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페이지뷰

2013년 5월 28일 화요일

호주선교사 후손들 지리산 선교유적지 방문


호주선교사 후손들 지리산 선교유적지 방문


2013년 4월, 억수같이 내리는 빗줄기 속에 지리산 선교사 수양관(유적지)에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 왔다. 이들은 노승배(Rev. Barry Maxwell Rowe) 호주 선교사의 딸과 사위, 그리고 외손자 등 5명이다. (사진: 한국교회언론회)

노승배 선교사는 목사안수를 받은 다음 해인 1965년 간호사였던 그의 아내 원혜숙(Joan Warren) 선교사와 함께 호주연합교회 소속으로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던 것이다.

노승배 선교사는 산업선교와 노동의 삶과 영성을 접목시키는 농촌 선교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당시 공단이 조성되고 있던 울산 지역의 울산산업선교회에서 사역했다.
그의 주된 사역은 울산 지역에서 산업화, 도시화에 맞는 사역 개발과 산업 단지 안의 외국인을 위한 영어 예배 인도, 그리고 지역의 교계 지도자들과 신체장애자를 위한 자활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그는 1966년에는 농촌의 가축개량을 돕기 위하여 대형 흰 돼지와 염소를 호주에서 들여와 번식과 분배를 지도하기도 했다. 1969년에는 “양지직업훈련센터”를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시계, 라디오, 전자기기, 은 가공, 진주목걸이가공 기술 등을 가르쳐 그들에게 자립심과 자기존중의식을 심어주는 사역도 감당했다. 노승배 선교사는 1977년 호주로 돌아갈 때까지 10여 년간 한국의 시대적 상황에 맞춰 영남 선교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이번에 한국을 찾은 노승배 선교사의 큰 딸 쉐린(Sherrin Ford) 5살 때부터 여름만 되면 지리산 선교사 수양관에서 직접 생활을 했다. 그녀는 이번 방문에 대하여 ‘어렸을 때부터 생활했던 지리산 선교사 수양관을 잊지 못해 찾아왔고, 한국교회의 따뜻한 환영에 감사한다’고 했다.

이렇듯 지리산 선교사 수양관(유적지)은 한국교회에 선교사()적 의미는 물론, 선교사간 서로 협력하는 에큐메니칼 협력정신의 실천장으로써, 그리고 선교사들이 다양한 선교의 장을 펼치는데, 충전과 활력을 얻었던 근․현대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다.

또 이곳의 중요성이 더한 것은, 외국의 선교사들의 흔적과 한국교회가 공존하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선교사들에 의한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지만, 대부분 한국교회에 귀속되어 있다. 그러나 지리산 선교사 유적지만은 한국교회와 선교사 후손이 함께 참여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관계자는 "이곳은 단순히 지나간 역사의 장()이 아니라, 이곳을 통해서 수많은 희생과 헌신으로 십자가의 사랑을 몸소 실천한 선교사들의 땀과 눈물과 기도를 모아, 새로운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의 미래를 열어가는데 원동력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Copyright 김규진 



한국교회와 에큐메니컬 운동


한국교회와 에큐메니컬 운동
- WCC 10차 부산총회에 즈음하여
 

장윤재 (이화여대 기독교학부 교수)
 

들어가는 말
 
한국교회에서 에큐메니컬 운동을 논한다는 것은 아직도쉽지 않은 과제다. 이 세계 그 어느 곳보다 배타적이고 원리주의적인 신앙이 강한 곳이 한국이기 때문이다. 한국적 풍토에서 대화와 관용의 문화가 자리 잡기는 참 힘들어 보인다. 잘 참고 대화하다가도 너 몇 살이냐?’(How old are you?), 혹은 어디 여자가!’(How dare you, woman!) 한 마디면 그것으로 모든 대화가 끝나는 게 한국적 풍토다. 너와 나의 다름을 인정하고 인내하면서 차이를 차별하지 않고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기에는 우리의 역사가 너무도 고단하고 힘들었나 보다. 상호 소통 능력이 빈약한 가부장 문화군사주의 문화에 배타적인 근본주의 신학이 결합하면서 한국은 에큐메니컬 운동이 꽃피우기 어려운 척박한 토양이 되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 그 어느 곳에서보다 에큐메니컬 정신과 문화와 운동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이 한국이며, 에큐메니컬 운동이야말로 한국교회의 제2의 도약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최대의 과제이며, 10WCC 부산총회는 바로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필자는 이글에서 이야기해보려 보려 한다.
 
Ecumenical vs. Evangelical
 
에큐메니컬’(ecumenical)이라는 말은 신약성서에 15번 사용된 그리스어 오이쿠메네’(oikoumene)에서 유래한 말로 사람이 살고 있는 온 누리를 뜻한다. 내 지역, 내 교파, 내 나라가 아니라 사람이 살고 있는 온 누리, 즉 지구 전체를 사고의 지평으로 삼으니 그것은 태생적으로 포용적이고 탈()경계적이다. 그런데 한국교회 안에서 이러한 에큐메니컬 정신과 문화와 운동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우리는 먼저 에큐메니컬에반젤리컬이라는 잘못된 도식부터 극복해야 한다. 이 잘못된 이분법은 한반도의 냉전과 분단 상황이 낳은 불행한 산물이다.에큐메니컬의 반대말은 에반젤리컬이 아니다. ‘에큐메니컬의 반대말은 섹테리안’(sectarian), 분파주의혹은 당파주의. 분파주의/당파주의란 자신의 특정한 신앙체험과 진리에 대한 이해가 마치 보편적이고 유일하며 최고의 것인 양 주장하는 태도를 말한다. 근본주의적 신앙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분파주의/당파주의이며, 따라서 에큐메니컬한 시각이 결여된 교회는 복음을 협소하게 해석하여 편협한 공동체로 전락하고 만다. 이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말한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긍정하는 태도와 정확히 대비되는 자세다. 분파주의는 교회의 다양성을 인정하지도 않고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대신 복음을 사유화’(privatization) 한다. 이에 반해 에큐메니컬이란 교파적 신앙고백(confession)의 부분성을 인정하고 세계적 지평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연합을 이루어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고린도전서 12:25) 하려는 정신이고 문화이자 운동이다. 그것은 곧 자기 초월, 자기 비움의 신앙적 결단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에큐메니컬은 철저한 에반젤리컬이다. 에반젤리컬(evangelical)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evangelion)을 최우선시 하고 그것에 모든 것을 헌신하는 신앙적 태도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선포하신 이른바 사명선언’(Mission Statement)에 잘 나타나 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18-19)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들, 즉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전파하며,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그리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이 복음적 이상들’(evangelical ideals)은 바로 에큐메니컬 운동이 추구해온 최우선의 가치다. 한국과 세계교회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그 누구보다도 에큐메니컬 운동이 바로 이와 같은 복음적 이상들의 구현을 위해 앞장 서 왔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태복음 7:20)고 말씀하셨다. 에큐메니컬은 탈복음주의후기 복음주의도 혹은 세속주의도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가장 충실하려고 하는 지극히 복음적인 운동이다. 에큐메니컬을 에반젤리컬에 반대되는 말로 오해되는 이분법적 도식부터 극복해야 한다. 에큐메니즘은 어떤 프로그램이나 활동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하나 되고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가장 본질적인 과정 그 자체인 것이다.
 
교회의 하나됨과 교회의 교회됨
 
교리는 분열시키고 봉사는 일치 시킨다”(Doctrine divides, but service unites)라는 말이 있다. 이 주장의 요지는 교리적 문제를 일단 접어두고 세계 안으로 뛰어들어 함께 선한 일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교회의 일치가 주어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우리의 실제 경험을 뒤돌아보면 우리는 교리적 문제만큼이나 사회참여와 봉사에서도 분열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하더라도, 실제로 어떤 정치경제 체제가 가난한 자들에게 바람직한 것인지, 그리고 어떤 경제적 발전이 그들을 위해 필요한 발전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를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교단 간(inter-denominational) 그리고 기독교 내(intra-Christian)의 대화와 일치의 노력, 즉 분열된 교회의 하나됨을 위한 노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대화는 공동의 증언과 공동의 봉사를 위한 신학적 토대가 된다. 오늘날처럼 이렇게 깊이 분열된 세계 속에서 교회가 구원의 신성한 상징’(sacrament of salvation)이 되기 위해서는 신학적 · 교리적 · 예전적으로 하나 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멀리 가기 위한 토대가 된다. 아프리카에 이런 속담이 있다. “빨리 가려면 혼자서 가라. 그러나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If you want to go fast, go alone; but if you want to go far, go together).

하지만 교회의 하나됨이 교회의 교회됨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언제나 잊어서는 안 된다. 필자는 일치를 위한 일치가 에큐메니컬 운동의 목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위한 일치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교회의 일치는 교회의 교회다움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교회의 교회다움을 묻지 않으면 분열은 물론이지만 일치도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를 우리는 깊이 경청해야 한다. 조직이나 기구적 제도를 인위적으로 개혁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오늘 우리 시대 생명과 평화와 정의의 총체적 위기앞에서 교회의 선교적 과제가 무엇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일치는 인위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됨을 추구할 때, 교회가 교회다움을 회복할 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렇다면 에큐메니컬 운동은 다른 말로 이 세계의 위기에 대한 교회의 공동대응이라고 필자는 정의하고 싶다. 여기서 말하는 세계란 하나님이 극진히 사랑하사 독생자까지 내어주신(요한복음 3:16) 세계다. 영어로 “the world”가 아니라 온 우주만물을 뜻하는 “cosmos”.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듯이(5:20), 교회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불의가 가득한 곳에 교회일치의 요구가 강하게 제기되곤 했다. 군사독재시절 한국의 70-80년대의 교회가 그랬고, 인종차별정책(apartheid)으로 고통 받던 남아프리카의 교회들이 그랬으며, 독일교회가 바르멘 선언으로 히틀러의 폭정에 대항할 때도 그랬다. 사실 교회일치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교회 내적인 요구에서라기보다 위기에 접한 세상으로부터의 요구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게 더 정직한 성찰이다.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는 이렇게 말했다. “The saints do not see things that others do not see; rather, they see what everyone else sees but in a different way.” (성자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이 보는 것을 똑같이 보되 그것을 다르게보는 사람들이다.) 에큐메니컬 운동이란 남다른 눈으로, 즉 신앙의 눈으로 이 시대의 징조를 읽고 이 세계의 위기에 책임 있게 응답하려는 공동의 신앙운동이다. 실로 희망의 시대가 될 것으로 예견됐던 21세기는 전쟁과 폭력, 경제적 불의와 양극화, 기후변화와 생태계 파괴, 종교간 갈등과 충돌, 세대 간 문화 간 단절, 그리고 영적 정신적 혼돈 등, 일찍이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심각한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우리 시대는 인간의 탐욕이 문명의 멸망을 재촉하고 우주적 종말까지 예견케 하는 시대이다. 이 시대는, 하나님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 위하여 모든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로마서 8:22)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한 마음 되어 세상 앞에 생명과 정의와 평화의 등불 들고 서있어야 한다.
 
세 종류의 에큐메니즘
 
에큐메니즘에는 세 종류의 에큐메니즘이 있다. 기독교 내’(intra-Christian), 기독교를 넘어선’(beyond Christian), 그리고 심층’(deep) 혹은 우주적’(cosmic) 에큐메니즘이다. 이러한 구분은 학문을 위한 인위적 구분이 아니라 실제 세계 에큐메니컬 운동의 역사적 발전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구분이다.

1948년 암스테르담 이전의 기독교는 개인 영혼의 구원을 축으로 한 기독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48년에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가 창립되면서 책임사회’(Responsible Society)라는 이념이 제기되었고, WCC의 제3차 뉴델리 총회(1968)와 제4차 나이로비 총회(1975)를 거치면서 세계교회들은 제3세계의 빈곤과 억압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사회변혁의 가치들을 수용하게 되었으며, 밴쿠버(5)와 캔버라(6)와 하라레(7) 총회를 거치면서는 이제 생명의 시각에서 신학과 선교를 할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요약하면, 에큐메니컬 신학과 운동의 패러다임은 개인 인격의 변화와 영혼 구원에 중심을 둔 선교에서, 교회의 성장과 확대를 중심한 선교로, 거기에서 교회를 넘어선 세속적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선교, 그리고 인간중심적 하나님 선교를 넘어선 생명 중심의 선교로 패러다임이 확대 ·심화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로 기독교내(intra-Christian) 에큐메니즘은 우리에게 익숙한 에큐메니즘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마지막으로 드리신 그의 간절한 고별기도에, 그리고 사도 바울의 권면에서, 이 에큐메니즘의 성서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이 기독교내 에큐메니즘의 핵심적인 신학적 전제는, 웨슬리 아리아라자(Wesley Ariaraja)가 잘 지적하듯이, 교회의 일치가 선물임과 동시에 목표라는 것이다. 완고한 교파주의와 개교회주의를 넘어서지 못하는 한국교회의 풍토에서 이 기독교내에큐메니즘은 언제나 중요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이 기독교내 에큐메니즘의 성패는 개교회와 지역교회의 참여에 달려 있다고 본다. 이제 개교회와 지역교회의 참여가 없는 에큐메니컬 선언들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과거 권위주의적인 군사정부 하에서 사회 모든 부문이 숨죽일 수밖에 없을 때는 그렇지 않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변화했다. 에큐메니컬 운동 선구자들의 기도와 헌신과 희생이 이러한 변화를 이루게 하였다. 이제 에큐메니컬 운동은 교회 밖일부 전문가들의 운동이라는 오해에서 벗어나 개교회와 지역교회의 목회자가 일반 교인들이 참여하는 저변운동(grassroots movement)이 되어야 하겠고, 그것을 위한 다양한 방안들이 모색되고 실천되어야 하겠다. 교회 내 에큐메니컬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한 에큐메니컬 목회론이 개발되고 실험되어야 한다는 제안은 검토할만한 가치가 있다. 또한 목회자의 영향력이 서구교회보다 강하게 나타나는 한국교회에서 목회자들의 인식을 전환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에큐메니컬 운동의 활성화를 꾀할 수 있다는 지적도 매우 중요하다.

둘째로 우리는 기독교를 넘어선(beyond Christian) 에큐메니즘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에큐메니즘은 대부분 기독교인들만의, 그리고 종종 개신교회의 전유물인 것처럼 여겨져 왔다. 하지만 에큐메니컬 운동은 신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교단통합보다 더 큰 운동이다. 원래 에큐메니컬 운동의 동력과 생명력은 교단 안에서 생긴 것이 아니었다. 이 힘은 교권 밖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교회와 세계의 교차점에서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온 누리를 뜻하는 오이쿠메네라는 말 자체가 벌써 에큐메니컬 운동이 교회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에큐메니즘은 교회 교파간의 대화와 일치를 넘어서 타종파와의 대화와 협력을 지향한다. 특히 아시아의 에큐메니즘은 교회 내적 대화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깊은 종교 문화적 전통과 대화하기를 요청받아 왔다.

셋째로 우리는 우주적(cosmic) 혹은 심층(deep) 에큐메니즘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온 누리를 뜻하는 오이쿠메네는 또한 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 집은 인간만이 사는 집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생명이 함께 살고 있는 집이다. 그 집은 창조세계라는 큰 집이다. 그런데 지금 이 집 전체가 신음하고 있다. 지금도 날마다 이 지구상에서는 100종의 생명체가 멸종하고 있으며, 2만 헥타르의 땅이 사막으로 변하고 있고, 86백만 톤의 기름진 땅들이 침식되고 있으며, 1억 톤의 이산화질소가 내뿜어지고 있다. 인류가 멸종과 자기파멸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생태학자들의 경고는 일부러 겁주기는 아닌 것 같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6:2에서, “너희는, 저녁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내일은 날씨가 맑겠구나하고,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궃겠구나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고 질타하셨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하늘의 징조곧 날씨가 시대의 징조가 되어버렸다. 지금 한반도가 아열대 국가가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하나님 지으신 창조세계를 등한시 하고 초자연적인 것에만 관심하는 경향이 한국교회 특히 개신교 안에 너무 강하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듣는 말씀’(성서)보는 말씀’(자연) 사이에 끊어졌던 연결을 회복하고, 하나뿐인 우리의 지구는 잠시 묵었다가는 호텔’(hotel)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함께 거하는 ’(home)임을 인식해야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세계 에큐메니컬 운동은 1961WCC 뉴델리 총회 이후 교회중심적 · 인간중심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반에 깊이 관심하는 운동으로 발전해 갔다. 성서의 신앙은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주의(God-centrism). 에큐메니컬은 그 폭에 있어서 전 지구적 관점과 그 깊이에 있어서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 있는 모든 생명에 관심하는 넓고도 깊은 개념이다. 그러므로 에큐메니즘은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생명에 화해와 정의와 치유와 평화를 가져다주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참여
 
그런데 제 아무리 에큐메니컬 이상이 좋고 훌륭하더라도 참여’(participation)가 없이는 진정한 에큐메니컬 운동이라 할 수 없다. 한국교회에서는 여성과 청년과 평신도의 참여와 발언과 역할이 매우 저조하다. 과거 에큐메니컬 운동이 교리나 직제의 일치에 관한 것으로 국한될 때 종종 그것은 신학자이며 사제이며 결정권자들이었던 남성들에 의해 지배되는 경향이 강했었다. 하지만 에큐메니컬 운동은 남성 성직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권리이자 사명이다. 지금 WCC는 여성, 청년, 평신도, 장애인, 원주민들의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그들의 선교적 사명을 발전시킬 수 있는 이론과 정책을 내놓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사실 오늘날과 같은 전문화 사회에서 교회의 대사회적 영향력은 목회자들보다 평신도의 참여를 통해서 구체화될 수 있는 내용들이 많다. 하지만 현재의 목회자 중심구조는 교회 내 엄청난 잠재력을 구조적으로 가로막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주신 다양한 탤런트들이 꽃피게 해야 한다.

한국에서 에큐메니컬 운동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특별히 에큐메니컬 2세 지도력의 재생산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필자는 27살의 젊은 나이에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의 공동의장으로 피선되어 5년을 아시아 에큐메니컬 운동을 위해 헌신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아무 것도 몰랐지만 인내와 사랑으로 기다려주고 지도해준 에큐메니컬 선배들의 노력으로 에큐메니컬 운동에 빚진 자가 되었다. 국제 에큐메니컬 기관에 청년이 배정되면 왠지 손해보는 기분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그것이 한국기독교 에큐메니컬 운동의 자산이 된다. 미래에 투자하는데 인색해서는 안 된다. 한국교회 안에 비전과 열정과 능력을 가진 젊은이들이 많이 있다. 그들이 에큐메니컬 운동에 헌신할 수 있는 신학적 소양자기 분야의 전문성그리고 해외 교회와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체계적으로 키워주는 의지와 프로그램이 매우 중요하다.
 
WCC 총회를 앞두고
세계교회협의회(WCC) 10차 총회가 드디어 올해 1030~118일까지 열흘 동안 부산 벡스코에서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God of Life, lead us to Justice and Peace)라는 주제로 열린다. WCC20101월 현재 세계 140개국 349개 개신교회와 정교회가 회원으로 가입해 있는 세계 최대 기독교 연합기구다. 여기에 속한 그리스도인 수는 약 58천 만 명에 달한다. 로마가톨릭교회는 WCC의 정식회원으로 가입하지는 않았으나, WCC의 한 주요 흐름인 신앙과 직제’(Faith & Order) 위원회에 정식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WCC는 세계 기독교를 망라하는 기독교의 유엔이라 말할 수 있다.
WCC 총회는 7년 혹은 8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WCC의 최고 의사결정 구조로서 다양한 전통을 가진 전 세계의 교회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공동의 선교적 사명을 분별하며 공동의 증언과 봉사의 과제를 설정하는, 전 세계 기독교의 신앙 축제라고 말할 수 있다. WCC 역대 총회의 일시와 장소 및 주제는 다음과 같다.
 
11948년 네델란드 암스텔담 인간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계획
Man's Disorder and God's Design

21954년 미국 에반스톤 그리스도 - 세상의 소망
Christ - the Hope of the World

31961년 인도 뉴델리 예수 그리스도 - 세상의 빛
Jesus Christ - the Light of the World

41968년 스웨덴 웁살라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Behold, I make all things new

51975년 케냐 나이로비 예수 그리스도는 자유하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신다
Jesus Christ Frees and Unites

61983년 캐나다 밴쿠버 예수 그리스도 - 세상의 생명
Jesus Christ - the Life of the World

71991년 호주 캔버라 오소서 성령이여,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
Come, Holy Spirit - Renew the Whole Creation

81998년 짐바브웨 하라레 하나님께 돌아가서 소망 중에 기뻐하자
Turn to God - Rejoice in Hope

92006년 브라질 포르토 알레그레 하나님, 당신의 은혜로 세상을 변화시키소서
God, in your grace, transform the world

102013년 한국 부산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God of Life, lead us to Justice and Peace
 
총회가 진행되는 동안 공식 총대들의 회의 이외에도 현 세계의 다양한 이슈를 토론하는 장외프로그램이 함께 펼쳐진다. WCC 총회는 전통적으로 총회를 개최하는 국가의 문화 속에서 대중과 함께 하는 소통의 공간을 운영한다. 예를 들어, 8차 총회가 열렸던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는 파다레’(Padare), 9차 총회가 열렸던 브라질의 포르토 알레그레에서는 무치롱’(Muchirao)등이 그것이다. 한국에서는 마당’(Madang)이 준비되고 있다. 방문자를 위한 프로그램도 마련되고 있다. WCC 총회의 예배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고, 미리 등록하면 공식 총대만 참여하는 회의를 제외한 모든 회의를 방청할 수 있다. 그리고 본총회 전에는 여성대회, 청년대회, 원주민대회, 장애인대회와 같은 총회사전 행사(Pre-Council Events)도 열린다. 또한 총회를 초청하는 지역교회와의 교제를 위해서 총회 전후 현장견학 프로그램과 총회 기간 중 주일에 총대가 흩어져 개 교회의 예배에 참여하는 기회도 가진다.
이번 부산총회의 주제로 결정된 "God of Life, lead us to Justice and Peace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는 지난 20112월 제네바에서 열린 WCC 중앙위원회에서 "In God's World, Called to be One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 하나로 부르심 받다)"는 또 다른 주제 제안과 경합하며 최종 선정된 것이다. WCC 역사상 처음으로 정의’(justice)’평화’(peace)가 총회 주제어가 되었다. ‘생명’(life)이 주제어가 된 적은 한번 있었지만(6차 밴쿠버 총회), 그리고 정의 · 평화 · 창조(Justice, Peace, Creation, JPC)’1990년 서울대회 이후 꾸준히 다뤄져오긴 했지만, 이렇게 정의와 평화가 전체 총회의 주제어로 떠오르기는 처음이다.

그런데 정의라는 말에 불편함을 느끼는 그리스도인들이 의외로 많이 있음을 필자는 발견했다. 정의가 칼 마르크스의 창작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관통해 흐르는 대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정의는 구약성서와 유대교 전통의 핵심의 하나이고, 동시에 신약성서와 기독교 전통에서도 중심적인 주제이다. 세상의 통치자들과 권력자들”(골로새서 2:15, 에베소서 3:10)은 가급적 정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상황을 정의와 불의로 설명하기 보다는, 더 낫고 더 못한 것으로, 착한 행위와 나쁜 행위로 설명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성서는 분명히 말한다. 야훼께서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가 6:8)이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이 야훼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예레미야 22:15-16) 그래서 이스라엘은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어야 한다.(시편 82:3) 정의는 평화나 생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안에 있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춘다.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는 하늘에서 굽어본다.”(시편 85:10) 성서는 정의의 열매가 평화요, 정의의 결과가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고 힘주어 말한다.(이사야 32:17) 풍성한 생명도 정의가 올바로 세워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 “정의에 굳게 서는 사람은 생명에 이른다.”(잠언 11:19)

신약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반대하는 적대자들을 향하여,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마태복음 23:23)고 비판하신다. 그리고 산상수훈에서는 정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마태복음 5:6)이며, “정의를 위하여 박해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마태복음 5:10)이라고 축복하신다. 그러면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정의를 구하라”(마태복음 6:33)고 강조하신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하나님)의 나라와 그(하나님)의 정의는 동일한 것이었으며 모든 것 중에서 최우선적인 것(priority)이었다. 이렇듯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정의는 단순한 미덕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주어진 신적 명령(divine imperative)이자 도전이었다. 그것은 오늘도 계속해서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고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정의는 구약의 메시지이고, 신약은 그것을 사랑이라는 메시지로 대체했다고 생각한다. ‘구약=정의, 신약=사랑이라는 이분법적 등식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의는 언제나 사랑보다 못한, 무언가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기독교가 정의가 아니라 사랑, 그것도 정의에 눈먼 사랑으로 정의된 아가페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로 신약성서에서 정의를 탈색(脫色)시키려는 노력은 기독교 역사에서 아주 오래된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 정의론 연구의 권위자인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는 이렇게 신약성서를 탈()정의화시키는 것은 신약을 구약의 연속이 아니라 구약의 거부로 보는 커다란 해석학적 오류임을 지적한다. 그는 신약성서도 정의에 관한 책임을 강조한다. 신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냐 정의냐’(God or justice)가 아니라 하나님과 또한 정의’(God and justice)를 가르친다고 강조한다. 이스라엘의 종교는 명상의 종교가 아니라 구원의 종교다. 그것은 이 지상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이 지상의 불의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는 종교인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인간이 말하는 정의와 다르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 야훼의 말씀이시다.”(이사야 55:8) 하지만 우리는 이 핵심을 종종 놓친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의 정의의 반대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의 말처럼,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반대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인간의 불의다.”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의 말처럼 하나님의 정의는 인간의 정의를 심판하시는 정의인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정의와 사랑의 잘못된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한다. 신약의 사랑이 구약의 정의를 대체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아가 사랑과 정의를 두 다른 것으로 전제하고 둘의 변증법적 통합을 시도하는 신학적 방법론 역시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정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하나님의 연민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분노하시는데, 그 이유는 그가 정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이사야 61:8a)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정의론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한 단서를 발견한다. 그것은 가난한 자, 약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compassion, 연민)이 바로 하나님의 정의의 시작이자 끝일뿐만 아니라 그 중심이라는 사실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다. 당신은 하나님을 선()이라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이름은 불쌍히 여기심(compassion, 연민)이다.” 실로 불쌍히 여김, 혹은 연민을 뜻하는 히브리어 라하민’(rahamin)은 성서에서 하나님의 한 속성으로 이해되었다. ‘자비로운’(compassionate)을 뜻하는 라훔’(rahum)은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에게 돌려진 히브리어 형용사이다. 그래서 에크하르트는 연민이 곧 정의라고 간략히 정리해 말하는 것이다. 자비와 정의는 둘이 아니다. 그 둘은 하나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정의가 있다. 사회적 정의(social justice), 형사상 정의(criminal justice),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 보복적 정의(retributive justice), 경제적 정의(economic justice), 정치적 정의(political justice), 도덕적 정의(moral justice), 그리고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 , 우리는 날마다 수많은 정의에 대해 말하고 듣는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정의를 이야기해야 한다. 즉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기에 불의와 강탈을 미워하며 분노하는 신적 정의, ‘연민에 기초한 정의를 이야기해야 한다. 이 정의는 다른 모든 정의를 포괄하며, 다른 모든 정의와 다르며, 또한 다른 모든 정의 위에 있는 정의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과 정의의 잘못된 이분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정의를 바로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정의가 다스리는 참 생명과 평화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룩하고 확장하는 데 올바로 헌신할 수 있을 것이다.
 
패러다임의 전환
 
이제 WCC 부산총회가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왜 WCC가 시리아가 아니라 한국(부산)을 차기 총회 개최지로 선정했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번 10차 총회의 실무총책을 맡고 있는 WCC의 한 책임자는 이번 총회 개최지를 결정할 때 무엇이 한국교회로부터 받은 가장 큰 인상이었는지 필자에게 일러준 적이 있다. 그에 의하면 그것은 한마디로 한국교회의 초대장 안에서 느낄 수 있었던 강한 협력의 느낌’(strong sense of togetherness)이다. 한국교회가 제9차 총회 유치를 위해 보냈던 초청장과 제10차 총회 유치를 위해 보낸 초청장을 비교해보면 큰 차이가 난다. 10차 총회 초청장에는 WCC 회원교회를 넘어 많은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서명이 추가되었다. 거기에 중국교회와 일본교회의 지지도 크게 작용했다. 한마디로 WCC는 한국의 다음과 같은 매우 독특한 상황과 잠재성에 끌린 것이다. 아시아 국가이면서 인구의 4분의 1이 기독교인이고, 가장 높은 개신교 비율을 자랑하면서, 종교간 평화를 이루고 있고 (유혈충돌이 없고), 가톨릭과 복음주의자들과 오순절교회와 에큐메니컬과 정교회가 협력하는, 그래서 ‘21세기 에큐메니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잠재력으로 가진 나라라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후인 2050년이 되면 전 세계 30억 명의 기독교인 가운데 50% 이상은 아프리카에, 그 다음 남미와 카리브 해에, 그 다음은 아시아에, 그리고 유럽에, 마지막으로 북미에 살고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것은 세계교회의 거대한 지형변화다.세계기독교백과사전(데이비드 바레트)에서 가져온 아래의 통계는 출현하고 있는 기독교의 새로운 경향을 잘 보여준다.
 
199020억 기독교인들
1
유럽
56000만 명
2
라틴아메리카/캐리비안
48000만 명
3
아프리카
36000만 명
4
아시아
31300만 명
5
북 아메리카
26000만 명

 
202526억 기독교인들
1
라틴아메리카/캐리비안
64000만 명
2
아프리카
63300만 명
3
유럽
55500만 명
4
아시아
46000만 명


205030억 기독교인들 가운데 가장 다수는 아프리카에 있게 될 것이고 그 뒤를 어어 남미/캐리비언, 아시아, 유럽, 북미의 순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지형변화 속에서 그동안 전통적으로 에큐메니즘에 참여해 온 기성 교회들은 오순절 운동과 복음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교회들과 만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교회 간 협력과 일치에 있어서 새로운 개념과 틀 그리고 접근방법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WCC 안에서는 지금 이제까지 WCC 안에서 누려온 교회 간의 친교를 로마가톨릭과 오순절교회 그리고 복음주의교회로 넓히려고 노력 중이다. 2013년 부산총회에서는 이와 같은 에큐메니컬 운동 새 판 짜기가 계속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이 ‘21세기 에큐메니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향한 커다란 잠재력을 가진 나라로 높이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의 에큐메니컬과 에반젤리컬, 오순절과 정교회, 그리고 가능하다면 가톨릭이 어떻게 함께 WCC 총회를 계기로 서로 협력하고 이웃종교와 대화하며 위기의 세상 앞에 복음을 증거하고 함께 기독교적 봉사의 삶을 살 것인가가 바로 21세기 세계 에큐메니컬 운동의 미래인 셈이다. 세계교회 지형변화의 축소판으로서의 한국교회는 세계교회 앞에 새로운 에큐메니컬운동의 정신과 방법 그리고 모형을 보여줄 것이 기대되고 있다. 우리는 단지 하나의 행사(event)로서의 WCC 총회가 아니라 지속적인 에큐메니컬 삶(life)의 한 표현으로서 WCC 총회가 되도록 대화와 협력과 자기비움과 일치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 일각에서는 WCC 총회 유치를 반대하는 흐름이 일어나고 있다. 사실 한국교회는 1959년에 WCC 가입문제를 놓고 교회가 분열되는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는 교회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부정적으로 WCC를 보는 입장은 한 일간지에 실렸던 어떤 교단 총회장의 담화문에 잘 나타나 있다. 거기에서 그는 “WCC와 함께 할 수 없고 일치될 수 없는이유를 19가지나 나열했는데, 비슷한 것끼리 묶으면 WCC 회원에 공산권 교회들이 대거 가입되어 있다는 점, WCC가 제3세계의 혁명이나 폭력 활동을 지원한다는 점, 가톨릭을 포함한 타종교에 관용적이고 종교 다원주의를 인정한다는 점, 성경무오설과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등의 교리를 믿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복음의 토착화에 관용적이고 동성애자 교회 등을 인정한다는 점들이었다.

그런데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이 지구상에는 더 이상 공산권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WCC의 회원 교회 가운데 동방 정교회가 가장 큰 회원 교회이긴 하지만 이 교회는 더 이상 공산권에 존재하는 교회가 아니다. 현재 WCC의 회원 가운데는 장로교(28%), 루터교(16%), 감리교(11%)를 포함해 개신교회들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한국에 언더우드 선교사를 보내 이 땅에 장로교회가 있게 한 미장로교회(PC-USA)도 현재 WCC의 정식 회원 교회다. 우리는 설사 UN에 공산국가가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 가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소극적 태도이기 때문이다. 현재 WCC에는 공산권 교회들이 대거가입되어 있지도 않을뿐더러, 하나의 지구촌이 되어가는 21세기 세계화 시대에 교회가 아직도 과거 동서냉전의 논리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은 교회의 미래와 선교를 위해서도 대단히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WCC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지만 그 핵심은 대화’(dialogue). WCC는 서로 다른 배경과 역사와 교리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만나 그동안의 다툼과 분열과 상쟁의 역사를 회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가려는 대화의 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만의 주가 아니라 세상의 주가 되신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에베소 4:6) 계신다. 따라서 WCC의 대화는 교회 안에 국한되지 않고 타종교로, 인류 공동체 전체로, 그리고 모든 창조의 세계로 확장되어 나갔던 것이다. WCC와 에큐메니컬 운동은 분명 빈곤과 인권과 정의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사회참여의 신학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정치적 해방으로 축소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그리스도의 구원은 결코 개인의 사후 영혼 구원으로 축소될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이 세상(cosmos)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요한복음 3:16)고 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은 이 인간의 영혼만이 아니라 이 세상, 즉 온 우주(cosmos). 하나님의 사랑은 우주적 사랑이고 그의 사랑은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 그리스도는 교회만의 머리가 아니라 온 세상의 주권자가 되신다. 그렇기에 그가 다스리는 이 세상이 불의와 폭력과 생명파괴로 얼룩질 수 있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는 것이다. WCC가 해 온 교회의 공적 증언’(public witness)은 바로 이와 같은 신앙의 표현이다. 같은 교회가 이것을 세상 권세자의 눈으로 불온시하는 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다.

수세기 동안 각 종교 전통들은 서로 고립되어 있었다. 여러 종교가 한 지역에 공존하고 있을 때에도 그들은 서로 정신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화의 시대는 각 종교 공동체들이 상호 고립을 깨고 새로운 관계를 맺을 것을 촉구해 왔고, 그 결과 지난 30여 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활발한 종교 간의 대화가 진행되었다. 물론 종교 혼합주의에 대한 우려와 종교간 대화가 선교의 절박함을 약화시킨다는 우려가 있었지만, WCC가 종교간 대화를 꾸준하게 이끌어온 이유는 오늘날 이 세상에 기독교적 대답만 요구하는 기독교적 문제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경제적 불평등, 전쟁과 테러리즘, 인종차별과 성차별,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에 대한 대규모 파괴 등, 오늘날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 가운데 오직 기독교인들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하나도 없다. 모든 종교 공동체가, 나아가 전 인류 공동체가 초당적으로 함께 대화하고 협력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하나도 없다. 그런데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다름을 존중하는 것이고,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태도다. 오늘날 많은 타종교인들과 일반인들이 한국 교회의 선교를 공격적이라고 말한다. 물론 선교는 세상의 권세에 대한 위협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마저 교회의 선교를 위협으로 느낀다면 우리는 그것의 목적과 목표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위협이 아니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우리의 메시지를 나눌 수 있는 방법이 모색되어야 한다. 그래야 더 선교가 잘 될 것이다.

최근 WCC개종전도를 반대한다고 소동이 있었다. 언제나 무지(無知)가 화근이다. WCC개종’(conversion)을 반대한 적이 없다. 개종이 아니라 개종강요’(proselytism)을 반대한다. WCC의 공식문서를 인용하면, 개종강요란 어떤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기독교적 증거를 신뢰하지 않는 방법과 수단을 사용하여 타인의 교회(혹은 교단)를 바꾸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이는 겉으로는 열정적 선교행위로 보이지만 사실은 진정한 전도에 대한 배신행위이고 나아가 복음을 위태롭게 만드는 역증거(counter-witness)”일 뿐이다. 다른 말로 개종강요는 자유시장의 극심한 경쟁 속에서 선교를 통해 새로운 고객을 끌어들이려는 행위이며, 한 마디로 양 도둑질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개종강요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 WCC는 그것이 공동의 증언이요 협력 선교라고 말한다. 개종강요의 포기는 결코 전도의 포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과 다른 기독교 전통을 물려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자기 교회로 끌어들이려는 유혹을 포기하고, 이미 존재하는 지역교회와 협력하면서,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WCC, 그동안 일부 보수교회가 꾸준히 제기한 의심과 달리, 이 세상에 지역교회를 세우고 확장하는 일에 반대하지 않는다. WCC의 공식문서를 보면, 오히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세포가 될 수 있도록 이 세계 모든 곳에 교회를 세우는 것은 복음전파를 위해 필수적인 일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다른 문화 속에 교회를 심는 일에는 반드시 복음의 토착화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와 태도를 요구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말씀이 육신이 된 것처럼, “복음의 토착화는 성육신의 신비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며,” 그것은 그 자체로 기독교 선교를 묘사하는 또 다른 방법이기 때문이다. WCC는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선교가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오히려 전 세계를 향한 복음의 선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긴급한 사명이라고 못 박는다. 하지만 이 사명은 십자군에 참여하는 공격적인 영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성령 안에서 수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다른 종교와 이념을 가진 사람들을 향한 대화적 접근은 기독교 선교와 모순되지 않는다고 본다. 오히려 타종교와의 겸손한 대화는 모든 인간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고 사람들 사이에 종의 모습으로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다. 한마디로 교회는 예수의 방법대로 선교하도록 부름 받았다.”

WCC가 선교와 전도를 둘러싼 모든 논쟁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예수께서는 결코 제국주의적 십자군 정신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으셨다. 우리가 전할 복음을 우리의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복음을 배반하는 일이다. 사랑의 힘이 복음을 전하는 모든 태도를 압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자신의 방식하나님의 방식인 양 착각한다. 교회는 종종 예수의 방법이 아니라 인간의 방법을 신뢰한다. 하지만 우리는 내 방법이 선이라고 우기지 말아야 한다. 내 방식이 사랑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가복음 14:36)라고 기도하시며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 그 사랑의 방법으로 우리는 선교해야 한다. 이것이 WCC의 주장이다. 왜 그것을 반대하는지 모르겠다.
 
나아가며
 
이제 한국기독교는 경쟁적이고 개교회적인 양적 팽창의 시대를 끝내고 질적인 성숙과 내실화를 도모할 때를 맞이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처한 절대 절명의 위기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팽창과 성장과 경쟁의 모델이 한국교회가 나아갈 모델이 아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이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했지만 가장 빨리 노화 혹은 퇴화할 것으로 진단받고 있는 한국개신교회는 이제 질적인 성숙과 내실화라는 패러다임의 전환’(paradigm shift)을 통해 새 길을 모색해야 한다. 바로 이 질적인 성숙과 내실화의 관건이 에큐메니컬 정신이고 운동이다. 그것은 21세기 한국기독교를 살리고 재도약하게 만드는 발판이 될 것이다.

2013WCC 총회의 한국 유치는 바로 그런 패러다임 전환을 향한 하나님의 초대라고 믿는다. 한국교회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주셨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이런 복된 초대 앞에 과거의 오해와 편견과 상처와 아집을 다 털어버리고 인간의 지혜보다 높으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아직 한국기독교가 가보지 못한 새로운 길을 믿음으로 달려가야 한다. 그 길은 에큐메니컬로 뻗은 길이다. 그 길은 광야와 같이 거친 길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광야가 못이 되게 하며 마른 땅이 샘 근원이 되게 할 것”(이사야 41:18)이다.
 
Copyright 장윤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