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페이지뷰

2015년 11월 8일 일요일

호주선교사와 영등포산업선교회

영등포산업선교회와 호주교회

인 명 진
(전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1. 영등포산업선교의 시작


   영등포산업선교회는 1958년 한국 최초로 세워진 노동자 선교기관이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한국 내에서 비교적 보수교단이라 일컬어지는 대한예수교(통합)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선교를 소위 진보적 교단이라는 다른 교단에 앞서 처음 시작됐다는 것이다. 사실 사회선교는 한국 기독교장로회(기장), 감리교의 대명사처럼 되어졌는데 말이다. 사실 70-80년대 세계교회에 널리 알려졌고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나 노동운동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산업선교가 일반 사람이나 세계교회에 알려진 대로 기장이나 감리교에 의해서 주도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전혀 기대도, 짐작도 하지 못한 보수적인 예장소속인 영등포산업선교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이제쯤은 바로 잡혀야 할 역사적 사실이다. 이는 무슨 교단주의나 주도권 다툼이 아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역사에 기록되어야 한다는 당위성 때문이다. 시작된 역사가 그렇고 그 활동의 내용에 있어서 그렇다.

영등포산업선교는 1958년 대한예수교장로회 경기노회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보다 앞서 예장총회는 총회의 결의로 1957년 총회전도부 안에 산업선교 중앙위원회를 설치하고 산업선교를 추진해 오던 중, 당시 가장 공장이 밀집해 있던 영등포 지역 관할노회인 경기노회가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물론 우리 총회가 이렇게 하기까지에는 당시 EACC (East Asia Christian Council)의 산업선교 담당총무이었던 미국장로교 선교사 헨리 존스 목사의 강력한 권고가 있었고, 우리 총회 지도자들의 고기가 많은 곳에 그물을 던져야 한다는 복음전도의 열정과 전략에 기인한다 하겠다.

그러므로 초기 산업선교는 그 이름 산업전도(Industrial Evangelism)에서 보는 대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공장에 있는 노동자들을 전도하는 일이었다. 영등포에 산업선교회는 당시 경기노회 안에 있던 교회지도자들인 방지일 목사, 계효원 목사, 유병관 목사, 이정학 목사 등에 의해 지원을 받아 시작되었고 강경구 전도사()가 초기 실무자로 일하게 되었다.

강경구 전도사는 노회의 지도자들이 바라는 바대로 공장근로자들을 전도하는 일에 힘써 왔다. 물론 그 때의 활동영역에는 이미 크리스찬으로서 공장에 다니는 노동자들을 모아 친교를 나누며 그들의 신앙생활을 돕는 것도 포함되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영등포산업선교의 활동은 1964년 산업선교의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조지송 목사가 경기노회에서 한국교회 역사상 최초로 산업선교목사로 안수를 받고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그의 사역을 시작한 몇 년 이내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 변화는 공장 노동자들을 전도하여 예수를 믿게 하려던 초기의 목적에서 벗어나 노동자들의 인권문제, 공장 안의 노동조건 문제 등을 선교의 과제로 삼게 된 것이다.

물론 이 같은 변화는 시대적인 변화, 본격적인 산업화에 따른 이전에 보지 못했던 복잡한 노동문제의 발생, 산업선교에 대한 노동자들의 현실적인 요구, 그리고 새로운 선교신학(: 평신도신학, 하나님선교-MISSIONDEI)의 자극 등에 의한 것이었다. 물론 이와 같은 영등포산업선교회의 노선 변화는 보수적 교회지도자들을 당황하게 했을 뿐 아니라 70,80년대에 절정에 이르는 교회와 산업선교회와의 긴장 내지는 갈등, 대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2. 호주교회와 영등포산업선교와의 관계의 시작

참으로 흥미로운 일은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역사를 보면 아주 초기를 제외하고는 외국교회와의 긴밀한 협력 속에 진행되었는데 그 직접적인 협력관계가 호주교회- 처음에는 호주장로교, 후에는 호주연합교회(Uniting Church of Australia)와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영등포산업선교회에 처음 온 선교사로 호주선교사 Dick Wooten 이었고 그 이후 연이어 무려 7명의 호주교회 파송선교사가 연이어서 영등포산업선교회에 와서 함께 동역하였다. 그 기간이 또한 수십년에 이른다. 그리고 이 같은 예는 한국 내에 있는 그 어떤 선교기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일이다.

결국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영등포산업선교가 공헌한 한국의 교회 역사에서뿐 아니라 노동운동역사, 민주화 운동역사, 인권운동역사는 호주교회와의 협력 속에서 이룩한 성과이었고, 그러므로 한국의 현대사와 한국교회 속에서 영등포산업선교의 공헌이었다고 한다면 그 공은 마땅히 호주교회와 함께 나누어야 할 것이다.

3. 영등포 산업선교회의 첫번째 선교사 우택인 목사(Richard Frank Wooten, 1964-1969)

우택인 목사는 호주 장로교 파송선교사로서 1964 7월 한국에 와서 한국어를 익힌 다음 영등포산업선교회에 와서 조지송목사와 협력하여 그의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우택인 목사는 호주에서 면허를 가진 배관기술자였고 난방, 용접, 에어컨디션 설비의 전문가였고, 목사가 되기 전, 그 방면에서 일을 한 노동자로서의 경험이 있었기에 그가 한국에서 노동자선교를 위해 영등포산업선교에 온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우택인 목사가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한 일은 홍콩산업선교회(CIC), 일본산업선교회와 필리핀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산업선교조직들과 연대를 맺고 그들과 영등포산업선교회간의 교류를 증진하는 일이었다. 우택인 목사는 영등포에서의 5년 남짓한 선교협력사역을 마치고 1969년 호주로 귀국하였는데 그는 호주에 귀국한 이후 오히려 한국의 노동자선교, 인권선교, 민주화운동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였다. , 그는 호주장로교총회(후에 호주연합교회) 세계선교위원회의 인권총무로서 그리고 아시아기독교교회협의회(CCA)와 세계교회협의회의 국제관계위원회(WCC-CCIA)의 위원으로서 한국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강력히 지원하여 큰 업적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남북의 평화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북한을 여러 번 방문하여 남북교회간의 교류와 북한 그리스도연맹과 세계교회와의 관계를 증진하는 일에 큰 기여를 하였다. 우택인 목사는 결국 한국에 있었을 때 보다 한국을 떠났을 때 더 많이 한국을 위해 일했으며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일한 기간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 동안 영등포산업선교회의 동역자로서 더 많이 헌신하였다. 그래서 우택인 목사는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영원한 선교동역자로 살아온 사람이다.

 4. 인명진 목사와 호주교회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회고록도 아닌 공적인 글 중에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은 객관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경험하고 알고 있는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하는 것은 후대에 역사를 연구하며 기록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좋은 자료가 되는 것으로서 꼭 필요한 일일 것이다. 필자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필자와 호주교회와의 사실적 관계를 기록하여 영등포산업선교회 역사의 한 부분으로 남기고자 한다.

필자가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일한 것은 산업선교훈련을 시작한 1972 4월부터 그곳을 떠난 1984 4월까지 만 13년이다. 이 때는 영등포산업선교회의 40여년 역사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시기이었다. 수많은 노동자투쟁이 영등포산업선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그래서 한국의 노동운동, 인권운동, 민주화운동에 영등포산업선교회가 구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던 시기였다. 그만큼 정부의 탄압도 심했으며, 필자는 4차례 3년여의 감옥생활을 했으며, 다른 산업선교실무자들도 체포,조사, 구금 등의 탄압을 받았던 시기이었다. 그래서 영등포산업선교회는 세계교회의 주목을 받았고, 기도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 영등포산업선교회는 그 역사상 한국교회와 가장 갈등과 대립관계에 있었다. 노회의 비우호적인 태도와 때로는 억압단계까지 이르러 그 동안 이어져 온 한국교회로부터의 재정적 지원중단, 심지어는 군사정부의 중앙정보부로부터 압력을 받은 총회로부터 탄압과 산업선교폐지의 위기, 교회 안팎의 산업선교 반대자들의 반 산업선교운동과 산업선교 비난과 흑색선전의 책자, 방송, 신문의 왜곡보도 등 산업선교의 암흑의 시기이었다.

그리함에도 산업선교는 그 역사상 노동자들의 가장 많은 신뢰와 가장 강력한 연대를 이룬 자랑스런 역사를 가진 때도 그 때이다필자는 바로 이 때 영등포산업선교의 실무자와 총무로 일하였다. 그 때 필자는 조지송, 명노선, 신철영, 송진섭 등 훌륭하고 헌신적인 동역자들과 함께 일할 수 있었음을 지금도 자랑으로 생각한다. 필자가 산업선교에서 일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당시 호주선교사로서 장로교신학대학에서 구약학 교수로 있던 변조은목사(John P Brown)의 권고와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필자가 신학교3학년 졸업반이었을 때 앞으로의 진로를 고민할 때, 변조은 목사는 교회목회로 가는 것보다 외국유학이던지, 산업선교로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권고를 했고 필자는 산업선교를 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필자가 산업선교를 선택한 것은 당시 누구의 권유 때문만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시던 예수님의 삶을 본받으려는 신앙고백적 결단이었다. 산업선교를 하기로 작정하고 영등포산업선교를 찾아간 필자에게 조지송 목사는 아주 뜻밖의 말을 하였다. 그것은 누구든 산업선교를 하려는 사람은 1년간 공장에 가서 노동자로서 노동경험을 해야 하고 -그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었고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었다. – 그리고 자신의 생활비에 대한 재정적 지원(교회 혹은 기관)을 약속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월급을 누구에게 후원 받아 가지고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조지송 목사)도 영락교회에서 주는 월급을 받고 있으며 당시 여성 실무자이었던 강행림 전도사는 서울노회 여전도회연합회에서 그 월급을 후원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필자에게도 그런 재정적 후원을 약속 받아 오라는 것이었다.

당시에 영등포산업선교회는 실무자 인건비는 각자 후원교회 혹은 기관에서, 선교사업비는 노회와 지역교회의 후원헌금으로 충당하는 아주 재미있는 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 제도 때문에 영등포산업선교회가 외국교회의 원조에 기대지 않고 선교활동을 할 수 있었고 한국의 다른 사회선교기관들이 외원이 끊어지자 다 없어졌던 것과 같은 일이 없이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생존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크게 평가받을 만한 선교구조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영등포산업선교 실무자들은 이중소속을 갖게 되었다. , 조지송 목사는 영락교회 소속목사로서 영등포산업선교회에 파송되어 영등포산업선교의 실무자로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영등포 산업선교 실무자들은 각각 소속된 교회, 기관이 다르고 그 기관이나 교회가 영등포산업선교회에 파송해서 함께 일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영등포실무자들은 늘 자기를 파송한 교회나 기관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정기적으로 산업선교활동을 보고하곤 하였다.

물론 이와 같은 훌륭한 제도는 1970년대 말 한국정부의 정보기관이 파송교회나 기관에 압력을 가해서 할 수 없이 중단하게 되었고 결국 영등포산업선교회도 1980년초부터 다른 사회선교단체처럼 선교회 스스로가 재원을 마련해서 실무자들의 월급을 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하여간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영등포산업선교회가 필자에게 재정후원자를 찾아오라고 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고, 필자는 이 일을 변조은 목사와 의논하여 호주선교부가 필자의 재정후원자가 되겠다고 약속해서 드디어 필자가 영등포산업선교회에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필자에 대한 호주장로교회(후에는 연합교회)의 재정적 지원은 필자가 영등포산업선교회를 떠나는 날까지 13년동안 계속해서 주어졌다. 필자는 호주교회가 파송한 한국인 선교사였던 셈이다. 그래서 필자는 늘 생각하기를 필자가 13년동안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이룩한 공헌과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증진활동, 노동운동에 끼친 공헌이었다면 그것은 필자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며 그런 일을 하게 한 호주교회에 드려야 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한편 필자가 왜 한국교회의 지원을 받는 한국교회가 파송한 실무자로서 활동하지 못했나 하는 아쉬움과 섭섭함이 있다. 결과적으로 70년대 영등포산업선교회 활동은 호주교회와 함께 한 선교의 사역이었고 이 같은 호주교회의 공헌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며 역사에 기록해야 마땅할 것이다.

또한 호주교회에 대해서 기억해야 할 것은 호주교회는 필자에 대한 계속적인 재정적 지원뿐 만 아니라 영등포산업선교회가 정부로부터의 탄압으로 고난을 받을 때 온 교회가 기도와 격려로 그리고 한국정부에 대한 항의로 또 세계교회와의 연대와 협력을 통해서 영등포산업선교회를 눈물겹게 지원해왔다. 산업선교와 노동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모금활동, 기도모임, 호주교회 안에서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일 등을 열심으로 해서 우리를 지원하였다. 주일학교 공과 책의 한 단원을 영등포산업선교회를 소개하는 내용으로 실었고, 매해 영등포산업선교활동을 소개하는 달력을 만들어 호주교회 안에 배포하며 영등포산업선교활동에 관심과 기도를 불러일으켰다.

이와 같은 호주교회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과 협력은 호주교회가 우택인 목사의 뒤를 이어 1976년 나병도(Steven Lavender)선교사를 보낸 후 6명의 선교사를 계속해서 영등포산업선교로 보낸 사실에서 더욱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다.

필자에 대한 호주교회의 지원은 필자가 영등포를 떠난 1984년에 이어 그 후 2년간 그리고 1981 1년간 호주에 머무를 수 있도록 온 가족에 대한 재정적 지원까지 계속 되었다.

결론적으로 영등포산업선교회는 한국교회와 호주교회가 함께 협력하여 수행한 선교활동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러므로 영등포산업선교회가 받는 칭찬과 역사 속에서 인정받는 업적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호주교회의 몫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5. 나병도 (Steven Victor Lavender, 1976-1978)

영등포 산업선교 초기 호주장로교선교부가 파송한 우택인 목사가 호주로 돌아간 후 영등포산업선교회에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 소속선교사인 함부만 선교사가 와서 일하게 되었다. 함부만 선교사는 그의 할아버지 때부터 우리나라에 와서 대대로 일하던 집안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노동자선교에 특별한 사명이나 관심이 없어 보였고 실무자들과도 잘 협력하지 못하다가 결국 당시 예장산업선교 실무자들의 요청으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영등포산업선교회는 다시 선교 동역자를 찾게 되었다.

당시 영등포산업선교회가 선교사를 필요로 하는 것은 몇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산업선교가 하는 일의 성격 상 외국 선교기관( CCA, WCC 및 각 나라의 산업선교단체)과의 긴밀한 연락을 갖기 위하여 영어능력이 있는 사람이 꼭 필요했고 둘째는 외국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산업선교활동내역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했고, 셋째로는 외국교회가 파송한 선교사가 있으므로 산업선교를 탄압하던 정부가 산업선교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고, 마지막으로 산업선교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한국교회에 오랜 선교협력관계에 있는 정통 협력교단(미국장로교, 호주장로교 등)대표가 산업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므로 한국교회 안에서 산업선교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의미가 있었으며, 또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로부터 약간의 재정적 지원을 기대하는 면도 있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이유로 선교사가 꼭 필요했고 영등포산업선교회는 호주장로교회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당시에 영등포산업선교회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필자를 영등포산업선교회에 보내고, 인건비 등 재정적 지원을 하고 있던 변조은 목사가 호주장로교 해외 선교부 총무로 있었으니 호주장로교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영등포산선 총무였던 필자는 호주장로교회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면서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하였다. 첫째는 한국사람이 사는 집에서 살아야 한다. 둘째, 영등포산업선교회 실무자들이 받는 사례비 기준으로 월급을 받아야 한다. 셋째는 선교사에 대한 사례비는 호주교회가 직접 주어서는 안되고 영등포산업선교위원회로 보내서 영등포산선이 지급해야 한다. 셋째, 영등포산선 실무자들과 똑 같은 시간, 똑 같은 조건으로 일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산업선교 일을 하기 전, 어학연수 이외에 산선 실무자로서의 최소한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    

호주교회에 내세운 이와 같은 조건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왜냐하면 당시만하더라도 미국선교사들은 한국사람과 같이 살지 않고 연희동에 선교사타운을 지어놓고 살며 월급은 자기네 나라기준으로 자기나라 선교부에서 직접 받았고 행정적으로도 한국교회의 지시를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일하던 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같은 영등포 산선의 선교사 파송 조건은 한국에 있던 선교사 사회는 물론 한국에 선교사를 오랫동안 파송해 오던 다른 나라 교회의 해외 선교부에 큰 충격과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이 제안을 받은 호주장로교 세계선교부는 이를 흔쾌히 동의하고 이런 조건으로 한국에 갈 선교사를 찾는 광고를 게재하였고 이에 자원하여 나선 사람이 나병도(Steven Victor Lavender)선교사이며 그는 그 동안 한국에 온 그 수많은 해외교회선교사들 가운데 전례를 깨고 전혀 새로운 차원의 선교협력 관계를 시작한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스티븐은 호주 빅토리아의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멜버른에 있는 명문 링우드 고등학교와 멜버른 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그의 전공을 따라 회계사로 일을 하였고 인종착취에 반대하는 운동에도 참여하였는데 이는 그가 대학생활 중 해왔던 기독학생운동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호주장로교 세계선교부는 그를 한국의 영등포산업선교회에 선교동역자로 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임무를 부여하였다고 한다.  (변조은 저, 『은혜의 증인들에서』)

귀하는 큰 산업도시인 영등포에서 장로교 산업선교 팀과 함께 일하게 될 것이다. 이 팀은 함께 공부하고 실천하며, 상호 격려하기 위해 만나고, 매달 지원하는 약 200팀의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지원하고 세계 그리스도인의 연대를 표현하기 위해 함께 일할 외국인을 요청하였다. 귀하는 노동자들과 함께 공부하고 실천하는 데 완전히 참여하면서 그들의 문제와 열망에 대해 응답해야 한다. … 귀하는 영등포에서 도시산업선교의 부분이 될 것이다.

스티븐은 1976 6 7일 서울에 도착했고 곧바로 영등포산선이 마련한 양평동의 판자집에서 살면서 낮에는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한국 말을 배웠다. 스티븐이 살던 양평동 판자집의 방은 집 옆으로 비스듬이 달아낸 방으로 키가 큰 스티븐은 그의 방 반은 서 있을 수 있었으나 방의 반은 허리를 굽혀야 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또 그 해 여름 장미철에는 지붕이 새서 방안에 그릇을 들여놓고 빗물을 받았고 또 재래식화장실에서 그는 생활하였다.

이런 환경 속에서 그가 어떻게 버텼는지 지금 생각하면 참 미안하고 훈련이기는 하지만 너무 심했다는 생각을 하지만 당시 그가 함께 일 해야 할 여성노동자들은 그보다 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었으므로 그런 훈련이 필요하다 생각했고 그의 이와 같은 6개월 동안의 훈련은 그가 영등포 산선에서 일할 때 그가 만나는 노동자들을 더 이해할 수 있고, 일체감을 가치며 노동자들의 아픔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좋은 훈련이 되었다. 그래서 그의 영등포 산선에서의 선교사역기간이 비록 짧았지만( 2) 그 어느 누구보다도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하겠다.

스티븐은 산선에서 열심으로 일했다. 소그룹 모임에 오는 노동자들을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당시 영등포 산산과 관련된 각종 노사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군사정부에 반대하는 노동자집회가 열릴 때마다 그는 빠지지 않고 참여하였고 (이런 일은 선교사들에게 매우 조심스럽고 주저되는 일이었다) 키가 큰 그의 모습은 산업선교를 감시하며 반정부집회에 참석하는 사람을 체크하는 한국군사정부의 정보기관에 뚜렷하게 노출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특히 스티븐의 중요한 활동은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일어나는 일과 당시 한국의 민주화운동의 일들을 영문으로 작성하여 온 세계 매스컴과 특히 해외교회와 CCA, WCC 등 해외 교회에 알리는 일이었고 아마 스티븐의 이 같은 활동이 한국정부당국의 주목을 받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스티븐은 영등포산선을 찾아오는 수많은 외국언론기관의 기자들과 에큐메니칼 손님들에게 한국 안에서의 노동자 인권의 억압상황과 그들의 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였다.
그는 특히 다국적 기업의 종사자들의 인권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이에 대한 국제적 연대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에 참여하였다.

스티븐이 영등포에서 일하던 1976-1978년은 한국 군사정부가 민주화운동과 노동자 인권운동에 대하여 많은 탄압을 하던 때이었고 영등포산업선교는 이 같은 정부의 탄압에 중요한 타켓이 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영등포산선에는 한달에도 수천명의 노동자들이 드나들었고 이것은 정부나 기업에 큰 골칫거리였다 말하자면 거대한 반정부조직이요 군사통치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의 중심지였다. 이러므로 정부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산업선교를 탄압하고 와해시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산선을 용공으로 몰아서 교회와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려고 온갖 산선을 비난하고 모략하는 거짓책자들을 펴내여 노동자들과 교회에 배포하였고 매스컴을 동원하며 산업선교를 공격하는 선전활동을 자행하였다.

이런 집요한 정부의 산선에 대한 감시와 탄압, 억압에도 산선이나 그와 관련된 노동자들이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그 활동이 강화되자 정부는 마침내 산선 탄압의 결정적인 조치를 단행하였다. 1978 5 1, 한국군사정부는 필자를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긴급체포 구속하였다. 청주산업선교회의 고난 받는 농민들을 위한 기도회에서 행한 설교를 트집잡아 그 내용이 긴급조치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나중에 공소장을 받아보니 필자가 설교본문으로 읽은 구약 미가서 2 1~2절 말씀과 7 2~3절 말씀 그대로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공소사실로 기록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긴급조치9호를 위반한 꼴이 되었고 필자가 아닌 미가 선지자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법정에 서서 재판을 받아야 하는 형국이 되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 사건을 지휘한 부장검사가 본 교단소속(소망교회) 장로인 이진우라는 사람이다. 장로가 목사를 그것도 성경본문을 긴급조치 위반이라고 구속하고 재판에 넘겼다는 사실이다. 정부당국은 필자를 구속할 뿐 아니라 산선에서 운영하던 신용협동조합에 대한 대대적 감사를 실시하여 결국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용조합(허가번호 1)에 대해 폐쇄명령을 내렸고 또 한편 그 동안의 영등포산선의 모든 회계장부를 압수하며 세무공무원들을 동원하여 한 달여 동안 부정한 재정지출이었는지를 샅샅이 조사하였다.

그리함에도 단 한 건의 문제가 될만한 회계 처리를 찾아내지 못하였는데 나중에 이 조사에 참여했던 세무공무원이 몰래 찾아와 산업선교 목사님들을 너무 존경한다. 자기가 오랫동안 회계 감사를 했지만 이런 단체는 처음 보였다고 고백하는 일도 있었다. 이 와중에 당연히 정부당국의 탄압의 표적은 스티븐에게 돌아갔고 그의 비자갱신을 거부하고 6 20일까지 한국을 떠나라는 추방명령이 내려지게 되었다. 추방이유인즉, 스티븐이 그의 입국 목적인 종교활동보다는 정치활동에 관여했기 때문이라는게 한국정부의 공식답변이었고 결국 스티븐은 6 20일 많은 노동자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눈물 속에 한국을 떠나 호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때 스티븐은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고백했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살기 위해 애쓰는 중에 나의 신상이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도록 나를 강제하고 있다” (변조은 저 『은혜의 증인들』 중에서 인용)

결국 스티븐은 그가 따르려고 했던 예수님의 경우처럼 가난하고 억울함을 당한 사람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돕는 것이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었다고 덮어씌우려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던 것처럼 그도 똑 같은 경우를 당하게 된 것이다. 산업선교를 탄압하고 없애려 했던 조사정부의 시도는 절대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실패하고 오히려 산업선교활동은 더욱 강화되게 되었다. 미가서 성경구절로 필자를 기소한 사건은 보수적인 한국교회를 분노하게 했고 그동안 산업선교를 비난하고 탄압하고 정부의 정책이 얼마나 거짓된 것이며 산업선교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목숨과 말씀에 든든히 서서 일하는 선교기관인가를 온 세상에 그리고 한국교회안에 적나라하게 들어내는 사건이 되었다.

호주로 추방된 스티븐은 한국에 있을 때보다도 한국의 노동자 인권을 위하여 그리고 한국의 민주화를 위하여 더 많은 일을 하였으며 특히 호주국민들에게 또 호주교회에 한국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지원을 이끌어 내는 일에 크게 공헌하였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때로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역사로 나타남을 본다. 호주의 젊은 청년선교사 스티븐 빅터 라벤더의 경우가 그러하다.

 6. 안도선 (Antony David Francis Dawson, 1981-1985)

스티븐 라벤더가 한국정부로부터 추방된 이후 영등포산업선교회와 호주교회는 스티븐의 뒤를 이어 일을 할 호주선교사를 찾고 초청하는 일에 여러 방면으로 노력을 하였다. 그 일은 그렇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우선 한국정부가 허락을 안 했고 또 적당한 후임자도 찾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영등포 산업선교회는 외국선교사가 절실히 필요로 하였다. 이때 떠오른 인물이 토니 도슨이다.

그는 본래 호주 시드니 출신으로 맥커리대학에서 역사와 심리학을 전공한 후, 1979 4월 한국에 와서 대전에 있는 대전 숭실대학교에서 영어회화를 가르치는 일로 한국에서의 그의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그 곳에서 2년 동안의 영어회화를 가르치는 임기가 끝날 때쯤 토니는 호주교회와 영등포산선으로부터 영등포에 와서 함께 선교사역에 참여할 것을 요청받아 1981년 영등포산선에 스티븐 라벤더 후임선교사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호주연합교회(장로교, 감리교회 회중교회연합)의 선교부총무였던 변조은 목사는 그의 책 『은혜의 증인들』에서 그에게 준 임명장의 내용을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교회는 그대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특히 가난하고 주변화된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하기 위해, 가장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권역을 부당하게 사용하는 사람들 에게 도전하도록 하기 위해 그대를 선교사로 파송한다. 그대의 사역은 주로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될 것이다. 한 사람의 국외자로서 그대의 존재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갱신된 인류의 일치를 증언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대의 메시지, 그대의 삶과 사역은 하나이다. …그대의 임무를 실천하는 것은 UIM 총무에게 책임을 맡긴다

토니 도슨의 임무는 그의 전임자들이 하던 일이었던 특히 외국교회들과 세계 여러 기독교 기관들(CCA,WCC)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언어의 어려움이 그의 일에 많은 지장을 주었음을 스스로 고백하기도 하였고 무엇보다도 당시 영등포산업선교의 복잡하고 급변하는 변화에 대해 잘 적응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다. 그 때는 1980년 광주민주항쟁 이후이었고 한국사회는 급격한 혼란,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과 박정희 정부 때보다도 더 극심한 탄압이 자행되던 때 이므로 이에 따라 산업선교도 거의 없어질 만큼의 호된 탄압에 시달렸고 한국사회 특히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에 불어 닥친 이념논쟁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시기였다. 1984 5월 그 동안 산선총무로 일하던 필자가 영등포를 떠나고 새로운 실무자들(이근복, 손은하 목사 등)이 산선의 책임을 맡는 등 그야말로 격동기였다. 그래서 외국선교사로서 그 모든 급변하고 복잡한 상황에, 어려움을 적응할 수 있었겠는가 가히 짐작이 가는 일이다. 그러나 토니 도슨은 한국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한국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늘 조용하고 온화함으로 그 모든 변화를 지켜보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서 성실하게 일했다. 당시 그와 함께 일했던 영등포산선의 실무자들과 노동자들은 토니 도슨과 함께 했던 추억을 잊지 않고 늘 회상하곤 한다. 그는 1985년 호주에 돌아갔다가 1988년 다시 대전의 한남대학에 와서 영어를 가르치다가 1991 7월 호주로 영구 귀국하였다.

 7. 임경란(Kelly Yim, 1986-1991)

토니 도슨 이후 호주의 많은 젊은이들이 줄을 이어서 영등포산업선교에 와서 일하므로 영등포산선과 호주교회는 오랫동안의 역사적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하여 왔다. 토니 도슨의 후임으로 영등포산업선교회에 선교사로 온 사람은 임경란(Kelly Yim)인데 그녀는 호주이민1.5세대인 한국교포청년으로 호주교회의 선교사가 되어 한국에 와서 일한 최초의 기록을 세웠다. 임경란과 그 이후의 영등포산선에 와서 일한 호주선교사들의 이야기는 변조은 목사가 쓴 은혜의 증인들에서 그대로 인용하여 기록하기로 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저자인 변조은 목사에게 허락을 받았음을 밝힌다.)

임경란은 대구에서 태어났고, 그의 부모와 함께 1976년에 호주로 이민을 떠났다. 그녀는 랜드윅(Randwick) 여자고등학교와 시드니 대학에서 공부했고 과학에서 우등성적을 받았다. 그녀는 학생시설에 학생기독운동에 참여했다. 그녀는 인명진 목사가 호주에 있는 동안 이끄는 공부 모임에 참여했고 한국에서 가서 착취당하는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겠다는 열망을 표현했다. 영등포산업선교회는 토니 도슨의 후임으로 함께 일할 수 있도록 그녀를 초청하였다. 임경란은 타고난 쾌활한 성격과 분석적인 사회경제학적, 정치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연합교회 세계선교위원회(CFWM) 1986 2월에 전임자에게 주었던 것과 비슷한 위임장을 주면서 그녀를 임명했다.  
   
교회는 그대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특히 가난하고 주변화된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하기 위해, 가장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권역을 부당하게 사용하는 사람들 에게 도전하도록 하기 위해 그대를 선교사로 파송한다. 그대의 사역은 주로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될 것이다. 한 사람의 국외자로서 그대의 존재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갱신된 인류의 일치를 증언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대의 메시지, 그대의 삶과 사역은 하나이다. …그대의 임무를 실천하는 것은 UIM 총무에게 책임을 맡긴다

켈리는 1986 5 29일 서울에 도착해서 즉각 UIM의 투쟁에 참여하였고, 정부의 노동자 탄압과 UIM 직원들에 대한 체포에 관한 정보를 세계 전역에 보냈다. 경찰이 오전 3 UIM 사무실 문을 부수고 침입했을 때 켈리는 3주 동안 한국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늦게까지 초과근무를 하였다. 그녀는 군사정부 아래서 어려운 시절, 줄곧 일을 했고 무슨 일이 얼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훌륭한 분석과 코멘트를 첨가해서 바깥 세계에 알렸다.
 그녀는 한국의 UIM을 찾아노는 많은 방문자들을 만나서 하나님의 정의를 약자와 가난한 자에게 전달하려고 헌신하는 UIM 일꾼들의 삶과 투쟁을 그들에게 소개했다. 그녀는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가장 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
 켈리는 1988 12 25일 한성주 씨와 결혼했다. 그 후 그녀는 2년을 더 UIM에서 일했고 1998 1월 말, 남편과 어린 두 딸 지선과 지인과 함께 호주로 돌아갔다.

8. 차민희 (데브라 자넷(데비) 카슨, 1990-1993)

데비 카슨은 브리즈번에서 자랐고 무루카(Moorooka)초등학교, 세인트 피터 루터란 칼리지, 퀸즐랜드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녀는 퀸즐랜드 록햄프턴(Rockhampton)의 기독교 가정센터에서 1986 1월부터 1988 12월까지 상담자로 일했고, 여행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다양한 병원사회사업 일을 하였다. 1989 3월에 데비는 선교사가 되기 위해 지원하였다. 그녀는 선교 프로그램 안에 인턴과정에 흥미를 가졌다.

데비는 영등포 도시산업선교(UIM)에 지원하였다. 그곳은 다른 국가에 있는 사람들에게 한국인들과 연대성을 가지고 활동하는 통로를 열었기 때문에 중요한 배치라고 보았다. 데비는 브리즈번에서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녀는 이전 선교사들과 브리즈번에서 살면서 가르치고 있는 한국인들로부터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배웠다. 그리고 인턴을 위한 두 달 사전 훈련 프로그램을 이수했다.

한국 정부와 한국장로교회에 사이에 비자발행을 위한 긴 교섭들이 있었다. 데비는 최종적으로 1990 9월에 한국에 도착했다. 그녀는 빨리 배웠고 곧 UIM과 산업노동자들의 사정에 관한 해외 배포용 영어 회보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사전 편지들을 통해서 지속적인 탄압에 대한 정부를 나누었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바닥의 관점에서 날카로운 분석을 제공했다. 데비는 한 명의 UIM 직원과 함께 그녀의 숙소를 공유했다. 그녀는 다국적 기업(TNC’s)들의 정책과 활동들에 관한 이슈를 다루는 일을 했다.

 1992 3월에 데비는 세계선교부의 임명을 6개월 연장해 달라고 신청했다. 1993 2월까지, 그녀는 다른 아시아 국가로부터 온 노동자들의 UIM방문을 조정하고 한국의 프로젝트들을 연결시켰다. 그녀는 또한 한국노동자의 일부 그룹들이 해외 컨퍼런스에 참여할 때 동반했다. 그녀는 UIM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영등포 도시산업선교에 대한 그녀의 경험은 호주로 돌아간 후에 불리한 산업노동자들과 특히 아시아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15년 동안 일하도록 고무시켰다. 그 일이 그녀가 현재도 지속적으로 행하고 있는 가치 있는 일이다.

9. 데브라 굿서,1992-1993

데브라 굿서는 뉴 사우스 웨일스의 헌터리존(the Hunter Region)에서 자랐다. 우등으로 학사학위와 교육학 디플로마를 마친 후에, 데브라는 브록큰 힐(Broken Hill) 고등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 선교사역에 관심을 표시했다.

서울에 있는 아시아여성정보센터(AWRC)의 소장 이선애 목사와 상당한 교섭 후에, 데브라는 여러 아시아 여성신학자들이 쓴 AWRC 신학 논문들의 저널을 출판하기 위해 편집하고 준비하는 일을 돕는 선교인턴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많은 이유로 이곳은 만족한 배치가 되지는 못했다. 데브라에게 이곳의 전반적인 경험은 성장이기 보다는 부정적이고 소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긍정적인 측면은 데브라가 서울에 있는 지역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발전시킨 것이었다. 그들을 데브라를 위한 그리스도가 되었고 그녀를 깊이 보살펴 주었다.
 호주로 돌아간 후에, 데브라는 인턴으로서 그녀의 봉사를 마치기 위해 국경 서비스와 오지 가족 서비스 프로그램을 위해 한동안 일했다.

10. 송영진 (엘렌 그린버그, 1994,1997)

 엘렌 그린버그는 타스마니아 대학에서 상업학사(B.C.), 교육학 디플로마를 마쳤다. (한국에서 임무를 마친 후에 그녀는 또한 1998~1999년에 사회봉사 디플로마를 마쳤다.)
 그녀는 3년의 임기의 UIM의 협력자로 영등포에 가도록 임명되었고, 1994 5 30일 서울에 도착했다. 그녀는 한국에 있는 동안 타스마니아에 있는 교회로부터 편지와 메시지를 통해 엄청난 움직이는 지원을 받았다.

그녀의 주요 역할은 국제적인 연락관이었다. 그녀는 영등포 산선의 활동가들과 한국의 노동운동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영어로 정보를 제공했다. 이 일은 전 세계에 관심 있는 조직들과 개인들에게 발송되는 계간 영어 회보를 편집하는 것을 포함하였다거기서 그녀의 임기의 후반기에 그녀에게 주어진 발전된 역할은 아시아의 다른 부분에서 온 활동가들에게 한국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역사에 관하여 교육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아시아 URM과 연결되었다.
 엘렌은 후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3년 동안, 나는 긍정적인 사회변화를 이룩하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내가 한국에 도착했을 때 나는 영성과 사회적 책임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매우 관심이 컸다. 내가 한국을 떠날 때 나는 이 두 가지 주제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회적 책임 없는 영성은 단지 삶의 고통에서 도피하는 한 형태에 불과한 것이며, 영성 없는 사회적 책임은 생기가 빠져나간 에너지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또한 영성이란

 그녀는 다른 문화 안에서 사는 것을 발견했고, 새로운 언어와 함께 도전적이면서도 때로는 매우 거친 새로운 사회적인 규범을 배웠다. 여러 번 그녀가 포기하지 않고 일을 지속할 수 있는 능력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친구들이나 협력자들로부터 온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녀의 자신의 영성 및 신학 이해에 중대한 성장의 시간이었다.
 그녀는 UIM에 연결된 작은 교회의 이름인 성문 밖을 좋아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성문 밖이 하나님께서 아주 자주 발견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과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은 확실성을 개발하였다. 그녀는 기독교이든 아니든, 한국 민중의 깊은 헌신성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10. 로한 스콧 잉글랜드, 2000-2006

 로한 잉글랜드는 찰스스튜트 대학 재학시절, 대학그리스도인친교(University Christian Fellowship)에 활동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웨스트엡핑(West Epping)에서 교회 청년그룹의 지도자였다. 그는 원주민 화해운동에 참여했고 사회정의에 헌신했다.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로부터의 요청에 응하여 세계선교위원회는 로한을 초대하여 다음과 같은 책임을 지고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그것은 첫째로 UIM과 성문밖 교회의 삶에 전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한국어, 문화, 관습들 학습이고, 셋째는 국제손님들을 위한 외출 프로그램 등 국제적 연대를 발전시킬 것, 연구와 영주 신문 준비, 그리고 넷째는 UIM의 국제 통신 처리 및 영문 보고서의 교정이었다.

로한은 영등포산선에 선교인턴으로 임명되었고, 2000 5 31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데비 카슨은 로한을 위해 호주에서 후원 그룹을 조직하는데 주도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6개월 동안 한국어를 공부하고, 그해 말 몇주간의 훈련을 받고 파송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 호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들과 동남아시아의 노동활동가들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에 곧바로 참여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갔다.

이 프로그램은 그 후 5년 동안 그의 중요한 책임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는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와 영등포산선이 협력하여 세우고 있는 아시아도시농촌선교 디아코니아 훈련센터(AURMDTC)에 배치되었다. 로한은 이 센터의 자원인력이었고, 그 후 6년 동안 아시아 전체에서 50명 이상의 도시농촌선교(URM) 활동가들을 위해 13개 훈련과정을 조직하고 수행하는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로한은 UIM의 세계연대국에 배치되어 영어통신, 정기적 영어 회보발간, 웹사이트 개발에 대한 책임을 맡았다. 그는 또한 산업선교회에 부속된 회중들인 성문 밖 교회의 삶에도 깊이 참여했다.

로한은 영등포산선의 삶 속에 아주 빨리 정착했다. 그는 동료 및 노동자에 의해 사랑을 받았다. 다른 한편, 그는 함께 일하는 사람을 좋아했고 비록 매우 부담이 되었지만 그가 하는 일을 즐겼다. 그는 보다 정당한 사회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과 나란히 일하고 싶어했고, 그것은 정확하게 그가 영등포에 찾아낸 상황이었다. 그의 감독자는 1년 후에 그에 대해 로한은 UIM의 많은 프로그램에 활발히 참가해서 우리의 진실한 협력자가 되었다.’고 보고했다. 그의 활동기간 끝 무렵, 그의 동료들은 그는 아주 좋은 선교사였다고 선언했다.

 로한의 사역 기간은 매년 연장되었고, 그는 2006년 말에 UIM에서의 사역을 완료했다. 그는 2005 3 12일에 송순애와 결혼했고, UIM과 함께 한 그의 사역을 마친 후에 안산 외국인노동자센터에 고용되어 아시아의 다른 부분에서 온 한국의 손님 노동자들(guest workers)과 함께 일했다

Copyright 인명진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