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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18일 일요일

호주선교사 헨리 데이비스와 그의 조카들

 


The First Australian Missionary in Korea Henry Davies and His Nieces

by John Thompson-Gray / Myong Duk Yang, 2020


차례

 

축하의 글 제임스 최 (주한 호주 대사)

축하의 글 셰릴 펜버티 (프레스비테리안 레이디스 칼리지 교장)

격려의 글 로란드 써섹스 (퀸즐랜드대학교 은퇴교수)

발행의 글 송영의 (진주교회 담임목사)

번역의 글 양명득

서문        존 톰슨-그레이

 

1 헨리 데이비스의 생애와 유산

 

1장 한국에 남긴 유산

189046일 전보 전설 도보자와 등반가 헨리, 한국에 가다 어린 시절 마크 듀리가 잘 요약하다 청년 헨리와 그의 이상 종고조 할아버지 헨리는 20살이었다 신문에 싣다 인도 그러나 갑자기 한국 첫 한국 선교 다시 집에 오다

 

2장 한국으로의 약속

빅토리안이 유산을 주장하다 여선교연합회 - ‘어떻게’ - 분열 지정학적 야망과 선교사들 빅토리아장로교회의 국내선교 선교사와 순교자들 뉴 헤브리데스와 한국 헤이스티 요소

 

3장 코필드 그래머 학교의 은사

서론 인도에서 돌아오다 자격 갖춤 가족에 대한 책임 코필드 그래머가 탄생하다 롤리 숍 생명을 위한 전인 교육 주말 선교사 관계되는 역사 헨리의 학교 운영 마케팅과 홍보 재정적 기지 창세기 1출애굽기 - 사도행전

 

2 마가렛과 진 데이비스, 삼촌을 따르다

 

1장 금광에서 조선으로

존 조지 데이비스 - 코롬브라에서의 8- 프레스비테리안 레이디스 칼리지 멜본대학교 - 조선으로 가다

 

21919년까지의 한국선교

한국을 개척하다 진주의 의료선교 세브란스 마가렛의 강연 모트 더 마우드 더 스코티쉬 하우스 브리핑 한국으로 파송되는 진 일차 세계대전 대 부흥운동 부산진의 마가렛

 

3장 폭풍의 계절

마가렛의 딜레마 크로니클 편지 윌리엄 테일러 부모와 함께 진주로 - 진의 편지 - 진의 일기에서 - 1936년 봄 폭풍의 계절

 

4장 벽에 쓴 글씨

비엔나 - 요코하마에서의 죽음 배돈병원을 떠나기 전 진의 보고서 박봉윤 2600마지막 환송 게이조 니본 신문 나환자 요양원 세계 여성 기도의 날 1941년 회고 적국의 외국인 성덕의 거룩한 종

 

5장 마가렛과 진의 마지막 날들

마가렛 데이비스 추모사 플라잉 닥터 진 - 진 데이비스를 추모하며

 

부록: 감사와 참고도서

 


축하의 글

  

James Choi 제임스 최

Australian Ambassador to the Republic of Korea

주한 호주 대사


 호주 첫 선교사 헨리 데이비스와 그의 조카들한국어판이 한국 독자들을 위하여 번역 출판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본 도서는 호주 작가 존 톰슨-그레이가 쓴 책으로 2018년 호주에서 출간된 바 있습니다.

이 책은 헨리 데이비스, 마가렛 데이비스, 그리고 진 데이비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세 명의 헌신적이고 용감한 호주인들은 1889년부터 1941년까지 특히 부산과 경남의 교육 및 의료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헨리 데이비스는 1889년 한국에 온 첫 호주 선교사였습니다. 마가렛 데이비스는 1910년부터 1940년까지 진주정숙여학교, 부산일신여학교 그리고 하퍼기념여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진 데이비스는 1918년부터 1941년까지 진주 배돈 병원의 의사와 원장으로 일하였습니다.

이런 뜻깊은 내용을 한국어로 번역하신 양명득 박사께 진심으로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양명득 박사는 한국과 호주 관계에 관련된 여러 권의 책을 출판한 바 있습니다.

호주 첫 선교사 헨리 데이비스와 그의 조카들을 통해 한국 독자들이 130년 동안 이어져온 한국과 호주의 긴밀한 인적교류에 대해 더 나은 이해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책을 통해 양국의 문화 교류뿐만 아니라 양국 관계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히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축하의 글

 

Cheryl Penberthy 셰릴 펜버티

Principal, Presbyterian Ladies’ College

프레스비테리안 레이디스 칼리지 교장

 

호주 멜버른에 있는 프레스비테리안 레이디스 칼리지 교장으로서 우리 학교 졸업생에 관한 글이 담긴 존 톰슨 그레이 씨의 특별한 책을 추천합니다. 그들은 선교사 자매 마가렛 데이비스(문학석사와 교육학 디플로마)와 진 데이비스 박사(의학과 이학사)입니다.

마가렛과 진은 둘 다 1902년부터 당시 다른 개척적인 여성들과 함께 우리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였고, 그들의 훌륭한 교육적 바탕으로 실질적인 경력을 쌓았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크게 발전시키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필자가 언급한 우리 학교의 다른 학생들과 교원들은 기독교적인 삶과 증언에 그들의 표지를 남기었습니다.

한국의 불안정한 상황과 극한의 어려움 속에서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일하였던 이 희생적인 자매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매혹적이고 영감적입니다. 또한 진의 호주 원주민 선교와 바누아투 선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 명의 여성은 그들의 전문적인 교육적이고 의료적인 기술을 모든 문화와 종교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이 두 명의 여성에 관계된 자료들을 필자가 멜버른의 우리 학교 고문서실에서 찾을 수 있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마가렛과 진의 훌륭한 학업 성적과 더불어, 마가렛의 음악사랑은 그녀의 삶을 지탱하게 하였고, 진의 프랑스어와 독일어 재능은 그녀의 미래의 사역과 학업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호주와 한국 간의 역사적인 관계의 특별한 시각을 제공하는 이 책의 저자 톰슨 그레이 씨와 한국어 번역자께 축하를 드립니다.

 

                                                              발행인의 글

송영의

진주교회 담임목사


데이비스 일가의 한국사랑 중 특히 진주사랑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는 부산으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진주에 들렀습니다. 아쉽게도, 그동안 경남지방 지명에 대한 미숙과 번역상의 착오로 데이비스의 진주 방문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일기 마지막 부분을 경남 진주 사람들이 아는 지명으로 정리해 보면, 데이비스 선교사는 부산으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진주에 들러 하룻밤 여관에 묵었습니다.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의 일기 마지막 날(1889821-1990331)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점심을 완사에서 먹고 수천으로 와서 아주 큰 마을에서 여관을 알아보다.”

 

이 지역 출신으로 지리를 잘 아는 조헌국 장로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점심을 완사(사천시 곤명면 소재)에서 먹고 수천[진주시 문산읍의 옛 이름 소촌(召村)을 잘못 이해]으로 와서 아주 큰 마을(진주)에서 여관을 알아보다.”

 

그 후 마산을 거쳐 부산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진주는 어떤 의미에서 헨리 데이비스의 끝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조카딸들인 마가렛이나 진에게는 첫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가렛이 언어를 배우고 처음 사역 발령을 받은 곳이 진주이고, 진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계속 사역했던 곳이 진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가깝게 느껴져서 그런지, 특히 저희 진주교회에서는 이 책 중간 중간에서 진주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면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이번에 진주교회에서 중심이 되어 이 책을 발행하게 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크게 감사드립니다.

이 책을 재미있게 읽어나가노라면, 몇 부분에서 빙그레 웃게 됩니다. 예를 들어, ‘냄새가 코를 찌르는 생선이라는 표현이 두어 번 나오는데, 선교사님들은 그것만은 도저히 먹지 못하겠더라고 표현합니다. 남부지방에서 잘 먹는 젓갈이지요.

그리고 1940년대 중반까지도 호주인들에게 영국시민권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저희 진주교회 역사관에는 설립자인 거열휴(휴 커를) 선교사님의 외손자에게서 기증받은 선교사님 가족의 당시 여권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호주가 아니라 영국 여권이라서 왜 그랬을까 했었는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대목에서 저희 진주교회 교인들은 빙그레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재미도 있지만 그보다 중요하게, 이 책에서는 여러 곳에서 중요한 역사적 자료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부산역에서 이뤄졌던 여러 노예장사들로부터의 젊은 여성들과 아이들 구출 작전들은 손에 땀을 쥐게 합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너무나 험악했던 우리나라의 그 어렵던 시절 때문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1940920일에 일제에 의해 전국적으로 일제히 천 명이 검거되었는데, 진주에서 배돈병원 소속의 3명이 검거되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매일신보1940922일자에 따르면, 신사참배 거부 항쟁자들에 대해서 1940920일 새벽 미명에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일제 검거를 단행하였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신사참배에 대한 여러 가지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또 일본의 대동아 전쟁 때 배돈병원에서 사용하던 차량도 강제 징발해 갔다고 합니다. 게다가 19382,946명의 한국인들이 일본의 군대에 자원하였고, 그 중 406명이 합격하였으며, 1939, 1940, 1941년 그리고 1942년에는 각각 613, 3,060, 3,208명 그리고 4,077명이 입대하였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1939년에는 67만 명의 한국인이 전쟁 산업의 노동자로 일본으로 이주되었다고 합니다. 1942년에 이르러 20만 명으로 추산되는 한국 여성이 간호사와 회사원으로 기록되었지만, 실제로는 일본제국의 위안부로 매일 한 명이 20명에서 40명 사이의 남성을 성적으로 상대해야 하였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정말 소중한 유산들입니다.

이 책에서는 한 일가가 어떻게 여러 선교에 헌신했는지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헨리 데이비스의 동생 존 데이비스 목사는 아내 애니와 함께 1923년과 1924년에 한국으로 와서 1년간 지내고 갔다고 합니다. 진주에서 진과 함께 6개월, 그리고 부산에서 마가렛과 함께 6개월. 그때 한국어와 문화를 충분히 배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때 익혔던 언어와 문화를 배경으로 다시 1931-33년에 2년간 한국으로 와서 성경공부반을 인도하거나 순회전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호주 선교 사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러한 단기 선교 사역들입니다. 그 중 일부가 소중하게 여기서 구체적으로 밝혀지게 된 것입니다. 존과 애니 데이비스 목사 부부는 정말 놀랍게 그 시대에 한국을 사랑해서 두 번이나(3) 귀한 단기선교 사역을 온 것입니다. 당시 호주에서 한국으로 오는 데 보통 한 달이나 걸리고, 또 선박 사고가 나서 호주 장로교의 총회장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적도 있는데, 정말 대단한 열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 몇몇 사례가 있었지만 그동안 호주 선교 연구자들의 연구서에서 단기 선교 사역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파송되었던 선교사 명단에도 그들의 이름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들 중 어떤 단기선교사는 1년 동안 선교사 자녀들(MK) 사역을 했고, 어떤 단기선교사들은 몇 달 동안 외로운 선교사들의 말벗이 되어주며 큰 힘을 불어넣어주고 갔습니다. 지금 선교계에서 MK 사역은 조금 하지만, 선교사들의 영적인 벗이 되어 선교 현장에 따라가 함께 있어주고 말벗이 되며 힘이 되어 줬던 그 놀라운 선교 사역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빛을 보지 못하고 숨겨져 있는 호주 장로교의 한국 단기 선교사들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해 봅니다.

마지막으로, 특히 인간적으로 볼 때는 부끄러워서, 진주교회와 관련된 숨기고 싶은 가슴 아픈 사실이 이 책에서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19392월에 당시 경남에서 교인이 가장 많은 교회라고 하면서(1,000명 교인) 저희 진주교회에서는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었습니다. 일제 총칼의 강압에 의한 것이기는 했지만, 무장경찰이 투입된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진주교회 제직회가 결의하고 전국 모든 교회와 경찰서로 선언문을 보냈습니다. (이 책에서 밝히지는 않았지만, 당시 한 기독교계 신문에 그 내용 전체를 크게 광고도 냈습니다.) 호주선교회에는 따로 비슷한 내용의 절연 선언문을 보냈습니다. 그 모든 비용은 진주경찰서에서 댔습니다.

충격적이게도, 그것은 진주교회 당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결의를 하고 교회당 문에 못을 박고 폐문했던 것을 반성한다고 하면서, 이제 신사참배에 기꺼이 동의한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전국 교회에 장려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인으로서 일본인이 아닌 외국 세력(당시 호주 선교부)의 물심양면 원조나 지도를 배척한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물론 저희 교회에서는 이미 수년 전에 저희가 입수한 호주 선교사들의 선교 보고서를 통해 그런 치욕스런 과거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200937일부터 44일까지 4주간 동안 다니엘과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본받아 자숙하며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는 엄숙한 기간을 가졌습니다. 다시는 그런 부끄러운 역사를 반복하지 말자고 하나님 앞에 다짐했습니다.

이 책은 데이비스 일가의 한국 선교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저희 진주교회에도 너무나 귀중한 많은 역사 자료를 담고 있는 기독교계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진주교회 설립 115주년인 20201022일에 즈음하여 이 책을 발행하게 되었습니다. 읽으시는 많은 분들에게 한 일가를 통한 생생한 선교행전이 뚜렷하게 담겨 하나님 나라 확장에 대한 큰 비전이 선명하게 새겨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번역자의 글

칭찬으로 완성된 작품

 

양명득

호주선교동역자


그날, 필자는 멜버른에서 시드니로 가는 비행기 위에서 잠깐 그 책을 펼쳤었다. ‘How Great Thine Aunt’ 위트 있는 제목이지만 한국어로는 그 느낌이 어떻게 전달될까. 한장 한장 대충 훑어 내려가는데 갑자기 전율이 왔다. 평소 필자가 관심 가지고 있던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 후 필자는 시드니의 바쁜 여정 속에서도 이 책을 단숨에 읽었다.

처음에 존 톰슨-그레이 씨는 나의 이메일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마 자신의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아니면 혹시 그는 내가 번역을 할 만한 사람인지 알아보고 있었던 것일까. 잊어버리고 있을 쯤 그에게 연락이 왔다. 한국어판을 내자는 흔쾌한 응답이었다.

그리고 그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번역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필자에게 한 가지 아쉬움이 있었다. 헨리 데이비스의 두 명의 조카 이야기인데, 정작 헨리의 이야기는 없었다. 나는 톰슨-그레이 씨에게 제안을 하였다. 기왕이면 헨리 데이비스의 이야기도 실어 호주교회의 초창기 한국 선교 주역인 트리오 데이비스로 책을 구성하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는 응답하기를 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시간이 좀 걸릴 것인데 괜찮은지 되물어 왔다.

그 후 몇 개월이 더 지나고 드디어 원고가 완성되고 번역도 완성되었다. 번역의 작업은 대부분 지루하고 압박의 시간이지만, 이번 작업은 그렇지 않았다. 톰슨-그레이 씨가 계속하여 나에게 영감을 주고 격려해 주었기 때문이다. 아마 내 인생에 그 짧은 기간 동안에 가장 많이 나를 칭찬해준 사람인 것 같다. 그리고 데이비스 가문의 사람에게 ‘exhibitor in the hearts of men’이라고 불림을 받는다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이다!

또 한분 감사한 것은 진주교회의 조헌국 장로이시다. 조 장로께서는 호주선교와 진주 관련 수권의 책을 펴낸 교육가이자 역사가이다. 세심하고 깊은 그의 지식은 용어 사용과 역사적 사실의 정확성을 높여 주었다.

그동안 호주선교사 관련 도서 몇 권을 어떤 사명감으로 출판하였지만 이제 좀 지치는 느낌이다. 책이 출판될 때 중요한 것은 다음에 또 책을 내려는 용기를 잃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독자들의 아낌없는 격려와 조언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