드대학교 지리학과 박사후 과정 연구원을 지냈다
오클랜드대학 아시아학과 내의 한국학연구소는 1995년 개설되어, 격년마다 주최하는 ‘한국학을 위한 남태평양 아시아 컨퍼런스’도 주목할 만 하다. 한국학에 관련된 다양한 주제의 논문들이 본 컨퍼런스를 통하여 발표되어 왔고, 자료집까지 출판되므로 연구활동을 돕고 있다. 2010년에는 본 학과의 송창주 교수 주관으로 ‘Korean Studies in Shift’ (변화하는 한국학)라는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려 수명의 학자들이 논문을 발제 하였다.
뉴질랜드에 한국인들이 본격적으로 들어 올 수 있었던 계기는 1987년 뉴질랜드 정부의 이민법 개정을 통하여 시작된다. 뉴질랜드정부는 당시 호주정부처럼 아시아인 이민제한정책을 통하여 영국계 중심주의를 표방하여 오다가 1970년 대에 들어서 국가 안팎으로 경제적인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에 따라 백인중심적 이민정책에 대한 변화 요구와 해외자본 유입이 필요로 하게 되었다. 마침내 새 이민법이 1987년 공포되고 유색인종에게도 이민문호가 개방되게 된다. 이후 뉴질랜드는 원주민인 마오리와의 양문화정책 (bi-culturalism)에서 여러 인종을 아우르는 다문화정책 (multiculturalism)을 수용하고 있다.
한편 한국태생이 뉴질랜드에 거주하며 양적 성장을 하게 되는 내용을 앞에서 언급한 김영성 교수는 뉴질랜드 인구조사통계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911년 이전에 1명, 1931년 이전에 3명, 1945년 당시에는 4명, 1961년에는 52명 (이들 중 42명은 원양어선 선원으로 추측, 그러므로 거주자는 10명), 1966년에는 30명, 1976년에는 86명, 그리고 1986년에는 162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김영성, 19). 이민법이 개정되기 전 한국인의 뉴질랜드 유입은 주로 취업, 결혼, 연수, 입양 등의 목적이었는데 초기에는 남태평양에 진출한 원양어선 선원들이 많이 입국하였고, 1950년대 부터는 콜롬보 플랜에 의하여 입국한 한국유학생이 3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플랜에 의하여 공부하고 후에 뉴질랜드에 정착하여 동포사회 지도자가 된 우준기 박사와 한국으로 귀국하여 한-뉴질랜드협회를 결성하여 양 국간의 이해를 증진시킨 박영인 박사 등이 있다.
한국과 뉴질랜드 정부간의 관계는 1950년 한국전쟁 때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뉴질랜드군도 유엔군의 일환으로 한국전에 6천여 명이 참전하여 45명 전사하였고, 그 중 34명은 부산 유엔묘지에 안장되므로 견고한 혈맹국가가 되었다. 공식 외교관계는 1962년 수립되었고, 1971년 뉴질랜드 수도인 웰링턴에 한국대사관이 개설되었다. 한인동포들이 많이 모여 사는 오클랜드에는 1996년 대사관 분관 형식으로 공관이 개설되었다.
한국인 중 누가 언제 처음으로 시민권을 받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1962년 6살로 입양된 김성미가 2년 후인 1964년 시민권을 받았다 (뉴질랜드한인사 발간위원회, 59).
뉴질랜드 한인회는 전체 교민의 수가 100명에도 못 미치던 1974년 당시 웰링턴의 뉴질랜드 대사 관저에서 창회되었으며 초대 회장에는 박사과정 중인 박흥섭 (후에 전남대 교수)이 선출되었다. 이 당시 태권도나 녹용 사업으로 이민 오는 동포들도 생기기 시작하였다.
뉴질랜드에서의 첫 교회도 웰링턴에 세워졌다. 원양어선 선원들을 위한 예배는 1960년 대부터 시작되었지만 교회로써의 창립은 웰링톤한인연합교회로 시작되었다. 한국전쟁에 구세군 소속 군목으로 참전하였던 스미스 (Smith) 목사는 귀국한 후에도 한인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예배를 인도하였고, 1984년 3월11일 그동안 함께 준비해 온 장경립, 변경숙, 클락슨 가족, 김진영, 안경순 영사등과 함께 교회를 창립한다. 그리고 얼마 후 한국에서 파송 된 김용환 목사가 그 뒤를 이어 목회를 하고, 김 목사는 후에 오클랜드 지역에 첫 한인교회를 창립한다.
1987년 이민법이 개정 되면서 투자이민제도가 실시되므로 1992년에 한인동포가 1,762명으로 크게 증가하고 있고, 체류자가 978명, 원양어선 선원이 309명으로 총 3,049명의 한인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1992년 이 후의 한인 이민은 점수제에 의하여 1994년에 4,167명, 1995년 3,394명의 한인이 영주권을 받았으며, 유입된 전문직 사무직의 젊은 층의 인력들로 뉴질랜드 한인사회를 또 다른 차원으로 변화시키게 된다.
한국인들의 뉴질랜드 방문을 더욱 촉진시키는 기회는 1993년도에 왔다. 태극날개를 단 대한항공이 그 해11월4일 뉴질랜드 오클랜드에 첫 바퀴를 내린 것이다. 직항 취항은 양국간의 인적, 물적, 문화적 교류증대를 가져 왔고, 다음 해인 1994년에는 양국간 사증 면제협정 체결이 이루어짐으로 뉴질랜드에 입국하는 한국인의 수가 1995년에서 1997년까지는 연간 10만 명에서 13만 명에 이르렀다 (뉴질랜드한인사 발간위원회, 148-149).
한국과 뉴질랜드 사이의 워킹 홀리데이(working holiday, 관광취업) 비자협정은 1998년 체결되었고, 그 다음 해부터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이 협정으로 인하여 양국간 젊은이들의 교류가 시작되었고, 매년 1,800여명의 한국인 청년들이 뉴질랜드를 방문하며 문화와 경제 교류를 하고 있다.
2006년 인구조사에는 영주권자와 시민권자가 17,600명, 일반체류자가 5,400명, 유학생이 10,000명으로 총 33,000명 정도로 나타나 있고, 이 중 79%는 북섬에, 21%는 남섬에 분포되어 있다.
현재 뉴질랜드에는 몇 개의 한인회가 주요 도시마다 세워져 있어 한인동포들의 정착을 돕고 있으며, 주류사회와의 연계와 모국과의 교류를 도모하고 있다. 아홉 개의 한인회는 한인들이 주로 모여 사는 다음의 도시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오클랜드, 크라이스트처치, 웰링턴, 와이카토, 로토루아, 더니든, 황가레이, 파머스톤, 퀸즈타운 등이다.
뉴질랜드 사회에 진출하여 대학교수, 변호사, 의사, 회계사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1세 동포 뒤를 이어 1.5세나 2세들도 점차로 주류사회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 중 윤용제는 크라이스트처치에서 한인 최초로 2004년 지역 의원으로 출마하여 시의원이 되었다. 그는 2007년 선거에서 재선되기도 하며 지역 의정활동을 해 왔고, 크라이스처치 한인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2008년에는 TV 앵커 출신인 이지연 (영어명: 멜리사 리)이 뉴질랜드 총선에서 집권 국민당 비례대표로 나서 한국인 이민자로서 최초로 뉴질랜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는 한인동포 여성으로도 최초의 국회의원으로 기록되어 전 세계 한인 이민 역사의 새로운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다.
최근 인구통계조사에 따르면, 전체 뉴질랜드 인구의 거의 1%가 한국 동포이며,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중국, 인도 다음으로 뉴질랜드에서 큰 사회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구 일인당 비율로 보았을 때, 뉴질랜드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규모가 큰 한인 동포사회를 가진 나라 중 하나이다. 뉴질랜드에서 유학중인 한국 학생수도 날로 증가하고 있는데, 중국 다음으로 한국은 뉴질랜드의 큰 유학생 시장이다.
한국은 뉴질랜드의 9번째 무역상대국이며, 양국간 교역 액은 2008년 기준 27억 뉴질랜드달러(뉴질랜드의 대(對)한국 수출액: 13억6천만 뉴질랜드달러, 한국의 대(對)뉴질랜드 수출액: 13억1천 뉴질랜드달러)를 기록했다. 양국간 무역은 상호보완적으로, 뉴질랜드의 한국에 대한 수출품목은 원목, 알루미늄, 쇠고기, 키위(과일), 유제품 및 해산물 등이고, 반면 한국은 자본 투자 및 자동차, 전자기기, 기계류 등의 소비재를 뉴질랜드에 수출하고 있다 (뉴질랜드정부 외교통상부 홈피, 2011).
III. 호주 한인 역사
호주의 한인동포들도 호주정부의 이민정책과 다문화 정책의 부침에 따라 그 명암이 바뀌어 왔다. 아시아인 이민에 우호적인 정권이 들어서면 늘어나는 한인 이민자들로 인하여 한인사회도 경제적 활기를 찾았고, 이민정책이 보수적인 정권이 들어서면 현상을 유지하며 새 날을 기다려야 했다. 이러한 굴곡을 거치면서도 지난 50여 년간 호주의 한인사회는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해 온 것이 사실이다. 호주와 한국의 만남은 사실 호주교회가 1889년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므로 120여 년이 지나고 있지만 이 글에서는 한국인이 호주 땅을 밟은 1920년 대부터 시작하도록 한다.
1) 초기 한인 방문자들 (1920-1950)
호주를 방문했던 최초 한인유학생에 관한 기록은 19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호주선교사가 세운 마산의 창신학교의 선생이었던 김호열은 호주장로교의 후원으로 호주에 입국하는데 백호주의 정부로부터 비자를 받아 멜본대학에서 학교행정에 관한 공부를 하게 된다. 그는 멜본에 있는 동안 후두암이 진행되어 치료를 받지만 의사의 권고대로 1925년 한국으로 돌아간 직후 사망했다.
1926년 호주선교사 에이미 스키너(Skinner)가 호주에 휴가 차 올 때 그의 한국어 선생이자 친구인 양한나 (1893-1976)와 동행한다. 호주에 머무는 동안 그는 유치원 운영에 관해 공부하였지만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가 사회 사업가로 상해임시정부 경상도대의원, 초대 수도여자경찰서장 등을 역임하였다.
1934년에는 심문태 목사가 호주에서 기독교교육을 공부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계속 공부한 후 1937년 한국으로 돌아가 사역했다. 1935년에는 세브란스 병원의 이춘철 의사가 연구차 호주에 왔었다. 1937년에는 빅토리아 장로교 총회 연사로 이약신 목사가 초청되었다. 그는 빅토리아 주에 몇 달 머물면서 여러 교회에서 설교와 강연을 하였고 한국으로 돌아가 진해와 마산에 있는 교회에서 일했다. 1937~1939년에는 손옥순과 이영복 간호사들이 멜본에 와 공부를 했는데 나중에 손옥순은 한국정부의 건강과 복지부에서 이영복은 이화여대에서 각각 공헌을 하게 된다.
이렇게 대부분 교회기관을 통해 호주로 온 초기 방문자들 대부분이 한국으로 돌아갔는데, 이 당시는 호주 이민제한정책이 왕성하던 시기라 아시아인들에게 거의 시민권을 주지 않았을 때였다. 또한 골드러시 때부터 살고 있었던 중국인이나 일본인의 숫자 조차도 크게 감소한 때라 본인이 원한다 해도 호주에 영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즈음 언급되어야 할 한인 ‘집단 방문자’들이 있다. 세계2차 대전 중 일본에 의해 강제로 징용된 한국 청년 중 일본군인들과 함께 포로가 되어 호주에 잡혀 온 162명의 전쟁포로들이다. 이들은 시드니 서북부 카우라(Cowra) 수용소에서 포로생활을 하다 전쟁 후 1946년 시드니를 거쳐 한국으로 송환된다.
한국전쟁을 전후해서도 계속하여 호주로 온 한국인들이 있었는데 호주 적십자나 YWCA를 통해, 그리고 특히 호주장로교가 부산에 세운 일신병원의 관계자들이 훈련의 목적으로 호주에 왔고 그 중에 호주에 영주하게 되는 경우가 비로서 나중에 생기기 시작하였다.
2) 초기 한인 이민자들 (1950-1970)
1950년대에 와서 이민 차별 법에 대한 변화의 필요성이 호주 정부안에 대두되게 된다. 특히 비 유럽계인들에게 시민권과 영주권을 주지 않는 데서 야기되는 외교적이고 상업적인 어려움은 호주 정부의 큰 짐으로 계속되고 있었다.
호주정부가 매년 발행하는 백서를 보면 1957년에 한국인 한 명이 호주 시민 된 것을 기록하고 있다. 필자는 이 기록을 근거로 그 시민권 자를 추척하였는데 결국 2010년 호주 멜본에 있는 국립고문서 보관서에서 그 내용을 찾아 아직도 생존해 있는 그 분을 시드니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민 배경과 이름이 밝혀진 그는 곽묘임이라는 여인으로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호주군인 리챠드 가렛(Richard Garett)을 일본에서 만나 호주로 입국한 것이다. 그녀는 시드니에서 곧 결혼하고 빅토리아 주 푼카펀얄(Puckapunyal)에서 외로운 호주에서의 삶을 시작하였고, 현재까지 생존하여 시드니에 거주하고 있다. 이 여인의 시민권 수여 연도를 기준으로 2008년 호주한인50년사가 출판되었다.
1960년 초에는 호주를 방문하여 호주인과 결혼하므로 영주권을 받아 호주에서 일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런 경우 방문자의 신분에서 영주권을 받는 과정까지 여러 복잡한 어려움이 있지만 호주사회에 정착하게 되는 초창기의 사례이다.
또한 공식문건의 확인이 어려운 1968년 이전을 제외하고 1969년 이후로 지금까지 호주에 입양된 한인 숫자가 3천명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도 당연히 이곳 한인이민사의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첫 가족이민으로 알려진 최영길은 1968년 이민수속 절차를 밟아 가족과 함께 호주에 입국한다. 그의 경우는 한국전쟁에 참여한 호주군인들과의 인연과 호주 재향군인회 등의 후원으로 비자를 받아 이민 한 초창기의 경우이다. 당시 시드니모닝헤랄드 (Sydney Morning Herald) 신문은 이 가족을 사진과 함께 보도하면서 최영길을 호주군인들이 ‘입양한 전쟁고아’로 소개하였는데 한국에서 함께 일했던 그들과 결국 호주에서 재회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1968년 6월 21일).
주 시드니 총영사관 홈페이지에 게재된 한국인 호주이민 역사를 보면 초기 전문직 이민자들에 관한 내용이 간단히 소개되었는데 1970년 이전 소수의 유학생 및 콜롬보 계획 장학금 수혜 공무원들이 50명에서 60명 수준으로 호주에 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 아시아국가들의 정치적 불안과 공산주의 확장을 막기 위하여 호주 정부는 다각도로 지원하였는데, 그 일환으로 ‘선한 이웃’정책을 60년대 이전부터 실시하였고 그 중에 성공적인 프로그램이 콜롬보 플랜이었다. 이 장학금제도를 통해 수 천명의 아시아인 학생들이 호주에서 기술을 배울 수 있었고 아시아국가들 중에 이 플랜만큼은 인기가 있었다. 이 플랜을 통해 1960년 입국해 호주에 정착한 소설가 김동호는 내 이름은 티안 (My name is Tian)이란 영문 장편소설로 호주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3) 한인 이민사회의 시작 (1960-1980)
호주 정부는 백호주의 정책을 한편으로 시행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아시아 나라들과의 외교와 경제협력을 계속 유지하였다. 그러므로 한국정부와 호주정부의 외교관계는 더 일찍 거슬러 올라 가지만 주 호주 한국대사관은 시드니 영사관을 시작으로1953년에 개관되었고 1962년에 가서야 대사관으로 승격된다. 한편 호주와 북한과의 국교수립은 1974년에 가서야 이루어지지만 그 다음해 북한대사관은 유엔에서의 의견차이로 호주에서 일방적으로 철수한다.
호주의 백호주의 정책이 공식 철폐되었던 1973년을 전후로 호주의 광산과 유전개발에 필요한 지질학자 및 헬리콥터 조종사, 보석 디자이너, 그리고 태권도 사범 등 소수의 전문기술자들이 호주로 입국하였다. 호주 이민성 홈페이지에도 1969년에서야 기술이민 프로그램으로 첫 한인 이민자들이 들어 왔다고 적고 있는데 1971년 당시 지질학자로 입국한 남기영은 그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1969년부터 소수이기는 했지만 서울 서소문에 있었던 주한 호주대사관에서 이민 신청서를 접수하였고 그 일진이 1970년 말과 1971년 초에 호주에 도착하였다. 그 당시의 이민은 소위 말하는 기술이민으로 호주에 필요한 인력을 선발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공계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남기영, 2003: 11).
멜본에서는 한국에서 사역했던 호주 선교사들이 호한회란 이름으로 한인 이민자들을 환영해 주었는데 그들이 작성한 명단에 의하면 1972년 말 멜본에는 영주 거주자가 36명, 그리고 유학생 등이 21명 있는 것으로 나와있고, 그 다음해 1973년 초 멜본한인회 주소록에는 성인 47명, 어린이 22명 초 69명이 기록되어 있다 (남기영, 2003: 11). 호주정부가 실시한 1971년 인구조사에 468명의 한국태생 한인들이 호주에 살고 있는 것으로 기록된 것을 보면 그 당시 시드니에 300여명 정도의 한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한인이민사회에 중요한 발전이 있었는데 1966년 브리스반한인회, 1968년 시드니한인회 그리고 1972년 말 멜본한인회가 각각 창립되었다.
4) 월남전쟁과 사면령 (1970년대)
1975년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막을 내린 월남전쟁은 정치적으로 호주에도 논쟁을 불러 일으켰을 뿐 아니라 지역적으로 비교적 가깝다는 이유로 호주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전쟁 고아들이나 보트피플 (boat people) 등의 난민들이 나중에 호주로 입국하기 시작한 것은 물론이고, 그곳에서 일하던 많은 해외 인력들이 호주 행을 택했기 때문이다.
월남패망 직전인 1974년부터 파월기술자 500여명이 관광비자로 입국하였는데, 물론 이것은 그 당시 백호주의 정책의 철폐와 비자 간소화 정책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 와 호주정부는 인종차별적인 백호주의 정책에 대해 일본, 필리핀, 인디아 등 주변 국가들로부터 계속 공격을 받고 있었고, 한국의 김수환 추기경도 호주 백호주의 정책이 아시아 나라들로부터 원망을 사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Australian Financial Review, 22 Feb 1973). 내부적으로는 호주의 적은 인구와 아시아 침략의 불안으로 인해 ‘인구증가인가 아니면 멸망인가’ 라는 질문이 2차 대전 후부터 끊임없이 대두되고 있었다.
이때 1973년 노동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극히 제한적이었던 아시아 이민을 개방할 뿐 아니라, 호주에 3년 이상만 영주하면 누구에게나 시민권을 수여하여 인구증가 정책을 시도하게 되고, 더 중요하게는 아시아국가들과의 정치경제관계를 개선하면서 당시 이민성 장관이 아시아를 방문하며 새 이민법을 적극 홍보하게 된다.
이런 배경 속에 월남에서 일하던 많은 한인들은 한국으로 돌아가기 보다 더 나은 미래를 찾아 호주로 오게 된다. 1973년 월남에서 호주로 입국한 이상기는 그 당시 많은 파월 기술자들이 그곳에서 저축한 돈과 또 월남전에 참여한 용사라는 배경으로 비교적 쉽게 호주 관광비자를 받았다며, 일년 비자기간이 지나면서 더러는 다른 종류의 비자로 바꾸기도 하고, 더러는 비자 유효기간이 지나기도 하고, 또 소수는 그 당시 이민이 쉬웠던 캐나다로 건너갔다고 말한다. 그 당시 한인들은 주로 시드니 시내 근처인 레드펀에 살았고 월남에서의 노동력 경험을 바탕으로 대부분 부지런하고 근면하게 일하면서 실제로 한인사회는 이때부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고 증언한다 (인터뷰, 2005년 12월 8일).
한국의 한겨례 21에 호주 이민사의 산 증인으로 소개된 고 신경선도 월남전 당시 파월 기술자 측량사로 맹호부대에 파견되었었고,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인 1974년 일자리를 찾아 지하자원이 풍부한 남부호주 퍼스에 첫 발을 디뎠다고 적고 있다(179호, 1997년 10월 23일). 이 당시 많은 이들이 열심히 일하는 만큼 돈을 벌 수 있고 또 미국달러보다 높았던 호주달러를 벌 수 있는 호주를 기회의 땅 혹은 지상의 천국으로 여기면서 돈 벌어 한국으로 돌아가기 보다, 이제는 한국에 있는 가족들을 불러 올 생각을 하게 된다.
1976년 호주 정부는 마침 이민쿼터를 7만 명으로 대거 늘리면서 1975년 말까지 입국했다가 비자기간이 지난 소위 ‘불법체류자’들에게 사면령을 내리게 된다. 멜본의 The Age(더 에이지)신문은 그 당시 호주건국기념일에 발표된 사면령을 3면에 조그맣게 기사화하면서 비자 간소화 정책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들어와 불법으로 체류하기 시작했다며, 그들 중에 범죄 기록이 없고 좋은 시민이 될 수 있는 자들을 선별하여 영주의 기회를 주겠다고 당시 이민성 장관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런 사면령이 앞으로 더는 없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약 8천명 정도의 이민자가 이 사면을 통하여 호주에 영주하게 되고 또 그들의 가족이 줄줄이 입국하게 되므로 ‘체인 이민’이 시작된다. 한인사회도 이 사면을 통하여 수적으로 성장하게 되는데 특히 여성들과 자녀들이 들어오므로 남자들만의 이민사회 성격이 좀 더 안정적이고 다양하게 바뀌어지게 되고, 70년대 말부터 여러 한인 단체들이 생겨 나기 시작하였다.
5) 호주 한인 이민사회의 성장 (1980년대)
사면령을 통하여 많은 이민자들이 호주에 영주하게 되자 세계 곳곳에 있던 많은 한인들도 기대를 가지고 호주로 입국하게 된다. 특히 한국에서는 물론 중동과 남미에 있던 한인들도 이 시기 입국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호주를 통과하여 다른 나라로 가는 것처럼 비행기 표를 구입하면 3일간 호주 체류가 가능하였는데 이것을 이용해 호주에 계속 머무는 방법이 있었다.
호주 프레이저(Fraser) 수상 정부는 사면령이 많은 방문자들을 불법으로 체류하게 만드는 요인인 것을 알면서도 또 한번의 사면령으로 알려진 신분정례화 프로그램을 1980년 선포한다. 영국인이지만 비 유럽계 배우자일 경우에도 엄격하게 제한하던 가족 재결합 정책을 완화하고, 아시아 피난민들 숫자를 늘리고, 또 비자유효기간은 지났지만 이미 호주에 적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신분의 합법화와 영주의 기회를 주는 인도적인 이민정책이 이 당시 진행되고 있었다.
호주 이민성 홈페이지는 “1976년과 1978-79년 사이에 있었던 사면령으로 500명 이상의 한인들이 호주의 영주권을 갖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1976년 한인의 공식 숫자는 1,460명 이었는데 5년 후 1981년에는 4,514명으로 급증한 것으로 보아 사면령의 영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진으로 보는 호주 이민사’라는 글을 쓴 김인기는 “초창기 체류자들은 주급 $120불을 모아 한국의 가족들 생활비 및 자녀교육비로 보내며, 또 한편으로는 이민 경찰의 습격에 항상 긴장해야 하는 이중의 고통을 감당하고 있었다” 고 그 당시 긴박한 상황을 전하고 있다 (2004년 2월 13일: 124).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숨어 다니며 (그 당시 그들은 ‘잠수함’ 혹은 ‘맨발’로 불리기도 하였다) 갖은 고생과 불평등을 견뎌 내다 결국 호주의 시민이 되어 가족을 불러들이는 여러 한인들의 경험과 증언은 그것만으로 가치 있는 이민역사의 한 부분이다. 그 후에도 1980년 말까지 꾸준히 입국한 사람들에게, 특히 호주 건국 200년을 맞는 1988년 또 한번 사면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좌절을 안겨 주었다.
이 당시 한가지 주요한 현상은1980년 대 초부터 시드니의 캠시(Campsie)라는 지역에 한인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한국식당과 식품점등이 자연스럽게 생기면서 한인촌이 형성되어 한인들의 보금자리가 된다. 한인들이 캠시에 모이게 되는 다섯 가지 현상을 번레이 (Burnley) 교수는 The Impact of Immigration on Australia에 설명하는데 정신적인 안정감, 직업 찾기의 용이함, 낮은 가격의 셋집, 한국식 서비스와 생활용품, 그리고 시드니 시내와 남쪽 공업지역으로의 교통편리 등이 그것이다 (번레이, Burnley, 2001: 271). 캠시는 그 후 오랫동안 한인들의 경제적, 사회적 중심지로 특히 갓 입국한 한인들에게 호주 이민생활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게 되고, 또 중요하게는 호주인들과 타 민족 이민자들이 코리언 음식과 문화를 접하게 되는 나눔의 현장이 된다.
6) 투자 이민과 기술 이민 (1980 – 1990년 대)
인종차별을 근거로 하는 이민 제한정책은 철폐되었지만, 이민은 결국 국가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필요와 이익에 따라 책임 있게 통제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후에도 여러 집권당에 의해 계속 유지되었다. 이민 점수제도가 그런 취지에서 1979년 도입되어 교육, 사회, 그리고 경제적인 능력에 따라 점수를 가산하므로 호주의 경제 발전에 얼마나 이바지 할 수 있느냐가 향후 이민의 골간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투자이민, 사업이민, 기술이민 등이 생겨나므로 아시아의 중산층 이상 수준의 이민자들을 불러 오게 되는데 이 정책들은 실패와 성공 속에 계속 보완되어 현재 호주사회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술이민 카테고리가 나와있다.
한 예로 1987년부터 시작된 사업이민은 해외의 자본 있고 기술 있는 이민자들을 호주의 주요도시로 불러오는 매력 있는 정책이었다. 호주의 경제를 활성화 시키는 한 방법으로 사업체 소유자, 투자자 그리고 기업간부 등이 호주에서 새 사업이나 기존의 사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영주권을 주고 있었다. 또한 호주의 고용주가 본국 시장에서 찾을 수 없는 기술이나 또 훈련이 불가능한 고급 기술 인력에게 우선적으로 이민을 허용하였다. ‘숫자’를 찾았던 호주정부의 이민정책이 이제는 ‘질’을 중심으로 인적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사면령 이민자’들과는 달리 이들 대부분은 호주에 정착하여 사업을 계속 할 것인지 돌아갈 것인지 여유로운 선택이 있었고 호주는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그리고 자녀들의 교육을 위한 한 방편이었다. 호주에 정착하기로 결정하면 곧 집을 사고 호주의 자연과 레저를 즐기며 살 수 있었는데 이전 이민자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이민이었다.
한길수 교수는 Asian Migrant(아시아 이민자)라는 학술지에 다른 단면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들 한인 사업 이민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본인이 원하는 사업을 호주에서 할 수 없어 정신적인 불만족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 주된 이유로는 영어의 어려움과 호주사회 이해부족에서 오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길수, 1996: 85).
그러므로 1980년대 사업비자로 들어 온 사람들의 시행착오를 보고 1990년대 들어 온 사업이민자들은 임금을 높이 주어야 하는 호주에서의 사업에 곧장 뛰어 들기보다 재산을 그대로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한국의 사업체를 계속 유지하거나 혹은 아시아 쪽의 시장으로 눈을 돌리게 하였다고 적고 있다. 사업이민자들 중 많은 사람이 본인이 원하는 사업을 호주에서 할 수 없어 심리적으로는 만족하지 못한 생활이지만, 좋은 기후와 한국에서 처럼의 과로나 술자리가 없어 육체적인 건강은 증진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한길수, 1996: 82-85).
이 당시 교민사회에 재미있는 용어가 있었는데 ‘구포(old timer)’와 ‘신포(new comer)’이다. 구포는 이전에 이민 온 교포들을 지칭하고 신포는 사업이민이나 투자이민으로 갓 이민 온 교포들을 말하였다. 구포는 신포를 향하여 ‘이민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돈만 있는’ 사람들로 이야기하고, 신포는 구포들을 볼 때 ‘남의 나라에서 고생고생하며 사는 가난한’ 사람들로 서로 조롱하는 단어였다 (한길수, 2001: 547).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여러 종류의 이민자들이 들어오고 또 구포들도 많이 성공하여 좋은 지역에 살면서 지금은 이런 구별이 없어 졌는데 이민의 서로 다른 성격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었다.
한편 ‘해외 이민의 명암: 호주 내 한인들의 이민동기와 실제생활’이란 글을 쓴 설병수는 대다수의 한인들은 경제적인 동기보다 ‘양질의 삶’을 위해 호주로 이민 왔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아메리칸 드림’이 경제적인 성공을 의미한다면, ‘오스트라리안 드림’은 보다 나은 ‘인간적인 삶의 추구’를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설병수, 2001: 59).
이 시기 이웃나라인 뉴질랜드에서 호주로 이민 오는 숫자가 크게 증가하였는데 이것은 영국인 이민자가 계속 감소하므로 같은 영국계 뉴질랜드 정부와는 쌍방 시민들의 입국절차를 간소화한 결과이고, 적지 않은 한인들도 이 경로를 통해 호주에 입국하였다. 한인이 9,285명이라는 1986년 인구조사는 1991년 가서 20,580명이 되어 배가 증가되었다. 이것은 이 당시 많은 한인들이 사업과 기술이민 등으로 들어 온 이유인데 이민성은 이 당시 매해 1,400명 정도가 입국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숫자는 1996년 인구조사에서 30,091명으로 나타나 조금 둔화되고 있다.
7) 한국 유학생과 교민사회 (1990년대부터 현재)
1990년에 들어서면서 호주는 한국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여행국가중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었다. 호주와 한국을 이어주는 비행기가 매일 뜨고 많은 사람들이 관광으로 또 공부를 위해 호주를 방문하고 있다. 한국 유학생들이 여러 모양의 교육과 미래의 발전을 위해 호주의 주요 도시로 들어 오고 있고 그의 부모들 중에도 함께 동행하여 호주에서 삶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따라서 많은 여행업체와 더불어 유학원들이 번성하고 있으며 식당업, 숙박업, 광고업들이 교민사회의 경제에 활력을 주고 있다. 이민성의 자료는 2002-2003년에 11,270명의 한인학생들이, 2003-2004년에는 14,375명으로 27.5퍼센트의 증가율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 다음으로 가장 큰 유학생 숫자이다. 폭발적으로 성장해 오던 호주 유학산업이 후에 잇단 악재로 인하여 신장세가 크게 둔화되는데 2009년에는 한인 유학생의 신규등록이 2%정도 감소되어 중국과 인도 다음으로 35,708명이다.
유학의 내용을 분야별로 보면 대학교와 대학원 등의 고등고육기관, 전문대 직업 전문기술과정, 초 중고등학교, 어학연수, 그리고 교환학생 등인데 이중에 언어연수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지역별로는 시드니를 중심으로 한 뉴싸우스웰스 주, 브리즈번을 중심으로 한 퀸스랜드 주, 그리고 멜본을 중심으로 한 빅토리아 주 등의 순서로 한국 유학생들이 들어 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006년 주간 코리아타운에서 유학생 276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유학 후 호주에 정착하고 싶다고 대답한 한국학생이 33%나 되었다 (2006년 3월24일).
2001년 7월 한국의KBS에서는 추적 60분을 통해 호주 한국유학생들의 문제점을 방송하기도 했는데 당시 한국이 3등급으로 하향 조정되어 유학의 절차가 어려워지게 된 이유는 소수 유학생들의 불법취업, 비자기간 경과 체류, 조기 유학생들의 탈선행위 등이 그 내용이었다고 하였다. 2년 후에 가서 한국은 다시 2등급으로 상향분류 되었는데, 호주의 각 대학마다 유학생 유치를 통하여 정부의 보조금 삭감으로 인한 부족한 재원을 충당하므로 연간 총35억불 이상의 호주 외화수입원이 되고 있다.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통해 호주에 입국하는 청년들도 점차 늘고 있는데 이것은 30세 이하의 청년들이 호주여행을 하면서 단기간의 노동을 통해 여행자금을 충당할 수 있는 제도로, 주로 과일 따기나 포장 등 추수철 호주의 부족한 인력을 충당하고 그래서 불법체류자들이 일을 못하도록 막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유학생과 관광객 등으로 인하여 교민 경제사회도 크게 활성화 되었고 그 중 유학업 및 교육 사업, 이민 상담업 그리고 관광업 등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동포 주간신문 Top지는 2005년 8월 4일자에 한인경제에 관해 논하면서 “14년 전 10개에 불과했던 유학원의 숫자가 이제는 시드니에서만 70여 개 이상으로 파악되고 있고, 14년 전 5개 업소에 불과했던 이민 대행업체가 현재는 이민 법무사라는 이름 아래 최소 12배 이상의 양적 팽창을 한 것으로 파악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Top, 2005년 8월 4일). 관광관련 업체도 91년 당시 1만 4천명에 그쳤던 한국 관광객이 2004년 무려 21만 명으로 집계 되었다는 통계는 여행사뿐만 아니라 관광객 전용 선물쎈터 역시 파죽지세로 양적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고 같은 신문은 전한다. 이것은 비단 한국 관광객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유럽 등에서 오는 관광객이 연평균 4백만 명, 워킹 홀리데이로 오는 청년들이 6만 여명, 그리고 학생비자로 10만 명 이상이 매해 호주에 입국하고 있다.
호주를 방문하는 한국인 단기 방문자는 2000년에 15만 여명, 2005년에 25만 명으로 최고를 이루었고, 2010년에는 21만 여명으로 세계 8위를 기록하므로 지역적으로 소외되어 있었던 호주도 글로벌시대의 한 주역이 되어 있다.
8) 젊은 한인 이민사회 (2000년 대 이후)
최근 호주인들이 한국의 언어와 문화에 더 관심을 가지고 실제로 몇 대학에서는 한국학과가 개설되는가 하면, 일부 고등학교에서도 한국어를 가르쳐 대학입시 시험과목의 하나로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한국이 호주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2004년-2005년에는 한국이 호주의 네 번째로 큰 무역 상대국이었고, 더 중요하게는 한국이 호주의 세 번째로 큰 수출국이었다.
1991년 정부 인구조사 통계에 호주의 한국태생 이민공동체는 84.8%가 가정에서 한국어를 사용하며, 영어만 사용하는 가정은 12.8%로 나타났는데 호주의 한인들은 한국의 문화와 생활 패턴을 비교적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한 단면이다. 한인들이 얼마나 호주사회에 적응하여 소외된 게토집단이 아니라 주류사회의 한 부분이 되는 가는 더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이민 1세들과 2세들, 그리고 1.5세들의 정체성과 문화에 대해 다각적인 연구가 요청되고 있다.
2001년 호주 인구 통계를 보면 38,840명이 한국에서 태어난 이민자로 기록되어 있다. 평균 나이는 30.8세이고 이것은 전체 이민자 평균 나이의 46세와 비교되며, 또한 호주 전체 평균 나이인 35.6세 보다도 젊은 나이이다.
호주에서의 한인사회는 주로 1세 사회로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한편으로는 일반사회와 잘 공존하면서 기여하고 있는 ‘모델 소수민족’으로,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영어사용을 포함해 일반 호주문화에 잘 동화되지 못하는 또는 않는 민족으로 비추어지고 있다. 계 파동이나 각종 사기사건 그리고 폭력 등의 범죄 이미지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한 두 호주언론에 과장되고 또 왜곡되어 비쳐진 결과이기도 하다. 2004-2005회계연도에는 각종 불법이민 항목에 한인들이 일제히 상위에 기록되어 한국과 한인들의 이미지에 손상이 가기도 하였다 (한국신문, 2006년 1월 19일: 14).
한인에 관한 호주 인구조사에는 호주에서 태어난 2세들의 생활이나 문화가 반영되지 않으므로 이들에 관한 통계나 학문적인 연구가 현재 전무한 현실이다. 이들에 관한 학문적 고찰은 아직 이를 수 있지만 2세들의 존재와 그들의 공헌은 한인사회와 호주사회 전반에 점차로 부각되고 있는 현실이다. 1.5세와 2세들 중에 전문화된 직업을 가진 지도자들이 많이 나와 있는데 사업가, 언론인, 의사, 변호사, 회계사, 종교지도자, 정치인, 교육가, 노동운동가, 복지사 등이다. 이들의 전문직 분야 진출은 일세대가 할 수 없었던 직종으로 일세대들의 희생과 희망으로 그 자리에까지 와 있는 것은 물론이다. 특히 1.5세로는 처음으로 호주의 주요 정당으로 진출해 2004년 스트라스필드 시의원이 되고 후에 시장까지 지냈던 권기범 한인정치인 후원회 모임에서 한 관계자는 “한 정치인 개인을 후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포사회 정치적 향상을 위한 차원에서 이런 행사가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한인들의 의사와 필요가 지방정부에 반영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정치 참여가 절실하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신문, 2005년 11월 25일). 또한 시드니의 한 총영사는 어떤 공식모임에서 한인사회의 정치적 신장에 대해 언급하며 동포사회의 위상을 위해 주류정치권을 향한 보다 효율적인 연대모임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한국신문, 2005년 8월 26일).
이것은 비단 한인사회뿐 아니라 다른 주요 이민자 그룹들의 정치사회적 영향력도 호주사회에 전반적으로 미약한 것이 현실이고, 이민자이기 때문에 지도자가 되기 보다는 이민자임에도 불구하고 개인능력으로 정치사회적 신분상승을 하는 호주 주류사회의 지금까지 분위기이다. 그러므로 한인사회의 발전과 정치사회적 영향력은 일반 다문화정책의 확장, 타 이민자 그룹의 발전, 그리고 호주정부의 우호적인 이민정책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호주의 사회학자 코간(Coughlan)은 그의 글 ‘Korean Immigration in Australia(호주의 한국인 이민)’에 다문화 호주사회 속에서 한인이민자에 대한 평가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젊고, 교육수준은 높고, 실업률은 비교적 낮은 한인들의 특성은 호주사회의 경제 발전과 사회 발전을 위해 가치 있는 공헌을 하고 있고, 또 이들은 전반적인 호주 복지제도에 부담이 적은 공동체이다” (Coughlan, 1997: 194).
IV. 호주 한인 연구 및 네트워크
호주 다문화 사회에서 한인사회는 길지 않은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수적으로도 비교적 소수민족 집단이다. 또한 한인들의 이민역사나 삶의 형태, 그리고 그 공헌이 호주 주류사회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사실 호주의 문화와 경제 발전에 한인을 포함한 여러 아시아 종족들의 공헌은 호주 정규학교의 역사와 사회 교과서에 대부분 언급되지 않고 있다. 중국인 노동자들은 오래 전 호주 오지지역의 금광에 취업을 해 왔었고, 그 이후 여러 도시에서 식당이나 서비스업, 그리고 호주인들이 저급하게 생각하는 일에 종사해 오면서 호주 사회에 기여해 왔고, 일본인들은 호주 북부에서 진주산업에 참여하여 왔고, 필리핀 사업가들은 호주와 아시아의 무역에 활발히 앞장서 왔고, 그리고 월남 난민들이 호주까지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등 이런 정도의 피상적인 내용만 호주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워왔다. 호주에 이민 온 아시아 인들이 현대 호주의 문화적, 경제적, 예술적인 발전에 공헌을 해 온 많은 이야기들이 근래에 와서야 비로소 조금씩 알려지고 있는 형편이다. 최근에 와서 사회교과서에 호주의 문화와 인종의 다양성을 가르치고 있으며 소수민족 공동체들의 이민역사와 그 공헌도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호주의 한인사회는 호주 정규교과서에 거의 언급이 안되고 있어 그들이 어떤 이유로 호주에 와 공동체를 이루었는지, 어떤 내용의 공헌을 하고 있는지, 또한 어떤 다문화 관계를 이루며 호주사회에 살고 있는지 등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형편이다. 호주의 사회학자 코간(Coughlan) 교수는 그 이유에 대해 크게 두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첫째로는 한인공동체가 비교적 수적으로 작다는 현실이다. 2006년 통계에 보면 한국출생 한인은 해외에서 온 이민자 중 17번째의 그룹이고 (52,761), 한국어는 13번째로 사용되고 있는 언어이고 (54,625), 한인은 29번째로 한 혈통을 가진 그룹이었다 (60,873). 두 번째로 한인들에 관한 내용이 호주교과서에 없는 이유는 호주한인들에 관한 영어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자료들이 오래된 내용이거나 호주 선생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만약 한인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호주 교과서와 강의실에 알리기 원한다면 연구된 내용들이 영어로 출판되어 이용되어야 한다(Coughlan, 2008: 117).
코간(Coughlan)은 호주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그룹 중의 하나가 한인공동체이고, 한인들이 호주에 정착한지 1세기가 되어 가지만 호주사회는 한인들에 대해 무지하거나 잘못된 정보에 의한 이해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언론에 의해 보도되는 이미지가 그 무지를 부채질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위의 책, 116). 이것은 물론 호주 정규학교의 역사나 사회과학 학과에 호주 한인들에 관련된 연구가 거의 없다는데 기인하고 있다. 호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인 학자들 중 한국어 교육이나 한국문화에 관한 연구는 지속하고 있지만, 호주사회에 사는 한인동포와 타민족과의 다문화 관계에 관한 연구나 글을 영문은 물론 한글로도 발표하는 학자가 거의 없는 형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 각 주에서 한인사회의 존재와 문화를 알리고 공유하려는 여러 단체들의 노력과 활동은 주목할 만 하다. 다문화 사회 행사에 참여하거나 다문화 행사를 주도하여 한인사회의 위상을 높이려는 다각도의 노력이 한인사회를 주류사회에 알리는 공헌을 하고 있고, 또한 모국의 단체들과의 꾸준한 네트워크와 교류를 통하여 호주 한인들의 위상과 생산적 다양성의 혜택을 창조해 나가고 있다.
최근 호주 한인이민사회 단체들마다 두 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고민하며 그 영역 확장을 경주하고 있는데 바로 네트워크 구축과 차세대 양육이다. 특히 네트워크 구축은 이 시대의 생존전략으로 한인사회 안과 밖의 많은 단체들과 관계를 맺으며 삶의 여러 방면의 깊이와 넓이를 더하고 있다. 네트워크(network)란 우리 말로 통신망이란 뜻으로 여러 개체가 서로 소통하는 모든 범주를 네트워크로 다룰 수 있다고 위키백과 사전은 말한다. 한인 디아스포라 영역에서의 네트워크는 ‘한민족공동체’란 한 단어로 집약될 수 있는데 “한민족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공유한 사람들로 구성된 상호협조의 연결망 또는 유대체제”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민족 성원들을 하나의 민족이라는 동질성과 동포의식에 기초하여 정서적으로 연대시키는 것이며, 나아가 그러한 정서적 연대에 기초하여 무한경쟁의 세계화 시대에 공동 대처하는 협조체제를 형성하는 것”이다 (정영훈, 2002, ‘한민족공동체 형성과제와 민족정체성 문제’, 재외한인연구, 재외한인학회, 제13권).
호주 한인 디아스포라 네트워크라 하면 크게 다섯 가지 방면에 거쳐 그 협조체제를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한인사회 안에서 여러 단체들과의 네크워킹이다. 한인회를 포함해 한인사회 안의 여러 단체들이 지역과 이해관계를 넘어 호주 전역 한인단체들과의 관계인데 이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각 도시의 한인회는 대부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타 도시 한인회와의 연대나 연합하여 하는 행사는 소극적이었다. 지역간의 연결 망 밀도가 좀 더 강화되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두 번째의 네트워킹은 호주 안 주류사회와의 네트워킹이다. 호주 정부나 시민사회와의 네트워킹은 주로 지역사회의 정당이나 시민 봉사단체들과의 관계인데 상호간의 네트워크를 통하여 불신이나 오해를 해소할 수 있고 호주에서의 권리나 의무를 다 할 수 있기에 그 중요성은 말로 다할 수 없다.
세 번째로 호주 다문화 단체와의 네트워킹이다. 다문화 단체라고 함은 다문화를 추동하는 단체들이나 타 이민자 단체와의 관계인데, 같은 디아스포라 입장에 있는 여러 인종들과의 관계는 때로는 경쟁자로 때로는 동반자의 관계로 나타난다. 이것은 특히 후세대들에게는 절실한 현실적 네트워크로 매일의 삶과 직결되어 있다. 이 분야 네트워킹이 현재 한인 디아스포라 사회에서 제일 저조한 분야로 보인다.
네 번째의 네트워킹은 한국정부나 NGO 단체들과의 네트워킹인데 외교통상부나 NGO 산하의 정치, 경제, 문화, 체육 등 여러 부서와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매년 많은 한인 지도자들이 한국을 오가며 그 통신망을 확장하여 한민족공동체의 유대를 강화시키고 있는데 상생 협력관계로 설명되고 있다.
다섯 번째는 재외 한인 디아스포라들과의 관계이다. 호주와 모국의 경계를 넘어서 미주, 아시아, 유럽 등 여러 한인단체들과의 수평적인 네트워킹인데, 타 지역 디아스포라가 이루어 놓은 경험과 성과를 배우고 서로 공유하여 이민사회에서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한인 경제인, 학자, 차세대 지도자, 체육인, 정치인, 종교인 등의 왕래와 연대를 통한 ‘초국가주의적 디아스포라 네트워킹’(transnational diaspora networking)이라 하겠다.
이러한 내용을 염두에 두고 그 동안 호주한인사회에서 되어 진 한인 디아스포라 연구를 검토하도록 한다.
V. 호주 한인사회 연구 소개
호주에서의 한인 디아스포라와 네트워크에 관한 연구는 현재까지 연구기관이나 대학에서 조직적으로나 체계적으로 되어졌다기 보다 호주인이나 한인 중 관심 있는 개개인 학자들 중심으로 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1980년 대부터 간간히 발표되어 온 호주 한인사회에 관한 단편논문들이 있어 왔지만 본격적인 한문적 토론은 1990년 대부터 시작되었고, 2000년 대에 와서 적지 않은 양의 논문이나 책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호주 한인사회 연구는 여전히 산발적인 형태이고 지속적이지 못한 측면이 있다. 한국학 연구에 비하여 한국이나 호주정부의 지원이 미미하고, 호주동포들의 관심도가 낮은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출판되는 해외동포에 관한 논문이나 출판물에도 호주를 포함한 대양주에 거주하는 동포에 관한 내용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이 분야의 저조한 학술적 연구 현실을 단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한 예로 한국의 재외한인학회에서 1990년부터 20여 년간 발간하고 있는 재외한인연구에 실린 호주 한인사회에 관한 논문은 현재까지 총 3편에 불과하며 그 중에 2편이 필자의 글이다.
이 장에서는 그 동안 호주 한인사회에 관한 책이나 연구 논문 최소 서너 편 이상을 발표한 학자나 주요 연구단체의 글을 중심으로 소개하도록 하겠다.
먼저 한길수 교수이다. 한길수는 현재 멜번의 모나쉬 대학 커뮤니케이션과 메스 미디어 학과 교수로 한인사회에 관한 연구와 글을 꾸준히 발표해 온 학자이다. 그는 주로 영문으로 글을 발표해 오므로 호주 주류사회의 학계와 해외의 학계에 호주 한인사회를 알리는 공헌을 하고 있다. 다만 한글로 발표되는 글이 적다 보니 한 박사의 한인연구가 한인사회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출판한 대표적인 책은 다음과 같다.
1) 1994, Social Sources of Church Growth: Korean Churches in the Homeland and Overseas. Lanham, MD., New York and London: University Press of America.
2) 2000, Health and Medicine under Capitalism: Korean Immigrants in Australia. London & Madison, N.J.: Associated University Presses & Fairleigh Dickinson University Press.
3) 2011, Korean Diaspora and Media in Australia In Search of Identities, Forthcoming September 2011, Lanham, MD, University Press of America.
이 외에 많은 단편논문을 발표하였는데 특히 호주의 여러 민족 인명록에 한인사회를 소개하여 왔다.
4) 2001, “Koreans”, Jupp, J (ed), The Australian People: An Encyclopedia of the Nation, Its People and Their Origins, Cambridge Uni Press.
두 번째는 제임스 코간 (James Coughlan) 교수로 그는 현재 퀸즈랜드 주의 제임스 쿡 대학 사회학과 교수로 주로 호주 아시아사회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한인에 관한 내용도 함께 다루고 있다. 호주정부 통계청이 4년마다 발표하는 인구조사 자료를 중심으로 사회학적인 분석을 주로 해 왔지만 한인사회와는 큰 관계를 맺지 못하였는데, 최근 한 한인 연구단체의 초청을 받아 한인사회에 관한 연구결과를 공유하고 있다. 아시아 이민자 그룹을 다양하게 다루는 코간 교수는 한인사회의 연구가 미미하고 관심이 많지 않은 것 같아 한인에 관한 글을 더 이상 발표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1) 1997, “Korean Immigration in Australia”, Asians in Australia, Macmillan Education.
2) 2008, “Korean-Australians: Present and Impending Contributions to Australia’s Future - An Outsider’s Perspective”, Cross-Culture, UTC: Sydney.
세 번째로는 신성철 교수로 현재 뉴싸우스웰즈대학 한국학 교수와 언어학부의 대학원 주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신 박사는 주로 한국어 교육과 언어정책에 관하여 꾸준히 영문으로 글을 쓰고 있으며, 동포신문에는 한글로도 글을 기고하여 왔다. 그는 호주 중고교 한국어교육에 공헌해 왔는데 1990년대 초 한국어 학습지침서를 주정부교육부에서 처음으로 집필하기 시작하였고, 당시 여섯 개의 교재가 개발되어 한국어가 공교육에서 교육되기 시작하였다. 92-93년에는 호주한국어커리큘럼프로젝트의 책임자로 근무하면서 관련 교재들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1) 2010, The Current State of Korean Language Education in Australian Schools. Melbourne, Victoria: Education Services Australia.
2) 2010, “Strategic Direction and Tasks for the Global Expansion of Korean Language Education”. Journal of the International Network for Korean Language and Culture 7-2. 27p (93-119). The International Network for Korean Language and Culture.
3) 2009, "Language Instructors' Use of Learners' L1 and L2 in Classroom: Perceptions by Students and Teachers of Korean". Journal of Korean Language Education, Vol. 24. 31p (165-195). 2009. Seoul National University Korean Language Education Research Institute.
4) 2008, “Language Use and Maintenance in Korean Migrant Children in Sydney”, Teaching Korean as a Foreign Language 33. 30 p (139-168). 2008. KLI Institute of Language Research and Education, Seoul.
네 번째로는 호주한인50년사 편찬위원회 (위원장: 추은택)이다. 호주 시드니 한인회는 2006년 ‘호주한인이민사 편찬위원회’를 구성하여 호주 한인에 관한 역사와 그 의미를 연구 출판하도록 하였다. 2년여의 작업 끝에 2008년 호주한인 50년사가 출판되었고 호주 전 지역에서 추천된 20명 이상의 집필진이 호주 한인의 삶을 다양한 주제로 다루어져 이 분야의 좋은 자료를 남기고 있다. 이 위원회는 책이 출판되어 해체되므로 더 이상의 연구활동은 없다. 본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1부 – 호주한인동포사회의 정착과 발전
1장: 한호간 초기 인적교류와 한인 사회의 형성 (1880-1967)
2장: 한인 동포사회의 정착 (1968-1979)
3장: 한인 동포사회의 역동적 발전 (1980-1999)
4장: 한인 동포사회의 성장과 그 질적 변화 (2000년 이후)
2부 – 한인사회의 분야별 발전
3부 – 호주 각 지역의 한인사회
4부 – 한인 동포사회의 단체활동
부록: 영문초록 및 한인사 연표
다섯 번째 양명득 교수는 호주 찰스스터트대학 방문교수로 재직하며 다문화 교육 분야의 강의를 해 왔으며, 한인이민사회와 교회에 관한 몇 권의 책을 한글과 영문으로 출판하였다. 한국어와 영문을 함께 사용하여 양쪽 문화권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으며, 호주한인50년사 편찬위원회 집필위원으로도 참여하였다. 최근에는 호주디아스포라연구원을 찰스스터트 대학 안에 개설하여 정규적으로 디아스포라 심포지엄 개최와 출판을 하고 있다.
1) 2004, 호주이민 한인교회 30년사, UTC: 시드니.
2) 2006, “호주한인이민사 연구 (1회-10회)”, TOP 신문, 시드니, 1월-3월.
3) 2009, 호주와 한국: 120년의 역사, 연세대출판사: 서울.
4) 2009, 다문화 사회 다문화 교회, 한장사: 서울.
5) 2010, “호주 다문화사회와 재호 한인동포”, 재외한인연구, 재외한인학회: 서울, 제22호, 97-137.
여섯 번째로는 이경숙 박사로 그는 시드니대학과 뉴싸우스웰즈대학에서 강의 하면서 호주 한인사회에 관한 몇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박사의 연구는 주로 한인상권, 가정, 그리고 여성들에 관한 내용으로 이 분야에 좋은 자료들을 남기고 있다. 또한 그는 호주한인50년사 편찬위원회 집필위원으로도 참여하였다.
1) 2000, “The Korean Migrant Women’s Perception of Domestic Violence”, Honours Thesis, unpublished, The University of Sydney.
2) 2005, “The Narrative Analysis of Labour Market Experience of Korean Migrant Women in Australia”, Ph D Thesis, Faculty of Economic and Business, The University of Sydney.
3) 2008, “한인들의 직업과 가정생활”, 호주한인50년사, 호주한인50년사 편찬위원회 편, 진흥출판사, 서울, 207-232.
4) 2008. “거주지역, 상권 및 사업영역확대”, 호주한인50년사, 호주한인50년사 편찬위원회 편, 진흥출판사, 서울, 172-191.
VI. 나가는 말
호주와 뉴질랜드의 한인들은 이민의 역사적 시기, 성격, 규모, 그리고 그 삶의 형태는 각각 독창적인 모습으로 발전 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인 두 나라의 한인 동포들은 같은 영연방 국가에서의 문화와 경험을 공유하고 있고, 현재는 유사한 다문화 사회에서 한민족의 정체성을 확립시키며 그 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다. 이민생활의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나누며 상호 연대하고 협력할 때 대양주에서의 한인공동체 위상을 굳건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글을 마치면서 앞으로의 연구 과제로 한인 정체성에 관해 언급하고자 한다. 호주와 뉴질랜드 한인들의 정체성은 유동적이고 복합적이지만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호주 속의 혹은 뉴질랜드 속의 한국인 (Koreans in Australia or Koreans in NZ), 한국계 혹은 뉴질랜드계 한국인(Korean-Australian or Korean-New Zealander), 호주인 혹은 뉴질랜드인 (Aussie Full Stop or Kiwi full stop), 그리고 다문화 호주 혹은 다문화 뉴질랜드의 주변인(‘AustrAlien’, Australia와 Alien의 합성어로 호주속의 이방인을 지칭함 혹은 ‘Kiwi-Alien’) 이다.
첫째, 호주/뉴질랜드 속의 한국인은 소위 ‘화분 채 옮겨 놓은’ 개척 1세 이민자들과, 노년에 자녀 따라 이민 온 0.5세대들이다. 대부분의 이들은 지리적 환경만 호주/뉴질랜드일 뿐이지 한국인으로 한국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하루 24시간 한국TV나 라디오방송에 귀를 기울이지만 이들의 꿈은 호주/뉴질랜드에서의 사업확장과 자녀교육의 성공을 꼽는다.
두 번째, 한국계 호주/뉴질랜드인은 ‘화분이 깨져 호주 땅에 뿌리를 내리는’ 모습으로 일부 1세나 1.5세, 그리고 2세까지 속하는데 이들은 한국과 호주/뉴질랜드를 연결하는 다리 세대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한국과 호주/뉴질랜드 사이 ‘하이픈’ (hyphen)이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양 쪽의 문화와 정체성에 편안해 하면서 더 넓은 다문화 사회로 까지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세대이다.
세 번째는 스스로를 호주인/뉴질랜드인으로만 여기는 정체성도 있다. ‘호주/뉴질랜드 땅에 씨가 뿌려져 싹이 튼’ 한국적 유산을 잃어버린 많은 2세나, 의도적으로 한국 문화를 멀리하는 1세나 1.5세도 여기에 속할 수 있다. 정말 100% 호주/뉴질랜드인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은 둘째 치고라도, 이들 2세 중 스스로를 호주/뉴질랜드 백인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미래의 꿈은 자기가 즐길 수 있는 직장과 생활을 갖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문화 호주/뉴질랜드 사회의 주변인으로 어느 한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떠다니는 씨앗’이다. 이 그룹도 1세, 1.5세, 2세들 중에서 다 나타나고 있는데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고 오히려 비슷한 아시안계 주변인들과 연결되고 있다. 이들이 즐겨 쓰는 말은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 (I belong nowhere.) 이다. 호주나 뉴질랜드 사회에도 속하지 못하고, 또 고국인 한국에 가서도 이방인처럼 느껴지는 이들의 삶은 고단한 이민자의 정체성을 단면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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