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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12일 목요일

변조은_죤 브라운 - 그의 삶과 생각

변조은_죤 브라운 그의 삶과 생각


홍길복 (시드니신학대 교수)


1.     들어가는 말

   한국 이름으로는 변조은, 출생지를 따른 영어 이름은 John Percival Brown, 그는 금년 9 24일로 80회 생신을 맞이하게 된다.
이 분은 1970년 장로회 신학대학에서 나에게 히브리어와 구약 신학을 가르쳐준 선생님이시다. 이 후 1980년에는 나를 호주로 초청하여 지난 33년간 호주 교회와 한국인 이민교회, 그리고 나그네와 행인 같은 이 디아스포라 사회와 역사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 세상과 교회, 목회와 신학, 그리고 인생과 죽음에 대하여 생각을 함께 나누어 온 스승이요, 선배요, 또한 친구이다. 신학생 시절부터 치자면 40여 년이 훨씬 지나 그의 인생 80에서 절반도 더 되는 긴 시간을 그와 함께 해 온 나는 진심으로 그의 생신을 축하하며, 변목사님의 인생길에 그와 함께 동행해 온 것을 크게 기뻐하고 감사한다.

변목사님은 나에게 있어서 신학하는 길을 가르쳐 준 선생님이요, 목회자의 길을 지도해 주신 선배요, 또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신 스승이요, 이 땅 호주에서 복합문화 사회를 경험하며 함께 인생길을 걸어온 친구이다.

     2.     출생과 성장

변조은의 조상은 본래 영국 스코트랜드 사람이었으나 1800년대 중반에 호주로 이민을 왔다그의 할아버지는 호주가 죄수들의 유형지로만 알려져 왔던 시절을 지나 호주에 골드 러쉬(Gold Rush)가 불어닥칠 즈음에 자유이주자로써 호주로 건너왔다. 그들은 남부호주 (South Australia) 의 동부 지역에 자리를 잡고 농사와 목축을 하면서 삶의 터전을 넓혀갔다. 그러나 초기 이민자요, 동시에 개척자로써 농토를 일구어가며 목초지를 만들어가는 하루하루의 삶은 몹시 힘들었으며 아주 많이 가난했다변조은은 19339 24, 그곳의 한 작은 시골 마을인 마운틴 갬비아 (Mt. Gambier)에서 팔 남매 가운데 다섯째로 태어났다. 죤의 가문은 이미 영국에서부터 경건한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었으며 그는 태어 날 때부터 깊은 신앙적 분위기 가운데서 낳고 자라났다.

다른 한편 할아버지 때부터 농업과 목축을 가업으로 해온 죤의 어린 시절을 한마디로 하자면 가난한 삶이었다. 공부하는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그 많은 자녀들이 먹고 입고 생활하는 것 자체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아무리 많은 빵을 화덕에서 구워내도 몇 일이 못 갔다. 죤을 비롯하여 자라나는 아이들은 먹성이 너무나도 좋았다. 그래서 그런지 변목사님은 지금도  무엇이나 참 잘 잡수신다. 한국음식 뿐만이 아니라 어느 나라 음식이든 가리는 것이 전혀 없다. 그는 자신이 어릴 때 가난하게 살았던 삶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인간을 이해하고 선교사로써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은총이라고 말하곤 했다. 변목사는 우리가 함께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 때도 심지어는 손가락에 뭍은 쨈이나 버터 까지도 다 빨아먹는다. 어떤 때는 좀 챙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런 몸에 배인 근검, 절약과 인간적인 모습은 늘 우리 마음에 신선한 감동을 준다. 언젠가 변목사님은 나한테 이런 말을 했다

그 시절 우리는 1년에 꼭 한 차례, 어머니가 레몬네이드나 코카콜라를 나누어 주셨는데 그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 전 날 저녁이었어요뿐만이 아니다. 변목사님은 다 헤어져서 이젠 버려야 할 것 같은 옷도 잘만 입고 다니신다. 체면이나 겉치레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는다. 그 분의 떨어진 양복, 헤어진 와이샤츠, 구멍난 양말, 십여 년도 넘게 쓰고 있는 넥타이와 지갑을 볼 때마다 나는 숙연해지며 마음 속 깊이 존경을 드리게 된다. 사실 변목사님에게서 뭍어나는 이런 체질적 검소함 때문에 우리는 인간과 인간이 내적으로 친밀해 질 수 있는 생활 감정의 동질성을 발견하게 된다.

초등 학교에 들어 갈 무렵 소년 변조은의 아버지는 식구들을 이끌고 빅토리아 (Victoria)주의 넬슨 (Nelson) 이라는 마을로 이사를 했다. 넬슨은 해변가에 있었지만 어촌이 아니라 농촌이었고 브라운 가문은 여기에서 또 다시 새로운 목초지와 농토를 개간 하게 되었다. 같은 나라에서의 이사이긴 했지만 이 또한 제2의 이민 이라고 해야 할 만큼 멀고 험하고 고달픈 길이었다.

이 곳에서 죤은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러나 어느 나라의 농촌에서나 마찬가지로 죤네 가정 역시 늘 일 손이 딸렸다. 죤은 항상 공부하면서 일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젖소들에게 여물을 먹이고 우유를 짜고 한바탕 아침 일을 마친 후에야 학교에 갔다. 하학 후에도 그는 아무리 해도 끝이 없는 농사 일을 거둘 수 밖에 없었다. “목초지를 개간 할 때 어느 해엔 제가 뱀을 삼십여 마리나 잡았을 때도 있었습니다고생스러웠던 옛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변목사님이 하신 이야기이다. 아마도 변조은목사의 타고난 근면성은 이때부터 형성 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오래 전에 나는 변목사님과 같이 한 두어 주간 해외 여행을 한적이 있었는데 그 때 우리는 한 호텔에서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그 때 나는 변목사님에 대하여 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 두 가지를 알게 되었다. 첫째로 변목사님은 참 부지런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과 둘째로 이 분은 참 경건한 신앙인 이구나 하는 것 이었다. 그는 새벽기도회가 없는 호주 교회에서 낳고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새벽 4시만 되면 어김없이 혼자 자리에서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한 후 퍽 긴 시간 기도하는 것이 생활화 되어 있었다. 어릴 때 넬슨에서의 소년 시절이 그에게 준 은혜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총 인구가 약 80여명 정도 되던 시골 마을 넬슨에도 예배당이 하나 있긴 했지만 목사님 한 분을 모시기에는 너무나 작은 교회이어서 한 달에 한번 정도만 목사님이 오셔서 예배를 인도했다. 허지만 소년 변조은은 목사님이 오시는 주일은 물론이고 그렇지 않을 때에도 주일이면 늘 교회에 나가서 혼자라도 말씀을 읽고 기도를 드렸다. 이는 그의 부모님들에게서 받은 영향이었는데 특히 그의 어머니의 깊은 신앙심과 영적 감화력이 그에게 크게 아로새겨졌다.

3.     부르심

초등학교 밖에 없는 넬슨 마을을 떠나 고등학교에 진학 하기 위하여 소년 변조은은 작은 아버지가 사시는 해밀턴 (Hamilton)으로 갔다. 13 살 때 였다. 십대의 나이에 부모님 곁을 떠나 객지에서 겪는 경험들은 변조은에게 인생과 신앙을 성숙하게 해 주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때부터 그는 열심히 공부에 전념했고 교회에서의 학생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즈음 흔히 그 나이의 건강한 소년들이 마음 먹듯이 죤 역시도 장차 의과 대학에 들어가서 의사가 된 다음 보다 더 가난하고 어려운 나라에 가서 선교사가 되어 불쌍한 사람들을 위하여 살겠다는 꿈을 지니게 되었다. 그런데 한 2년 후 먼저 의사부터 되리라고 했던 그의 희망이 사라지게 되었다. 의과대학에 진학 하기 위해서는 고등학교에서 반드시 수학과 물리, 화학을 공부해야만 하는데 그 곳 해밀톤 시골 고등 학교에는 화학과목을 가르칠 선생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과 과정을 제대로 마칠수가 없게되었으니 의과대학 진학은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의사에 대한 꿈을 잃어버리게 된 변조은은 해밀턴 고등학교를 마친 후 실의와 좌절감을 안고 다시 아버지가 계신 넬슨으로 돌아왔다. 그는 낙심 가운데 장래 문제를 놓고 고민하면서 약 2년 정도 아버지의 농사일을 거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변조은의 마음 속에는 새로운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그는 틈이 있을 때 마다 부쉬(Bush)에 들어가 기도하고 명상하며 하나님과 더불어 대화하던 가운데 장차 목사가 되어 선교사가 되겠다는 새로운 비젼을 발견하게 되었다. 진짜 토박이 호주 사람들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변조은 목사도 호주의 부쉬를 참 좋아한다. 그것은 부쉬가 그의 육체적, 영적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는 부쉬 속에서 낳고 성장했으며, 부쉬 가운데서 배우고 생각하고 깨닫는 경험을 했다. 소년 변조은은 부쉬 가운데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법을 배웠다. 오래 전 모세가 시내산 떨기나무 불 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것 같이 변조은도 빅토리아 넬슨의 부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마침내 그는 멜본대학에 가기로 작정하고 장학생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여기서 변조은은 철학과 고대 중동어를 복수 전공하여 문학사 학위를 얻었다. 중동어 가운데서도 특히 그는 고대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전공하였다. 그가 훗 날 서울의 장로회 신학대학에서 히브리어를 가르칠 수 있게 된 것은 이때 준비 해둔 것이다. 곧 이어 그는 멜본대학교 안에 세워진 장로회 신학대학인 오몬드 칼레지(Ormond College)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신학사 학위를 받고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25살의 젊은 나이에 그는 목사가 되었다.

한편 신학도 변조은이 대학과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즈음인 1950년대 중반기 한국은 6.25후 정치,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이 계속되고 있었다. 한국전쟁에 참여하여 3백 여명이 넘는 호주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친 미지의 땅 한국에 대한 소식이 호주의 방송에서도 자주 전해지고 있었다. 피난민들과 가난, 질병과 굶주림을 비롯한 각종 사회적 비극들에 대한 뉴스들이 전파를 탓다. 지구의 어느 쪽에 있는지도 모르는 한국의 슬픈 뉴스가 전해 질 때 마다 이를 유심히 들어오던 변조은은 전에 부쉬에서 하나님께 약속한 대로 내가 공부를 마친 다음 목사가 되면 선교사가 되어 한국에 가서 일을 하리라 다짐하고 장로교 총회 선교부에 한국선교사 지원서를 보냈다. 그는 영적으로 대단히 민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이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주어진 현실의 학업 속에서 때때로 소명은 잊혀지거나 보류 될 경우도 적지 않은 법이다. 시간은 흘러 목사안수를 받은 변조은목사는 빅토리아주 번스데일(Bairnsdale)에 있는 성 앤류(St.Andrew) 장로교회로 부터 청빙을 받아 3년째 목회를 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교회에서의 목회 뿐 만이 아니라 깁슬랜드(Gippsland)와 라트로브 밸리(Latrobe Valley)를 중심한 여러 지역에서 노회청년 지도 목사로써 젊은이들을 지도하며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1957 8월엔 노마 비어(Norma Beer)와 결혼도 했고 이듬 해엔 아들 마이클(Michael)도 낳았다. 행복하고 보람있고 뜻있는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이었다. 변조은 목사는 총회 세계 선교부로 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당신이 신학교 재학 중에 한국 선교사로 지망 했던 것을 지금 이행 할 것인지 아니면 포기 할 것인지 확실히 결정 해 달라는 내용 이었다.

4.     보내시다.

내가 너희에게 말 한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의 편지를 받은 변조은 목사는 즉시 성 앤드류 교회를 사임했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변목사는 노마와 함께 선교사 훈련기관인 올 세인트 칼리지(All Saints College)에 입학하여 선교사로써의 기본적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1960 9 25일 두 살 배기 아들 마이클을 데리고 4.19 이후 혼란스런 일들이 연이어지는 우리 나라 부산 항에 도착했다. 멜본과 시드니, 브리스번과 다윈, 그리고 홍콩과 일본을 거쳐 한 달이 넘는 긴 항해 끝에 당도한 땅이었다. 28살의 청년 변조은목사가 넬슨의 부쉬에서 부르심을 받고 신학생 때 흘러나오는 방송 뉴스를 통하여 하나님과 맺었던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찿아온 것이다. 이후 그는 1972 7월 호주 장로교 총회 선교부로 부름을 받기 까지 만 12년 동안 선교사로, 목사로, 신학교의 교수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참 진실한 한국인들의 친구요, 색깔이 다른 또 하나의 한국인으로 우리들 곁에서 우리와 함께 삶을 나누어 왔다. 그의 나이 가장 젊고 활기차고 또 뜨거운 정열과 빛나는 지성과 아름다운 신앙의 기간을 그는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부산에서 하룻 밤을 지낸 다음 날 변목사와 그의 가족은 서울로 올라왔다. 그들은 미국연합장로교회 선교사였던 포만목사(K.J.Foreman)의 집에 짐을 풀었고 변목사는 곧 연세대학교 한국어 학당에 입학하여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후 만 2년 동안 그는 이 학당과 또 개인 언어 선생에게서 집중적으로 언어훈련을 받음으로 한국어 뿐만이 아니라 한국인의 정서와 생각, 한국의 역사와 문화, 한국의 전통과 풍습을 익히게 되었다.

때때로 변목사를 만나본 한국 사람들은 그의 뛰어난 한국어 구사에 크게 감탄하며 아마도 변목사님은 언어에 있어서 타고난 재질이 있는가 보다고 말한다. 그러나 변목사 자신은 이런 말을 듣게 될 때마다 매우 섭섭해 한다. 한국 말을 배우느라 고생한 그의 피 눈물 나는 노력을 인정해 주질 않는 듯 해서 그런 것이다. 실제로 지금도 가끔 변목사는 한국 말로 설교를 하거나 원고를 써야 할 경우 자주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 보다 정확한 어휘를 물어보고 확인하는 노력을 끊이지 않는다. 변목사는 때때로 웃기네” “미치겠네하는 식의 한국 말도 곧 잘 사용하곤 하는데 사실 이런 말들은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지니지 않고는 사용하기가 쉽지 않은 말들이다. 켄베라에서 살고있는 그의 아파트를 방문하면 한자로 만들어진 한국식 문패가 붙어있다. 집안에 들어가 사방을 둘러보면 온통 동양화와 병풍과 매듭들이 우리를 맞아 주어서 우리는 이 집 주인이 정말 한국 사람임을 실감하게 된다. 그는 한글 만이 아니라 한자도 천자 이상이나 알고 있어 천지신명이니 천고마비니 하는 한문자들도 곧 잘 사용한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까지 한국 말을 익히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지 그의 끈질긴 노력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처음 한국 말을 배운 후 설교 한편을 준비하여 그는 각기 다른 곳에서 48번이나 되풀이 해서 설교를 한 적이 있다고 나에게 말 한 적이 있다. 사실 과정 없이 얻어지는 결과란 없는 것이다.

변조은 목사가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12년 가운데 처음 7년은 주로 거제도와 창원, 그리고 김해지역을 중심하여 경남 지방의 농촌 교회를 돌보는 일에 헌신했다. 물론 창신학교를 비롯한 교육기관에서 가르치는 일도 일정부분은 감당했으나 경남지방의 미자립 교회를 돌아보며 목사가 없는 교회들을 찿아가 설교와 세례 그리고 성례를 집행하는 일이 큰 사역이었다. 어떤 때는 16개나 되는 교회의 담임목사(당회장)직을 맡아 순회하며 시골교회에서 일하는 전도사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을 교육하였다.  60년대의 가난한 한국 농촌 교회에서 순회 선교사로 교회를 돌보는 동안 그는 한국의 온돌방을 사랑하게 되었고 재래식 변소에 익숙해졌으며 김치와 된장국, 그리고 밥그릇 위에 수북히 올라온 밥이 그릇에 담긴 밥 보다 더 많은 한국인들의 따뜻한 사랑을 귀하게 여길 줄 알게 되었다. 보통 20, 30리 길은 걸어서 다니며 자신의 아들과 딸들을 한국학교에 보내 공부하도록 하여 시골 어린이들 틈에서 자라도록 하였다. 변목사를 대할때 마다 느끼는 것은 그는 참으로 한국인을 사랑하고 한국을 아끼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언젠가 한번은 우리 한국 목사들이 함께 자리한 곳에 변목사도 동석한 적이 있었는데 이야기 도중에 어떤 목사가 우리 이 문제는 변목사님이 가신 다음에 우리끼리 해결 합시다라고 말하자 변목사는 아주 정색을 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 나 정말 많이 섭섭합니다. 나도 한국 목사입니다

5.     신학적 반성과 방향 전환

거제도에서 교회를 돌보던 시절, 변목사는 농부들이 가축 개량 사업을 통하여 농가 수입을 높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여 호주에서 양과 염소와 돼지를 들여왔다. 1966년 한국 농촌 교회 교우들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하여 그는 호주 산 대형 흰 돼지와 샤넨 염소(Saanen goats)들을 수입했다. 그를 파송한 빅토리아 선교회가 적극 지원하였다. 기도와 눈물로 헌금하는 교우들을 생각하며 그는 선교비를 조금이라도 아껴서 한 마리의 돼지라도 더 가져오고 싶었다. 변목사는 자신이 직접 호주에 와서 성도들이 돈을 모아 사준 돼지와 염소들을 배에 싣고 자신이 친히 43일 동안이나 같은 배를 타고 가축들에게 여물을 먹여 가면서 같이 먹고 자며 부산 까지 왔다. 변목사는 그의 조수요, 동역자였던 권오성씨의 협력을 받아가면서 이들 돼지와 염소들을 분양 해주고 또 번식 시켜 나갔다.

분양된 돼지와 염소들은 새끼를 치기 시작했고 변목사는 이것이 밑거름이 되어 거제도지역의 농촌 경제를 개선하는 데 크게 보탬이 되리라는 희망에 젖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돼지를 분양 받은 한 농가를 방문했는데 돼지들이 한 마리도 없이 다 사라져 버리고 축사가 텅 비어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 이냐고 물었더니 그 농부는 이렇게 말 하는 것이었다. “ 목사님, 그 동안 농사 짓느라고 고리로 사채를 써 왔는데 어제 채권자가 와서 돼지들을 다 빼았아 갔습니다.” 변목사는 이런 과정을 경험 하면서 한국의 농촌이 지닌 구조적 문제들이 무엇인지 하나씩 깨닫게 되었다. 아직도 부자 지주들이 토지와 자본을 비롯한 일체의 모든 것을 독점 하고 있으면서 소작인들을 착취하고 있는 현실을 알아가게 되었다.  동시에 그는 없는 사람들은 영원히 그 가난을 면하기가 어려운 정부의 정책이 지닌 모순을 알게 되었다.

본래 변조은 목사는 단순한 복음주의적 열정에 이끌리어 선교사가 된 사람이었으나 1960년대 이후 한국 농촌이 지닌 구조적 악을 체험적으로 자각하게 된 이후 점점 강경한 어조로 사회정의의 실천과 구조 악에 대한 교회의 책임적 행동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는 거듭된 한국 농촌 교회 교우들의 고난을 목격하고 그들의 고통에 직접 참여하면서 교회가 해야 할 일, 선교사가 가야 할 길은 이 주어진 가난을 이겨내고 잘못된 정책을 바로잡고 제도적 악과 싸우며 병든자와 가난한자들을 돌아보며 정의로운 인간공동체를 만들어 가는데 있음을 자각하는 신학적 반성으로 연결 되었다.

간혹 변조은 목사에 대하여 오해를 갖고 있는 이들은 변목사가 지나치게 한국의 정치문제나 사회문제에 간여하며 또 신학적으로 진보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변조은 목사는 복음과 말씀에 충실한 하나님의 종이요,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예수의 제자요, 우리 한국을 참으로 좋아하는 우리들의 친구이다. 그는 군사 독재 시대 우리 조국의 민주화를 위하여 한국과 호주의 정부나 각계 사회단체는 물론 세계교회와 연대하며 온갖 힘을 기울여 왔다. 그는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 할 때는 물론, 호주로 돌아온 후에도 줄기차게 군사 독재정권의 종식과 인권의 신장과 경제적으로 정의로운 사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편지하고 설교하고 방송하고 투고하며 글을 쓰면서 온 몸을 다하여 노력해 왔다. 나는 보통의 경우 내가 우리 조국에 대하여 비판 하는 것은 당연시 하면서도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데 대해서는 언짢아 할 때가 많다. 그러나 변조은 목사가 우리나라 문제에 대하여 말 할 때는 좀처럼 화가 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변목사는 진정으로 우리나라를 자기 나라처럼 사랑하고 우리 사회를 안타까워하며 우리 나라 국민들이 잘 살게 되기를 바라는 진심이 묻어 나기 때문이다.

경상남도에서 농촌 전도자로 출발한 선교사 변목사가 사회정의를 향한 신학적 반성을 할 즈음이었다. 그는 이미 1964년 부터 간간히 마산에서부터 야간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장로회 신학대학에서 히브리어와 구약신학을 가르쳐왔는데 1969년 부터는 아예 서울로 선교지를 변경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산하 호주 선교부의 대표가 되어 총회에서 일하게 되었다. 변목사는 총회의 각종 선교사역에 협조하며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를 비롯한 여러 가지 사회선교활동에 헌신 하면서 장로회 신학대학의 전임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신학교수로써의 변조은목사는 성실하고 자상하면서도 친구 같은 선생님이었다. 특히 그의 한국어 강의는 권세열 목사와 함께 모든 학생들에게 신기 할 정도였다. 변목사는 우리들이 제출한 레포트나 시험지에 일일히 코멘트를 달고 잘못 쓴 맞춤법 까지도 교정해서 되돌려 주었다. 당시 한국인 교수들 중에는 그렇게 하는 이가 한 분도 없을 때였으니 참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한 사람의 교수가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내 나이 70이 되어 지금 호주의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학습을 평가하는 모든 기준은 이때 변목사님으로부터 물러 받은 것이다.

변목사의 구약신학 강의는 예언자적 전통과 비젼에 그 촛점이 있었다. 지금도 눈에 선한 것은 주전 6세기 이스라엘 예언자들에 대한 그의 열정적 강의이다. 아모스서를 비롯하여 호세아서와 남북왕국의 부패한 정치와 이에 대한 예언자들의 저항 정신에 대한 그의 열변이 우리들의 가슴을 뜨겁게 해 주었다. 분명히 그분의 영향이 컷을 것이다. 당시의 시대적 아픔과 더불어 변목사의 구약신학으로부터 크게 도전을 받은 우리 반에서는 남달리 민주화와 인권 그리고 사회정의와 빈민선교에 뛰어든 친구들이 많이 배출 되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지금 까지도 변목사님이 진정으로 존경스럽고 또 참으로 아름답게 인생을 살아오신 분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그의 구약신학이나 예언자 신학에 대한 강의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넬슨에서 부터 시작하여 거제도를 거쳐 시드니와 켄베라에 이르기 까지 그의 변치 않는 삶의 태도와 일관성 때문이다.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 없이 불의를 미워하고 정의를 추구하며 약한 자를 변호하며 자신은 검소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그의 일관성 있는 사람됨의 바탕이 그이를 존경 받게 해 준다. 변목사는 한국에서 뿐만이 아니라 호주에서도 총회나 교회나 에큐메니칼 기관이나 각종 NGO 를 비롯한 그 어디를 동원해서 든지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과 약자들의 편을 들어 주었다. 호주 원주민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슬픈 역사와 과거의 아픈 상처를 어루만지며 그들의 권익에 앞장서 왔다. 호주를 찿아오는 난민들을 위하여 교회가 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미치도록 주도 해 왔다. 한국인 이민자들을 비롯하여 아시아 이민자들을 위하여 동분서주 하면서 온갖 뒤치닥거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진실로 이 지구 위에 단 한 사람의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만 남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 까지도 우리 믿는 사람들과 교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변목사는 자주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는 그가 신학교에서 가르친 신학과 그 자신의 삶을 구분하지 않고 살아 온 예수의 좋은 제자이다.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흘러 지난 날 조국의 민주화와 인권과 정의로운 사회를 위하여 고난 받았던 친구들이 현실 정치에서 권력도 잡고 가진자들의 편에 편입이 되어 허무한 생각이 들 때가 참 많이 있다. 예언자 선생님은 여전히 예언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예언자를 공부한 사람들은 아합도 되고 이세벨도 되어 버렸다. 몇 일 전 우리 집을 방문한 변목사는 한국 사회가 예전 보다 좋아진 점도 있기는 하지만 오히려 교회가 더 크게 걱정이 된다고 하시면서 이런 말을 하셨다. “ 내가 참 미안 합니다. 그 때 신학교에서 좀 더 잘 가르쳐야 했는데 내가 그만 잘 못 가르쳤습니다.”

6.     호주로 돌아온 후

19727월 변조은 목사는 12년에 걸친 한국 선교사역을 마치고 호주장로교 총회 에큐메니칼 선교와 국제 관계부에서 책임자로 일하게 되어 호주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파송을 받았을 때는 배를 타고 긴 항해를 했었는데 이제는 단숨에 비행기로 돌아왔다. 가난한 농촌 교회의 전도자로, 존경 받는 신학 대학의 교수로 그리고 한 시대의 고뇌하는 지성인으로써의 역할에 대해 대구 계명대학이 수여한 명예박사학위를 받고 호주가 준비 하고 있는 에큐메니칼 시대, 새로운 사명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
1974년 변목사는 시드니에서 최초의 한인교회를 설립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했다. 당시 시드니 한인사회에는 약 30여 세대의 한인들이 살고 있었으며 때마침 월남 전쟁이 종식 되면서 월남에 가있던 많은 한국인들이 호주로 모여들었다. 이들을 중심하여 자연스럽게 한국 말로 예배와 친교를 나눌 수 있는 한인교회의 필요성이 제기 되었다.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했던 변조은 목사는 이 일을 위하여 준비된 사람이었다. 물론 이 교회는 어디까지나 한국인들이 중심이 된 최초의 한국인 이민교회였지만 변목사의 노력과 헌신적인 협조로 출발이 되었다. 변조은 목사는, 한국 땅에 있는 한국 사람이든, 호주에서 살고 있는 한국 사람이든, 그는 운명적으로 한국인들과는 결코 그 인연을 끊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시드니 시내 남서부에 있는 워터루(Waterloo)에서 시작 된 이 최초의 시드니 한인교회의 특징은 에큐메니칼 교회였다. 물론 여기에는 처음부터 교파의 구별이란 없었으며 심지어는 신구교의 장벽 까지도 허물어졌다. 개신교 목사 뿐 만이 아니라 호주에 유학차 온 천주교회의 신부들 까지도 함께하여 예배와 설교, 미사와 강론 그리고 성도의 친교를 나누었다. 교우들 역시 과거 한국에서 통합측이든 합동측이든, 고신이든 기장이든, 감리교이든 성결교이든, 순복음이든 천주교인이든, 그 어떠한 구별도 없이 모두 하나가 되어 한 예배당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성도의 교제를 이루어 갔다. 그래서 교회이름도 호주연합교회가 생기기 전부터 이미 시드니 한인 연합교회로 시작이 되었다. 이것은 지도자로써의 변조은 목사가 지닌 신학적 성격을 반영한 것이었다.

1977년 호주장로교회, 감리교회 그리고 회중교회가 통합하여 호주연합교회 (The Uniting Church in Australia)가 되기 까지 호주교회는 일치를 위한 긴 신학적 여행을 했다. 물론 그 중에는 지난 날 주님의 몸을 찢어 놓았던 분열의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에큐메니칼 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땅, 호주에서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를 초월하여 생명수 강가에서 주를 찬양하는 천국의 환상을 바라본 믿음의 선각자들이 많이 있었다. 변조은 목사도 바로 이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는 주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나가도록호주연합교회를 만들어 나가는데 일익을 감당하였다. 변목사는 스코트랜드와 웨일즈와 잉글랜드 만이 아니라 지구촌 모든 나라와 민족이 모두 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사람이었다. 호주연합교회가 형성 될 당시 한국 파송 선교사들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이 새롭게 만들어진 호주연합교회로 옮겨온 것은 변조은이라고 하는 장로교 총회 선교부 책임자의 신학적 노력이 가져다 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호주연합교회가 탄생된 후 15년 동안, 그리고 일선 책임자의 자리에서 은퇴 할 때 까지 지난 20여 년에 걸쳐 변목사는 세계선교부의 책임자로써 줄기차게 에큐메니칼 정신에 입각한 평화와 정의, 일치와 평등을 위하여 헌신했다.

한 때 그는 교회의 성장 보다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 보다 더 강조 되어야 한다는 그의 신학적 확신을 넓혀가기 위하여 호주연합교회 총회장에 입후보자로 나선적이 있었으나 당선 되지는 못했다. 허지만 그는 오히려 그가 있는 자리에서 호주연합교회는 다문화 교회” (The Uniting Church is A Multicultural Church) 라고 하는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선언문을 만들어 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 냈다. 호주연합교회 제 3차 총회가 공식적으로 채택한 이 문서는 호주연합교회 뿐만이 아니라 오늘 날 세계교회가 지향 해 나가야 할 신학적 성격과 선교의 방향을 지시해 주는 대단히 중요한 문서 가운데 하나이다. 변목사가 이후 호주연합교회 원주민 총회 (UAICC, The Uniting Aboriginal and Islander Christian Congress)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개입하고 또 은퇴 후 까지도 온 힘을 기울여 지난 날 백인들이 이 땅에서 저지른 잘못을 회개하며 참회의 날’ (The Sorry Day)을 이끌어 내도록 교회의 목소리를 모으면서 뛰어다닌 것 역시도 모두 다 그의 이런 두잉 테올로지 (Doing Theology)에 대한 성실함 때문이다.

변목사는 호주연합교회 안에서 만이 아니라 호주교회협의회 (Australian Council of Churches)의 대표와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중앙 위원과 선교와 전도위원회의 위원을 비롯한 각종 에큐메니칼 기관에서 쉬임 없이 교회를 새롭게 하고 세상을 바르게 하는 일에 정성을 다하여 일 해 왔다. 본래부터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지체이며 따라서 갈라서거나 대립 되거나 경쟁적이 되어서는 않된다는 것이 그의 신앙이며 신학이다. 분열된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도덕적 충고를 할 수 없다는 신학적 태도 위에 굳게 서서 종교개혁 후 계속되어온 우리교회의 쓰라렸던 분열의 시대를 마감하고 이제는 일치를 향하여 피차 겸손히 마음의 문을 열자는 것이었다. 변목사는 이러한 원칙 위에 서서 한 시대 호주교회의 지도자로써 맡겨진 길을 잘 걸어왔다.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은 함께 해야 합니다. 함께 할 수 없는 일만 따로 따로 해야 합니다. 함께 할 수 있는 일인 데도 불구하고 따로 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이것이 그분이 내게 자주 들려준 에큐메니칼 신학이다.

7.     나가는 말

변조은은 목사이다. 그는 예수의 뒤를 따라가는 선한 목자이다. 특히 그는 잃은 양과 울타리 밖에 있는 양들에 대하여 더 많이 마음을 쓴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을 위하여 평생 기도하며 그들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을 대변한다. 원주민들, 이민자들, 특별히 아시아 이민자들, 보트 피플들, 난민들, 가난한 사람들, 병든 이들, 버려진 사람들, 집 없는 이들, 북한 사람들과 탈북자들, 인권이 침해 당하는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인종적으로 성적으로 차별 받는 사람들, 가난과 내전과 전쟁으로 인하여 고통 당하는 사람들, 동남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제 3세계의 가난한 사람들 변목사는 이런 사람들을 편들어주고 이런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면서 이런 사람들을 섬기고 이들을 위하서 일 해 왔다. 그는 선한 일에 참 부지런한 사람이다. 그는 악과 불의에 대해서는 분노하고 선과 의에 대해서는 기뻐한다.

변조은은 신학자이다. 그는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끊임없이 말씀을 묵상한다. 그는 성서 언어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성서 해석에 있어서 남다른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본문과 상황을 연결하는데 있어 민감한 영안을 부여 받았다. 그는 끊임 없이 연구한다. 나이는 들었지만 늘 새로움을 향하여 목말라하며 새로운 학문적 세계를 향해 열린 마음을 갖는다. 그는 가르치는 것을 즐거워하며 말씀 따라 사는 것을 행복으로 여긴다. 그는 단순히 학자 만이 아니라 교육자이다. 그의 학문적 입장은 교실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는 상아탑의 학자가 아니라 교회의 학자이다.

변조은은 착한 사람이다. 그는 선한 양심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잘못은 머뭇거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한다. 그는 미안하다든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을 하나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변목사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다. 잘못된 일이나 그릇된 사람에 대해서는 금방 얼굴을 붉힌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의 기쁨과 행복에 대해서는 어린 아이 처럼 좋아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해 한다. 그는 정이 많은 목회자이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웃는 자들과 같이 우는 사람이다. 지난 날 내가 한 교회를 떠나 몹시 우울해 하고 아파 할 때 그는 나를 찿아와 아침부터 저녁 때 까지 온 종일 같이 이야기도하고 기도도하며 놀아준 적이 있다. 그는 목사들의 목사이며 적어도 나에게는 영원한 선생님이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변목사님은 또한 나의 친구이다. 해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목사님이 늘 우리 집을 방문하신다. 선생님이기 때문에 내가 찿아 뵈어야 할 것 같지만 그러치 않다. 변목사님은 정말 좋은 친구요, 그져 순수하고 맑은 사람이라는 점을 잘 보여주시는 모습이다.      

Copyright 홍길복
               

   

호주선교사 죤 브라운 - 변조은

호주선교사 죤 브라운 변조은

 

1. 들어가는 말
 
죤 브라운(John P Brown, 한국명: 변조은) 목사에게 2012년은 기념될만한 해였다. 한국장로교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예배가 있었고,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창립 100주년 행사도 진행되었는데, 해외에서 초청된 대표들 중에 호주에서 온 변조은이 그 중심에 있었다.

9월 초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열렸던 한국장로교총연합회가 주관한 백주년기념예배에 변조은은 축사를 하였고, 같은 달 소망교회에서 개최된 예장 통합 백주년 기념총회에서는 공로상을 받았는가 하면, 부산일신병원 60주년 기념예배에서는 설교를 하였다. 이 한해에만 변조은은 한국을 3번 방문하였다고 한다. 어느새 그는 한국교회의 주요 행사가 있을 때 마다 호주교회를 대표하는 대부가 되어 있었다.

이 글은 변조은의 생애와 사역을 간략하게나마 정리한 글로 앞으로 그를 연구하는 학도들에게 참고자료를 제공하려는 목적에서 쓰여 졌다. 그러나 글의 한계는 역시 변조은이 현재 정정하게 활동을 하고 계신데 이런 종류의 글을 쓴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제약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업은 호주교회의 한국선교를 연구하는 학도들에게 꼭 필요한 의미 있는 작업이다.

필자는 변조은 목사의 사역을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누었다. 1) 한국선교, 2) 호주연합교회 총회 사역, 3) 호주한인교회 목회, 4) 북한선교 그리고 5) 호주원주민 사역이 그것이다. 이글은 변조은의 이 다섯 가지 사역을 중심으로 쓰되 그 외의 공헌에 대하여도 기록할 수 있는 만큼 기록하였다.
 
2. 청년 변조은
 
변조은은 1933924일 생으로 남호주의 마운트 갬비아(Mt Gambier)의 한 농촌에서 팔 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의 증조 할아버지는 1839년 스코트랜드에서 호주로 이민하였고 변조은이 태어날 당시 부모는 가업으로 농사와 목축을 하면서 개척자의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세계 1차 대전에 참여하였고, 2차 대전시에는 호주에서 해안을 지키던 군인이었다. 어머니는 여덟 명의 자녀를 모두 키우는 생활력이 강한 부모였는데, 어린 변조은은 그러한 가정환경에서 밤낮으로 가정 일을 도우며 부지런함과 검소의 가치를 배우며 자라났다.

그는 성장하여 집을 떠나 해밀턴중고등학교에서 공부하였는데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누나가 그곳 우체국에 취직해서 자신의 작은 보수를 나누어 하숙비를 내주는 바람에 공부할 수 있었어요.” (크리스찬리뷰, 201252). 동시에 그는 교회생활도 열심이었다. 학교 내 크리스찬 서클이 있어 참여 할뿐 아니라, 교회에서는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기도 하였다. 변조은은 어머니가 기도를 가르쳐 준 것을 기억할 만큼 경건한 가정에서 자라났고, 다니던 교회 목회자의 근본주의적 성경 가르침으로 인하여 보수주의적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의대를 꿈꾸었던 변조은이지만 아버지의 병환으로 농장에서 많은 일을 해야 했고 그로인하여 대학입학 성적이 좋지 않았다. 부모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 2년 가사 일을 돕다가 멜본대학교에 입학한 변조은은 철학과 중동어 중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선택하였는데 성경을 좀 더 알기 위함도 있었고 또 언어를 좋아하기도 하였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불어 반에서 일등을 하곤 하였는데, 나중에 한국어를 구사하는 것을 보면 언어에 대한 재능이 탁월하였을 것이다.

1952년 멜본대학에 입학하였고 그 시절 중요한 전기가 변조은에게 찾아온다. 당시 멜본 언론에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뉴스와 호주군인들의 파병에 대한 내용을 많이 보도하고 있었고, 전쟁으로 인하여 파괴된 도시들과 긴 피난민 행렬 등의 사진과 기사를 접하게 된다. 또한 당시 이미 한국에 파송 받은 호주선교사 자매가 부산에 일신병원을 세우고 있었는데 그 과정을 거의 매주 장로교신문을 통하여 변조은은 접하고 있었다. 청년 변조은 마음에는 어느새 선교의 사명이 불타올랐고 1954년 빅토리아장로교 총회선교부에 한국선교사역을 지원하게 된다.

멜본대학에서 그는 또한 평생의 반려자 노마(Norma, 한국명: 노미연)를 만나게 된다. 대학교 안의 기독교학생회에 모임에서 만나 교제를 계속하다가 1957년 결혼하였다. 그들은 결혼 전에 이미 한국에 선교사로 함께 나가기로 약속하였다고 한다.

변조은은 호주장로교회의 목사후보생이 되어 신학교육을 빅토리아주장로교신학대학 (후에 오몬드칼리지)에서 신학공부를 하였다. 그는 후에 고백하기를 '그가 성장하며 배웠던 근본주의적인 신앙의 교만으로 목사가 되기 위하여 신학교에 간 것이지 본인이 이미 알고 있었던 진리에 더 이상 새롭게 배울 것이 없다'는 태도를 당시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변조은, ‘50년의 목회 후에’, 미공개자료). 그러나 다행히 그는 신학교에서 좋은 교수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중 특별히 데이비스 메카키 목사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고, 매카키는 후에 호주연합교회의 초대 총회장이 된 인물이다.

변조은은 195825살의 젊은 나이로 호주장로교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는 벤스데일(Bairnsdale), 오메오(Omeo)에서 목사로, 깁슬랜드(Gippsland)와 라트로브 벨리(Latrobe valley) 노회에서 기독교교육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때 변조은에게 호주빅토리아장로교 선교부로부터 전보 한통이 왔다. 6-7년 전 대학시절에 지원했던 한국선교를 이제 떠나겠느냐는 내용이었다.

바로 그날이 벤스데일교회에서 변조은을 담임목사로 청빙하겠다는 날이었는데, 변조은은 한국에 선교사로 나가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올세인트 미션 바이블칼리지에서 단기간 선교훈련을 이수한 변조은과 노미연 부부는 두 살 된 아들 마이클과 함께 호주를 떠나 미지의 세계 한국의 부산에 첫 발을 들여 놓게 된다. 그날이 1960925일이었고, 변조은은 막 27세가 되었다.
 
3. 한국선교와 변조은
 
호주장로교선교회는 당시 한국에 선교사를 예전과 같이 많이 파송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제하에 대부분의 선교사가 특히 신사참배를 거부한 호주선교사들은 강제로 출국되었고 그 후 해방이 되어서도 50년까지는 6, 50년대에는 13명밖에 파송되지 못하였다. 당시 호주도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경제가 어려웠고 호주장로교선교회도 선교사를 파송할 재정이 항상 부족하였다.

그러다 1960년대에 들어서 선교사 파송이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는데 경제도 나아지고 선교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변조은은 시드니 시내에 소재하는 세인트 스테판교회가 지원을 하였고, 10여 년간 계속되었다. 변조은도 선교보고서를 수시로 그 교회에 보내곤 하였는데 현재 그 편지들은 시드니의 미첼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부산에서 바로 서울로 올라 온 변조은 가정은 종로 5가에 살고 있던 한 미국선교사 사택에 거하며 선교훈련을 받은 대로 먼저 한국어와 지역 문화를 배우는데 집중하였다. 그는 약 2년 동안 연세대 어학당에서 그리고 개인교습도 받으며 평생 유용하게 사용할 한국어 기초를 습득하게 되고, 이때 한국어 이름 변조은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변조은은 예장 통합의 마산노회에서 사역을 시작한다. 변조은은 당시 어떤 이유로 호주장로교회와 관계가 깊었던 고신도 아니고 또 합동도 아닌 예장 통합에서 일을 하게 될까. 호주선교부는 일제치하에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있었고 그로인하여 한국에서 떠나도록 압력을 받아 1941년 한국에서 철수한다. 해방 후 호주선교부가 다시 한국에 돌아 왔을 때 장로교는 신사참배로 인하여 분열되고 있었고, 특히 경상남도 지역은 미국계 보수적인 장로교 선교단체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어, 이들의 근본주의적 신앙은 호주선교사들의 신학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이상규의 호주장로교회와 한국교회라는 글에 의하면 당시 교회 쇄신을 주창했던 고신의 지도자들이 해방 전의 4대 장로교 선교부의 신학과 생활에 불신하고 있었으며, 정통 장로교회만을 교류의 대상으로 고집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한국교회와 호주교회 이야기, 50).

결국 1952년 장로교는 분열되어 고신총회가 세워졌고, 1959년에는 세계교회협의회 가입문제로 합동총회가 세워져 또 한 번의 분열이 생긴다. 변조은이 소속된 호주장로교회는 세계교회협의회의 회원교단이었고, 그로인하여 그는 자연스럽게 통합총회와 공식적인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당시 내가 왔을 때는 다른 선택이 없었고, 내가 관계할 수 있는 교회는 통합측 밖에 없었다고 후에 고백하고 있다(크리스찬리뷰, 20125).

마산노회 소속으로 변조은은 7년 동안 주로 거제도, 창원, 김해, 창녕, 그리고 때로 밀양 지역까지 많은 교회들을 방문하며 당회장으로, 설교가로, 교육가로, 목회자로 돌보았다. 그가 당시 이렇게 넓은 지역을 다닐 수 있었던 이유는 호주선교부가 제공한 지프차를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어가 서툴렀던 변조은은 한국어로 억양과 악센트까지 그대로 외운 설교 한편을 가지고 45번 이상 설교하며 다녔다고 하는데, 당시 예장, 합동, 고신 등의 교회 분열을 염두에 두고 고린도전서 1장의 교회 연합에 대한 내용의 설교였다고 한다.

그는 또한 이 지역의 농부들과 함께하며 농부들의 삶의 향상을 위하여 가축개량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농부출신의 부모 밑에서 자란 그는 호주의 가축들을 자연스럽게 떠 올렸고 우유가 많이 나오고 고기가 많은 품종의 가축에 관심을 가졌다. 결국 그는 1966년도 공부휴가로 호주에 갔던 차에 호주 흰 돼지와 샤넨종 유양을 한국으로 들여오게 된다. 이 일을 위하여 빅토리아선교부의 모금과 지원이 변조은에게 큰 힘이 된 것은 물론이다.

당시 지역 언론인 깁슬랜드타임즈는 33살의 변조은 목사를 소개하며 한국의 가축개량을 위하여 9마리의 우량 염소와 5마리의 돼지를 배에 싣고 본인이 직접 6주 동안 배에서 가축들을 먹이고 치우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이 신문은 변조은이 한국 농촌의 가난함과 원시적인 농경법을 보고 이 일을 시작하였다 하며 한마리 염소가 한 가정에 많은 영양을 보충해 줄 것이다는 변조은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우성이라는 화물선에 가축들을 싣은 비용은 700불이었다는 내용까지 포함하고 있다 (Gippsland Times, 13/8/1970. 6). 멜본의 일간지 에이지(The Age) 신문도 변조은이 염소를 배에 싣는 사진을 보도하여 지금까지 흥미있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가축들과 함께 부산항에 도착한 변조은은 창원지역에 품질개량원을 운영하면서, 돼지를 먹이고 키우는 책자까지 만들 정도로 열심이었다. 또한 거제와 마산 지역의 농민들 가정에 시범적으로 염소와 돼지를 보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농촌구조는 호주돼지와 염소 몇 마리로 쉽게 개선될 수 없었다. 보급 받은 돼지를 채무로 인하여 빼앗기는 가정도 있었고, 관리를 잘못하여 죽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자신의 부모가 당시 돼지를 받아 키웠거나, 그 염소의 젖을 먹고 자랐다고 회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업은 비록 크게 성공적이지는 못하였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아직도 감동적 이야기로 남아 있다.

1964년부터 변조은은 서울의 장로회신학대학에서 히브리어와 구약학을 가르쳤다. 그가 대학시절 공부하였던 히브리어가 유용한 기초가 되었음은 물론이고, 변조은은 한국학생들을 위한 히브리어문법 책자 히브리말 배우자를 펴낼 정도였다. 마산에서 격주로 기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와 이틀간 학교에서 강의하였고, 스스로 틈을 내어 대학원 공부까지 한다. 그러다 그는 1969년에 농촌선교를 마치고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하였고 전임교수로 강의하게 된다. 신학대에서의 강의를 통해 그는 한국에 많은 제자들을 둘 수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후에 총회의 총회장이 되거나 학교, 기관, 교회 곳곳에 지도자로 섬기었다. 그 중 후에 호주에 와 목회를 하게 되는 홍길복 목사, 인명진 목사, 조성기 목사 등이 있는데 이들은 변조은 목사를 지금까지 은사로 모시고 그 예를 다하고 있다.

변조은 목사의 강의 시절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 있는데 홍길복 목사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존 브라운 교수님한테서 이사야서 41장 원서강해를 듣고 시험을 쳤습니다. 며칠 후에 답안지를 돌려받았는데 정말 믿기 어려운 사실을 목격했습니다. 한국에 온지 5년 남짓한 선교사가 학생들이 한글로 작성한 답안을 빨간 펜으로 일일이 교정해 놓았는데, 놀랍게도 학생들이 틀린 한글 맞춤법을 정확하게 지적했더라고요” (‘호주 친한파 상징 존 브라운 목사’, 윤필립).

그러나 신학대학에서 예언서를 가르쳤던 선교사 변조은은 정작 자신에게 오히려 큰 도전이 되는 사건들을 만나게 된다. 그가 가르치던 반의 학생들이 한국의 민주화와 노동운동에 참여 하면서 감옥에도 가고 학교에서 정학도 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모스의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강같이의 외침이 실제 목회현장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변조은은 보기 시작하였고, 설교하였던 복음서의 내용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예언서 강의는 점차로 깊이를 더해 갔으며, 특히 변조은 자신이 후에 약자 편에 서는 예언자적인 목회를 하는데 튼튼한 신학적 바탕이 되었다. 그의 학생 가운데 당시 민중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학생이 많았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변조은과 가깝게 지내던 당시 장신대 교수는 주선애, 박창환, 이종성, 고 김이태 등이 있다. 차가 있었던 변조은은 이들을 픽업하여 학교까지 가고는 했는데, 그 중 곽선희 목사도 있었다. 변조은은 후에 2001년 장신대 설립 백주년 기념예배 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변조은은 가르치는 일 외에도 호주선교회 대표로 일하면서 총회 임원들과 가깝게 일하였다. 그는 총회 대표들과 해외 선교사 대표들과 더불어 연합선교회라는 이름으로 정규 모임을 가져 선교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미국연합장로교회, 미국남장로교회, 호주장로교회, 카나다장로교회, 그리고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대표들과 더불어 일하며 1964년의 상호협정서 이 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한국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그리고 시대가 바뀜에 따라 선교협력의 내용도 달라졌는데 그때마다 수차례 합의된 상호협정서나 선교협정서를 통하여 그 관계와 일을 조정하여 왔다.

당시의 합의문이나 선언문등은 앞으로 좀 더 면밀한 연구가 되어야겠지만 선교사회 임무, 선교동역자들의 인사, 선교재정 및 재산, 공동선교사업의 방향, 지도자 양성 등이 문서화 되어 있다. 가장 최근인 2011년 북한공동선교를 위한 양해각서를 합의할 때까지 변조은은 주요멤버로 그 현장에 있었다 (한국교회와 호주교회 이야기, 362-403).

변조은이 보는 한국교회와의 선교관계를 다음의 글에서 엿볼 수 있다. “한국전쟁 전까지 호주에서 한국으로 일방적으로 주는 선교에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평등하고 상호 협력적인 관계의 파트너십으로 바뀐 것이다” (미션 리뷰, 1989, 45, 12). 변조은은 한국교회를 선교의 동반자로 보고 있었고 이러한 선교 이해는 앞으로도 그의 사역에 초지일관 하게 된다.

변조은은 19727월 호주로 돌아갔다. 호주장로교 총회로부터 청빙을 받았기 때문이다. 12년간의 한국사역을 마치고 돌아가는 변조은과 노미연 가정은 한국에서 낳은 앨리슨과 입양한 딸 순자와 함께 다섯 명이었다.
 
4. 호주연합교회 총회와 변조은
 
호주로 귀국한 변조은은 호주장로회선교회의 에큐메니칼 선교와 국제관계부총무로 일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일은 1977년 호주장로교회 다수가 호주연합교회로 연합할 때까지 계속 되었다변조은은 연합이 된 호주연합교회 총회의 세계선교국 총무로서 사역을 이어 갔는데 이때 그의 사역으로 인하여 한국교회와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호주장로교회에서 호주연합교회 중심으로 옮기어 졌고, 그 관계는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또한 그는 호주연합교회 구조조정 속에서도 1992년까지 총회 선교국 총무로 봉직하면서 호주연합교회의 국내와 해외 선교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가 총회에 있으면서 집행한 일중에 두드러지는 몇 가지를 언급한다면 세계선교정책 수립, 국내전도 후원, 다문화정책 수립, 원주민협의회 설립, 한인교회 후원,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한국교회와의 연대 강화였다.
호주연합교회는 19854차 총회에서 호주연합교회는 다문화교회이다선포하고 있다. 이 안은 변조은이 총무로 있던 세계선교국에서 발의되었고, 실무자였단 그의 신학과 리더십이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당시 이 안은 원주민협의회 설립 의제와 함께 통과 되었는데 변화하는 호주사회에서의 새로운 선교방향과 교회 안 소수자와 약자의 권리를 강화하는 구조적인 변혁을 가져오게 된다.

1980년대에 들어서 호주는 급속히 아시아와 남태평양의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변조은은 교회가 존재해 있는 사회가 변하고 있음을 보고 있었다. 한국인, 통가인, 일본인, 사모아인, 중국인, 피지인, 필리핀인, 인도네시아인, 베트남인, 중동인 등이 호주연합교회를 찾고 있었고, 변조은은 그들이 연합교회 안에서 소속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교회당 사용, 목회자 청빙,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모국어와 문화 형식으로 예배를 드리도록 도왔다.

뿐만 아니라 이민자 대표들이 정규적으로 모여 자신들의 목회와 어려움을 나눌 수 있도록 하였고, 그들 스스로 노회나 총회에 참여하여 그들의 의견이 반영되도록 격려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호주연합교회의 다문화목회와 신학 이해가 탄생되었고, 호주연합교회의 중요한 정체성 중 한부분이 되었. 후에 이것은 총회 안에 다문화 목회부가 생긴 것이나, 한인노회가 설립되는 놀라운 결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총회 선교부 실무자로 재직 시 변조은은 에큐메니칼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는바 1975년부터 7년 간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으로 봉사하였다. 또한 1982년부터는 선교와 전도위원회와 도시농촌 목회위원회에서 일하였는데 무려 13년 동안 재직하며 세계교회의 선교와 전도 정책 수립에도 공헌하였다. 변조은은 한때 선교와 전도위원회의 총무로 추천을 받았지만 시드니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를 막 시작한 사모 노미연 목사와 함께하기 위하여 그 제안을 고사하였다고 한다.

변조은과 호주연합교회와의 관계 중 한가지 언급할 것은 그가 1994년 시드니에서 열렸던 총회 총회장으로 출마하였던 일이다. 당시 그는 총회 총대들과 직원들에게 이미 잘 알려져 있었고 총회의 주요 의제를 주도하던 인물이어서 변조은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선거운동을 자제하면서도 총회장으로 선출될 것을 확신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의외였다. 낙선이었다. 좀 더 보수적인 후보가 선출된 것이다. 당시 연합교회는 개 교회의 전도와 성장에 관심이 많았고 그 방면 리더로 알려진 감리교 배경 인물이 당선되었는데 이는 전체교회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었다. 비록 변조은은 당시 실망하였지만 이것은 장차 그가 호주 원주민과 비원주민 사이의 화해사역을 위하여 매이지 않고, 전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변조은이 선교국 사역에서 은퇴할 때 당시 총회의 선교와 전도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감사의 말을 남기고 있다.

이 엄청나고 도전적인 사역을 위하여 변 목사님은 교회의 선교를 위하여 깊은 성찰과 희생으로 성실하고 열심을 다하였습니다. 우리는 변 목사님의 지혜와 신학적 깊이로부터 많은 유익을 얻었습니다. 그의 국제적이고 전국적인 교회 경험과, 사회와 교회에서의 다문화 경험과 은사로 인하여 비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호주연합교회의 복음적인 개혁운동 대표들과의 회의를 공유하는데 변 목사는 중요하고도 효과적인 지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변 목사님은 복음에 겸손하고 신앙적이며, 전체 교회를 위하여 깊은 관심과 자상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정의와 진리를 향한 그의 열정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순례의 도상에서 함께한 동역자 관계에 감사합니다.” (문서 B201, 총회 선교와 전도부, 19921211)
 
5. 호주 한인교회와 변조은
 
호주에 첫 한인교회는 1973년에 멜본에서, 그리고 1974년에 시드니에서 설립되었다. 그리고 이 두 교회의 창립과정에 한국에서 선교사 임기를 마치고 귀국한 호주선교사들이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이 한국에서 습득한 한국어와 한국문화 그리고 한국교회에 대한 이해가 이민교회에 큰 자산이 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그 선교사가 총회의 선교국에서 실무자로 일을 하고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변조은이 그랬다. 이 모든 조건을 다 가지고 있었고 제일 중요한 한국교회에 대한 애정도 있었으니 한인목회자들에게는 둘도 없는 후원자였다.

시드니 소재 시드니한인연합교회는 1974년 마침 한국에서 한 교단지도자의 방문을 계기로 한인지도자 몇 명이 변조은의 집에서 만나게 된다. 이때 이민생활의 외로움을 서로 위로하고 힘이 되기 위한 한인교회의 필요성을 공감한 것이 교회창립의 시작이 되었다. 첫 예배는 197498일 레드펀(Redfern)의 회중교회에 약 70명이 모였고 창립을 위한 초청장에 교회창립의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다음이 그 일부이다.

다행히 이 시드니에 우리말로 우리들의 예배를 인도해 주실 수 있는 목사님과 신부님들이 계시고, 그 분들의 희생적인 협력에 힘입어, 마침내 한인들만의 교회 모임을 갖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이 교회 모임이 끝까지 결실을 맺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 바입니다” (호주교회 이민목회 30). 변조은은 이렇게 시드니에서의 첫 한인교회 창립목사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변조은의 후원을 받아 호주로 들어 와 목회를 하거나 공부를 하게 되는 한인들도 여러 명 있는데 그 중에 한명이 인명진 목사였다. 한국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노동과 인권 운동을 하고 옥에 갇혔던 인 목사를 재정적으로 지원하였을 뿐 아니라 호주로 초청하여 재충전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사역을 호주연합교회 총회 세계선교부 잡지 미션 파트너(Mission Partners)’에 꾸준히 소개함으로 호주 내에 지원 단체들을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인 목사는 후에 시드니 소재 갈릴리교회를 개척하기도 하였다변조은의 도움으로 장학금을 받거나 후원을 받은 한인들 중 고 김이태 목사, 홍길복 목사, 조성기 목사, 채은하 목사, 지태영 목사, 양명득 목사, 장기수 목사 등이 있다.

이후에 계속 생겨나는 한인교회들을 위하여 변조은은 많은 일을 감당하게 된다. 유창한 한국어 설교, 목회자의 교단가입, 교회당 찾는 일, 호주문화 나눔, 한국 목회자 청빙과정, 한국교회와 호주교회의 분쟁 조정, 한인신학생 교육, 심지어는 통역까지 맡아서 호주한인교회의 친근한 벗이 되었다. 그는 현재까지도 목회자가 공석인 캔버라의 한 한인교회 임시 당회장을 맡아 계속 목회하고 있다.
 
6. 북한선교와 변조은
 
한국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변조은은 북한에 대하여도 깊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그러던 중 2003년 좋은 기회가 왔다. 북한의 북쪽 지역에서 사역을 하고 있던 한 한국계 미국인 목사가 어린이 사역과 빈민구제를 도와 달라는 요청을 호주연합교회에 하였다. 변조은은 그 내용을 멜본한인교회의 지도자들과 깊은 상의를 하였고 그것이 결국 북한 선교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사용하는 단어는 선교라는 용어보다 인도적인 지원이었고, 이 지원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꾸준히 진행되며 발전하여 오고 있다.

호주연합교회 총회와 멜본한인교회는 이 사역을 폭 넓게 하기 위하여 별빛재단을 설립하여 모금운동을 하며 관심 있는 여러 단체와 개인을 회원으로 받아 함께 협력하고 있다. 변조은은 별빛재단이 임명한 북방선교회의 회장으로 북한선교 지원을 맡아 수차례 중국과 북한을 방문하고 있다. 현재까지 지원되고 있는 프로젝트는 보육원, 결핵병원, 이동병원, 컴퓨터기술학교, 유치원, 간호학교 등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이 사역에 한국의 예장 통합총회가 협력하여 백여 명의 어린이를 수용할 수 있는 건물 건축을 위하여 큰 후원을 하였는데 변조은의 튼튼한 인맥으로 가능했던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최근에는 중국을 현장 답사하여 훈춘 시에 한 건물을 구입하였고, 그곳을 기지로 삼아 프로그램을 확장시키고 있다이 사역에 관한 내용을 변조은은 호주연합교회와 예장과의 북한 공동선교는 제목의 글로 남기고 있다 (호주교회와 한국교회 이야기, 350-353). 변조은은 이 사역을 지원하기 위하여 현재도 한국, 중국 그리고 북한을 오가고 있다.
 
7. 호주 원주민선교와 변조은
 
호주연합교단 안의 원주민협의회는 변조은이 총회 세계선교국 총무로 재직하던 1985년 설립되었다. 이 결정은 호주원주민교회가 대표들의 협의체를 구성하여 원주민 목회와 선교를 스스로 돌보며, 결정하며, 실행할 수 있도록 하고, 원주민대표들을 파트너로 인정하는 역사적인 내용이었다.

처음 원주민협의회가 생겼을 때에는 총회 선교부의 한 부서였고, 직원도 선교부 소속이었고, 총회에 보고서를 낼 때에도 선교국을 통하여 하고 있었다. 즉 당시 선교부 총무가 변조은이었으므로 원주민협의회가 그에게 보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주민 지도자들과 변조은의 개혁 하에 당시 총회는 주총회와 노회의 모든 권위와 책임을 원주민협의회로 위임하고 있었고, 더 나아가 원주민들이 스스로 목회자 후보생들을 훈련시키고 안수하며 재정을 운영하는 필요성이 대두되어 토론 끝에 총회의 인준을 받게 된다.
1992년에는 원주민들에 대한 이해와 호주인들 간의 화해와 계약 과정을 위하여 원주민협의회로부터 변조은은 초청받아 그 책임자로 호주전역의 주총회와 노회들을 방문하게 된다. 한 백인이 원주민들로부터 이러한 위임을 받은 것을 보면 변조은에 대한 원주민들의 신뢰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것은 전국의 교회들이 그들이 처한 지역의 원주민들과 교제하며 화해의 과정을 이루도록 하는 선구자적인 프로그램이었다. 호주정부도 1993년에 가서야 이 방법을 따라 사회 각 단체들이 원주민들과 관계를 맺도록 실행하였는데 변조은은 교회간의 화해과정을 주도하였다또한 1994년에는 총회의 총회장이 과거 학살과 차별 역사에 대하여 원주민들에게 공식 사과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사과의 전문 초안을 원주민 지도자들과 상의하여 변조은이 작성을 하였다.

1995년에는 호주정부의 과거 원주민자녀 입양정책으로 인하여 생긴 많은 차별과 고통을 조사하도록 진상위원회를 임명하였다. 이 위원회는 후에 매년 국가적으로 참회의 날’(Sorry Day)을 제정하도록 제안한다. 이 날은 원주민들에게 저질러진 여러 차별을 참회하고, 모든 호주인들이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알도록 하는 목적을 가지고 현재까지 지켜지고 있다. 이러한 호주 역사를 호주인들이 이해하도록 전국위원회가 세워졌는데 변조은은 한 원주민 지도자와 함께 8년 동안 공동회장을 맡아 공헌하였다.

변조은은 2000년 총회 사역을 은퇴하였지만, 원주민들과의 화해와 계약관계를 맺는 총회 프로그램의 코디네이터로 계속 활동하게 된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지역 교회나 신앙 그룹들이 그 지역의 원주민들과 화해하고 계약을 맺어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며, 서로 존중하여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 바닥운동이었다.

변조은은 현재도 마일크릭(Myall Creek)을 매년 방문하고 있는데, 이곳은 1838년 백인들에 의하여 원주민 학살이 자행되었던 대표적인 곳이다. 1999년 원주민들과 비원주민들이 그곳 공동체를 중심으로 위원회를 구성하여 매년 6월 둘째 주 그 현장에 모인다. 이 행사에서 그들은 학살에 대한 반성과 원주민과의 화해, 그리고 좀 더 공평한 호주사회를 위하여 결단한다. 변조은은 이 위원회를 원주민 장로와 함께 지난 15년 동안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다.
변조은은 호주사회 속에서의 이러한 공헌을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아 1993호주 훈장(Order of Australia)를 받았고, 건국 백주년 기념 해에는 원주민과의 화해를 위한 봉사로 건국백주년 메달(Centenary Medal)을 받았다.

당시 호주 훈장을 추천한 사람 중에 호주연합교회 증경 총회장 로날드 윌슨 판사는 변조은을 이렇게 정부에 소개하고 있다.

그동안 내가 알아 온 변 박사님은 호주와 호주 밖 세상에서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그리고 소외된 자들을 위하여 지치지 않고, 용감하며, 겸손하고, 희생적인 분 이었습니다. (중략) 그때 변 박사님은 원주민들을 위하여 그의 지도력과 협력의 은사로 사역하였으며, 그 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 국가와 교회에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그의 총회 사역은 또한 세계교회들과의 관계를 맺고 지속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변 박사님이 국제적으로 에큐메니칼 교회관계에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바탕이 된 것입니다. (중략) 변조은 박사님은 전 인류의 하나 됨을 위한 신학의 권위자로 호주와 해외에서 광범위하게 존경을 받고 있으며, 그것은 창조의 보전을 위한 정의, 평화, 그리고 존경의 의제임을 단호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의 의견으로는 변 박사님은 자랑스러운 호주인 이며, 호주훈장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분입니다.” (로날드 윌슨, 1992313)
 
8. 나가는 말
 
변조은은 평생에 걸쳐 몇 번의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그 중에 호주 멜본에서의 젊은 신학생 시절, 좋은 교수들을 만나 협소한 근본주의적 신앙관에서 열린 진보주의적 신학을 가지게 되는 바울의 회심과도 같은 순간이 있었다. 그는 주한 호주선교회 약사란 자신의 글에서 자신의 목회와 선교에 영향을 끼친 네 그룹의 사람과 운동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첫째는 거제도 등 섬지역의 가난한 농어민들과 교제하며 받은 영향이다. 고된 생활 속에서도 정직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일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둘째는 장신대에서 강의하던 시절 학생들에게 오히려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학생들 중에는 빈민과 노동자들 속에서 목회하는 사역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누구 편에 서서 일하고 계시는지 보았던 것이다.

셋째는 호주 원주민들의 땅 소유권을 찾는 운동과 화해의 과정에서 배운 점이 많다고 하였다. 소수자 속에서 함께 고난당하시는 그리스도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WCC와 아시아교회협의회(CCA)의 인권 운동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연대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그의 사역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국교회와 호주교회 이야기, 84-85).

변조은의 목회와 선교, 그리고 신학은 그가 강의하였던 이사야서의 예언자적 외침과 누가복음 418에서 예수님이 다시 인용하며 선포하신 말씀에 굳게 뿌리를 두어, 변두리에 계신 예수님을 따라 본인 자신도 평생을 가난한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들과 함께 하며 복음을 전하며 교제하며 사역하여 왔다고 요약될 수 있겠다.

변조은의 일생을 연구하면서 필자는 변조은이 팔순을 맞이하며 느끼는 아쉬움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그가 청년시절 한국에 도착하여 처음 하였던 설교 주제가 교회일치와 연합이었다고 앞서 언급하였는데, 이후에도 변조은은 이 주제로 고민한 흔적을 여러 곳에 남기었다. 그는 호주선교부에서 각 교단지도자들과 협력하면서 한국교회의 연합을 격려하였고, 장신대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을 때 장신대와 총신대가 연합할 것을 주장하였고, 한국장로교 백주년 기념예배 시에도 한국교회가 분열에서 일치로 돌아 올 것을 호소하였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변조은은 WCC 부산총회 준비과정에서 드러난 한국교회의 심각한 분열 소식에 얼굴빛이 어두워지기도 하였다. 그의 계속되는 한국방문은 아마 한국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보고 확인하고 싶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작년에 증조할아버지가 된 변조은은 요즈음도 본인이 직접 만든 오렌지 잼, 블루베리 잼, 딸기 잼 등을 가방에 담아, 50여 년 전 배를 타고 한달 여에 거쳐 처음 왔던 한국을 이제는 수십 번 비행기로 오가고 있다. 필자도 한국에 있으면서 그가 만든 잼을 선물로 받아 잘 먹고 있지만 앞으로도 그가 만든 잼을 많은 지인들이 오랫동안 즐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고도서>

'한호선교 120년의 발자취' DVD 동영상, 예장총회, 2012.
 
김석원, ‘복음의 씨앗을 심은 호주 선교사들-변조은 목사’, 크리스찬리뷰, 201256.
변조은, ‘존 브라운 목사’, 은혜의 증인들, 한국장로교출판사, 2009.
양명득 편, 한국교회와 호주교회 이야기, 한국장로교출판사, 2012.
양명득, 클라이브 피어슨 편, 호주이민 한인교회 30, 한국장로교출판사, 2004.
윤필립, ‘호주 친한파 상징 존 브라운 목사’, 신동아 별책부록, 201111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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