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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7일 화요일

호주 첫 한국인 유학생 김호열과 양귀념

호주 한국인 유학생 김호열, 독립운동가 양귀념


2011년 올해가 한국과 호주정부의 수교가 이루어진 50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나 호주 한인 역사에 있어서 올해는 한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알려져 있지 않다. 호주를 방문했던 최초 한인 유학생에 관한 기록이 19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므로 올해 90년이 된다는 사실이다.

구십 이번 호주 땅에 입국한 한국인은 김호열이다. 그는 호주선교사가 세운 한국 마산포의 창신학교 선생으로 그의 김호연은 일찍이 미국에 유학하기도 하였다. 김호열이 호주에 오게 경위는 호주선교사 데이비드 머리 라이얼 목사(한국명: 라대궐) 멜번의 오션 그로브 대회에서 김호열을 소개하며 호주에 공부하기 원한다는 보고를 통해 소개되었다. 호주장로교 유니온은 즉시 후원과 재정지원에 동의하여 그의 방문을 추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동아일보는 1921년 당시 김호열의 유학을 호주류학은 처음일 소개하고 있다.

 본시 학교는 호주사람의 경영하는 학교이엿슴으로 자연 씨의 뛰어나는 텬재는 말다른 호주사람에계까지 감동을 주게되야 여러가지로 교섬이잇슨후 씨는 금월십오일에 신호를 떠나 멀리 남양호주로가서라고 쓰면서 연이어 그의 학비는 전부 (중략) 호주사람 교회에서 부담할터인대 우선 조선에서 려비문뎨에 곤란을 밧고 지금씨는 평양에잇서서 백방으로 주선중이라하니 반갑고도 딱한일이라하겟다더라(동아일보, 1921 8 6, 3, 철자법과 띄어쓰기 그대로 인용함)

김호열은 백호주의가 왕성하던 1921년 9 6 호주 북부 서스데이 섬을 통해 입국한다. 입국할 기록한외국인 등록증 (Alien Registration)’ 멜번 고문서관에 오랫동안 보관되어 있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그는 1901 출생으로 당시 20세이었으며, 한국인 (Corean)이지만 일본여권 (여권번호 190081) 소지하고 있었고, 방문 목적은멜번대학에서의 공부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민족주의자라는 증거 없슴’ (No Evidence of Nationalist) 불충실의 혐의가 없슴’ (No Suspicion of Disloyalty)이라는 성격소견과 서스데이 경찰서의 직인과 함께 그의 지문이 찍혀있다. 멜번에 도착한 그는 멜번 근교의 (Kew) 거주했던 외국인 등록 기록도 남아있다.

김호열은 스카치 칼리지에서 단기 영어공부 문학사 공부를 위하여 멜번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짧은 기간 안에 영어를 배우면서 기말시험에 합격하는 김호열은 공부에 진전을 가져 온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그의 쾌활한 성격으로 인하여 만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2학년 말에 가서 후두암이 진행됨에 따라 공부하는데 지장을 받는다. 아픔과 고통 중에도 시험을 보는 내용이 기록에 남아있는데 결국 의사의 권고에 따라 1925년 5 한국으로 다시 돌아간다. 한국에 돌아 그는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지만, 사망하게 된다.

빅토리아장로교 총회는 김호열에 관심을 갖고 계속 보고해 왔으며, 그의 사진도 소개하므로 자료를 남기고 있다. 마지막 보고서에는 장래가 촉망되고 능력 있는김호열 교사의 불행을 애도하고 있다.

한국 여성으로 호주를 처음 방문한 사람은 양귀념이다. 1893 생인 양귀념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호주선교사가 세운 부산의 일신여학교 1 졸업생으로 마산 의신여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그러나 1915 학교당국이 일본 대정의 즉위식 기념 떡을 학생들에게 먹이려고 하자 학생들과 반발하여 요주의 인물이 되었고, 일본에 건너가 요코하마신학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소주여자사범대학에 학적을 두면서 상해임시정부 경상도대의원을 지냈다. 1922 임시정부 특사로 밀입국하던 잡혔으나 석방되어, 이듬해 다시 상해로 건너가 민족운동가들과 주로 재정을 모금하는 독립운동을 하였다. 당시 그의 이름이 양귀념에서 양한나로 바뀌었는데 이는 도산 안창호가백두산에서 한라까지 나라를 길이 보존하도록 노력하라 격려의 뜻으로 개명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한나는 어머니의 병환으로 귀국하여 1924 이화여자전문학교 유치사범과를 마치고 중국에 드나들며 민족운동에 계속 관여하는 한편, 사회사업에 뜻을 두고 있다가 1926 호주를 방문하게 된다. 당시 동아일보는 양한나의 유학을 사진과 함께 보도하며 조선녀자로 오스트랄리에 류학하기는 이분으로써 처음이라소개하고 있다 (1926 818, 3).

호주 방문 배경은 통영에서 선교하던 에이미 스키너 선교사 (한국명: 신애미) 호주로 휴가 34세의 양한나를 동행하여 입국한 것이다. 그녀는 멜번에서 많은 교회를 방문하며 따뜻한 환영을 받는 동시에, 그녀의 선한 매너, 유머감각, 그리고 긍정적인 태도로 호주인 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다음해 그녀는 편의 글을 영문으로 남기고 있는데 제목이빅토리아 교회에 대한 한국인의 인상’ (A Korean’s Impression of Victorian Churches)이다.  글에서 그녀는 한국과 호주의 문화 차이에 관해 언급하였고, 또한 멜번에 소재하고 있는 아름다운 교회당에 감동하며 한국에도 그런 양식의 교회당이 세워지기를 바라고 있다. 그녀는 유치원 운영과 교회음악 등을 견학하였고 후에 한국에 돌아가 어린이와 여성들을 위하여 사회사업가로 일하면서 호주를 다시 시찰방문 하기도 하였다. 1936년에는 부산 YWCA 창설하는 사회복지사업 일선에서 활동하다 광복을 맞았으며, 광복 1946년에는 초대 수도여자경찰서장에 취임하였고, 부산 애국부인회장으로 여성운동과 사회사업에 헌신하였다.

1948 고아원으로 자매여숙을 설립하였고, 전국의 정신병원을 순례하며 정신병자수용소를 세워 병을 치료하게 하는 양한나는 부산이 낳은 대표적인 여성운동가, 독립운동가 그리고 사회운동가였다. 1976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하였으며 사망하였다.

참고자료:
The Missionary Chronicle (4월과 10, 1927),
양한나의 삶과 활동에 관한 일고찰 (이송희, 신라대학교, 2002),
호주한인50년사 (진흥출판사, 2008),
호주와 한국: 120년의 역사 (연세대출판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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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 Right 양명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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