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의 글
인명진
(재단법인 한호 기독교 선교회 이사장)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의 한국사랑은 위대하다. 그들의 첫 선교사 데이비스가 한국에 온지 6개월 만에 풍토병으로 소천 하였음에도, 오히려 호주교회는 선교사들을 계속 파송하여 의료, 교육, 복지, 교회 등 다양한 선교활동을 이어간다.
그런데 이러한 선교활동은 당시 호주교회가 재정적으로 풍족한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미국이나 캐나다 등의 선교부에 비하면 작은 규모였다. 호주선교사 스스로도 자신들은 베냐민 족속과 같다고 하였으니 말이다.
그런 가운데 부산, 진주, 마산에 이어 통영에 선교부를 설치한 것이다. 당시 작은 항구 통영에 유독 미신이 많은 것을 보고 호주선교사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많은 인적 그리고 물적 자원을 지원하였다. 호주 빅토리아교회들이 아끼고 아끼며 열심히 모금한 재정으로 말이다.
통영근대사는 호주선교부를 빼고는 완전할 수 없는 역사가 되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본 도서를 통하여 통영근대사에 있어서 호주선교사들의 공헌이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며, 저자인 서상록 선교사와 양명득 선교사의 수고에 감사하며 축하를 드린다.
통영호주선교사기념사업회가 통영의 호주선교부 유적 중에 일부나마 복원하기 위하여 노력한다니 참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이 일에 통영의 많은 시민단체들과 교회들이 협력하고 후원하기를 희망하며, 꼭 결실을 맺기를 바란다.
호주선교사들을 통하여 보여주신 통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더 위대하다.
축하의 글
강석주
(경상남도 통영시 시장)
젊은 여성의 몸으로 스키너 선교사가 이 땅에 오셨을 때, 우리나라는 아직 가난하고 작은 변방의 한 나라였고, 나라를 잃은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이런 곳에 오셔서 1940년 고국 호주로 떠나기까지 수십 년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봉사와 선교, 의료와 교육에 헌신했습니다.
1929년 진명학교의 교장이 된 스키너는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통영의 여성들에게 복음과 의료를 가르친 교사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어려운 장애인들에게 미싱과 자수 등을 직접 가르쳐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직업훈련까지 펼치며 그들의 자립을 도왔습니다.
먼 동양의 땅에서 선교를 펼치는 어려운 삶 속에서도 스키너는 늘 감사해 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깨닫게 해 주신 것에 감사해 했고 “주님이 허락하신 방법으로 힘을 보태게 된 것에 감사” 했습니다.
참으로 스키너의 선교는 소외받고 병든 이들의 친구이자 어머니셨고, 우리 곁에 와서 살다 가신 작은 예수였습니다. 그분의 업적과 정신을 우리가 오랫동안 제대로 기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그분이 오신 지 한 세기가 지난 오늘, 그리고 한·호 선교 130주년을 맞아 이렇게 기념도서가 발간되니 더욱 기쁜 마음입니다. 이를 위해 그동안 애쓰신 서상록 통영 호주선교사 기념사업회 회장님을 비롯한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는 환경과 풍습, 말과 음식이 다른 먼 이국땅에서 자신의 일생을 바쳐 진정한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신 스키너 선교사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100년 전 스키너가 보여 준 사랑과 헌신에 다시 한 번 깊이 고개 숙입니다.
추천의 글
이상규
(고신대학교 명예교수, 백석대학교 석좌교수)
이번에 양명득 박사와 서상록 선교사가 공동 집필한 『호주선교사 에이미 스키너와 통영선교』가 출판된 것을 축하드리며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호주장로교는 1889년 10월 내한했던 해리 데이비스의의 죽음을 계기로 한국선교를 시작하였고, 해방이전까지 78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바 있습니다. 호주 장로교 한국선교부는 부산(1891), 진주(1905), 마산(1909)에 이어 1913년에는 통영과 거창 선교부를 개설했는데, 통영지부는 통영지방을 비롯하여 인접 지역과 거제, 고성 등지를 관할했습니다. 이곳에 파송된 첫 선교사가 왕대선(Rev R. D Watson) 선교사 부부와 모이리사백(Miss E. S. Moore)이었습니다. 곧 위대인 의사(Dr W. Taylor)와 그의 부인이 통영지부로 배속됩니다.
이렇게 통영지부가 세워지고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 신애미(Miss A. M. Skinner) 선교사인데, 1914년 내한하여 거창지부에서 일정 기간 일하고 통영으로 옮겨와 한국을 떠나기까지 20여녀 간 봉사했습니다. 호주 빅토리아주 북동쪽에 위치한 비치워스(Beechworth)의 의사 가문에서 출생한 그는 멜버른대학교 재학 중에 학생자원운동(SVM)의 영향을 받고 선교사로 자원하였고, 교회여성훈련원에서 선교사 교육을 받은 후 내한하였습니다.
그는 거창, 마산 그리고 통영에서 일했는데 그의 주된 사역은 학교교육, 특히 여성교육이었습니다. 교육학을 공부한 그는 선교지에서의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교육입국(敎育立國)에 대한 확고한 신념의 인물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교육이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교육은 복음 전파를 위한 통로이자 도구였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진공상태에서 전파되거나 수용될 수 없었고, 기독교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는 문자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문화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학교교육을 중시했던 것입니다. 자식들에게 문자를 가르치되 단순히 문자 교육이 되어서는 안 되고 자기 스스로 성경을 읽게 하기 위해 문자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던 존 코튼(John Cotton)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신애미 선교사는 한국인 여성 교육이야 말로 이 나라의 장래가 결정되는 잠재적 자산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육할동을 중시하고 그가 일한 선교지부에서 학교교육의 책임자로 봉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딜 가나 한국인들에 의해 ‘신교장’으로 불렸습니다.
이번에 위의 두 분의 수고로 통영지부와 신애미 선교사에 대한 귀한 책이 편집되고 출판된 것을 충심으로 환영하며, 이국인이 통영지방에서 일한 지난 세월의 자취를 드러내고, 오늘 우리에게 주신 정신적 유산을 성찰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 책을 통해 호주선교부와 선교사들의 수고와 헌신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격려의 글
박형균
(사단법인 통영사연구회 회장)
19세기 말은 약육강식하는 밀림의 논리가 전 세계를 팽배하던 격동기로, 그 때 한반도는 세계열강의 각축장이었다. 한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벌어진 청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동학혁명이 겹쳐 일어나 더욱 몸살을 앓고 사직(社稷)은 누란(累卵)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약 300년간의 통제영이 해체(1895)되었고, 고성군에서 독립하여 새로운 군을 설치해야 한다는 지역민의 열망이 고조되었던 시기와 맞물린다.
이 시기에 통영에는 동시에 두 개의 외래문화가 들어 왔는데, 그 하나는 일본제국을 등에 업은 일제침략문화였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서구문화였다. 그러나 이 두 문화가 통영에 남긴 결과는 너무나 확연히 달랐다.
내가 어렸을 때 겪었던 이 두 문화는 각각 다른 색깔로 뇌리에 각인(刻印)되어 남아 있다. 전자는 어둡고 무시무시한 색깔로, 그리고 후자는 온유한 느낌의 밝은 장밋빛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제는 이 땅에서 두 번의 전쟁 끝에 이 나라를 강점하여 식민지로 수탈하였고, 종국에는 민족분단의 빌미마저 남겨 우리는 지금도 그 고통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빼앗기 위하여 우리 땅에 왔었다.
그러나 선교사로 대표되는 서구문화는 삶의 최고 가치를 봉사에 두고 현대식 의료병원을 개설하였고, 불우청소년들의 직업안정을 도왔으며, 백년대계로 각 급의 학교를 세워 인지계몽에 나섰다. 그들은 선교사업 이외에도 꼭 필요한 것을 씨뿌리기 위하여 이 땅에 왔었다.
선교사의 집은 여황산의 남향 산록에 있었다. 우리들에게 그 서양 집은 늘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동화 속 요정이 살고 있는 집이었다. 그리고 나의 집은 통제영 서문의 성하거리, 명정리에서 십자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윤보선대통령 영부인 공덕귀, 소설가 박경리, 시조시인 장응두, 독립운동가 박봉삼, 피리악공 주봉진 어른과 그리고 정갑섭 친구도 한집 건너 서로 이웃하고 살았다.
그때 공덕귀 여사의 모친이 독실한 크리스천이라 서양 집과 왕래가 잦았고, 공덕귀 여사는 당시 진명유치원 선생님이기도 했다. 또 나의 집은 삼촌을 비롯해서 위로 형님 세 분과 누님 세분이 진명유치원에 졸업 또는 재학 중이었기 때문에 종교는 달라도 선교사들과는 늘 가까이 지냈다.
제사음식을 모반에 담아 올려 보내면 답례로 화채 유리그릇에 양딸기 잼을 가득 담아 보내주던 일, 그리고 린들이라는 선교사의 딸이 김치 맛에 중독되어 걸핏하면 동네 조선 친구 집에 살며시 먹으러 가기 때문에 이를 못하게 선교사가 매를 들었다는 이야기와, 누님들이 유치원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아온 캔디의 맛을 잊을 수 없다. 그 가운데서도 선교사들이 1941년에 통영을 떠나면서 주고 간 물품들이 있는데, 특히 신애미 선교사가 누님에게 준 철제 침대는 나의 잠자리이자 뜀뛰기 놀이기구였고, 독서용 등나무 흔들의자는 타고 구르는 망아지가 되었다.
이러한 어릴 적 기억들이 후일 성장하면서 동화의 세계를 넘어서 통영향토사의 여기저기에 엄격한 역사현실로 새롭게 확장되어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개화기 통영의 문예발전은 참으로 찬란했다. 발전을 이끌었던 통영청년들의 각 분야 활동영역과 작품 속, 특히 항일운동에는 항상 호주선교사들의 잔영(殘影)이 말없이 도사리고 있다.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나라 잃은 통영 청소년들에게는 이심전심의 격려였고 마음의 의지였다.
그들은 1941년 강제 출국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당시 그들이 우리에게 남기려던 메시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언 80년이 지난 지금, 오랫동안 보존되어 온 그들의 메시지가 호주에서 잠을 깨어 다시 우리 앞으로 다가온다. 기적 같은 일이다. 이일을 가능하게 해주신 서상록 회장과 양명득 박사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리고 경의를 표한다.
발행의 글
서상록
(통영호주선교사기념사업회 회장)
기억에도 없는 필자의 어린 시절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밖으로 다니기가 부담스럽다고 어머니께 자주 말씀 하셨다는 것을 사춘기가 될 무렵에 들었다.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눈에 보이는 사물들에 대한 호기심과 이에 대한 질문이 끝도 없이 이어졌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인지 지금도 필자는 지리적, 지적 호기심이 유난히 많은 듯하다.
통영은 지금도 인구 13만 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인데, 한국을 대표하는 거목과 같은 숱한 예술가들을 배출한 특이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이 점에 대해 궁금해 하며 시민들에게 묻곤 하는데, 대부분의 시민들은 ‘자연풍광이 아름다워서’ 라고 얼버무리는 듯이 대답하는 모습을 많이 보아 왔다. 필자의 귀엔 궁색하기 짝이 없는 무성의한 대답 같이 들렸다. “아니, 아름다운 곳이 여기 뿐 이겠는가?” 이 때부터 통영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 관심을 따라 가다보니 근대 호주 선교사들의 역할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침내 1990년 8월 외부문명이 유입되는 통로인 바다와 섬들을 답사하기로 하고 아내와 함께 섬들을 찾아 나섰다. 채록 장비들을 챙겨 한산도를 시작으로 섬과 섬을 이어가며 방문했는데 욕지도를 끝으로 짧지만 일주일간의 답사여행을 의미 있게 마쳤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29년이 흐르는 동안 이에 대한 작업은 이어져 오고 있다. 통영 근대화의 산실 역할을 했던 호주 선교사들은 항일민족 운동과 최초의 근대식 교육 그리고 다양한 사회사업으로 많은 업적과 영향력을 이 지역에 남겼다.
이러한 그들의 숭고한 발자취를 답사하는 것이 계기가 되어 결국은 필자도 선교사가 되어 100여 년 전 열악한 조선을 찾아 온 호주 선교사들처럼 그렇게 세계의 오지인 히말라야에 들어가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안식년을 이용해 통영지역의 기독교 전래와 호주선교사들의 역할에 대한 신학 논문을 준비하면서 호주 선교사의 집이 있던 문화동 269-1번지 일대와 그들이 걸었던 간창골 골목길을 수도 없이 걸으며 얼마나 많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이제 필자에게 남은 중요한 또 하나의 과제가 있다면 통영인의 기억 속에 향수처럼 남아 있는 호주 선교사의 집을 복원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2016년 10월 1일 사단법인 통영호주선교사 기념사업회를 설립하여 주춧돌만 남아 있는 옛 집터와 부지를 구입하였고 시민들과 함께 공감대를 형성해가며 나머지 일들을 진행 중에 있다. 이 일을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기념사업회의 여러 후원자와 회원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끝으로, 호주선교사가 세웠던 진명 유치원에 다니던 어린소년 김춘수의 눈에 비춰졌던 호주선교사에 대해 쓴 그의 시로 글을 맺고자 한다.
호주濠洲 아이가
한국韓國의 참외를 먹고 있다.
호주濠洲 선교사宣敎師네 집에는
호주濠洲에서 가지고 온 뜰이 있고
뜰 위에는
그네들만의 여름하늘이 따로 또 있는데
길을 걸어오면서
행주치마를 두른 천사天使를 본다.
〈김춘수 幼年詩 1〉
2019년 3월
히말라야 은둔의 왕국 부탄에서
히말라야 은둔의 왕국 부탄에서
편저자의 글
양명득
(호주선교동역자)
2010년 8월 19일 호주연합교회 총회 세계선교부 주관으로 시드니 파라마타의 한 교회에서 파송예배가 있었다. 필자를 한국으로 파송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그해 9월 1일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사무실에 부임하였다. 필자를 파송하는 공식 문서에는 선교동역자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었다. “한국과 호주교회 선교동역관계 증진, 다문화와 디아스포라 목회 협력, 세계교회협의회 부산총회 지원, 총회 영문 작업 지원 등”이었다.
그 후 총회와 세계교회협의회 부산총회 준비위원회에서 필자는 3년을 사역하였다. 그러나 선교동역자의 생활은 녹녹치 않았다. 호주교회에 속한 한국인 목사로 이곳에서는 내부인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백인이 아니니 완전 외부인도 아닌 경계선에 걸쳐진 느낌이었다. 물론 이것은 장점이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어려움이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힘들 때마다 필자에게 이상한 버릇이 하나 생기었다.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염려스러운 모습이었다.
“스키너 선교사님, 당신이라면 이런 상황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당시 그 어촌 항구에서 선교사님은 어떻게 견디었습니까?” “선교사님이 살아 계셔 한번 만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요.”
한국에 다녀 간 약 130명이나 되는 호주선교사 중에 하필 왜 스키너 선교사에게 혼자 말을 하였는지는 지금도 잘 모른다. 다만 그녀가 나의 고민을 잘 받아 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번에 스키너에 관한 연구를 좀 더 깊게 하면서 나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더 들었다.
통영 호주선교사 기념사업회 서상록 회장은 호주선교사들에 관하여 공부한 후에 본인도 선교사가 되었다고 할 만큼 호주선교사에 대한 애정과 이해가 깊은 분이다. 한호선교 130주년을 맞아 본 도서를 함께 출판하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한다.
전 세계에 흩어져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에게 본 도서가 조금이나마 영감이 되고 도전을 준다면 책을 만드는 이 고생스러움을 필자는 잊어버릴 수 있겠다.
2019년 3월 18일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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