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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24일 수요일

뉴질랜드한인이민사

간추린 뉴질랜드 한인사 




뉴질랜드에서는 뉴질랜드 한인사 발간위원회 (위원장한일수 박사)의 연구성과를 먼저 말할 수 있다아오테로아에서 한인들이 살아  이야기라는 부제를  뉴질랜드 한인사 2007년에 출판되었다뉴질랜드 한인사 발간위원회의 4년간의 노력으로 이야기 형식으로 출간된  한인사는  방면 연구에 유일한 자료로 남고 있다 한인사는 다음과 같은 목차를 담고 있다.

1) 북반부로부터 뉴질랜드로 이주가 시작된 지 170여 년
2) 한국전쟁으로 맺어진 한국과 뉴질랜드의 인연
3) 1970년 이전의 한인 사회
4) 1970년대에 한인 사회가 태동하다
5) 뉴질랜드가 이민 문호를 개방하여 한인사회가 성장하다
6) 일반 이민 제도 시행으로 한인 사회가 도약하다
7) 한국의 IMF 사태로 인한 시련 중에도 희망을 펼치다
8) 뉴질랜드에서 한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9) 뉴질랜드 한인들의 현주소
10) 뉴질랜드 한인 사회의 미래

초기 뉴질랜드 한인사를 기록한 학자는 김영성 교수이다그는 상명여대 지리학과 교수로 1994년 뉴질랜드의 한국인이란 논문을 월간해외동포 1994 5월 호에 기고하였다이 글은 초기 한인들의 양적 성장과 한인사회의 전개과정을 1971년부터 주요 연표를 통하여 기록하고 있다윤홍기 교수와 임석회 교수가 함께 연구하여 발표한 뉴질랜드 오클랜드지역 한국인의 생업분석 1997년 대한지리학회지를 통해 발표되었다이 논문은 뉴질랜드 이민 초기 한인들의 생업을 한인주소록을 분석하여 쓴 글로 당시 한인들의 생활을 엿 볼수 있는 자료이다윤홍기는 오클랜드대학교 지리학과 교수이며임석회는 오클랜드대학교 지리학과 박사후 과정 연구원을 지냈다

오클랜드대학 아시아학과 내의 한국학연구소는 1995년 개설되어격년마다 주최하는 한국학을 위한 남태평양 아시아 컨퍼런스도 주목할 만 하다한국학에 관련된 다양한 주제의 논문들이 본 컨퍼런스를 통하여 발표되어 왔고자료집까지 출판되므로 연구활동을 돕고 있다. 2010년에는 본 학과의 송창주 교수 주관으로 Korean Studies in Shift’ (변화하는 한국학)라는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려 수명의 학자들이 논문을 발제 하였다.

뉴질랜드에 한국인들이 본격적으로 들어 올 수 있었던 계기는 1987년 뉴질랜드 정부의 이민법 개정을 통하여 시작된다뉴질랜드정부는 당시 호주정부처럼 아시아인 이민제한정책을 통하여 영국계 중심주의를 표방하여 오다가 1970년 대에 들어서 국가 안팎으로 경제적인 위기에 처하게 된다이에 따라 백인중심적 이민정책에 대한 변화 요구와 해외자본 유입이 필요로 하게 되었다마침내 새 이민법이 1987년 공포되고 유색인종에게도 이민문호가 개방되게 된다이후 뉴질랜드는 원주민인 마오리와의 양문화정책 (bi-culturalism)에서 여러 인종을 아우르는 다문화정책 (multiculturalism)을 수용하고 있다.

한편 한국태생이 뉴질랜드에 거주하며 양적 성장을 하게 되는 내용을 앞에서 언급한 김영성 교수는 뉴질랜드 인구조사통계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911년 이전에 1, 1931년 이전에 3, 1945년 당시에는 4, 1961년에는 52 (이들 중 42명은 원양어선 선원으로 추측그러므로 거주자는 10), 1966년에는 30, 1976년에는 86그리고 1986년에는 162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김영성, 19). 이민법이 개정되기 전 한국인의 뉴질랜드 유입은 주로 취업결혼연수입양 등의 목적이었는데 초기에는 남태평양에 진출한 원양어선 선원들이 많이 입국하였고, 1950년대 부터는 콜롬보 플랜에 의하여 입국한 한국유학생이 3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 플랜에 의하여 공부하고 후에 뉴질랜드에 정착하여 동포사회 지도자가 된 우준기 박사와 한국으로 귀국하여 한-뉴질랜드협회를 결성하여 양 국간의 이해를 증진시킨 박영인 박사 등이 있다.

한국과 뉴질랜드 정부간의 관계는 1950년 한국전쟁 때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뉴질랜드군도 유엔군의 일환으로 한국전에 6천여 명이 참전하여 45명 전사하였고그 중 34명은 부산 유엔묘지에 안장되므로 견고한 혈맹국가가 되었다공식 외교관계는 1962년 수립되었고, 1971년 뉴질랜드 수도인 웰링턴에 한국대사관이 개설되었다한인동포들이 많이 모여 사는 오클랜드에는 1996년 대사관 분관 형식으로 공관이 개설되었다.

한국인 중 누가 언제 처음으로 시민권을 받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1962 6살로 입양된 김성미가 2년 후인 1964년 시민권을 받았다 (뉴질랜드한인사 발간위원회, 59). 뉴질랜드 한인회는 전체 교민의 수가 100명에도 못 미치던 1974년 당시 웰링턴의 뉴질랜드 대사 관저에서 창회되었으며 초대 회장에는 박사과정 중인 박흥섭 (후에 전남대 교수)이 선출되었다이 당시 태권도나 녹용 사업으로 이민 오는 동포들도 생기기 시작하였다.

뉴질랜드에서의 첫 교회도 웰링턴에 세워졌다원양어선 선원들을 위한 예배는 1960년 대부터 시작되었지만 교회로써의 창립은 웰링톤한인연합교회로 시작되었다한국전쟁에 구세군 소속 군목으로 참전하였던 스미스 (Smith) 목사는 귀국한 후에도 한인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예배를 인도하였고, 1984 311일 그동안 함께 준비해 온 장경립변경숙클락슨 가족김진영안경순 영사등과 함께 교회를 창립한다그리고 얼마 후 한국에서 파송 된 김용환 목사가 그 뒤를 이어 목회를 하고김 목사는 후에 오클랜드 지역에 첫 한인교회를 창립한다.

1987년 이민법이 개정 되면서 투자이민제도가 실시되므로 1992년에 한인동포가 1,762명으로 크게 증가하고 있고체류자가 978원양어선 선원이 309명으로 총 3,049명의 한인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1992년 이 후의 한인 이민은 점수제에 의하여 1994년에 4,167, 1995 3,394명의 한인이 영주권을 받았으며유입된 전문직 사무직의 젊은 층의 인력들로 뉴질랜드 한인사회를 또 다른 차원으로 변화시키게 된다.

한국인들의 뉴질랜드 방문을 더욱 촉진시키는 기회는 1993년도에 왔다태극날개를 단 대한항공이 그 해114일 뉴질랜드 오클랜드에 첫 바퀴를 내린 것이다직항 취항은 양국간의 인적물적문화적 교류증대를 가져 왔고다음 해인 1994년에는 양국간 사증 면제협정 체결이 이루어짐으로 뉴질랜드에 입국하는 한국인의 수가 1995년에서 1997년까지는 연간 10만 명에서 13만 명에 이르렀다 (뉴질랜드한인사 발간위원회, 148-149).

한국과 뉴질랜드 사이의 워킹 홀리데이(working holiday, 관광취업비자협정은 1998년 체결되었고그 다음 해부터 시행되기 시작하였다이 협정으로 인하여 양국간 젊은이들의 교류가 시작되었고매년 1,800여명의 한국인 청년들이 뉴질랜드를 방문하며 문화와 경제 교류를 하고 있다.

2006년 인구조사에는 영주권자와 시민권자가 17,600일반체류자가 5,400유학생이 10,000명으로 총 33,000명 정도로 나타나 있고이 중 79%는 북섬에, 21%는 남섬에 분포되어 있다.

현재 뉴질랜드에는 몇 개의 한인회가 주요 도시마다 세워져 있어 한인동포들의 정착을 돕고 있으며주류사회와의 연계와 모국과의 교류를 도모하고 있다아홉 개의 한인회는 한인들이 주로 모여 사는 다음의 도시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오클랜드크라이스트처치웰링턴와이카토로토루아더니든황가레이파머스톤퀸즈타운 등이다.

뉴질랜드 사회에 진출하여 대학교수변호사의사회계사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1세 동포 뒤를 이어 1.5세나 2세들도 점차로 주류사회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그 중 윤용제는 크라이스트처치에서 한인 최초로 2004년 지역 의원으로 출마하여 시의원이 되었다그는 2007년 선거에서 재선되기도 하며 지역 의정활동을 해 왔고크라이스처치 한인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2008년에는 TV 앵커 출신인 이지연 (영어명멜리사 리)이 뉴질랜드 총선에서 집권 국민당 비례대표로 나서 한국인 이민자로서 최초로 뉴질랜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이는 한인동포 여성으로도 최초의 국회의원으로 기록되어 전 세계 한인 이민 역사의 새로운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다.

최근 인구통계조사에 따르면전체 뉴질랜드 인구의 거의 1%가 한국 동포이며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중국인도 다음으로 뉴질랜드에서 큰 사회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인구 일인당 비율로 보았을 때뉴질랜드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규모가 큰 한인 동포사회를 가진 나라 중 하나이다뉴질랜드에서 유학중인 한국 학생수도 날로 증가하고 있는데중국 다음으로 한국은 뉴질랜드의 큰 유학생 시장이다.


한국은 뉴질랜드의 9번째 무역상대국이며양국간 교역 액은 2008년 기준 27억 뉴질랜드달러(뉴질랜드의 대()한국 수출액: 136천만 뉴질랜드달러한국의 대()뉴질랜드 수출액: 131천 뉴질랜드달러)를 기록했다양국간 무역은 상호보완적으로뉴질랜드의 한국에 대한 수출품목은 원목알루미늄쇠고기키위(과일), 유제품 및 해산물 등이고반면 한국은 자본 투자 및 자동차전자기기기계류 등의 소비재를 뉴질랜드에 수출하고 있다(뉴질랜드정부 외교통상부 홈피, 2011).


Copyright 양명득


2016년 2월 22일 월요일

호주교회의 한국선교 120년 역사 동영상 및 선교선언문



'한호선교 120년의 발자취' DVD 동영상,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편, 서울, 2012.

'120 Years of Australian Mission in Korea' DVD,

Edited by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Seoul, 2012.


Copyright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 
              The PCK General Assembly


한호선교 120주년 기념 선교선언문




2016년 2월 21일 일요일

호주장로교회 한국선교 1889-1941

The Australian Presbyterian Mission in Korea 1889-1941

Edith A. Kerr & George Anderson


Australian Presbyterian Board of Missions

1970
 

호주장로교회의 한국선교 1889-1941’1970년 호주선교사가 쓰고 호주장로교회에 의해 발간된 것으로 초기 한국선교 출발부터 식민지시기 동안의 선교 기록을 상세하게 정리하고 있다

경상남도 지역에서 활동한 호주장로회 선교사들에 관한 자료로, 그 당시 선교활동의 범위와 교육활동의 특징을 살펴보고 있는데, 한국선교 초기 기록이 매우 취약하고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현실을 비추어 볼 때 1941년 이전에 활동한 선교사들이 그들의 활동을 전체적으로 정리한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경상남도를 중심으로 하여 각종 활동을 전개한 호주선교부에 대한 기록은 미국 주요 교파 및 서울과 평양 중심의 주류 역사 이면에서 잘 드러나지 않은 호주교회의 한국선교 활동과 경상남도 지역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기초자료로 남고 있다.
 
This book is published in 1970 by the former missionaries who worked in South Kyongsang Province of Korea during the latter part of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In The Australian Presbyterian mission in Korea, 1889-1941, the authors provide a comprehensive account on the nature of their missionary work in Korea, featuring such aspects as the earlier history of the Protestant mission through the most controversial Japanese Shrine issue that divided the Christians in Korea during the 1930 and 1940s. 

Since the records of the earlier mission history are scarce and fragmented in nature, the book contributes significantly as it is written by the participants of the most active period of the missionary history of Korea. As the Australian mission represented the smaller group of missionaries who worked exclusively in the southern part of the country, this resource book may complement or, often, challenge the mainstream account of missionary history focusing mostly on the work of the American missionaries and those who worked in larger cities such as Seoul and Pyongyang. 






2016년 2월 11일 목요일

벵밀리아

벵밀리아 Beng Mealea


몇 달러나
아끼겠다고
그 무더운 먼지길을
뚝뚝이로 왔다

이 도시에선
더 이상 볼것이 없을즈음
누군가 귀뜸해준
낯선 지명

무슨 쓸쓸한
돌무더기 만나려나
도착한 길
입구로 향하는데

아 아
순식간에
압도하여
과거로 빨아 들였다

무너진 그대로
돌덩어리들이
이야기 하고
춤을 추고

꽃 뱀 거북이 무희
생명을
머금은채
이끼를 피우고

돌아오는 길
자꾸 뒤를 보았다
천년의 신비
벵밀리아

Copyright 양명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