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페이지뷰

2012년 8월 7일 화요일

호주 첫 한인 시민권자 – 드디어 베일을 벗다

호주 한인 시민권자 드디어 베일을 벗다


1. “한국사람 찾았습니다
킴이라는 명찰을 여직원이었다. 순간 필자의 눈이 휘중그래지는 것을 느꼈고, 직원의 눈도 잠시 놀라는 모습이었다. 필자의 반응을 잠깐의 투영이었다.
정말이요? 사람이 호주에서 처음으로 시민권을 받은 한국인입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도울 있어 기쁩니다.”
직원이 보여 사람의 이름은 Myoim Garrett(묘임 가렛)으로 여성이었다2009 63 멜본 국립고문서보관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2. 호주정부가 매년 발행하는 연감에는 시민권을 받은 사람들을 국적별로 숫자만 밝히고 있다. 코리언이 처음 등장을 하는 연감은 1958년으로 해인 1957 시민권을 받았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무었인지 혹은 어떤 경로로 호주까지 왔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작년 초에 발행된 호주한인50년사 연감을 기준으로 호주이민50년으로 설정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시민권자의 구체적인 내용을 찾지 못하여 아쉬워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뭐랄까. 호주정부의 공식기록이니 무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확신을 갖자니 이름도 밝혀지지 않은 사람인데 말이다.

3. 사실 사람을 거의 찾을 했던 때가 2 전에 한번 있었다. 당시에도  호주한인이민사 자료와 시민권자를 찾기위해 멜본의 국립고문서보관소를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도 시민권을 받은 사람들의 명단이 적혀있는 가제트라는 역시 호주정부의 기록을 보았다. 1957년에 시민권을 받은 사람은 33655명이나 되었고, 국적은 표기되지 않고 이름과 주소만 적혀있었다. 직원의 설명은 이름을 알면 사람의 국적과 배경을 찾을 있지만, 코리안이라는 국적만 가지고는 사람을 찾을 있도록 시스템이 되어 있지 못하다는 설명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1957년에 시민권을 받은 33천여명의 이름중에 한국이름을 찾아내어 일일히 확인하는 방법이다. 시간에 쫒기며 동행한 일행과 보관소 한쪽 책상에서 한국이름을 찾고 있었다. 당시 시민권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럽인들이었기에 그렇게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고, 다만 간간히 나오는 중국인 이름과만 구별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우리는 드디어 (Jung)’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을 찾았다. 그의 주소는 시드니 썸머힐로 되어 있었다. 사람이 한국인인것을 거의 확신하며 직원에게 확인을 요청하였다. 그동안의 고생이 기쁨으로 바뀌는 순간인것 같았다.

그러나 잠시 , 직원의 대답은 우리의 기대를 무너뜨렸다. 네델란드 사람으로 아니라 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허탈해하며 마감시간에 쫒겨 보관소를 그렇게 나왔었다.

4. 사람은 필자의 마음속에 숙제로 남아 있었다. 베일에 감추어진 사람은 누구일까. 어떤 사정으로 백호주의 정책하에 호주에까지 시민이되어 살았을까. 호주한인이민사에 사람의 위치와 의미는 무었일까. 사람을 기준으로 필자가 호주한인이민사 50년을 제안했던 것에 대한 부담감도 있었지만, 무었보다도 무명의 사람이 호주사회와 한인사회에 당당히 나서도록 돕고 싶었고, 후세들에게 이민 선배의 개척적인 여정을 보여주어 자랑스럽게 생각하도록 가르치고 싶었다.

작년 언젠가는 시드니 시내에 있는 미쳘도서관에서 다시 호주연감을 열어 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리 보아도 시민권을 받은 사람들의 명단을 찾을 없었다. 직원에게 물어 보아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작은 글씨로 되어있는 호주연감을 탓하며, 침침하여 피곤해지는 눈을 탓하며 포기하는 심정으로 도서관을 나와 하늘을 보았다.

그러나 당시에는 몰랐다. 호주연감 탓도 아니었고, 약해지는 시력의 탓도 아니었다. 기억력에 문제가 있었다! 시민권을 받은 사람들의 명단은 호주연감이 아니라 가제트에 있었는데 호주연감에서만 찾고 있었다니. 어쩔수 없이 세월은 간다.

5. 이번의 일정은 캔버라와 멜본의 국립고문소보관소를 다시 찾는 일이었다. 비행기 회사들의 경쟁으로 다행히 값이 낮아져 시드니-캔버라-멜본-시드니로 예약을 하였다. 동행하며 사진을 촬영하기로 권순형 크리스찬 리뷰 발행인은 무거운 사진기 가방을 메고 공항에 나타났다.
이번에 정말 사람을 찾을 있겠습니까?”
글쎄요. 우리가 찾는 것이 아니라 분이 한인사회에 나오려고 해야 찾아질텐데요.”
선문답 같은 대화가 오고 갔다. 그러나 이번 방문의 목적은 이전에 이미 찾은 다른 자료들을 촬영하기 위함이었고, 혹시 시민권자에 대한 기록을 찾을 있다면 그것은 보너스였다. 캔버라 국립도서실을 거쳐, 우리는 국립고문서보관소를 찾았다

필자에게는 정겨운 건물이었지만 동행한 분들은 처음 와보는 곳이란다. 미리 신청한 자료들을 촬영하는 동안 그곳의 직원에게 1957년에 시민권을 받은 사람들에 대해 말을 걸었다. 그런데 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당시 시민권 받은 사람들의 시민권증서 복사본을 열람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복사본이 수천장이 되는데 어떻게 뒤져 있겠느냐는 질문이었다.

수천장의 복사본은 5개의 카테고리로 나누어져 있는데 독신남성, 결혼남성, 독신여성, 결혼여성, 그리고 어린이였다. 이중에서 두개를 신청하면 내일 있도록 하겠다고 친절하게 직원이 말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내일 오후 멜본으로 떠나야 했고, 다시 시간에 쫒기는 마음이었다. 독신남성과 결혼남성의 것을 신청하고 나오는데 발행인의 말이 걸렸다.
시민권자가 남성이라고 생각하세요?”

6. 다음날 아침, 고문서보관소에 도착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시민권증서 복사본이었다. 우리 일행은 구석에 조심스럽게 앉아, 그리고 비장한 심정으로 복사본 한장한장을 넘기기 시작하였다.

7. 정말 시민권자가 남성이라고 생각했을까? 1957년이면 호주군인과 결혼해 입국한 여성일 있고, 입양된 어린아이일 있는데 말이다. 세시간 이상에 걸쳐 넘겨 시민권 복사본에는 결국 코리언이 없었다. 사람이 도데체 누구이기에 이렇게 꽁꽁 숨어 있는 것일까.
멜본에 도착하자 마자 우리는 고문서보관소로 달려 왔다. 그리고 필자는 2년전의 기억을 살려 보관소 한구석에 있는 책들을 둘러 보는데 갑자기 기억에 나는 시리즈로 책이 있었다. 가제트였다. 바로 이것이었다. 시민권자의 명단이 수록된 . 1958 가제트를 찾아 열어 보니 1957 시민권자들의 명단이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필자는 동행한 일행과 나란히 앉아 한국이름을 다시 찾고 있었다. 이번에는 성만 한국성이 아니라 이름도 한국식 이름이면 찾기로 하고, 중국식 이름이라도 일단 적어 문의해 보기로 하였다. 수천개의 이름들을 다시 짚어 보며 일단 수상한이름들을 A4용지 한장에 채웠다. 직원에게 그것을 먼저 확인해 보도록 부탁하고, 계속하여 필자는 다른 이름들을 넘겨 보고 있었다. 함께 찾던 일행은 다른 약속으로 먼저 자리를 떠난 상황이었다. 킴이라는 직원이 다가 것이다.

8. 묘임 가렛 (Myoim Garrett). 1933 27 한국 경상북도 태생. 검은 머리와 갈색 눈동자. 1956 114 일본에서 호주 도착. 19571121 시민권 받음. 주소: 39 Malaya Road, Puckapunyal, Victoria. 시민권 번호: EF10024248.

9. 그녀는 호주에 입국할 당시 23살이었고 일년 후에 시민권을 받았다. 호주인 성을 가지고 빅토리아에서 살았으며, 현재 살아 있다면 76세이다. 충분히 생존해 있을 있는 연령이기에 글이 조심스럽다. 호주인 성을 가진 것으로 보면 호주인과 결혼하여 입국한 것으로 보여지며, 호주인이 호주군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상의 추측은 하지 말자. 본인이 나서거나 혹은 분의 후손이 말하기 전까지는, 아니면 구체적인 자료를 찾기 전까지는 이상의 해석은 보류하는 것이 옳겠다.

10. 올해가 호주와 한국: 120년의 역사 해이다. 이제 120 역사의 중간에 기념비적으로 묘임 가렛이라는 여인이 있다. 누가 여인을 만나기 원하는가.

Copy Right 양명득


“혹시 당신의 이름이 곽묘임인가요?”


혹시 당신의 이름이 곽묘임인가요?” 
전화를 통해 전달되는 필자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지난 4년여 동안 연구해 왔던 호주 한인 1호 시민권자인 곽묘임 할머니(77)를 마침내 찾은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고 시드니에 30여년 동안 살고 계셨다.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곽 여사댁을 찾았을 때 초로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그곳에 서 있었다세월의 흔적이 곽 여사의 얼굴에 앉아 있었지만 사진으로 보았던 20대 초반의 고운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호주인 남편 가렛씨는 “당시 아내는 굉장히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여성이었다. 용기를 내어 청혼을 하였다고 말하였고, 곽 여사는 “가렛이 서양인이었지만 자상하고 믿음직스러웠다고 회고하였다.

당시 곽씨는 꿈 많은 20대 초반의 여성으로 패션 디자이너를 희망하였지만 한국참전 군인인 가렛씨를 만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곽씨의 부모는 딸을 이역만리의 백호주의 나라인 호주로 보내는 것을 기뻐할리 없었다신랑의 부모도 아시아 여성을 며느리로 불러 온다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당시 시대가 그러했다호주 정부도 가렛씨가 먼저 귀국한 후 2년 동안의 ‘냉각 기간을 갖도록 하였지만 서로에 대한 애정은 계속되어 결국 곽씨는 1956년 호주에 오게 되고양가 부모의 참석없이 시드니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그 후 곽씨는 직업군인 남편을 따라 호주에서의 이민생활을 시작하고 박봉인 남편을 도와 온갖 일을 다하며 가정을 세우는데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음식과 외로움이었다고 토로했다호주식대로 아침에 ‘씨리얼(곡물류)’을 먹는데 이곳 사람들은 아침부터 ‘과자를 먹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으며고독한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없었다는 것이 특히 힘들었다. “그곳 생활이 힘들면 언제라도 돌아 오라는 부친의 당부가 종종 생각났지만 곽씨는 호주에서 죽겠다는 각오로 새 땅에 정착하였으며 안타깝게 먼저 간 아들 외에 12녀를 훌륭하게 키워냈다

본인을 기준으로 ‘호주한인50년사 2008년에 시드니 동포사회에서 출간되었다고 하자 놀라며, 본인이 첫 시민권자인 것을 모르고 있었다고 말했다또한 캔버라와 멜버른 고문서 자료관에 보관되어 있던 본인에 관한 자료가 세상에 공개되었다고 하니 그것이 알려질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면서 부끄러워 하였다곽씨에게 스스로를 한국인으로 생각하는가 일본인으로 생각하는가 물어보니한참 고민후에 본인은 호주인이라 대답을 한다호주에 살면서 한국말을 잊어버려 한인사회에도 가지 못하고또 출생이 한국이니 일본사회에도 끼지 못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곽씨는 지금까지 보관해 온 대구에서의 출생증명서를 필자에게 보여주며언제 기회가 되면 시집 온 후 54년 간 한번도 못 가 본 고향을 꼭 다시 한번 찾아 가고 싶다고 말했다그러나 한편 한국사회가 본인을 어떻게 볼지 두려운 마음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필자는 몇년 전 호주한인이민사를 쓰면서 “우리 이민 선배인 호주 첫 한인시민권자를 찾아 그 개척적인 여정을 후세들에게 알려 주고 싶다  언론과의 대담에서 밝힌 바 있다그리고 이제 그 이민 선배의 모습이 우리 앞에 있다그 시대의 한 역사를 시작하였던 곽씨 할머니의 호주 정착이야기그것은 한 개인의 여정만이 아닐 것이다우리와 우리 후세들의 이민역사로호주의 삶에서 고달프고 지칠 때 그 분의 이야기는 계속하여 영감과 용기를 줄 것이다이제 누가 곽 씨의 이야기를 영상 다큐멘타리로 제작하여 후손들에게 자료로 남기려는가.

Copy Right 양명득


댓글 1개:

  1. 백호주의로 알명 높았던 호주의 첫 한인 이민 시민권자는 권묘임 이라는 여성분이었군요. 호주의 한인사회 역사를 잘 기록하는 분이 있어 다행입니다. 퍼갑니다^^ :)

    답글삭제