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한인이민교회 생성과 발전
서론
호주에 있는 한인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중요한 삶의 한 부분이다. 초창기 한인들에게 교회는 신자이거나 비신자이거나 낯선 호주사회에서 친근한 모국어를 쓸수 있는 만남의 장소였으며, 위로와 나눔의 공동체 였고, 이민생활을 살아가게 하는 용기와 희망의 출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 한인 단체들이 제 구실을 감당하게 되면서 교회는 자연스럽게 영적인 역할에 우선을 두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여전히 한인사회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이글은 호주한인사회에서의 이민교회의 생성과 발전 그리고 그 정체성을 간략하게나마 다루는데 그 목적이 있다.
- 호주선교사들과 첫 호주방문자들
호주에 있어서 한인교회를 논하자면 앞서 이야기되어야 할 역사가 있다. 다름아닌 1889년 부터 시작된 호주선교사들의 한국선교이다. 이들의 한국행이 지금까지 알려진 호주와 한국의 민간관계의 시작이고, 이들을 통해 호주에 첫 한인방문자들이 들어 왔고, 훗날 호주에 한인교회를 세우는데 또한 큰 공헌을 하게 되므로 이들의 발자취는 호주 한인들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이에 관한 글은 독립된 글로 본 책에 수록되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다만 호주선교사가 한국에 들어 간지 30년이 지나서야 그들의 후원으로 호주에 들어 오는 한인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 후부터 꾸준히 입국하지만 큰 숫자는 아니었다. 당시 미국, 영국, 캐나다 선교사들의 한인지도자 인재양성에 비해 뒤떨어지고 있는데 이런 사실은 호주의 백호주의 정책의 영향과 그 정신이 잠재적으로 드러난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지태영, 21).
처음으로 호주에 입국한 한인유학생은 호주 빅토리아장로교 총회에서 초청을 허락한 김호열이다. 1921년 총회에서 그에 대한 재정적 후원을 확인하고, 그가 호주에 옴으로 한국에 대한 선교관심이 증대될 것을 기대하고 있으며, 김호열은 좋은 타입의 한국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빅토리아장로교 총회회의록, 1921). 김호열은 호주선교사가 세운 마산포의 한 중학교 선생이었는데 창신90년사에 그는 창신학교의 교사로 기록되어 있고, 창신학교는호주선교사가 창설한 학교로 1919년 일제의 강점에 항거하는 마산의 3.3만세사건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창신90년사 편찬위원회, 마산, 1998:123). 김호열은1921년9월 호주에 도착하여 영어공부 후 문학사 공부를 위해 멜본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기말시험에 합격하면서 공부에 큰 진전을 가져오지만 애석하게도 후두암이 발견됨에 따라 의사의 권고대로1925년5월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후에 곧 사망하게 된다 (빅토리아장로교 총회회의록, 1925년).
그 후 1926년9월 통영에서 선교하던 에이미 스키너 (Skinner)선교사가 호주로 휴가 올 때 양한나를 동행하여 입국한다. 그녀는 빅토리아 주의 많은 교회를 방문하며 교제를 나누었고, 유치원과 여성센터 등을 방문하였다. 후에 그녀는 한국으로 귀국하여 고아와 여성들을 위하여 일하였으며, 초대 수도여자경찰서장과 부산애국부인회 회장을 지내며 사회사업에 헌신하였다.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호주에 입국한 첫 목회자는 심문태 목사로 1934년 입국하여 교회학교 운영에 관한 공부를 한 후 미국을 거쳐 귀국한다. 1935년에는 세브란스병원의 이춘철 의사가 멜본에서 연수하였고, 1937년에는 홍옥순 간호사와 이영복 간호사가 멜본에서 2년간 연수하고 한국으로 돌아가 나중에 대한간호사협회 회장을 각각 역임하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같은 해 호주장로교 100주년 기념대회에 한국교회 대표로 부산의 이약신 목사가 입국하는데 이 목사는 빅토리아의 여러 호주교회를 다니며 일제하의 한국교회에 대해 강연과 설교를 하며 한국기독교에 대한 좋은 인상을 호주인들에게 남기게 된다. 그 후 교회계통이나 YWCA, 대한적십자사등을 통하여 그리고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나 병원계통, 특히 부산의 일신병원을 통하여 40년대부터 60년대까지 한인들이 호주를 꾸준히 방문하게 되는데, 그 당시 백호주의로 인하여 호주에 정착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부분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 주요 교단별 첫 한인교회들
처음 호주를 방문하거나 호주에 정착을 시작한 한인들 중 많은 사람이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첫 한인교회는 1973년에 가서야 멜본(Melbourne)에 그리고 1974년 시드니(Sydney)에서 창립되게 된다. 이 두 교회에 관한 배경은 본 책의 호주연합교회 한인교회 부분에 자세히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한다.
이 후 멜본한인교회나 시드니한인교회는 호주연합교회가 1977년 탄생하므로 투표절차를 거쳐 호주연합교단 (The Uniting Church in Australia) 소속 교회가 된다. 한국에서 여러교단 배경을 가진 한인들이 호주의 장로교, 감리교, 회중교가 연합한 연합교회에 속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결국 이것이 불씨가 되어 교회가 갈라지게 되는데 시드니에서 그 첫 교회가 호주한인장로교회였다. 신학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당시 성가대 지휘자였던 김선일 집사가 시드니한인연합교회를 나가지 않자 한인 중 몇명이 장로교회를 세우자고 제안하고, 결국 1977년 9월 써리힐에 한인장로교회를 창립하게 된다. 김 집사는 후에 호주장로교단(The Presbyterian Church in Australia)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 목사안수를 받는다.
이 교회는 후에 한인중앙장로교회를 1981년 4월 부활절에 개척하여 크게 부흥을 시킨 홍관표 목사를 청빙하게 되는데 홍 목사는 호주장로교회 소속 한인장로교회에서 나온 이유를 다음과 같이 한 좌담회에서 설명하고 있다. “신학적이고 교리적인것들이 상당이 문제가 되었고 호주장로교회 법이 서리집사나 권사를 못세워 한인교회와 맞지 않는 부분이 상당이 있었습니다” (크리스찬리뷰, 2006년 9월, 74). 이 후 홍 목사를 중심으로 첫 한인단독총회인 대양주한인예수교장로회가 창립되어 호주는 물론 뉴질랜드와 동남아에 있는 회원교회까지 확장되고 수명의 목사가 배출되기도 한다. 그 후 홍관표 목사는 20년동안 한 교회에서 목회한 후 지금은 은퇴하였지만 여전히 교계의 지도자로 여러교회에 봉사하고 있다.
호주한인그리스도교회도 그 당시 1977년 11월29일 버우드에서 창립되었는데 개척한 어윤각 목사는 1975년 3월 학업을 위해 호주에 입국하여 시드니한인연합교회에서 때로 설교로 봉사하다가 본인의 교단배경인 그리스도교회를 창립하게 된다. 시드니의 한 신문은 어 목사를 목사의 신분으로 호주에 입국하여 한인목회를 시작한 첫 한인목사로 소개하기도 하였고 (톱, 2007년 1월 18일), 교회 개척 10년 만인 1987년 말 한인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그랜빌 지역에 교회당을 건축한다.
1979년 1월7일 창립된 시드니순복음교회는 당시 한인연합교회에 출석하던 강영식 집사가 여의도순복음교회 설교테이프를 들으며 은혜 받은것이 계기가 되어 콩코드에 있는 교회당에서 첫 예배를 드리게 된다. 그 후 두어달이 지나면서 정우성 전도사가 부임하였고 얼마후 목사로 안수받으면서 시드니순복음교회는 시드니에 6개의 지성전과 22개의 교회를 호주, 뉴질랜드, 피지에 개척하며 성장하여 왔고 순복음선교회 오세아니아총회를 탄생시켜 협력선교를 하고 있다. 특히 순복음교회는 80년대 말 체류기간이 지난 한인들에게 영주권을 받도록 적극 도와준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시드니한인침례교회는 1982년 6월6일 최승호 목사가 세가정과 더불어 개척한것으로 알려졌고 최 목사는 현재 중국에 선교사로 나가 있다. 시드니성결교회는 그 후에 개척이 되었는데 1988년 3월6일 강현성 목사 가정과 홍승표 장로 가정등 3가정이 모여 창립하였으며, 강 목사는 1세 개척 목회자로 지난2006년 소천하였지만, 2007년 말 교회당을 완공하여 태평양선교의 기지를 마련하므로 그의 꿈이 이루어졌다.
한편 브리즈번(Brisbane)에서는 호주장로교 브리즈번노회 소속 브리즈번한인장로교회가 1984년 9월9일 창립되었다. 담임인 김만영 목사는 일찌기 호주장로교회의 초청으로1964년 26세의 젊은 나이로 호주에 입국하였고 후에 호주인과 결혼하여 브리즈번의 바톤장로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된다. 당시 브리즈번에 살던 소수의 한인들이 김 목사의 도움으로 예배에 참석을 하면서 한인들만의 예배모임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결국 67명의 한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1984년 창립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김 목사는 그 후 교회를 성장시키면서 교회당을 건축하였고 호주장로교 브리즈번 노회장과 퀸스랜드주 총회장을 역임하여 한인목회자로 호주교회에 공헌하기도하였다. (김만영, 24).
서부호주에 있는 퍼스(Perth)에서의 한인교회는 1979년 8월26일부터 가정예배형식으로 퍼스한인기독교회가 탄생되었고 호주원주민선교를 위해 온 우남수 목사를 중심으로 계속되었다. 한편 시드니한인연합교회의 도움으로 1980년 6월 22일 창립된 서부호주한인교회는 홍길복 목사가 한국에서 부임하여 시작하였다가 같은 해 8월 10일 두 교회가 합하여 한 교회를 이루어 우 목사가 담임하고 홍 목사는 시드니에 막 창립된 시드니제일교회로 부임한다.
초창기 시드니에 있어서의 청년연합운동은 재호한인기독청년회 (KCYF)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매주 모여 예배와 성경공부는 물론 여러 친목행사를 나누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라를 위한 기도회와 통일운동까지 연결되어 1986년4월6일에는 조국을 위한 기도회를 갖고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성명서를 처음으로 교민사회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 성명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비록 우리가 태어난 조국을 떠나 이민자로서의 우리들은 이곳 사회에 적응해야 한다는것과 우리의 뿌리인 조국의 발전에 공헌해야 한다는 두가지 중요한 과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국에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여러 민주단체, 종교단체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며 호주에 살고 있는 교민들도 조국의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주기를 바란다…” (한호타임즈, 1986년5월호).
후에 회원 중 몇 명이 한국민족자료실을 개설하여 운영하였는데 이들은 특히 해외의 통일운동과 연계하며 1989년에는 강병조, 권기범, 박은덕, 김진엽등이 북한 평양의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석하고 호주에 돌아와 보고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이 중 김진엽은 후에 호주 의료선교사로 부산의 일신병원에 근무하면서 당시 전대협 대표 임수경의 방북을 도왔다는 이유로 호주 한인청년으로서는 처음으로 국가보안법위반으로 구속 실형을 살았고, 권기범은 후에 시드니 스트라스필드 (Strathfield) 시의 시의원을 거쳐 시장이 된다.
당시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던 한국의 인권운동 출신 인명진 목사는 호주연합교회 초청으로 시드니를 방문해 머물며 갈릴리교회를 개척하고, 그 당시 시드니의 교민신문 한호타임즈에 ‘늘벗칼럼’을 연재하며 기독청년들을 의식화시키기도 하였다.
한국이 아직 군부독재 아래있을 때 초창기 호주의 한인교회들의 통일운동은 미미하였지만 호주연합교회 총회 세계선교부의 주관으로 한반도 통일쎄미나가 1990년 4월 멜본과 시드니에 열렸고, 또 1991년 2월 남북교회지도자가 캔버라(Canberra)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대회에서 만나고 시드니에서 합동강연회를 갖기도 하였다. 이때 북한의 기독교도연맹 고기준 목사는 북조선교회의 상황과 활동에 대해 발제를 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 말에 소수민족선교원의 원장이었던 양명득 목사는 민족학교를 개강하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김동완 목사, 한신대의 김성재 교수, 감신대의 김순영 목사, 새가정 발행인 이문우 장로등을 강사로 초청하기도 하였다.
- 호주 한인교회의 부흥
초창기 시드니 한인이민사회는 곧 교회사회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교회가 가지고 있는 역할이 지대했다. 그 한 예로 배구, 탁구, 축구등의 체육대회가 교민들을 상대로 여러 교회들의 주최로 진행되었는데 그 중 배구는 시드니한인연합교회가 시작하여 올해 2009년30년째 대규모의 지역행사가 되어 매년 호주 건국기념일에 행해지고 있다. 초창기 한인회에서 주관한 야유회에 교회들이 동참하면서 큰 축제로 발전하기도 하였고, 민족명절에 교회들이 주도하여 노인들을 초청하여 대접한것이 노인회의 출발이 되기도 하였고, 혼자 사는 사람들을 돌아본 내용등이 초기 한인회보에 잘 기록되어 있다.1981년 4월 부활절에는 교회들간의 첫 부활절 새벽연합예배가 시드니 타운홀에서 있었으며 500여명이 참석하므로 교파를 초월한 연합활동이 왕성한 시기였다.
1970년대 후반에서90년대 사이에는 특히 비자기간이 지나 불법의 신세가 된 한인들에게 교회는 위로와 쉼의 장소였을뿐 아나라 실제적으로 합법적인 신분을 받을 수 있도록 교회에서 지원하던 그런 때였다. 특히 호주건국 200주년을 기다리며 한인교회와 호주교회협의회 그리고 시드니한인회가 공동으로 ‘사면을 위한 공청회’를 1987년9월24일 열어 로비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또한 교회에서 한글학교와 영어학교를 운영하므로 모국에 대한 자부심과 동시에 호주사회에 실제적으로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온것은 잘 알려진 내용이다.
이 당시 목회자들은 영적으로 교인들을 돌보는 일 외에 공항 픽업에서부터 복덕방에 가서 집 얻는 문제, 직장 알아보는 일, 은행구좌 열어 주는 일, 아이들 학교등록, 사회보장성에 신청, 통역등 생활에 필요한 전반적인 도움을 주곤하였다. 특히 시드니한인연합교회 초대 담임이였던 김상우 목사는 당시 시드니에 하나밖에 없는 한인교회를 목회하면서 초창기 한인들에게 헌신적인 도움을 준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군목출신으로 월남 사이공에서 한인교회를 목회하였고, 월남이 공산화 되자 함께 억류된 한인들과 예배를 드리고 있다가 이미 호주로 온 월남파 한인들의 구명활동과 호주연합교단의 도움으로 호주에까지 초청되어 시드니한인연합교회를 담임하게 된 것이었다.
1977년에는 평신도지도자들을 장로로 세워 목회를 협력하기 시작하였는데 호주연합교회에서는 그해 말 유준학이, 그리고 1978년 중순에는 변효섭이 시드니한인연합교회 (담임목사: 김상우)에 세워졌으며, 호주장로교회에서는 한인가나안장로교회 (담임목사: 김태현)를 통해 유준웅과 소원춘이 1984년 초에 가서 장립을 받았다.
1982년 말 한인사회에 형식을 갖춘 첫 쎄미나로 한 교포신문에 소개된 모임은 시드니제일교회(담임목사: 홍길복)에 의해 주관되었으며 변조은 목사의 ‘호주는 어떤 나라인가’와 이경재 선생의 ‘한국인은 어떤 민족인가’가 발제되어 생활고에 고달픈 이민생활 중에 함께 토론하게 한 의미있었던 모임으로 보도되기도 하였다 (호주소식, 1982년 1월15일).
또한 갓 이민 온 가정과 방문자들 그리고 유학생들에게 임시 숙소를 제공하던 캠시(Campsie) 갈릴리교회 (담임목사: 임동규)의 ‘등대의 집’은 수 천명의 한인들에게 낯 선 땅에서의 안식처가 되었고, 나중에 소수민족선교원으로 발전하여 인종차별 반대운동, 원주민의 문화와 역사 교육, 다문화정책 해설과 복지상담 등으로 봉사하였다. 그런가하면 여러교회에서 운영하던 무료 영어학교는 호주정부의 역할을 대신하여 한인들의 입을 열어 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목회자들이 몸을 아끼지 않고 여러일을 하였고, 교회의 성도들이 너그럽게 베풀었기에 한인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985년 10월28일 호주한인교회교역자회 (후에 시드니한인교회 교역자협의회)가 시드니의 8명의 목사들인 김명수, 손동식, 어윤각, 이상택, 조병기, 한승수, 홍관표, 홍길복 등이 중심이되어 결성되기로 뜻이 모아진다. 그리고 그 다음 달 김창식, 윤수한, 정우성, 최승호 목사등도 함께 참여하여 창립총회를 갖고 회칙을 통과시킨다. 초대회장이었던 홍관표 목사는 그 당시를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그 때 몇분 목사님들이 모여서 이 사회에서 같은 주님의 일을 하면서 친목을 나누며 목회정보도 교환하고 함께 일했으면 좋겠다는 뜻에서 처음에는 협의회가 아닌 교역자 친목회로 시작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교회가 많아지니까 협의회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권순형, 2006년 9월, 72).
회칙에 명시되어 있는 협의회의 목적은 ‘호주에 있는 한인교회와 교역자들의 목회협력과 선교, 교육, 봉사, 친교를 위하여 상호 협력하는데 그 목적을 둔다.’ (회칙 2조)이고, 정회원, 명예회원, 준회원등 100여명의 회원이 현재 등록되어 있다.
시드니한인교회 교역자협의회는 창립 후 한인교계사회에 교파를 초월한 지도력을 가지고 부활절 새벽연합예배, 교역자 훈련프로그램, 연합성회, 이단에 대한 대처, 중보기도회,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전도집회, 그리고 최근에는 북한돕기운동등 여러 주요한 일을 진행해오고 있고, 특히 2007년 초에는 한국의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1907년을 기념하며 호주에서의 부흥을 다짐하는 ‘부흥 2007’ 선포식이 있기도 하였다. 한편 협의회 안에 교역자 상조회도 두어 회원간의 경조사를 지원하고 있다.
역대 시드니한인교회 교역자협의회 회장 명단을 보면 다음과 같다; 홍관표, 홍길복, 이상택, 어윤각, 최승호, 김창식, 강현성, 이상진, 김윤기, 임영순, 김석호, 손아브라함, 이광수, 김종규, 홍관표, 최석진, 박채오, 한경훈, 박만경, 형주민, 정선일, 진기현, 유종오, 황기덕 등이다.
교역자협의회가 1985년 창립되고 한달 후인 12월 호주한인기독교 평신도연합회가 창립되는데 그 발기취지문 중 주요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고 사랑으로 협력하여 이국 땅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는데 도움이 되고저 미약하고 적은 힘이나마 서로의 뜻을 같이하는 믿음의 형제들이 힘을 합하여…” (한호타임즈, 1985년11월15일). 그러나 이 취지문이 발표되자마자 교역자협의회에서는 “본 협의회나 한인교회들과는 상관 없는 연합회”라고 광고를 내고 (호주소식, 1985년, 12월 ), 곧 이어 평신도연합회에서는 유감의 뜻을 표현하는 성명문을 발표하고 공개토론을 요구하는데 그 내용의 일부분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이민교회의 분열과 목회자와 성도간의 오해와 불신은 우리 이민사회의 단합과 총화에 큰 장애물이 되어왔슴을 우리 모두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호주소식, 1986년1월). 교역자들과 일부 평신도지도자들간의 긴장관계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시작되었고 그 후에도 다른 모습으로 한인사회에 이따금 표출되기도 하여왔다.
시드니에 있어서 교회수의 성장을 5년 단위로 보면 1974 - 1교회, 1980년 - 6교회, 1985년 - 11교회, 1990년 - 39교회, 1995년 - 68교회, 2000년 - 107교회, 2005년 - 130교회등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초창기는 한인회보나 교민신문, 1990년부터는 크리스챤리뷰의 자료를 근거로 한것이다. 타 도시의 2005년 교회 숫자를 보면 울릉공(Woollongong) 2교회, 뉴카슬(New Castle) 2교회, 캔버라(Canberra) 5교회, 멜본(Melbourne) 12교회, 브리즈번(Brisbane) 8교회, 골드코스트(Gold Coast) 9교회, 케인즈(Cains) 2교회, 아델라이드(Adelaide) 3교회, 테즈메니아(Tesmania)에 1교회, 그리고 퍼스(Perth)에 9교회로 나타나 있다.
한인교회들이 이렇게 숫적으로 성장한 이면에는 교회의 분열이라는 이유도 큰 몫을 차지하는데 이것은 한국에서의 신학생 과잉공급과 무관하지 않다고 한길수 교수는 지적하고 있다 (양명득, 53). 많이 배출된 목회자 중 해외로 눈을 돌려 당장 일할 교회가 없어도 여러경로로 일단 호주에 들어와 관망하다 기회가 되면 교회를 개척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이민사회에 대한 이해나 준비 그리고 소명없이 시작하는 경우라 또 다른 상처와 분열을 낳아 미자립교회로 남고, 그리고 자녀교육등의 현실로 인해 한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상황이 생긴다. 교회분열의 또 다른 요인은 일부 평신도 지도자들간의 직분으로 인한 갈등 그리고 목회자와의 갈등에서 비롯되기도 하는데 교회를 옮기거나 새로 개척하므로 그 교회에서 영향력를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드니의 한 언론매체가 한인밀집지역의 ‘업종별 톱 10’이라는 기사를 냈는데 첫번째 업종이 교회로 소개될만큼 시드니에 한인교회가 많아졌고 (한국신문, 2006년 2월 2일) 이것에 대해 호주연합교회 총회선교국 총재를 지낸 변조은 목사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지난 30년동안 200여개의 교회가 교민 6만명 가운데 세워진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부정적인 증거가 되었고, 교회일치를 부인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양명득, 46). 이민교회의 양적 성장에 대해서는 이렇게 복되고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해석이 엇갈리는 것이 사실이다.
호주 한인이민교회의 성격을 한눈에 볼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몇 년째 대양주목회자 부부쎄미나를 주관하는 새순장로교회 (담임목사: 이규현)의 목회자대상 설문조사를 보면 한인교회 목회자들은 목회사역의 중점을 설교와 제자훈련에 두고 있고, 목회현장에서 느끼는 큰 갈등으로는 성도들과의 갈등, 성도들의 영적성장 둔화 등으로 나타났고, 이민목회를 시작하는 목회자들에게 주고 싶은 말은 이민현장 이해및 준비, 그리고 인내와 사랑으로 섬기기를 꼽고 있다 (2005년, 제5회 쎄미나 설문조사 결과).
평신도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단체도 이민교회생활과 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데 한국기독실업인회 호주지회, 호주한인교회 평신도협의회, 한국예비역기독장로연합회 시드니지회, 두란노아버지학교 오세아니아본부, 대한민국 국가조찬기도회 호주지회, 호주두레공동체운동, 세계스포츠선교회 호주지부, 시드니성시화운동등이 그것이다.
호주이민 상황에서의 한인교회에 관한 분석이나 이민신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지 못한 이유가 여러가지 있겠지만 간간히 단행본자료가 되어 출판되기도 했는데, 호주사회와 교회에 대한 공헌으로 영국여왕으로 부터 국민훈장(OMA)을 받은 이상택 목사의 ‘새 교회와 새땅’, 한길수 교수가 영문으로 쓴 ‘Social Sources of Church Growth’ , 홍길복 목사의 ‘이민자 예수’, 그리고 양명득 목사가 한글과 영문으로 공동편집한 ‘호주이민 한인목회 30년’과 ‘다문화 사회 다문화 교회’가 있다. 최근에는 시드니에 ‘목요예수마을’ (촌장: 장경순 목사)이 평신도들을 위한 다양한 주제의 목회와 신학 강좌를 매 주 개설하므로 이민교회의 신학적 성찰의 장을 마련하고 있다.
1990년 1월 시드니에서 창간 된 월간 크리스찬리뷰 (발행인: 권순형)는 그동안 한인교회의 여러 자취를 기록함과 동시에 문서선교를 감당해 오고 있고 특히 이상규 교수의 100회에 걸친 호주선교사들의 한국선교발자취는 이 방면에 유익한 자료로 남고 있다. 1991년 1월에는 창간1주년 설문조사를 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을 남기고 있다.
1973년에 세워진 교회로부터 시작하여 현재 시드니에는 52개 교회 (천주교회와 가정교회 제외)가 세워져 있는데 1988년부터
1990년 사이에 27교회가 한꺼번에 세워져 계속 교회는 늘어날 전망을 보이고 있다.
교회건물을 구입한 교회는 5교회인데 거의 임대하고 있으며 호주교단에 가입하면 무료로, 그렇지 않으면 관리비 명목으로 또는 헌금형식으로 조금만 지불하면 된다.
특히 관심있는 것은 출석교인이 총 5,876명으로 현재 교민 25,000명(총영사 추정)에 비례할 때 23.5%이므로 아직도 교민복음화에 대한 문제점이 지적되었다(김명동, 22-27).
2004년5월에 창간된 주간 크리스천투데이 호주판(발행인: 정경준)은 매주 발간되므로 교회간의 원활한 의사소통과 한국교회 소식을 발 빠르게 전하고 있다.
- 호주사회와 한인교회
호주에 있는 한인교회들의 교단이나 노회 유형을 보면 몇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가 독립교단이다. 한국이나 호주에 있는 교단에 속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교단을 만들어 자체적으로 행정적 권위를 가진 교회들이다. 이들은 주로 한국의 비슷한 교단배경을 가진 목회자들로 한국의 비슷한 성격의 총회와 동등하게 교제하며 함께 선교하기도 한다. 둘째는 한국의 교단 총회에 속한 노회나 교회들이다. 한국에서 안수받은 총회의 파송으로 왔거나, 재정적인 후원을 받거나, 그곳에 회원으로 있는 목회자들은 계속해서 한국의 총회와 관계를 맺으며 그 교단이름을 유지한다.
세째는 호주교회에 속한 한인교회들인데 호주의 주요교단에 회원이 되어 그들의 행정권 아래 목회 하고, 또 그 호주교단에서 공부하여 목사가 되어 한인교회 협의회를 이루고 목회하는 경우이다. 네째는 무소속교회들이다. 이런 경우에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거나 아니면 느슨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독립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경우이다. 또한 교단관계에 있어서 목회자가 한 총회와만 관계하지 않고 이중의 회원권을 가지고 한국과 호주 둘 다의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최근에는 미국의 한 한인교단의 노회가 된 교회들도 있어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몇가지 유형의 교단관계는 여러 요인이 존재하겠지만 신학적, 재정적, 정체성적, 문화적, 행정적, 선교관계적 요인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여러 모습의 형태가 존재하고 있다.
2006년 12월 성탄절 축하광고를 보면 대부분 교단의 이름이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대양주한인예수교장로회, 대한예수교장로회(순장)대양주지역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호주노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 호주뉴질랜드직할지방회, 예수교대한성결교회 오세아니아지방회, 해외한인장로교회총회, 순복음선교회 오세아니아총회, 호주장로교회 한인교회협의회, 호주연합교회 준노회, 호주그리스도교회 한인교회협의회, 호주침례교회 한인교회협의회등이다 (크리스찬 리뷰, 2006년 12월).
호주교단총회에 속해 있는 한인교회들끼리 협의회를 조직하여 서로 교제하고 돕는 일은 흔하지만 한인교회들끼리 노회를 조직하여 호주교단 안에서 행정권과 치리권을 갖고 일하는 경우는 많치 않다. 호주연합교회에 속한 시드니의 한인교회들이 10여년간의 준비 끝에 한인들만의 준노회를 2003년 허락받아 현재 운영하고 있는데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한 호주교단 직영 신학대학들인 호주장로교나 호주연합교에서는 그동안 적지 않은 한인들이 영어로 공부하여 목사가 되었는데 이들 중 한인교회나 호주교회를 섬기기도 하고 학교, 병원, 기관등에서 일하고 있다. 이들 중 특히 호주 시골지역의 교회에서 호주인들 대상으로 성공적으로 목회를 하고 있는 한인목회자들이 있는데 한인사회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경우이다. 호주교단의 총회에서 일하는 한인목회자들은 주로 다문화목회 부서를 담당하고 있는데 빅토리아 침례교 총회에서 다민족들간의 교제와 화합을 위해 일하는 양미원 목사, 호주 구세군 본영에서 다민족들의 사회봉사를 돕는 김환기 사관, 호주연합교회 뉴싸울스웰스주 총회에서 다양한 다문화교육과 평화 웍샾을 진행하고 있는 양명득 목사가 현재 활동하고 있고, 호주연합교회 전국총회에서 유성자 장로와 빅토리아주 총회에서 최정복 목사가 각각 섬기기도 하였다.
때로 한국에서 온 목회자 그룹과 호주에서 신학공부를 한 젊은 목사들 사이에 갈등이 표출되기도 하였는데 신학적 문화적 혹은 인간관계적 요인으로 발생되며, 어떤 경우에는 총회 위원회까지 상정될 정도로 심각하기도 하였다.
한인이민교회 목회와 선교를 위한 한인신학대학도 시드니를 중심으로 생겨났는데 권동조 목사가 개척하여 발전시킨 써던크로스 신학대(Southern Cross College)의 코리안 캠퍼스를 비롯하여, 웨슬리대학(Wesley Institute) 한국어 신학부 (담당: 이계원 목사), 호프칼리지(Hope College, 담당: 김덕영 목사), 그리고 국제음악대학(International Music College, 학장: 이경희) 등에서 매해 사역자가 배출되고 있고 미국이나 한국에서 들어 와 운영하는 신학과정도 있다.
한인 2세들을 위한 목회도 점차로 주목을 받으며 몇 큰 교회들이 영어예배와 2세 사역에 중점을 두고 있고 호주에서 훈련받은 2세 사역자가 점차로 배양되고 있지만, 현재까지는 주로 미국에서 2세 사역자를 청빙하여 사역을 개발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들 중 대부분 얼마 안가서 교회를 사임하거나 본국으로 돌아 가는데 1세 지도와의 갈등, 교회의 지원 부족, 과다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 호주사회에 대한 이해부족 등이 그 원인으로 드러나고 있다. 2세 사역은 호주에 있어서 아직 초기 단계이며 많은 교회가 한국문화권 유학생을 중심으로 청년 사역을 하고 있다. 유학생들을 전도하고 이곳에서 영적으로 개발하고 훈련시켜 한국으로 되 돌려 보내는 사역도 중요한 이민교회 역할중의 하나인데, 특히 시드니 시내 중심부에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섬기는 교회들도 있다. 호주에서도 코스타 등 여러 청년집회가 매해 열려 해외에서 유명강사들이 방문하여 집회를 인도하고 있으며, 멜본에서는 한인교회들이 연합하여 매해 멜본예수청년대회를 개최하여 청소년들에게 신앙과 비젼을 주는데 큰 몫을 하고 있다.
한인교회에 있어서 교회당 문제가 가장 큰 어려움중의 하나인데 대부분 호주교회를 빌려 시간제로 사용을 하면서 교회의 활동에 여러 제약을 받고 있다. 말 그대로 복덕방과 세입자의 관계가 있는가 하면, 조금 발전된 주인과 손님의 관계, 더 나아가서 동역자 관계의 모델이 있고, 한편으로는 기존의 교회당이나 학교건물 등을 구입 개조하여 단독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많치는 않으나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최근에는 성전을 위해 부지를 확보하고 용도에 맞게 건축하는 교회도 생기기 시작하였는데 한 예로 시드니와 브리즈번의 한 교회는 빌려쓰는 단계와 단독으로 사용하는 단계를 거쳐 교회가 부흥하므로 부지를 매입하여 새 성전을 건축하는 단계로 까지 이르고 있다. 셋방살이 처럼 교회당을 빌려쓰다 온 교인이 합심하여 성전을 구입하거나 건축하는 이야기는 눈물겨울 정도로 감동적인 증언이다.
교회당 단독사용이 이렇게 여의롭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한인교회들이 문화학교, 한글학교, 경로대학, 여성학교, 영어학교 등을 열어 좀 더 전문적인 교육에 힘을 쓰고 있는데 교회의 이러한 활동은 대외적으로 크게 드러나지는 않치만 이민교회가 감당하고 있는 주요 교민봉사이다.
또한 호주교회와 관계를 맺으면서 합동으로 예배와 친교를 나누다가 다문화 목회로까지 발전하는 경우도 있고, 처음부터 다인종교회로 선포하여 여러 민족들을 대상으로 전도하고 섬기는 한인교회도 있고, 또 한인교회에서 상처를 받고 아예 호주교회에 출석하여 호주인들과 공동체를 이루는 한인들도 없지 않다. 이민사회와 교회 안에는 여러 모양으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있는데 몇 교회에서는 부설기관으로 전문상담과 치유목회를 활발히 벌이고 있다. 많은 경우 한인교회의 기도의 열정, 모임의 열심, 그리고 말씀의 사모함이 호주교회에 좋은 귀감이 되고 있고 점점 쇠약해가는 호주교회에 이민자교회나 다문화교회들이 도전을 주고 있다.
또한 특별히 호주의 원주민에 관심을 가지고 도시나 시골에 사는 원주민교회를 방문하거나 그들 공동체와 관계를 맺으며 선교하는 교회도 있는데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며 그들에게 다가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모습이고, 최근에는 원주민전도 전략쎄미나등이 열리므로 효과적이고 연합적인 방법을 모색하기도 하고있다.
호주사회와 접목되어 그들에게도 다가가려는 노력이 이 외에도 많이 있는데 그 중 6.25에 참전한 호주군인들을 매년 초청하여 함께 예배드리며 친교하거나, 한국어린이를 입양한 가족들을 초청하여 나누거나, 수용소에 있는 한인들을 정기 방문하며 돌보거나, 그리고 지역에 있는 카운슬과 협력하여 여러 문화교육 강좌를 여는 등 지역사회의 호주인들에게도 친숙한 모습으로 다가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한인교회는 여전히 한국교회의 목회자중심, 남성중심의 구조를 답습하고 있으며 심지어 2006년 시드니교역자회 총회에서는 여 교역자 회원가입 문제에 관한 열띤 토론이 있었으나 결론이 나지않아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일년간 연구하여 보고하기로 하였으나 (크리스천투데이, 2006년 11월24일), 현재까지 결론나지 않고 있다.
호주에서 배출된 여성목사는 멜본의 호주침례교회에서 양미원, 시드니의 호주연합교회에서 박명화, 이혜경, 엄애련, 선우정민등이 호주교회나 기관에서 섬기고 있고, 하나님의 성회에서 권한나, 도에스더등이 목사안수를 받았다 . 여성목사도 그렇거니와 여성을 장로로 세우는 일은 더 희귀한 일로 호주연합교회 소속 교회들 중 여성을 장로로 세워 멜본에 이근덕, 시드니에 박미자, 유성자, 배인숙, 한은경, 양인자, 변은혜 등 손꼽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한인교회의 구조와 문화가 한인이민자들이 호주의 다문화사회와 세계로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있어온것도 사실이다. 영적인 가르침과 우주적인 인류애를 우선시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한국의 유교적인 가치와 단일 민족성을 강조하다 보니 여러 인종이 함께 사는 호주사회에 적응하고 동화하는데 도움이 되기보다 장애가 된다는 지적을 받기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에서의 한인교회는 자체의 역동성으로 한국교회와 호주교회 사이에서 제3의 정체성과 신학을 발전시키며 계속하여 한인사회에 중추적인 열할을 감당할 것이다.
나가는 말
호주의 지정학적인 특징이 아시아와 남태평양에 근접하여 있으며, 유럽백인들을 중심으로 수 많은 민족들이 함께 사회를 이루고 있고, 또 이 땅에서 오래 살아 온 원주민들이 있어 그야말로 세상 끝까지 가지 않아도 이곳 자체가 곧 땅 끝이기도하고 모든 인종과 문화의 전시장이라고 할 수 있다. 아시아와 남태평양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좋은 기지가 될 뿐 아니라 호주 국내에서도 다양한 목회를 시도해볼 수 있는 그야말로 모든 민족과 언어와 백성들이 모인 더 할나위 없이 좋은 선교지이고 신앙의 자리이다.
이곳에서 한인들의 교회는 한국의 민족성과 문화를 종교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서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후세들에게 물려주어 대를 이을 뿐 아니라, 호주사회에 소개하여 그 속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그동안 많은 노력을 경주하여 왔다. 또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영적인 힘으로 한국과 호주 사회의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많은 이민자들에게 위로와, 사랑과, 희망을 주면서 그 역할을 다 해왔고, 사회적 책임도 이민사회에서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채우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면서 한편 한인들에게 있어 교회는 호주사회에서 느끼는 지위 불일치를 해소하고, 자신을 드러낼 수 있고,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장으로도 쓰여, 일반 단체에서 겪는 여러 갈등과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여 온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본인의 집은 못 사도 교회당 구입을 위해 헌신하는 교인들이 이국 땅에 영적인 쉼의 거처를 마련하는 눈물겨운 이야기는 후세에게 꼭 알려져야 할 역사의 한 부분이다.
결국 호주사회에 있어서 이민교회는 이민자들과 호주인들 사이에 영향을 끼치며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변화시키는 영적인 역할과, 정의와 평화를 이루어야 하는사회적 책임을 계속하여 해 나가며 그 영역을 확장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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