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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11일 목요일

다문화 호주연합교회와 한인목회


다문화 호주연합교회와 한인목회



1.  한인교회들의 시작

호주연합교회는 1977년에 탄생했지만 호주에서  한인교회는 이미 4 전인1973 멜본(Melbourne) 창립되었다 당시 교회는 초교파적인 교회로 여러 배경의 사람들이 주일에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친교하며이국땅에서의 외로움을 나누던 시절이었다당시 남기영 멜본한인회 한인회장은 한인들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영어가 안되어 주일에 교회를  나가는 한인들을 보고 그들을 위한 교회의 필요를 인식하고 고민하게 된다.

그러던 차에 마침 한국에서의 10년간의 선교를 마치고 멜본에 있던 알란 스튜어드 (Alan Stuart, 한국명서두화목사를 찾아가  한인교회 창립을 도와 줄것을 요청하였다그러나   목사는 한국인이 호주에 왔으면 호주교회에 적응해야지 여기까지 와서 한인들끼리의 교회를 만들겠냐며 도움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목사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지금은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라고 인정되지만  당시 나는 한인교회를 세우자는 말에 주저했었다호주에 살려고 이곳에 왔으면 영어로 호주사람들의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이곳에 적응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러나 확실하게 그리고 다행히도 (certainly, and fortunately) 나는 그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했었다 (김영섭, 14).

결국  목사가 설득을 당했고그의 도움으로 1973 7 8 멜본한인연합교회 (후에 멜본한인교회 개명) 버우드장로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다이때 어린이를 포함한 모두 33명의 한인이 참석하였는데 남기영/유정자 가족김탁웅/문경숙 가족,  박용국/최봉자 가족박웅서/이우경 가족오영열/안중민 부부김병식/김영옥 가족등이다.

1977 7 호주연합교회가 시작되므로 버우드교회와의 합동예배에서 선서라는 절차를 밟아 연합교단 교회가  버우드교회의  일원이 되므로 멜본한인교회도 연합교회의 교회가 되었다그때까지 멜본한인연합교회 (Korean United Church of Melbourne)라는 이름을 한국의 어느 교단 교인이던 환영한다는 뜻으로 사용하였지만유나이팅 (Uniting)교회의 회원이 되므로  명칭이 적절치 않차 교회이름을 바꾸게 되는데 그것이 멜본한인교회 (Korean Church of Melbourne)이다.

초대담임이었던 서두화 목사를 이어 김이태 목사김태현 목사조성기 목사 (후에 예장통합 총회 사무총장), 박기백 목사지태영 목사주현신 목사, 현재는 고동원 목사 시무하고 있고멜본한인교회는 빅토리아 주총회에서 다문화 목회에 공헌하면서 부흥을 거듭하여 호주의  한인교회로서의 모습을 계속 증언하고 있다.

 다음해인 1974 시드니(Sydney)  한인교회인 시드니한인교회 (후에 시드니한인연합교회 개명) 창립되는데 마침 한국에서  교단지도자의 방문을 계기로 한국에서 20여년간 선교사를 지낸  브라운 (John P Brown한국명변조은)목사의 집에서  명이 만나게 된다이때 이민생활의 외로움을 서로 위로하고 힘이되기 위한 한인교회의 필요성을 공감한것이 교회창립의 시작이 되었다이때 참석한 사람들이 유준학/유성자 (후에 호주연합교회 총회 다문화목회부 총무부부임남웅 부부그리고 나만섭 부부등이었다 (양명득, 41).  예배는 1974 9 8 레드펀(Redfern) 회중교회에  70명이 모였고 창립을 위한 초청장에 교회창립의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다음이  전문이다.

 예배에 초청하면서

귀하와 귀하의 가정에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곳  이국에서 우리말로 하느님께 예배드리고 아울러 한인들 사이에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교회모임이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나 느끼는 바라 하겠습니다다행히  시드니에 우리말로 우리들의 예배를 인도해 주실  있는 목사님과 신부님들이 계시고 분들의 희생적인 협력에 힘입어마침내 한인들만의 교회 모임을 갖게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교회모임이 끝까지 결실을 맺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 바입니다.
 교회 모임은 구교와 신교의 구분이 없음은 물론신교중의 모든 교파를 초월하고 어디까지나 성경중심으로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취지에서 출발하는 것이며이제까지 기독교인이 아닌분들도 함께 참석해 주시기를 원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모임의 일시와 장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일시: 197498 (일요일오후2
장소: Inner City Parish, 56 Raglan St. Waterloo
문의처라만섭 (896-1185), 임남웅 (789-4116), 유준학 (888-2940)

시드니 한인회장
최영길 (싸인)

  시드니한인교회도 호주연합교회가 탄생하므로 투표절차를 거쳐 호주연합교단 소속 교회가 된다한국에서 여러교단 배경을 가진 한인들이 호주의 장로교감리교회중교가 연합한 연합교회에 속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지만결국 이런 신학적이고 교회정치적인 것들이 불씨가 되어 교회가 갈라지게 되는데이후 여러교회가  교회에서 나가 창립되게 된다.
초대 변조은 목사에 이어 김상우 목사이상택 목사문문찬 목사류성춘 목사 그리고 현재는 우병진 목사가 담임으로 목회하고 있고, 1977년에는 유준학이 다음 해에는 변효섭이 초대 장로들로 세워므로 평신도지도자들의 사역도 본격화되었다특히 시드니한인연합교회가 시작한 교민배구대회는 올해 200930년째 대규모의 지역행사가 되어 매년 호주 건국기념일에 행해지고 있다.

이렇게 멜본과 시드니에  한인교회들이 세워지고 얼마가지 않아 호주연합교회 안에 한인교회들이 계속 생겨나게 되는데 년이 지난 1988 한인교회협의회가 창립될 당시 있었던 교회들은 다음과 같다.

시드니제일교회는  1980 시드니한인연합교회에서  사람이 나와 창립한 교회로 당시 유준학 장로변효섭 장로방광남 집사임용모 집사 가족 등이 개척하였고 초대 목사로 홍길복 목사가 부임한다 교회는 이민사회에 여러 봉사를 하며 후에 중국과 북한선교그리고 영어예배 등을  개발하면서  교회로  성장하여 단독교회당을 소유하게 된다.  김영헌 목사윤휘상 목사지태영 목사를 거쳐 현재 조삼열 목사가 시무하고 있다.

시드니한인연합교회의 도움으로 1980 6 22 창립된 서부호주한인교회는 홍길복 목사가 한국에서 부임하여 시작하였다가 같은  퍼스한인기독교회와 합하여  교회를 이룬다  지태영 목사김윤상 목사,  김세영 목사김신일 목사 등이 시무하였다.

동산교회는 시드니 서부지역 파라마타에 서부동산교회라는 이름으로  1982 처음 세워진 교회로 손동식 목사 등이 창립하였다 교회는 한글학교  지역사회를 위한 여러 선교활동을 하며 성장하였는데 목사가 파나마로 선교사로 떠나면서 황기덕 목사가 부임하였다   교회당을 건축하는  부흥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4 창립된 캔버라한인연합교회는 변조은 목사의 도움으로 3가정이 창립하였다후에 한국 감리교에서 공식 파송된 임천일 목사가 부임하였고김성철 목사그리고 다시 임천일 목사그리고 김기윤 목사 등이 담임으로 있었다한글학교  캔버라 한인사회에 선교해 오고 있으며호주교회와 함께 교회당을 사용하다가 최근 단독으로 교회당을 사용하고 있다.     

갈릴리교회는  1985 시드니의 남부 본다이에 처음 세워졌는데 교회는 당시 인명진 목사 (후에 한나라당 윤리위원장), 양명득 전도사이홍준 집사 등이 중심이 되어 개척한 교회이다후에 워터루를 거쳐 캠시로 교회당을 옮기면서 이민  가정과 방문자들 그리고 유학생들에게 임시 숙소를 제공하던 등대의   천명의 한인들이 이용하였고나중에 소수민족선교원갈릴리 케어 등으로 발전하여 봉사하였다임동규 목사 (후에 부산 YMCA사무총장), 황기덕 목사양무 목사장기수 목사를 거쳐 현재 최효진 목사가 시무하고 있으며 교회에서  명의 목사들이 배출되었다.

소망교회는  배영환 집사박이훈 집사 등이 1985 시작하였다가,  당시 한국 감리교 선교사로 뉴질랜드로 파송되어 있었던 이상진 목사를  청빙하므로 호주연합교회로 발전되기 시작하였다소망교회는 라켐바호주연합교회와 교회당을 공동으로 사용하면서 다문화 관계를 지속하고 있고회교도가 많은 지역에서 선교의 비젼을 가지고 현재 선교관을 건축하는 중에 있다현재까지 이상진 목사가 담임하고 있으며 목사는 대양주지역 감리사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삼일교회는 1987 영광교회라는 이름으로 김석호 목사가 창립한다 목사는 한국의 예장통합 출신으로 초기 시드니교역자협의회 회장을 지내는  활발한 목회를 시작한다삼위일체의 뜻을 가진 삼일교회는 교회당을 함께 쓰는 호주교회와 영어학교를 운영하는  여러 선교활동을 하며 오늘 날에 이르고 있다.

아델라이드한인연합교회는 1988 김윤상 목사에 의해 창립되었다남부호주 주총회에 하나뿐인 이민자교회로 교회당을 단독으로 사용하며 한글학교임시숙소 등을 운영하며 아델라이드 한인사회에 봉사하고 있다.  박은성 목사를 거쳐 현재는 아델라이드한인교회라는이름으로 오경수 목사가 담임으로 사역하고 있다.

2. 한인교회협의회의 목회와 선교



교파를 초월한 시드니 한인목사들의 모임인 호주한인교역자협의회(후에 시드니한인교역자협의 개명) 1985 창설되어이민초기 한인교회들이 이민사회의 중심이 되어 활발한 목회와 복지활동을 하고 있었다또한 호주연합교회 소속 한인교회 목회자들도 정기적으로 만나 교제하며 기도의 모임을 가져오고 있었고  공식적인 기구로의 발돋음을 위해 협의체의 모습으로 시작하게 되는데호주연합교회 한인교회협의회가 1988 2 탄생하게 된다.
협의회의 창립총회에 함께한 교회들은 위에서 소개한 시드니에 7교회 (갈릴리교회북부영생교회서부동산교회소망교회시드니제일교회시드니한인연합교회영광교회), 멜본에 1교회 (멜본한인교회), 퍼스에 1교회 (서부호주한인교회), 아델라이드에 1교회 (아델라이드한인연합교회), 그리고 캔버라에 1교회 (캔버라한인연합교회 11교회였다협의회는 창립총회  회칙을 통과시키며 공동선언문을 발표하는데 다음이  전문이다.

우리는  한인교회협의회를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영광과 감사를 드린다.
우리는  협의회가 교회의 본질적 사명인 전하는 일과섬기는 것과시랑을 나누는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땅에 구현하는데 이바지 할것을 믿는다.
우리는  협의회를 이룸으로 호주속의 한인으로써 호주연합교회 속의 한인 교회로써의 우리의 자리를 확인하면서 인종과 교파와 세대를 넘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되며 연합하는 일에 힘써야 함을 믿는다.
우리는  협의회를 이룸에 있어 우리가 서야  자리가야  그리고 해야  일이 있음을 인식한다.
첫째우리는 동족에 대한 선교의 사명을 인식한다.
둘째우리는 주안에서 타민족의 형제들과 함께 일하는 길을 구하고 실행함이 마땅함을 인식한다.
셋째우리는  교회의 다른 지체와의 협력과 이해를 바탕으로  공동사역의 필요성을 인식한다.
넷째우리는 다른 교회와의 끊임없는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이 하나님의 뜻임을 인식한다.
우리는  협의회를 통하여 함께 주를 섬기며 서로의 짐을 나누어짐이 그리스도의 뜻을 성취하고 그의 제자된 도리를 이루는 것임을 확신한다.
1988 2 28
            호주연합교회 한인교회협의회 창립총회

이때 발표된 선언문은 호주속의 한인으로호주연합교회 속의 한인교회로의 위치를 분명히 인식하고인종과 교파와 세대를 넘어선 선교의 사명을 확인하고 있는데 내용이 사실상 현재까지도 선교와 목회의 중심질문으로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고   있다.
당시 협의회는 호주연합교회 안에 공식 행정권한은 없었지만 한인교회에 영향력을 가지며 목회와 행정적인 일을 감당하게 되었고시간이 지날수록 호주연합교회 뉴싸울스웰스주 총회도 협의회를 인정하며 여러 자문을 구하게된다 협의회가 모체가 되어 나중에 결국 준노회라는 공식기구를 가져오게 되므로  역할이 제대로 평가되어야 한다.

협의회 창립과 더불어 회장에 홍길복 목사부회장에 황성운 장로  목사와 평신도들로 임원이 구성되고 청년연합회여선교회연합회남선교회연합회교사연합회공동규정위원회 등이 만들어지고 월례연합기도회가 매달 한번씩 모이는가 하면성탄절에는 연합으로 찬양예배를 드리기도 하였고 불법체류자들을 위하여 사면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1989년은 한호교회 선교협력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로, 1889 호주의 선교사 죠셉 데이비스 목사와 그의 누이 메리 데이비스가 한국에  발을 디딘 해였다 행사준비를 위해 1988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과 부산 경남 지역 방문단  호주를 방문하여 협의회 주관으로 특별예배를 드리기도 하였고다음  한국 부산에서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한호선교 100주년 기념대회 총회와 당시 협의회 회장이었던 이상택 목사등의 대표들이 참석하기도 하였다.

호주연합교회 총회에서 이민자교회와 다문화목회를 선교국에서 담당하였는데 변조은 목사가 선교국 총무로 시드니에서또한 서두화 목사는 멜본에서 각각 한국선교사 출신으로 초창기 한인교회를 도왔으며총회 선교국 사무실 직원으로 출발하여 나중에 총회 다문화목회국 총무가되는 유성자 장로의 역할도 점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총회와 한인교회협의회의 관계는 때로는 협력과 도움의 모습으로 때로는 긴장과 투쟁의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하였는데 서로의 기대와 문화차이에서 오는 어려움들이 있었음을 부인할  없다.

 중의  예가  1990  NSW 총회사무실에 있었던 한인교회협의회 목회자들의 항의시위였다한국에서   감리교 여성전도사의 목사안수 청원을 둘러 싸고  주총회의  한국선교사 출신 교수의 입장과 발언을 인종차별로 생각한 한인목회자들은 강하게 반발하였고급기야는 주총회 사무실까지 찾아가 항의하는 사태로까지 이어졌다. ‘우리 승리하리’ 라는 노래를 함께 부르며 앉아 있는 한인목사들을 보며 주총회의 실무자들은 당황했고다문화의  다른 경험을 하고 있었다.

  주총회와 협의회 간의 의견조정을 위하여 한호교회 조정위원회가 1994 임명되었으며 여러 업무에 관한 의사소통과 조율을 하게 된다목회자 청빙과 회원권교회당 사용노회와의 관계호주연합대학 출신 한인목사와의 관계지도자 교육공동규정한인노회  등의 주요 안건을 토론하여 왔는데 당시 주총회 총무였던 노만 맥도날드(Norman McDonald) 목사 드레이턴(Dean Drayton목사고든 딕커(Gordon Dicker) 목사 등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위원회는 한인준노회가 생기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역할을 다하였다.

1980 말에 들어서면서 한가지 특이한 사항은 호주연합교회 신학대학에서 공부하여 안수받고 목사가  한인들이 배출되기 시작하였는데 시드니에서는 처음으로 양명득 목사가 (1989), 여성으로는 박명화 목사가 (1990), 그리고 서부호주 퍼스에서는 지태영 목사가 1988 안수를 받음으로 호주연합교회 안의  한인목사로 되어 있었다  시드니의 연합신학대학에서  명의 한인목사가 배출되어 호주교회나 기관에 있는데특히 시골이나 도시의 호주교회에서 다리의 역할을 하며 성공적으로 사역하는 이중언어의 목회자들이 있고현재도 수명의 한인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에서 청빙을 받아 현재 서울 상도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는 최승일 목사 등도 호주연합신학대학을 출신이다.

호주연합교회와 한인교회들은 한국의 평화통일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는데, 1989 당시 민족자료실을 운영하며 연합교회 청년회원이었던 강병조권기범 (후에 스트라스필드시 시장), 박은덕김진엽 등이 북한 평양의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석하고 돌아  교회와 교민사회에 보고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1990년에는 양명득 목사가 원장으로 있던 소수민족선교원에서 민족학교를 개교하여  우튼 목사피터 헤이스 교수김성재 교수 (후에 청와대 수석비서관), 김동완 목사 (후에 KNCC총무등을 강사로 한반도의 통일과 비핵화에 대한 쎄미나를 주최하기도 하였다.

1991 세계교회협의회의 캔버라총회 참석   한국교회의 권호경 목사 (후에 한국기독교방송국 사장), 북한교회의 고기준 목사등 대표들이 호주연합교회 초청으로 연합신학대학에서 남북교회에 관한 강연회와 합동예배에 참석했으며, 1997년에는 총회 대표로 그레고 핸더슨(Gregor Henderson) 총무홍길복 목사장기수 목사 (후에 시드니한인복지회 회장)등이 북한교회를 공식 방문하여 당시 수해를 당한 북한을 지원하기도 한다.
 다음해 호주연합교회 총회선교부는 북한교회 대표뿐 아니라 한국교회와 해외교회 관계자들을 초청하여 시드니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관한 에큐메니칼 모임을 주최하기도 하였다.

3. 한인교회와 대체규정

한인교회협의회가 창립되기 전부터 한인교회 내에서는 교회행정적인 중요한 질문이 형성되고 있었다호주연합교회의 헌법과 규정인데그것이 한인교회와 문화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으므로 보다 효과적인 목회를 위해 한인교회 자체 규정의 필요성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다당시 협의회의 6 부서 중에 공동규정위원회가  일을 담당하여 초안을  오기도 하였는데 안건은 앞으로 협의회와 한인교회들의 가장  잇슈중의 하나로  오르게 된다.
목사의 청빙과 임기장로의 선출과 임기안수집사와 권사집사에 대한 항목등이 명시된 공동규정 초안이 1988  만들어져  교회 공동의회에 상정되었지만 부결되었음을 공동규정 제정위원회 변효섭 위원장의 이름으로 422 공문이 돌려지었다.

당시  9교회가 공동의회에서 찬반을 물었는데 5교회가 찬성을 하고, 4교회가 반대하였다. 10 한인교회의 3분의 2 찬성과 동시에 공동의회에 참석한 10개교회 전체 재적 세례교인 수의 3분의 2 찬성으로 채택되도록 하였는데  투표수의 3분의 2 득하였으나 교회 수의 3분의 2에는 미달되었기 때문이다이렇게 부결이 되자 공동규정에 대한 토론이 한동안 냉각기를 맞게 되지만 후에 다시 떠오르게 된다.

그러다 결국 수정된 공동규정을 다시 1990 후반기에  교회에 보내 투표하도록 하였는데 다음과 같이 결정되었다. “공동규정   교회 공동의회 결과 참여교회 10교회 찬성 9교회 반대 1교회참여인원 792 찬성 634 반대 114 (기권 36 무효 8) 보고 받고  공동규정 안이 통과됨을 선포하다연합교회 총회에서 인준하는대로 적용하기로 하다.” (협의회회의록, 1991 3 10)

당시 협의회 회장이었던 이상진 목사가 공동규정이 통과됨을 선포하고 1991 총회의 승인 요청을 받아 효력을 발생하기 시작하였다그러나 이것은 결국 8 후인 1999 총회 상임위원회에서 한인교회를 위한 대체규정으로  승인될때까지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1991 브리즈번에 있었던 6 총회에서  공동규정을 일부 변경하여 총회 상임위원회에  권한을 위임하였는데나중에 그레고 핸더슨 총회 총무는 이때 총회에서 간접승인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1992 총회상임위원회가 임시로 인준하고, 1993 확정한 것이라고 공문을 통해 말하였다 (1996 222 공문). 여기서 총회가  단어는 변경조항이었고 협의회에서는 공동규정을 썼는데, 1995  우연한 기회에   문건 중에 목사의 임기를 포함하여  조항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 발견되어 한인교회 안에  파장을 가지고 온다.
일부 평신도 대표들은 공동규정이 불법으로 쓰여졌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NSW 총무 노만 맥도날드 목사가  평신도 쎄미나에 참석하였고후에 공동규정 실행에 대해 아는바 없다는 답변서가 번역되어 1996 크리스찬 리뷰  2 호에 긴급진단공동규정의 실체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실렸다이것이  교계에 파장을 가져  것은 물론이고, 3 호에는 특집기획공동규정 파문’ 이란 제목으로  다시 해명서와 항의서가 이어졌고심지어 SBS 라디오 한국어 방송에서 까지 지상중계라는 이름으로 당시의 긴박함을 글로 싣고 있다.

이에 대하여 한인교회 목사들은 총회에서 합법적으로 인준한 공동규정을 주총회 총무가 모를  없고그의 편지가 출판되어 교회에  혼란을 불러 일으켰으므로 사직을 요구하기까지 이른다결국 주총회 총무는 1996 221일자로 공개사과문을 한인교회에 발송하게 되지만당시 전국총회 총회장의 중재에 따라 사직하지는 않았다.

결국 총회 상임위원회와 법률위원회가 공동규정의 합법성을 인준하였고오해의 여지가 있었던 변경조항을 폐지하였다 과정으로 인하여 총회 상임위원회는 1997 공동규정을 재심의 하는 연구위원을 임명하였는데 변조은 목사그레고 핸더슨 목사홍길복 목사김석호 목사이상진 목사노만 맥도날드 목사로 구성되었다 다음  연구그룹은  교회와 노회와의 토론을 거쳐 추천안을 내었고총회는 설문조사까지 하였다이때 한인교회 평신도협의회라는 단체에서는 계속하여 공동규정 수정안을 강력히 반대하였는데  내용은;

목사 평생 위임제부목사 평생 진로방해성도들 목사 접근금지성도들의 호주 현지화를 막고 한국화 시켜서  위에 군림하려는 ’  반대성명을 전면광고로 발표하기도 하였다 (크리스찬 리뷰, 1998 9월호, 12).

당시  충돌은 협의회의 대표적인 한인교회들 중에 담임목사와의 분쟁으로 어려움이 있었는데  안과 맞물려 더욱 증폭되었고결국 담임목사가 나중에 교회를 떠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결국 1999 3 총회 상임위원회에서 공동규정을 한인교회를 위한 대체규정으로 승인하여 호주연합교회 헌법과 규정 속에 추가하게 되었다.
대체규정의  가지 핵심조항은 목사의 임직기간과 장로의 시무기간으로 교회는  가지  하나를 선택할  있도록 하였다 장로를 평생직으로 선출할 수도 있고아니면 5 임기로 선출하여 재선할  있고마찬가지로 담임목사도 위임 임직할 수도 있고아니면 호주연합교회의 임기에 따라 청빙할 수도 있게 하였다.

한가지 특이한 사항은 여성을 권사로 선출하기 보다 호주연합교회 정신에 따라 장로로 선출할  있도록 총회 총무는 강력히 권고 하고 있고  멜본한빛교회의 이근덕 장로시드니연합교회의  박미자 장로시드니제일교회의 유성자양인자변은혜 장로시드니교회의  배인숙한은경 장로   명의 여성 장로가 배출되었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는 아니다.

  한인교회들은 공동의회를 통하여  가지 조항  하나를 선택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호주연합교회 법을 완전히 따르는 교회는 소수이고대부분 대체규정을 따르고 있다.
1992 당시 협의회 회장이었던 김석호 목사는 공동규정 확정에 즈음하여이란 글에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만든 공동규정은 호주적이면서도 한국적이어야 하며동시에  교단적 배경을 가진  교회나 교인들의 정서를 감안해야하는 (중략)… 차례 전체교회가 투표한 끝에 교회 수와 교인 전체 수의 3분의 2 얻어 합의를 이룩한 것은 우리 이민교회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초지일관 사명감을 가지고  일에 임해주신 여러 위원들과… (연합기독신보시드니, 1992)

한인교회들의 대체규정의  다른 의미는 이민자 그룹으로는 처음으로 자체의 규정을 교단 헌법 책에 자신의 언어로 편입하였다는 것이다다른 이민자 교회들도 백인 중심의 헌법과 규정속에 교회 행정과 목회를   문화전통적인 차이가 있을 것임을 짐작할  있는데한인교회가 자체의 규정을 가짐으로  시발점이  것이다그러나 현재까지 다른 이민자 교회에서 자신들의 규정을 만들려는 구체적인 움직임이 호주연합교회 내에서는 없다.
2006 총회에서 임명한 소위원회는 대체규정을 재심의하였고한인교회들은 대체규정이 가지고 있는 융통성과 규정이 제공하는 선택의 여지에 전반적으로 만족을 표명하였다다만 규정이 추천하는대로 여성장로가 많이 선출되지 않은것에 대해 우려가  표시되었고앞으로  사항이  지켜지도록 다시 권고하기로 하였다대체규정은 여성장로 피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체 규정의 발효시부터 적어도 시무 장로의 3분의 1 여성이  때까지 최소한 새로 선출되는 장로의 절반은 여성이 된다 때부터 교회 내에 적어도 시무장로의 3분의 1 여성이 되며적어도 시무 장로의 3분의 1 남성으로 한다. (3.1.34(b))

 대체규정은 2012 전에 다시 심의될 예정이다.

4. 한인교회협의회의 현재와 미래

호주연합교회 총회가 인준한 한인교회들을 위한 대체규정 3.6.46(a) 한인교회협의회의 권위와 역할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총회는 한인교회협의회를 호주연합교회 내에 모든 한인교회와 한인 목사를 연결하는 전국적인 기관으로 인정한다협의회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교제;
모든 한인교회와 목사에 대한 권면;
한인교회 내에 호주연합교회의 생활과 선교의 증진;
강한 교회가 약한 교회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행정적인 그리고
한인교회 내에 선교전도교육과 봉사를 격려하는 .
(총회 헌법과 규정, 2008, 238)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인교회협의회의 위상은 크게 축소되어 있다 이유는 교회의 공식의회인 준노회를 출범시켰기 때문이다협의회는 호주연합교회 안에서 법적인 효력은 가지지 못하는 기구임에도 불구하고 목회적행정적 그리고 도덕적인 주요한 역할을 감당하여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그러다 2004 법적인 효력을 가지는 공식적인 기관인 준노회가 시작되므로 협의회는 자연스럽게 역할이 감소되었으며주로  주에서 새로운 한인교회가 연합교회에 가입할  자문역할을 감당하고 있고사실  교회협의회라기 보다 목회자협의회의 모습으로 담임목사들의 정기적인 모임과 연례 수련회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1996 협의회가 한인선교노회로 전환하려 했던 이유가 바로 효율적이고 공식적인 노회기구의 역할이기 때문이었다.

2008 11월에 열린 협의회 22 총회에 교회의 허락을 받아 시드니의 담임목사들이 모여 진행되어 임원선거를 하였으며재정수입이 없는 협의회를 앞으로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있었다.

협의회는 전국총회의 교회기구이기에 멜본테즈메니아캔버라브리즈번골드코스트케인즈타운스빌아델라이드퍼스 등지의 많은 한인교회들과 함께 공조해야 하는  기본적인 역할은 계속하여 중요하며또한 한인준노회에 속하지 않은 교회들을 위해서도 공정한 협의회의 역할이 남아있음을 서로 인식하는 선에서 토론이 되었으며앞으로의 협의회 모임에서 회칙개정과 역할에 대해 다시 토론하기로 하였다.

뿐만 아니라 협의회는  교단에 속해 있는 모임이지만 한국의 진보와 보수  여러 교단 배경의 목회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신조예배교육  서로 확인하고 조율해야  필요성이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다한국에서는  교단 중심으로 목회를 하다가 호주에 와서 경험하는 연합운동으로 보다  틀과 시야를 목회자들이 갖기도 하지만한편으로는 원래 가지고 있던 교단 정체성에 혼란을 경험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협의회는 초지역적이고초교파적인 성격을 가지고 지금까지 왔다고   있다.

이렇게 호주연합교회 한인이민교회를 위해 막강한 영향력과 역할을 감당해 왔고한인준노회의 모체가 되었던 협의회가 처음 선언문에서 밝힌  역할들을 다하고, (혹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는채로이제 새로운 모습으로 재정비되어야 하는 길목 위에  있는 것이다.

 글을  이후 2012 호주연합교회 13 총회에서 ‘Korean National Conference’(전국한인교회컨퍼런스) 인정되었다그러므로 주로 시드니의 한인교회 목회자들만의 모임이었던 한인교회협의회는 소멸되고호주 전국의 한인 목회자와 평신도가 참여하게 되는 대회의 성격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Copyright 양명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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