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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12일 목요일

호주선교사 죤 브라운 - 변조은

호주선교사 죤 브라운 변조은

 

1. 들어가는 말
 
죤 브라운(John P Brown, 한국명: 변조은) 목사에게 2012년은 기념될만한 해였다. 한국장로교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예배가 있었고,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창립 100주년 행사도 진행되었는데, 해외에서 초청된 대표들 중에 호주에서 온 변조은이 그 중심에 있었다.

9월 초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열렸던 한국장로교총연합회가 주관한 백주년기념예배에 변조은은 축사를 하였고, 같은 달 소망교회에서 개최된 예장 통합 백주년 기념총회에서는 공로상을 받았는가 하면, 부산일신병원 60주년 기념예배에서는 설교를 하였다. 이 한해에만 변조은은 한국을 3번 방문하였다고 한다. 어느새 그는 한국교회의 주요 행사가 있을 때 마다 호주교회를 대표하는 대부가 되어 있었다.

이 글은 변조은의 생애와 사역을 간략하게나마 정리한 글로 앞으로 그를 연구하는 학도들에게 참고자료를 제공하려는 목적에서 쓰여 졌다. 그러나 글의 한계는 역시 변조은이 현재 정정하게 활동을 하고 계신데 이런 종류의 글을 쓴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제약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업은 호주교회의 한국선교를 연구하는 학도들에게 꼭 필요한 의미 있는 작업이다.

필자는 변조은 목사의 사역을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누었다. 1) 한국선교, 2) 호주연합교회 총회 사역, 3) 호주한인교회 목회, 4) 북한선교 그리고 5) 호주원주민 사역이 그것이다. 이글은 변조은의 이 다섯 가지 사역을 중심으로 쓰되 그 외의 공헌에 대하여도 기록할 수 있는 만큼 기록하였다.
 
2. 청년 변조은
 
변조은은 1933924일 생으로 남호주의 마운트 갬비아(Mt Gambier)의 한 농촌에서 팔 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의 증조 할아버지는 1839년 스코트랜드에서 호주로 이민하였고 변조은이 태어날 당시 부모는 가업으로 농사와 목축을 하면서 개척자의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세계 1차 대전에 참여하였고, 2차 대전시에는 호주에서 해안을 지키던 군인이었다. 어머니는 여덟 명의 자녀를 모두 키우는 생활력이 강한 부모였는데, 어린 변조은은 그러한 가정환경에서 밤낮으로 가정 일을 도우며 부지런함과 검소의 가치를 배우며 자라났다.

그는 성장하여 집을 떠나 해밀턴중고등학교에서 공부하였는데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누나가 그곳 우체국에 취직해서 자신의 작은 보수를 나누어 하숙비를 내주는 바람에 공부할 수 있었어요.” (크리스찬리뷰, 201252). 동시에 그는 교회생활도 열심이었다. 학교 내 크리스찬 서클이 있어 참여 할뿐 아니라, 교회에서는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기도 하였다. 변조은은 어머니가 기도를 가르쳐 준 것을 기억할 만큼 경건한 가정에서 자라났고, 다니던 교회 목회자의 근본주의적 성경 가르침으로 인하여 보수주의적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의대를 꿈꾸었던 변조은이지만 아버지의 병환으로 농장에서 많은 일을 해야 했고 그로인하여 대학입학 성적이 좋지 않았다. 부모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 2년 가사 일을 돕다가 멜본대학교에 입학한 변조은은 철학과 중동어 중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선택하였는데 성경을 좀 더 알기 위함도 있었고 또 언어를 좋아하기도 하였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불어 반에서 일등을 하곤 하였는데, 나중에 한국어를 구사하는 것을 보면 언어에 대한 재능이 탁월하였을 것이다.

1952년 멜본대학에 입학하였고 그 시절 중요한 전기가 변조은에게 찾아온다. 당시 멜본 언론에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뉴스와 호주군인들의 파병에 대한 내용을 많이 보도하고 있었고, 전쟁으로 인하여 파괴된 도시들과 긴 피난민 행렬 등의 사진과 기사를 접하게 된다. 또한 당시 이미 한국에 파송 받은 호주선교사 자매가 부산에 일신병원을 세우고 있었는데 그 과정을 거의 매주 장로교신문을 통하여 변조은은 접하고 있었다. 청년 변조은 마음에는 어느새 선교의 사명이 불타올랐고 1954년 빅토리아장로교 총회선교부에 한국선교사역을 지원하게 된다.

멜본대학에서 그는 또한 평생의 반려자 노마(Norma, 한국명: 노미연)를 만나게 된다. 대학교 안의 기독교학생회에 모임에서 만나 교제를 계속하다가 1957년 결혼하였다. 그들은 결혼 전에 이미 한국에 선교사로 함께 나가기로 약속하였다고 한다.

변조은은 호주장로교회의 목사후보생이 되어 신학교육을 빅토리아주장로교신학대학 (후에 오몬드칼리지)에서 신학공부를 하였다. 그는 후에 고백하기를 '그가 성장하며 배웠던 근본주의적인 신앙의 교만으로 목사가 되기 위하여 신학교에 간 것이지 본인이 이미 알고 있었던 진리에 더 이상 새롭게 배울 것이 없다'는 태도를 당시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변조은, ‘50년의 목회 후에’, 미공개자료). 그러나 다행히 그는 신학교에서 좋은 교수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중 특별히 데이비스 메카키 목사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고, 매카키는 후에 호주연합교회의 초대 총회장이 된 인물이다.

변조은은 195825살의 젊은 나이로 호주장로교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는 벤스데일(Bairnsdale), 오메오(Omeo)에서 목사로, 깁슬랜드(Gippsland)와 라트로브 벨리(Latrobe valley) 노회에서 기독교교육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때 변조은에게 호주빅토리아장로교 선교부로부터 전보 한통이 왔다. 6-7년 전 대학시절에 지원했던 한국선교를 이제 떠나겠느냐는 내용이었다.

바로 그날이 벤스데일교회에서 변조은을 담임목사로 청빙하겠다는 날이었는데, 변조은은 한국에 선교사로 나가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올세인트 미션 바이블칼리지에서 단기간 선교훈련을 이수한 변조은과 노미연 부부는 두 살 된 아들 마이클과 함께 호주를 떠나 미지의 세계 한국의 부산에 첫 발을 들여 놓게 된다. 그날이 1960925일이었고, 변조은은 막 27세가 되었다.
 
3. 한국선교와 변조은
 
호주장로교선교회는 당시 한국에 선교사를 예전과 같이 많이 파송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제하에 대부분의 선교사가 특히 신사참배를 거부한 호주선교사들은 강제로 출국되었고 그 후 해방이 되어서도 50년까지는 6, 50년대에는 13명밖에 파송되지 못하였다. 당시 호주도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경제가 어려웠고 호주장로교선교회도 선교사를 파송할 재정이 항상 부족하였다.

그러다 1960년대에 들어서 선교사 파송이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는데 경제도 나아지고 선교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변조은은 시드니 시내에 소재하는 세인트 스테판교회가 지원을 하였고, 10여 년간 계속되었다. 변조은도 선교보고서를 수시로 그 교회에 보내곤 하였는데 현재 그 편지들은 시드니의 미첼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부산에서 바로 서울로 올라 온 변조은 가정은 종로 5가에 살고 있던 한 미국선교사 사택에 거하며 선교훈련을 받은 대로 먼저 한국어와 지역 문화를 배우는데 집중하였다. 그는 약 2년 동안 연세대 어학당에서 그리고 개인교습도 받으며 평생 유용하게 사용할 한국어 기초를 습득하게 되고, 이때 한국어 이름 변조은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변조은은 예장 통합의 마산노회에서 사역을 시작한다. 변조은은 당시 어떤 이유로 호주장로교회와 관계가 깊었던 고신도 아니고 또 합동도 아닌 예장 통합에서 일을 하게 될까. 호주선교부는 일제치하에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있었고 그로인하여 한국에서 떠나도록 압력을 받아 1941년 한국에서 철수한다. 해방 후 호주선교부가 다시 한국에 돌아 왔을 때 장로교는 신사참배로 인하여 분열되고 있었고, 특히 경상남도 지역은 미국계 보수적인 장로교 선교단체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어, 이들의 근본주의적 신앙은 호주선교사들의 신학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이상규의 호주장로교회와 한국교회라는 글에 의하면 당시 교회 쇄신을 주창했던 고신의 지도자들이 해방 전의 4대 장로교 선교부의 신학과 생활에 불신하고 있었으며, 정통 장로교회만을 교류의 대상으로 고집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한국교회와 호주교회 이야기, 50).

결국 1952년 장로교는 분열되어 고신총회가 세워졌고, 1959년에는 세계교회협의회 가입문제로 합동총회가 세워져 또 한 번의 분열이 생긴다. 변조은이 소속된 호주장로교회는 세계교회협의회의 회원교단이었고, 그로인하여 그는 자연스럽게 통합총회와 공식적인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당시 내가 왔을 때는 다른 선택이 없었고, 내가 관계할 수 있는 교회는 통합측 밖에 없었다고 후에 고백하고 있다(크리스찬리뷰, 20125).

마산노회 소속으로 변조은은 7년 동안 주로 거제도, 창원, 김해, 창녕, 그리고 때로 밀양 지역까지 많은 교회들을 방문하며 당회장으로, 설교가로, 교육가로, 목회자로 돌보았다. 그가 당시 이렇게 넓은 지역을 다닐 수 있었던 이유는 호주선교부가 제공한 지프차를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어가 서툴렀던 변조은은 한국어로 억양과 악센트까지 그대로 외운 설교 한편을 가지고 45번 이상 설교하며 다녔다고 하는데, 당시 예장, 합동, 고신 등의 교회 분열을 염두에 두고 고린도전서 1장의 교회 연합에 대한 내용의 설교였다고 한다.

그는 또한 이 지역의 농부들과 함께하며 농부들의 삶의 향상을 위하여 가축개량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농부출신의 부모 밑에서 자란 그는 호주의 가축들을 자연스럽게 떠 올렸고 우유가 많이 나오고 고기가 많은 품종의 가축에 관심을 가졌다. 결국 그는 1966년도 공부휴가로 호주에 갔던 차에 호주 흰 돼지와 샤넨종 유양을 한국으로 들여오게 된다. 이 일을 위하여 빅토리아선교부의 모금과 지원이 변조은에게 큰 힘이 된 것은 물론이다.

당시 지역 언론인 깁슬랜드타임즈는 33살의 변조은 목사를 소개하며 한국의 가축개량을 위하여 9마리의 우량 염소와 5마리의 돼지를 배에 싣고 본인이 직접 6주 동안 배에서 가축들을 먹이고 치우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이 신문은 변조은이 한국 농촌의 가난함과 원시적인 농경법을 보고 이 일을 시작하였다 하며 한마리 염소가 한 가정에 많은 영양을 보충해 줄 것이다는 변조은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우성이라는 화물선에 가축들을 싣은 비용은 700불이었다는 내용까지 포함하고 있다 (Gippsland Times, 13/8/1970. 6). 멜본의 일간지 에이지(The Age) 신문도 변조은이 염소를 배에 싣는 사진을 보도하여 지금까지 흥미있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가축들과 함께 부산항에 도착한 변조은은 창원지역에 품질개량원을 운영하면서, 돼지를 먹이고 키우는 책자까지 만들 정도로 열심이었다. 또한 거제와 마산 지역의 농민들 가정에 시범적으로 염소와 돼지를 보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농촌구조는 호주돼지와 염소 몇 마리로 쉽게 개선될 수 없었다. 보급 받은 돼지를 채무로 인하여 빼앗기는 가정도 있었고, 관리를 잘못하여 죽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자신의 부모가 당시 돼지를 받아 키웠거나, 그 염소의 젖을 먹고 자랐다고 회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업은 비록 크게 성공적이지는 못하였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아직도 감동적 이야기로 남아 있다.

1964년부터 변조은은 서울의 장로회신학대학에서 히브리어와 구약학을 가르쳤다. 그가 대학시절 공부하였던 히브리어가 유용한 기초가 되었음은 물론이고, 변조은은 한국학생들을 위한 히브리어문법 책자 히브리말 배우자를 펴낼 정도였다. 마산에서 격주로 기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와 이틀간 학교에서 강의하였고, 스스로 틈을 내어 대학원 공부까지 한다. 그러다 그는 1969년에 농촌선교를 마치고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하였고 전임교수로 강의하게 된다. 신학대에서의 강의를 통해 그는 한국에 많은 제자들을 둘 수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후에 총회의 총회장이 되거나 학교, 기관, 교회 곳곳에 지도자로 섬기었다. 그 중 후에 호주에 와 목회를 하게 되는 홍길복 목사, 인명진 목사, 조성기 목사 등이 있는데 이들은 변조은 목사를 지금까지 은사로 모시고 그 예를 다하고 있다.

변조은 목사의 강의 시절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 있는데 홍길복 목사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존 브라운 교수님한테서 이사야서 41장 원서강해를 듣고 시험을 쳤습니다. 며칠 후에 답안지를 돌려받았는데 정말 믿기 어려운 사실을 목격했습니다. 한국에 온지 5년 남짓한 선교사가 학생들이 한글로 작성한 답안을 빨간 펜으로 일일이 교정해 놓았는데, 놀랍게도 학생들이 틀린 한글 맞춤법을 정확하게 지적했더라고요” (‘호주 친한파 상징 존 브라운 목사’, 윤필립).

그러나 신학대학에서 예언서를 가르쳤던 선교사 변조은은 정작 자신에게 오히려 큰 도전이 되는 사건들을 만나게 된다. 그가 가르치던 반의 학생들이 한국의 민주화와 노동운동에 참여 하면서 감옥에도 가고 학교에서 정학도 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모스의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강같이의 외침이 실제 목회현장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변조은은 보기 시작하였고, 설교하였던 복음서의 내용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예언서 강의는 점차로 깊이를 더해 갔으며, 특히 변조은 자신이 후에 약자 편에 서는 예언자적인 목회를 하는데 튼튼한 신학적 바탕이 되었다. 그의 학생 가운데 당시 민중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학생이 많았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변조은과 가깝게 지내던 당시 장신대 교수는 주선애, 박창환, 이종성, 고 김이태 등이 있다. 차가 있었던 변조은은 이들을 픽업하여 학교까지 가고는 했는데, 그 중 곽선희 목사도 있었다. 변조은은 후에 2001년 장신대 설립 백주년 기념예배 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변조은은 가르치는 일 외에도 호주선교회 대표로 일하면서 총회 임원들과 가깝게 일하였다. 그는 총회 대표들과 해외 선교사 대표들과 더불어 연합선교회라는 이름으로 정규 모임을 가져 선교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미국연합장로교회, 미국남장로교회, 호주장로교회, 카나다장로교회, 그리고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대표들과 더불어 일하며 1964년의 상호협정서 이 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한국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그리고 시대가 바뀜에 따라 선교협력의 내용도 달라졌는데 그때마다 수차례 합의된 상호협정서나 선교협정서를 통하여 그 관계와 일을 조정하여 왔다.

당시의 합의문이나 선언문등은 앞으로 좀 더 면밀한 연구가 되어야겠지만 선교사회 임무, 선교동역자들의 인사, 선교재정 및 재산, 공동선교사업의 방향, 지도자 양성 등이 문서화 되어 있다. 가장 최근인 2011년 북한공동선교를 위한 양해각서를 합의할 때까지 변조은은 주요멤버로 그 현장에 있었다 (한국교회와 호주교회 이야기, 362-403).

변조은이 보는 한국교회와의 선교관계를 다음의 글에서 엿볼 수 있다. “한국전쟁 전까지 호주에서 한국으로 일방적으로 주는 선교에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평등하고 상호 협력적인 관계의 파트너십으로 바뀐 것이다” (미션 리뷰, 1989, 45, 12). 변조은은 한국교회를 선교의 동반자로 보고 있었고 이러한 선교 이해는 앞으로도 그의 사역에 초지일관 하게 된다.

변조은은 19727월 호주로 돌아갔다. 호주장로교 총회로부터 청빙을 받았기 때문이다. 12년간의 한국사역을 마치고 돌아가는 변조은과 노미연 가정은 한국에서 낳은 앨리슨과 입양한 딸 순자와 함께 다섯 명이었다.
 
4. 호주연합교회 총회와 변조은
 
호주로 귀국한 변조은은 호주장로회선교회의 에큐메니칼 선교와 국제관계부총무로 일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일은 1977년 호주장로교회 다수가 호주연합교회로 연합할 때까지 계속 되었다변조은은 연합이 된 호주연합교회 총회의 세계선교국 총무로서 사역을 이어 갔는데 이때 그의 사역으로 인하여 한국교회와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호주장로교회에서 호주연합교회 중심으로 옮기어 졌고, 그 관계는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또한 그는 호주연합교회 구조조정 속에서도 1992년까지 총회 선교국 총무로 봉직하면서 호주연합교회의 국내와 해외 선교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가 총회에 있으면서 집행한 일중에 두드러지는 몇 가지를 언급한다면 세계선교정책 수립, 국내전도 후원, 다문화정책 수립, 원주민협의회 설립, 한인교회 후원,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한국교회와의 연대 강화였다.
호주연합교회는 19854차 총회에서 호주연합교회는 다문화교회이다선포하고 있다. 이 안은 변조은이 총무로 있던 세계선교국에서 발의되었고, 실무자였단 그의 신학과 리더십이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당시 이 안은 원주민협의회 설립 의제와 함께 통과 되었는데 변화하는 호주사회에서의 새로운 선교방향과 교회 안 소수자와 약자의 권리를 강화하는 구조적인 변혁을 가져오게 된다.

1980년대에 들어서 호주는 급속히 아시아와 남태평양의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변조은은 교회가 존재해 있는 사회가 변하고 있음을 보고 있었다. 한국인, 통가인, 일본인, 사모아인, 중국인, 피지인, 필리핀인, 인도네시아인, 베트남인, 중동인 등이 호주연합교회를 찾고 있었고, 변조은은 그들이 연합교회 안에서 소속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교회당 사용, 목회자 청빙,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모국어와 문화 형식으로 예배를 드리도록 도왔다.

뿐만 아니라 이민자 대표들이 정규적으로 모여 자신들의 목회와 어려움을 나눌 수 있도록 하였고, 그들 스스로 노회나 총회에 참여하여 그들의 의견이 반영되도록 격려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호주연합교회의 다문화목회와 신학 이해가 탄생되었고, 호주연합교회의 중요한 정체성 중 한부분이 되었. 후에 이것은 총회 안에 다문화 목회부가 생긴 것이나, 한인노회가 설립되는 놀라운 결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총회 선교부 실무자로 재직 시 변조은은 에큐메니칼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는바 1975년부터 7년 간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으로 봉사하였다. 또한 1982년부터는 선교와 전도위원회와 도시농촌 목회위원회에서 일하였는데 무려 13년 동안 재직하며 세계교회의 선교와 전도 정책 수립에도 공헌하였다. 변조은은 한때 선교와 전도위원회의 총무로 추천을 받았지만 시드니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를 막 시작한 사모 노미연 목사와 함께하기 위하여 그 제안을 고사하였다고 한다.

변조은과 호주연합교회와의 관계 중 한가지 언급할 것은 그가 1994년 시드니에서 열렸던 총회 총회장으로 출마하였던 일이다. 당시 그는 총회 총대들과 직원들에게 이미 잘 알려져 있었고 총회의 주요 의제를 주도하던 인물이어서 변조은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선거운동을 자제하면서도 총회장으로 선출될 것을 확신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의외였다. 낙선이었다. 좀 더 보수적인 후보가 선출된 것이다. 당시 연합교회는 개 교회의 전도와 성장에 관심이 많았고 그 방면 리더로 알려진 감리교 배경 인물이 당선되었는데 이는 전체교회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었다. 비록 변조은은 당시 실망하였지만 이것은 장차 그가 호주 원주민과 비원주민 사이의 화해사역을 위하여 매이지 않고, 전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변조은이 선교국 사역에서 은퇴할 때 당시 총회의 선교와 전도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감사의 말을 남기고 있다.

이 엄청나고 도전적인 사역을 위하여 변 목사님은 교회의 선교를 위하여 깊은 성찰과 희생으로 성실하고 열심을 다하였습니다. 우리는 변 목사님의 지혜와 신학적 깊이로부터 많은 유익을 얻었습니다. 그의 국제적이고 전국적인 교회 경험과, 사회와 교회에서의 다문화 경험과 은사로 인하여 비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호주연합교회의 복음적인 개혁운동 대표들과의 회의를 공유하는데 변 목사는 중요하고도 효과적인 지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변 목사님은 복음에 겸손하고 신앙적이며, 전체 교회를 위하여 깊은 관심과 자상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정의와 진리를 향한 그의 열정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순례의 도상에서 함께한 동역자 관계에 감사합니다.” (문서 B201, 총회 선교와 전도부, 19921211)
 
5. 호주 한인교회와 변조은
 
호주에 첫 한인교회는 1973년에 멜본에서, 그리고 1974년에 시드니에서 설립되었다. 그리고 이 두 교회의 창립과정에 한국에서 선교사 임기를 마치고 귀국한 호주선교사들이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이 한국에서 습득한 한국어와 한국문화 그리고 한국교회에 대한 이해가 이민교회에 큰 자산이 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그 선교사가 총회의 선교국에서 실무자로 일을 하고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변조은이 그랬다. 이 모든 조건을 다 가지고 있었고 제일 중요한 한국교회에 대한 애정도 있었으니 한인목회자들에게는 둘도 없는 후원자였다.

시드니 소재 시드니한인연합교회는 1974년 마침 한국에서 한 교단지도자의 방문을 계기로 한인지도자 몇 명이 변조은의 집에서 만나게 된다. 이때 이민생활의 외로움을 서로 위로하고 힘이 되기 위한 한인교회의 필요성을 공감한 것이 교회창립의 시작이 되었다. 첫 예배는 197498일 레드펀(Redfern)의 회중교회에 약 70명이 모였고 창립을 위한 초청장에 교회창립의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다음이 그 일부이다.

다행히 이 시드니에 우리말로 우리들의 예배를 인도해 주실 수 있는 목사님과 신부님들이 계시고, 그 분들의 희생적인 협력에 힘입어, 마침내 한인들만의 교회 모임을 갖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이 교회 모임이 끝까지 결실을 맺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 바입니다” (호주교회 이민목회 30). 변조은은 이렇게 시드니에서의 첫 한인교회 창립목사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변조은의 후원을 받아 호주로 들어 와 목회를 하거나 공부를 하게 되는 한인들도 여러 명 있는데 그 중에 한명이 인명진 목사였다. 한국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노동과 인권 운동을 하고 옥에 갇혔던 인 목사를 재정적으로 지원하였을 뿐 아니라 호주로 초청하여 재충전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사역을 호주연합교회 총회 세계선교부 잡지 미션 파트너(Mission Partners)’에 꾸준히 소개함으로 호주 내에 지원 단체들을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인 목사는 후에 시드니 소재 갈릴리교회를 개척하기도 하였다변조은의 도움으로 장학금을 받거나 후원을 받은 한인들 중 고 김이태 목사, 홍길복 목사, 조성기 목사, 채은하 목사, 지태영 목사, 양명득 목사, 장기수 목사 등이 있다.

이후에 계속 생겨나는 한인교회들을 위하여 변조은은 많은 일을 감당하게 된다. 유창한 한국어 설교, 목회자의 교단가입, 교회당 찾는 일, 호주문화 나눔, 한국 목회자 청빙과정, 한국교회와 호주교회의 분쟁 조정, 한인신학생 교육, 심지어는 통역까지 맡아서 호주한인교회의 친근한 벗이 되었다. 그는 현재까지도 목회자가 공석인 캔버라의 한 한인교회 임시 당회장을 맡아 계속 목회하고 있다.
 
6. 북한선교와 변조은
 
한국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변조은은 북한에 대하여도 깊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그러던 중 2003년 좋은 기회가 왔다. 북한의 북쪽 지역에서 사역을 하고 있던 한 한국계 미국인 목사가 어린이 사역과 빈민구제를 도와 달라는 요청을 호주연합교회에 하였다. 변조은은 그 내용을 멜본한인교회의 지도자들과 깊은 상의를 하였고 그것이 결국 북한 선교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사용하는 단어는 선교라는 용어보다 인도적인 지원이었고, 이 지원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꾸준히 진행되며 발전하여 오고 있다.

호주연합교회 총회와 멜본한인교회는 이 사역을 폭 넓게 하기 위하여 별빛재단을 설립하여 모금운동을 하며 관심 있는 여러 단체와 개인을 회원으로 받아 함께 협력하고 있다. 변조은은 별빛재단이 임명한 북방선교회의 회장으로 북한선교 지원을 맡아 수차례 중국과 북한을 방문하고 있다. 현재까지 지원되고 있는 프로젝트는 보육원, 결핵병원, 이동병원, 컴퓨터기술학교, 유치원, 간호학교 등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이 사역에 한국의 예장 통합총회가 협력하여 백여 명의 어린이를 수용할 수 있는 건물 건축을 위하여 큰 후원을 하였는데 변조은의 튼튼한 인맥으로 가능했던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최근에는 중국을 현장 답사하여 훈춘 시에 한 건물을 구입하였고, 그곳을 기지로 삼아 프로그램을 확장시키고 있다이 사역에 관한 내용을 변조은은 호주연합교회와 예장과의 북한 공동선교는 제목의 글로 남기고 있다 (호주교회와 한국교회 이야기, 350-353). 변조은은 이 사역을 지원하기 위하여 현재도 한국, 중국 그리고 북한을 오가고 있다.
 
7. 호주 원주민선교와 변조은
 
호주연합교단 안의 원주민협의회는 변조은이 총회 세계선교국 총무로 재직하던 1985년 설립되었다. 이 결정은 호주원주민교회가 대표들의 협의체를 구성하여 원주민 목회와 선교를 스스로 돌보며, 결정하며, 실행할 수 있도록 하고, 원주민대표들을 파트너로 인정하는 역사적인 내용이었다.

처음 원주민협의회가 생겼을 때에는 총회 선교부의 한 부서였고, 직원도 선교부 소속이었고, 총회에 보고서를 낼 때에도 선교국을 통하여 하고 있었다. 즉 당시 선교부 총무가 변조은이었으므로 원주민협의회가 그에게 보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주민 지도자들과 변조은의 개혁 하에 당시 총회는 주총회와 노회의 모든 권위와 책임을 원주민협의회로 위임하고 있었고, 더 나아가 원주민들이 스스로 목회자 후보생들을 훈련시키고 안수하며 재정을 운영하는 필요성이 대두되어 토론 끝에 총회의 인준을 받게 된다.
1992년에는 원주민들에 대한 이해와 호주인들 간의 화해와 계약 과정을 위하여 원주민협의회로부터 변조은은 초청받아 그 책임자로 호주전역의 주총회와 노회들을 방문하게 된다. 한 백인이 원주민들로부터 이러한 위임을 받은 것을 보면 변조은에 대한 원주민들의 신뢰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것은 전국의 교회들이 그들이 처한 지역의 원주민들과 교제하며 화해의 과정을 이루도록 하는 선구자적인 프로그램이었다. 호주정부도 1993년에 가서야 이 방법을 따라 사회 각 단체들이 원주민들과 관계를 맺도록 실행하였는데 변조은은 교회간의 화해과정을 주도하였다또한 1994년에는 총회의 총회장이 과거 학살과 차별 역사에 대하여 원주민들에게 공식 사과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사과의 전문 초안을 원주민 지도자들과 상의하여 변조은이 작성을 하였다.

1995년에는 호주정부의 과거 원주민자녀 입양정책으로 인하여 생긴 많은 차별과 고통을 조사하도록 진상위원회를 임명하였다. 이 위원회는 후에 매년 국가적으로 참회의 날’(Sorry Day)을 제정하도록 제안한다. 이 날은 원주민들에게 저질러진 여러 차별을 참회하고, 모든 호주인들이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알도록 하는 목적을 가지고 현재까지 지켜지고 있다. 이러한 호주 역사를 호주인들이 이해하도록 전국위원회가 세워졌는데 변조은은 한 원주민 지도자와 함께 8년 동안 공동회장을 맡아 공헌하였다.

변조은은 2000년 총회 사역을 은퇴하였지만, 원주민들과의 화해와 계약관계를 맺는 총회 프로그램의 코디네이터로 계속 활동하게 된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지역 교회나 신앙 그룹들이 그 지역의 원주민들과 화해하고 계약을 맺어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며, 서로 존중하여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 바닥운동이었다.

변조은은 현재도 마일크릭(Myall Creek)을 매년 방문하고 있는데, 이곳은 1838년 백인들에 의하여 원주민 학살이 자행되었던 대표적인 곳이다. 1999년 원주민들과 비원주민들이 그곳 공동체를 중심으로 위원회를 구성하여 매년 6월 둘째 주 그 현장에 모인다. 이 행사에서 그들은 학살에 대한 반성과 원주민과의 화해, 그리고 좀 더 공평한 호주사회를 위하여 결단한다. 변조은은 이 위원회를 원주민 장로와 함께 지난 15년 동안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다.
변조은은 호주사회 속에서의 이러한 공헌을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아 1993호주 훈장(Order of Australia)를 받았고, 건국 백주년 기념 해에는 원주민과의 화해를 위한 봉사로 건국백주년 메달(Centenary Medal)을 받았다.

당시 호주 훈장을 추천한 사람 중에 호주연합교회 증경 총회장 로날드 윌슨 판사는 변조은을 이렇게 정부에 소개하고 있다.

그동안 내가 알아 온 변 박사님은 호주와 호주 밖 세상에서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그리고 소외된 자들을 위하여 지치지 않고, 용감하며, 겸손하고, 희생적인 분 이었습니다. (중략) 그때 변 박사님은 원주민들을 위하여 그의 지도력과 협력의 은사로 사역하였으며, 그 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 국가와 교회에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그의 총회 사역은 또한 세계교회들과의 관계를 맺고 지속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변 박사님이 국제적으로 에큐메니칼 교회관계에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바탕이 된 것입니다. (중략) 변조은 박사님은 전 인류의 하나 됨을 위한 신학의 권위자로 호주와 해외에서 광범위하게 존경을 받고 있으며, 그것은 창조의 보전을 위한 정의, 평화, 그리고 존경의 의제임을 단호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의 의견으로는 변 박사님은 자랑스러운 호주인 이며, 호주훈장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분입니다.” (로날드 윌슨, 1992313)
 
8. 나가는 말
 
변조은은 평생에 걸쳐 몇 번의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그 중에 호주 멜본에서의 젊은 신학생 시절, 좋은 교수들을 만나 협소한 근본주의적 신앙관에서 열린 진보주의적 신학을 가지게 되는 바울의 회심과도 같은 순간이 있었다. 그는 주한 호주선교회 약사란 자신의 글에서 자신의 목회와 선교에 영향을 끼친 네 그룹의 사람과 운동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첫째는 거제도 등 섬지역의 가난한 농어민들과 교제하며 받은 영향이다. 고된 생활 속에서도 정직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일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둘째는 장신대에서 강의하던 시절 학생들에게 오히려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학생들 중에는 빈민과 노동자들 속에서 목회하는 사역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누구 편에 서서 일하고 계시는지 보았던 것이다.

셋째는 호주 원주민들의 땅 소유권을 찾는 운동과 화해의 과정에서 배운 점이 많다고 하였다. 소수자 속에서 함께 고난당하시는 그리스도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WCC와 아시아교회협의회(CCA)의 인권 운동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연대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그의 사역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국교회와 호주교회 이야기, 84-85).

변조은의 목회와 선교, 그리고 신학은 그가 강의하였던 이사야서의 예언자적 외침과 누가복음 418에서 예수님이 다시 인용하며 선포하신 말씀에 굳게 뿌리를 두어, 변두리에 계신 예수님을 따라 본인 자신도 평생을 가난한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들과 함께 하며 복음을 전하며 교제하며 사역하여 왔다고 요약될 수 있겠다.

변조은의 일생을 연구하면서 필자는 변조은이 팔순을 맞이하며 느끼는 아쉬움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그가 청년시절 한국에 도착하여 처음 하였던 설교 주제가 교회일치와 연합이었다고 앞서 언급하였는데, 이후에도 변조은은 이 주제로 고민한 흔적을 여러 곳에 남기었다. 그는 호주선교부에서 각 교단지도자들과 협력하면서 한국교회의 연합을 격려하였고, 장신대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을 때 장신대와 총신대가 연합할 것을 주장하였고, 한국장로교 백주년 기념예배 시에도 한국교회가 분열에서 일치로 돌아 올 것을 호소하였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변조은은 WCC 부산총회 준비과정에서 드러난 한국교회의 심각한 분열 소식에 얼굴빛이 어두워지기도 하였다. 그의 계속되는 한국방문은 아마 한국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보고 확인하고 싶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작년에 증조할아버지가 된 변조은은 요즈음도 본인이 직접 만든 오렌지 잼, 블루베리 잼, 딸기 잼 등을 가방에 담아, 50여 년 전 배를 타고 한달 여에 거쳐 처음 왔던 한국을 이제는 수십 번 비행기로 오가고 있다. 필자도 한국에 있으면서 그가 만든 잼을 선물로 받아 잘 먹고 있지만 앞으로도 그가 만든 잼을 많은 지인들이 오랫동안 즐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참고도서>

'한호선교 120년의 발자취' DVD 동영상, 예장총회, 2012.
 
김석원, ‘복음의 씨앗을 심은 호주 선교사들-변조은 목사’, 크리스찬리뷰, 201256.
변조은, ‘존 브라운 목사’, 은혜의 증인들, 한국장로교출판사, 2009.
양명득 편, 한국교회와 호주교회 이야기, 한국장로교출판사, 2012.
양명득, 클라이브 피어슨 편, 호주이민 한인교회 30, 한국장로교출판사, 2004.
윤필립, ‘호주 친한파 상징 존 브라운 목사’, 신동아 별책부록, 201111월 호.
 
Copyright 양명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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